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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니르 님의 서재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여섯 분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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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아함(阿含)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0
최근연재일 :
2024.05.21 17:00
연재수 :
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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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수 :
99,438

작성
24.05.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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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7)

DUMMY

“일단 의복부터 단정히 해야겠군요. 분명 일곱째 도련님의 옷장에 어릴 때 입으시던 게 남아있을 텐데...”


그때, 유모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왜 그래?”


「나도 갈래.」


“안 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쌍둥이에게도 말 같잖은 소릴 들었는데 가주의 부인들한텐 어떤 참신한 개소리를 들으려고.


가주는 총 다섯 명의 부인을 뒀다.


각각 종교, 재계, 정계, 언론, 군과 관련되어 있으며,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그 영향력이 절대에 가깝다.


‘애 딸린 유부남이 뭐 좋다고 흘레붙는 개년들. 그중에서 날 달가워 할 년이 없는데 내 약점을 대놓고 보여주라고?’


미친 소리다.


“절대 안 돼.”


「그래도 갈래...」


유모의 눈을 보니,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 안 해주면 어떻게든 따라올 듯하다.


“가족 모임이야, 유모. 유모는 내 가족이지. 그들의 가족이 아니잖아. 그렇지?”


「하지만 나도...」


“조금 늦을 것 같으니 먼저 밥이라도 먹고 있어. 방은... 더러워졌으니 사용인들한테 치우거나 바꿔달라 말하고.”


유모는 말을 할 수 없기에, 나는 귀를 막는 대신, 몸을 돌렸다.


‘일곱째면 외가가 언론 쪽이었지.’


이도현, 별명은 벌꿀오소리.

모델 겸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개인방송으로 던전 공략을 주로 찍었던 걸로 기억한다.

특징은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유독 심하다다는 것.


누가 자기 물건에 멋대로 손을 대면, 권위에 상처 입은 가주마냥 발작하는데,

외가가 없어서 받지 못하는 지원을 다른 형제들 삥 뜯으며 채웠던 꿈속의 나도, 놈과 엮이는 건 최대한 피했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양 집사를 바라봤다.

그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손을 잡아드릴까요? 저택이 너무 넓어 혼자 앞서 걷다간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치 처음 손주를 봐서 기쁜 할아버지처럼.


‘...행복해 보이네. 응, 아무 생각 없어보여.’


나는 떨떠름함을 감추며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


“그럼 도련님, 이쪽입니다.”


그는 내가 걷기 편하게 내 쪽으로 살짝 몸을 수그려주었다.


“그나저나 도련님, 독순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아주 능숙하시더군요.”


내가 아까 유모의 입모양을 읽으며 대화하던 게 인상깊었나보다.


“뭐, 그냥 살다보니...”


그때, 임 비서의 몸에서 지갑을 꺼낸 쌍둥이들이 은근슬쩍 그것을 빼돌리려는 게 보였다.

양 집사의 질문에 나는 대충 대답해주며, 남는 손으로 쌍둥이를 쥐어박고, 지갑을 갈취했다.


이 정도는 직계끼리의 사소한 다툼이란 건지, 양 집사는 개입하지 않았다.


“그럼 말은 어떻게 떼셨습니까? 이것도 유모 분이 가르쳐준 건가요?”


8년 만에 자식의 존재를 알게 된 게, 사실 가주가 아니라 양 집사였나?

항상 냉랭하게 굴던 사람이 살갑게 구니, 부담스럽다.


“아뇨. 그건 다른 사람한테.”

“끄어억!!”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에서 몰래 주먹 감자를 날리는 나쁜 팔을 역으로 한 번 꺾어줬다.


“뒤에서 그러면 안 보일 줄 알았냐?”


그렇게 두 팔을 모두 잃은 동현은 나를 말려주지 않은 양 집사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양 집사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잡은 손을 반대로 옮기며, 스스로 나와 쌍둥이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감자의 꽃말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였지... 그럼 주먹으로 감자를 표현한 건, 이 주먹으로 당신을 따르겠다는 복종의 의미인가?’


모르겠고, 일단 기분 나쁘니 한 대 더 때려야겠다.

나는 카드와 현찰을 뺀 지갑을 쌍둥이의 얼굴로 투척했다.


다만 얼굴이 똑같이 생겨서 잘못된 타겟에게 날아갔다.


-철썩!


“나는 왜! 가만히 있었잖아!”


옆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멀뚱히 서있기만 하던 구현이 벌겋게 부푼 뺨을 붙잡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누가 그렇게 생겨먹으래?”


양 집사는 이런 상황이 일상인 양, 아무렇지 않게 나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펠 도련님이시군요.”

“...삼촌을 알아요? 아니, 그보다 도련님?”


