10. 수심가지(水深可知)
그렇게 하나의 흔적이 지워지고 잊혀져갈 무렵, 사무실엔 언제부터인가 겉에 드러나지 않은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있었다. 바로 최근 들어 더욱 심해진 주팀장과 손과장 간의 신경전이다. 이중성 때문에 눌러왔던 주팀장의 불같은 성격과 불의라면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손과장의 정의감이 전쟁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던 어느 날, 전혀 예상 밖의 일이 터지고 말았다.
“과장님. 전에 약속하신 것 왜 안 주세요?”
“약속한 거라니?”
“전에 팀장님이 시킨 일 끝내면 주기로 하셨잖아요.”
“아, 그거. 내가 팀장님한테 물어볼 게.”
그러나 그 이후 며칠이 지났지만 유과장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기다리던 고대리가 몇 차례 얘기를 했으나 어영부영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팀장과 유과장의 은밀한 대화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를 전해들은 고대리의 얼굴에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고대리.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회의실로 가자고.”
잠사 후, 둘이 회의실로 들어간 지 얼만 지나지 않아 안에서 고대리의 고성이 흘러나왔고 간간이 들리는 유과장의 변명이 한 시간이나 계속됐다. 결국 고대리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는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책상을 정리했고 유과장은 출근 때 들고 왔던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나가는 고대리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과장님. 무슨 일이에요?”
“무용씬 할 일 없어?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러나 내막을 모르고 호기심을 발동했던 무용은 유과장의 화풀이 상대를 피할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자존심이 상한 무용도 화가 났는지 입을 닫아버렸다.
“유과장. 고대리 어디 갔어?”
“아, 그게.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제가 조퇴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러나 주팀장은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감정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는 손과장의 포커페이스다. 주팀장과 언성을 높일 때도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문득 군에 있을 때 일이 생각난다.
“야. 진일병. 저기 창가에 있는 병장 보이지?”
“네.”
“저 사람한테 꼬투리 잡히지 마. 애들 때리면서 말투는 물론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냉혈한이야. 재수 없게 걸리면 반은 죽으니까 조심해.”
지금 손과장이 그렇다. 얼마 전 이중성에게 직장에선 좀처럼 듣기 힘든 쌍욕을 쏟아내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반해 유과장은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금방 표가 날 정도로 감정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다. 지금 유과장의 표정엔 고대리에게 당한 수모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만 퇴근들 해.”
오후 내내 멍하니 앉아 있던 유과장은 주팀장이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무용도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과장의 말에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나 보다. 그 바람에 과에는 선미와 둘만 남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미가 퇴근하면서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었다. 오늘은 모두가 말을 잊은 날이다.
“진정도씨. 혹시 약속 있나?”
“네?”
뒤를 돌아보니 뜻밖에도 손과장이 거기에 서있었다. 갑작스런 일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손과장을 따라 회사 인근에 있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거기엔 이미 운영과 과원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오는데 진정도씨 혼자 있기에 대리고 왔어.”
“어서 와요. 정도씨. 자, 우선 한잔 받아요.”
“감사합니다. 조대리님.”
그런데 어색할 줄 알았던 자리가 왜 이렇게 편한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손과장이 마치 직속상사 같은 느낌이 들었고 목에 넘어가는 술도 거부감이 없다. 그리고 듣던 것과는 달리 분위기는 손과장이 주도했고 평소 까탈스럽던 오미호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조대리님. 지금 뭐하세요?”
“에구머니. 미호씨 잔이 비었네.”
정말 뜻밖이다. 그러면 무용이 했던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들에겐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주팀장의 생색내는 꼴이 싫어 자체에서 자신들 만의 회식비를 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비용은 손과장이 주로 부담했고 가끔 조대리가 분담하는 식이었다.
“조대리님. 이런 회식 자주해요?”
“자주는 아니지만 한 달에 두 번 정도 해요.”
더욱 뜻밖인 것은 이들의 회식이 늘 2차 노래방 코스까지 계속된다는 점이다. 평소 보기와 달리 손과장의 노래 솜씨는 말 그대로 수준급이었고 조대리와 미호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뽐냈다.
“진정도씨가 내 밑으로 왔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과장님. 처음에 그러기로 했던 것 아닙니까?”
“맞아. 그런데 갑자기 주팀장이 웬 이상한 놈을 끌어들이더니 나보고 맡으라는 거야. 사실 나 보다는 조대리가 속 많이 썩었지.”
“말도 마십시오.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습니다.”
“아이. 과장님. 회사얘기 그만해요.”
“아, 미호씨. 미안.”
비밀스런 회식은 12시를 목전에 두고서야 끝났다. 미호는 손과장이 잡아 준 택시를 타고 먼저 떠났고 손과장은 집이 같은 방향인 조대리와 다른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회사에서 집이 멀지 않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조대리가 당부하던 말이 생각난다.
“다른 사람에겐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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