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호의 서재입니다.

오피스 108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9.10.25 20:57
최근연재일 :
2020.06.06 00:19
연재수 :
109 회
조회수 :
39,265
추천수 :
1,022
글자수 :
254,932

작성
19.11.15 03:24
조회
546
추천
16
글자
7쪽

15. 배려와 동정

DUMMY

말수가 줄어든 것은 무용도 마찬가지다. 회식을 하고 난 뒤, 가끔 말을 주고 받긴 했으나 예전에 한창이던 특파원 보고도 없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느라 잠시도 쉬지 않았던 그를 생각하면 지금의 무용은 다른 사람 같다. 특히 달라진 것은 일에 대한 진지함이다. 전에는 일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정도로 부산했던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무용씨. 잠시 얘기 좀 해요.”


그런데 고과장과 무용이 들어간 회의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과장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고과장과 무용이 얘기하는데 손과장이 왜? 시간이 갈수록 의혹이 쌓여가는 동안 지원과 과원들까지 의아한 표정으로 문이 굳게 닫힌 회의실을 힐끔거렸다.


“손과장 어디 갔어?”

“과장님 지금 저 안에서 회의 중이십니다.”

“회의? 무슨 회의?”


조대리의 보고를 들은 주팀장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멀뚱히 회의실을 바라보다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측은한 생각이 든다. 한창 잘 나가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잔뜩 풀이 죽은 그의 표정은 이빨 빠진 호랑이의 최후가 머지않았다는 예감을 갖게 했다. 측은지심에 빠져 있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고장들을 따라 무용이 모습을 나타냈다.


“셋이서 뭐했어?”

“마침 오셨네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바쁘지 않으시면 잠시 얘기 좀 하시죠.”


손과장의 요구에 주팀장은 아무 말 없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심복이던 토끼를 잃고 이빨마저 빠진 주팀장은 명목상의 팀장일 뿐 실세는 손과장이다. 아직 섣부르긴 하나 손과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차기 팀장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그런 소문을 듣고 있음에도 손과장은 표정하나 변치 않는다.


“과장님. 손과장님 원래 저래요?”

“뭐가요?”

“제가 처음 입사할 때부터 느낀 건데요. 감정이 없는 분 같아서요.”

“아, 난 또.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못 대하는 거예요. 카리스마가 있잖아요.”


이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주팀장과 손과장이 뭔가를 소곤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곧이어 고과장이 손과장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고 무용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다. 그런데 그이 표정이 심상치 않다. 예감이 적중한 걸까? 잠시 후, 자리로 돌아온 고과장이 무용을 데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지?’


이번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무용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더 어둡다. 그의 얼굴은 좌절감으로 가득했고 말없이 자리에 앉는 고과장도 표정이 좋지 않다. 분위기가 어찌나 무겁던지 갓 입사한 하얀의 표정까지 굳게 만들었다.


“정도씨. 나하고 술 한 잔 합시다.”


한 번도 이런 적 없는 그가 같이 술을 먹자고 할 정도면 분명 뭔가 일이 있다. 그와 같이 간 곳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포장마차들이 몰려 있는 공원이다. 안주도 나오기 전인데 그는 연거푸 소주 세잔을 들이켜곤 안주가 나올 때까지 대로를 질주하는 차량들만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보내던 그는 기다리던 안주가 나오자 입을 열었다.


“제가 올해 직급 정년인 것 알아요?”

“들은 적은 없지만 짐작은 했어요.”


물고가 트이듯 입이 열린 그는 직급 정년인 올해 연말에 진급 못하면 퇴사하거나 계열사로 이직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계열사 이직은 윗선의 추천이 있어야만 가능했고 대부분 연줄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혜택이라 바랄 수도 없는 처지다.


“그런데 부서를 옮기면 1년간 보류가 돼요. 그러니까 1년 더 일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고과장한테 부탁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연말에 그만둬야죠. 뭐.”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의 고민을 들어준 적은 있지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고민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난들 알겠냐는 식으로 흘려듣곤 했던 것이다. 어쩌면 무용은 나에게서 뭔가를 기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선배는 경력이 있으니까 다른 데 취직하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힘내세요. 아직 연말 되려면 석 달이나 남았는데.”