그런 내 반응이 재밌었는지, 양 집사는 웃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껄껄, 제겐 가주님도 도련님이셨지요. 그립군요... 어린 시절엔 두 분이 함께 자라셨는데. 펠 도련님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삼촌이요?”


나는 잠시 펠 삼촌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삼촌이 속한 엘프라는 종족을.


아름다운 외모, 긴 수명, 높은 자연 친화력까지...

‘엘프’는 인간이 바라는 모든 걸 갖고 있대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동경이 어디 동경만으로 끝나던가.


신을 동경한 인간은 하늘까지 탑을 쌓았고, 달을 동경한 인간은 달에 로켓을 쏘아보냈으며, 미지를 동경한 인간은 남극대륙을 횡단했다.


엘프에 대한 판게아 인의 선망은 열망이 되었고, 그 열망은 이내 갈망으로 변질되었다.


노예 시장에서 수도의 대저택 하나 값에 팔리는 비싼 매물.

이것이 엘프들의 현주소다.


지난 대전쟁의 승리로 한껏 위상이 오른 이종족 연합에선 당연히 이를 강력히 규탄했다.

하지만 아무리 현대화가 진행됐다고 한들, 판게아는 지구처럼 될 수 없었다.


홀로 국가를 전복시키는 게 가능한 초인이 있는 곳인데, 평등이나 민주주의 같은 허상이 가능할 리가.


그렇게 판게아의 노예 시장은 불법이면서도, 불멸인 기묘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선망과 달리 엘프는 상당히 불완전한 종족이다.


‘빛이 생명, 정신, 신성력 등을 상징한다면, 어둠이 상징하는 건 죽음, 육체, 그리고 마력이기에 온전히 빛의 손에서만 창조된 엘프는 태생적으로 마나를 쓸 수 없지.’


‘빛’이 아닌 ‘세계수’를 신으로 섬기기에 사용 못하는 건 신성력 또한 마찬가지.


그나마 ‘숲의 은혜’로 신체 능력은 평균적인 인간보다 뛰어난 편이지만, 세계수의 영역 밖에선 시름시름 앓다, 원래의 수명을 반도 못 살고 죽어버린다.


마족 같이 온전한 어둠의 손에서만 빚어진 이들과는 여러모로 반대된다고 할 수 있겠다.


‘놈들은 강인한 신체와 압도적인 마력 재능을 타고난 대신, 지속적으로 살육을 해 생명의 근원을 빼앗지 못하면 생명 활동을 계속할 수 없으니까. 타종족과의 공존이 애초에 불가능한 종자들.’


그래도 이런 불완전함을 타계하는 방법만큼은 엘프와 마족 모두 같았다.


『계약』


지성체와 계약한 마족은 그들에게 긴 수명과 마력에 대한 재능을 주는 대가로 그들이 죽인 생명의 생명력 일부를 받는다.


마신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인(魔人)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방법은 계약으로 같으나, 엘프는 계약을 맺는 대상이 마족과 달랐다.


그들이 계약하는 건, ‘이지가 깃든 자연’.

흔히 정령(精靈)이라 불리는 존재이다.


정령과 계약한 엘프는 세계수의 영역 밖에서도 육체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며, ‘정령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진다.

정령들 또한 이 계약을 통해서만 물질계에 관여할 수 있기에 일종의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어린 엘프가 처음 정령을 받는 곳이 바로 내가 살았던 ‘요정의 숲’이며, 숲의 마물과 이런 노예 사냥꾼으로부터 동족을 지키는 게 ‘숲지기’인 삼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정령과 계약하지 못해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하는 어린 엘프라니, 노예 사냥꾼 입장에선 이보다 탐스러운 먹잇감이 없었다.


“삼촌은...”


그래서인지, 기억 속의 삼촌은 항상 바빴다.


이따금 숲을 빠져나가, 노예 시장을 급습해 동족들을 구출하는 것도 그의 업무 중 하나였다.

반드시 하이 엘프만이 숲지기로 선택받는 건 아니었으나, 세계수의 영역 밖에서 약해진 동족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선 ‘작은 세계수’라 불리는 하이 엘프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노예가 된 상황에 절망해 잘못된 선택을 해버린 동족을 심판하는 것 역시 삼촌의 일이었다.


“복잡해보이시네요.”

“네, 복잡하네요...”


하얗다는 건, 그만큼 물들이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프가 계약할 수 있는 대상은 정령만이 아니며, 마족과 계약할 수 있는 지성체 역시 인간만이 아니다.


『다크 엘프』


마족과 계약한 엘프는 그 피부부터가 검게 물들었다.


정신이 불안정해져 쉽게 광기에 빠지며, 더 이상 정령들을 부르진 못하지만, 마수들을 부릴 수 있게 된다.