그날 이후, 무용은 자주 자리를 비웠고 그 바람에 그가 맡았던 일의 일부까지 떠맡아야했다. 그러나 이것은 고과장이 무용의 재취업을 위해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연말까지 아직 3개월 이상 남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 덕에 할 일이 많아지면서 짜증스런 날들이 계속됐다.


“정도씨도 취업하느라 힘들었죠?”

“예.”

“그건 경력자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일 때문에 짜증스러운 것 아는데 요즘에 어디서 오라고 하지 않는 한 직장 옮기기 정말 힘들어요. 사람 충원되면 좀 나아질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요.”

“알겠습니다.”


그러나 일이 힘에 부치다 보니 내가 왜 남의 일까지 해야 하나 하는 불만에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그럴 때마다 짜증이 나다 보니 무용을 돕는 게 아니라 동정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공사가 분명한 조직사회에서 이래도 되나? 고과장은 어째서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무용이 새 직장 찾으러 다니는 동안 그가 할 일을 대신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요즘 좀 힘들어요.”

“아무래도 그렇지.”

“전 과장의 처사가 마음에 안 들어요. 퇴사하기 전까진 근무를 해야 하잖아요. 도대체가 과장이란 사람이 공사 구분을 못하고 동정심에 빠져있으니. 원.”

“그건 말이다. 동정이 아니라 배려야. 네 말을 들으니 그 선배라는 사람 사정이 딱하게 된 것 같은데 박하게 굴면 안 돼.”


그렇다면 배려와 동정의 차이가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고과장의 행동은 동정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주팀장의 부당한 지시에 대꾸 한번 못하고 허허실실이던 유과장을 못마땅해 했던 그녀가 왜 저러는 것일까? 혹시 무용에게 딴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고과장은 유부녀, 분명 그건 아닐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대외 이미지 때문에?


“제가 보기엔 배려나 동정이나 그게 그것 같은데요?”

“배려는 상대를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이고 동정은 상대를 딱하고 가엾게 여기는 거야. 넌 거지에게 돈을 주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난데없이 거지 얘기를 꺼낸 아버지는 거지는 그 돈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시 구걸을 하지만 그에게 돈을 벌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면 그는 구걸을 하지 않을 거라면서 젊은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 고과장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지금 그 과장이라는 사람은 네 선배가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거야. 그게 배려야. 그러니 너도 덕을 베푼다고 생각해.”


아버지 말씀을 듣고 나니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군대까지 갔다 오고도 여자보다 생각이 짧았다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오피스 108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 19. 인연 19.11.24 507 13 5쪽
18 18. 초라한 퇴장 19.11.23 517 13 9쪽
17 17. 진상 19.11.21 507 12 7쪽
16 16. 갑질 19.11.18 506 11 6쪽
» 15. 배려와 동정 19.11.15 547 16 7쪽
14 14. 행복한 고민 19.11.13 535 13 5쪽
13 13. 몸통과 깃털 19.11.12 534 15 9쪽
12 12. 쓰레기 19.11.11 557 16 10쪽
11 11. 고래싸움. 19.11.10 568 12 7쪽
10 10. 수심가지(水深可知) 19.11.08 569 13 6쪽
9 9. 폭풍전야 19.11.08 573 13 5쪽
8 8. 입방정 19.11.07 615 13 6쪽
7 7. 싸가지 19.11.05 607 15 5쪽
6 6. 악연 19.11.04 635 17 6쪽
5 5. 갈등 19.11.03 672 14 8쪽
4 4. 신세계 19.11.03 698 14 3쪽
3 3. 처신 19.11.03 729 15 6쪽
2 2. 가시밭길 19.11.03 829 19 6쪽
1 1. 첫 출근 19.11.01 1,304 1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