타락한 다크 엘프가 마수 군단을 이끌고 자신을 구해주지 못한 고향 숲이나, 자신을 노예로 만든 왕국을 불태우는 장면은 판게아의 동화책에서 자주 등장한다.


하이 엘프에게 주어지는 이런 ‘영광스런 과업’에 진절머리가 난다면, ‘장로’가 되어 세계수 바깥에 부락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그들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는 것이기에 장로가 되면, 자유가 사라진다.


나무가 자기 혼자 걸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마을의 중심에서 세계수의 역할을 해줘야 했으니까.


자유로운 영혼인 삼촌에겐 여러모로 불가능한 업무라 할 수 있겠다.

하이 엘프지만, 반은 인간의 피가 섞였고, 인간들의 사회에서, 인간과 함께 자란 삼촌에게는...


‘아, 그러고 보니 삼촌을 만나려면 8년은 더 기다려야 하네.’


고작 인간 아이를 돌보느라, 사명을 게을리한 삼촌의 행동은 엘프들에게 동족을 배신하는 행위.


그에 대한 형벌로 삼촌은 한동안 근무지인 요정의 숲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기간은 나를 돌본 시간과 같은 8년.


때문에 내가 가문에서 지내는 동안, 삼촌은 나를 만나러 올 수 없었다.


“정말... 복잡해요.”


잠깐, 생각해보니까 삼촌이야말로 이 모든 일들의 원흉 아닌가?


다음에 만나면 그 길쭉한 귀부터 반으로 접어버려야지.


그러니까... 대충 8년 정도 후에.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이니까.


“아, 이쪽입니다.”


나를 이끄는 손을 부지런히 따라가며 나는 복수의 마음을 다졌다.


***


숲을 닮은 소년이 바위에 앉아있다.


“지금쯤 도착했으려나?”


가지처럼 길게 뻗은 귀.

잎사귀를 닮은 연녹색 머리카락과 개울을 닮은 맑고 푸른 두 눈동자.


이 모든 것들이 소년이 인간이 아님을 암시했다.


그의 이름은 펠 스토르게.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용사의 장남.


그러나 어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나이는 이미 불혹을 넘었다.


“식사는 잘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그 순간,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바위가 움직였다.


“뭐, 괜찮겠지. 마경을 제 안방처럼 나다니던 아이니까. 여차하면 대모님이 나서실 테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위의 윗면이 갈라지며 거대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런 괴물이 마을로 내려간다면 대참사가 일어나리라.


“네 시체를 조각내 주변에 뿌려두면 한동안은 조용해지려나?”


그의 손이 순간 흐릿해지나 싶더니, 산처럼 거대한 마물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의 손엔 어느새 영롱한 빛을 내는 보석이 들려있었는데, 세공이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그 크기가 상당했다.


“아, 마석을 좀 챙겨준다는 걸 잊었네. 인간들 사회에선 돈이 필요한데 말이야.”


이 붉은 돌이 바로 마석(魔石), 어둠의 피조물들이 생명의 정수를 담아둔 힘의 근원되는 돌이다.

그 돌은 마치 심장처럼 그의 손에서 조용히 맥박쳤다.


“왜 마석이라 이름 붙인 건지 모르겠다니까. 생명은 빛에 속하니, 성석이라 부르는 편이 더 맞을 텐데.”


여태 이런 의문을 가진 게 그 하나만은 아니었으나, 빛이 밝을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지는 법.


어둠은 빛에 이끌린다. 강인한 정신에 마나가 호응하고, 강렬한 감정엔 마력 역시 요동친다.


무지한 이들의 눈엔 불나방처럼 마나가 모여드는 이것이 마치 마나의 근원처럼 보이겠지.


실상은 그 반대인데 말이다.


현재 마도구를 구동하는 메커니즘도 이와 같았다.

마석을 진의 핵에 두어, 대기 중의 마력을 끌어 모으는 것.


그러면 해당 물건에 새겨진 마법을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새겨진 마법에 따라 충전에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빨리 기억을 찾는 게 좋을 거야, 기적. 남은 시간이 네 생각만큼 길지 않을 거 같거든.”


펠의 친애하는 조카는 하루 빨리 깨달아야 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 왜 요정의 숲인지, 왜 하필 이곳이었는지를.


스스로 사랑했던 모든 걸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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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8) 24.05.13 14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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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6) 24.05.11 16 1 12쪽
6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5) 24.05.10 15 1 13쪽
5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4) 24.05.09 14 1 12쪽
4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3) 24.05.09 17 1 11쪽
3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2) 24.05.08 20 1 13쪽
2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1) 24.05.08 40 1 13쪽
1 용사의 손자 24.05.08 6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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