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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니르 님의 서재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여섯 분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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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아함(阿含)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0
최근연재일 :
2024.05.21 17:00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294
추천수 :
13
글자수 :
99,438

작성
24.05.08 11:40
조회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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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용사의 손자

DUMMY

용사의 손자로 태어났다.


처음 이 사실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인생 핀 줄 알았는데...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마왕을 죽이고, 판게아와 지구 두 세계의 평화를 가져온 용사가 내 할아버지라니...


숲에서 태어나, 부모 얼굴도 모르고 자란 고아에겐 인생 역전도 이런 인생 역전이 없었다.


내게... 배다른 형제만 무려 열 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 마왕을 죽이고 지구로 귀환한 이세계 하렘 용사. 그게 우리 할아버지다.


문제는 아성이가(亞星異家)의 가주, 이겸...

내 생물학적 아비가 그런 용사의 여성 편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거고.


그래도 괜찮았다.


유산의 1,000분의 1.

아니, 10,000분의 1이면 어떤가.


설령 아무런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대도, 당장 등 따습고 배부른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곁을 지켜주었던 유모를 놈들이 내쫓기 전까지는.


그때부터 가슴에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겼다.


열 명에 달하는 형제를 모두 죽이고, 가주 자리를 찬탈해도 가슴 속 허전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삶이란 후회를 쌓는 과정이라 하던가.


숲을 벗어나, 가문에 오게 된 것.

그게 내 첫 번째 후회다.


숲에서 별을 바라보던 소년은 도시의 빛에 눈이 멀어버렸고, 새벽안개에 잠긴 도시는 더 이상 지평선을 보여주지 않았다.


“쿨럭...! 이럴 줄 알았으면, 형제들 중 한둘은 살려두는 건데...”


그리고 나는 오늘도 지겹게 후회를 했다.


“...그게 유언인가?”


제단에 묶인 나를 보며 턱뼈를 달그락대는 최후의 군단장.

전성기의 용사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는 ‘퇴적된 죽음’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뭐... 대단한 거라도 있을 줄 알았냐? 마왕 부활에 쓰일 제물로 가장 적합한 게 용사의 손자라니,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쿨럭!”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꾼다.

강산을 뒤바꾸고, 낯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마왕이 용사에게 죽은 뒤의 80년, 사람 하나가 태어나고 죽는데까지 걸리는 그 평균적인 시간도 그랬다.


마치 자신의 시체로 세상을 만든 태고의 거인처럼, 놈의 시체가 변화한 ‘무언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갔다.


던전(Dungeon)...

인간의 욕망을 삼키는 개미굴이자, 이 땅의 생명을 근절시키고자 마왕이 남긴 악의.


그리고 그 악의는... ‘돈’이 됐다.


오직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부산물들.

잊혀진 신의 가호나, 각종 희귀한 금속, 특별한 물약이나, 강력한 아이템 따위가 뭇사람들을 가슴 뛰게 했다.


하지만 모험에는 위험이 따른다.

무사히 돌아온 사람보다 던전 탐사 도중 목숨을 잃은 이들이 더 많았으며, 시체라도 온전히 돌아온 자가 드물었다.


이에 누군가는 이게 죽은 마왕에게 먹이를 주는 게 아니냐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방치된 던전에선 몬스터들이 범람하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야말로, 마왕의 부활을 저지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신교, 이 영리한 토끼 새끼가 굴을 여러 개 파놓은 게 아니었다면.


지난 전쟁의 승리자들이 마왕의 시체 위에서 축배를 드는 동안, 놈들은 패배를 곱씹으며 다음 전쟁을 준비했다.


우린 왜 졌을까?

우리에게 부족한 건 무엇이었을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렇게 찾아낸 패인(敗因)은...


용사의 존재?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지구와 이세계를 동시에 적으로 돌린 것, 그게 결정적이었다.


공통된 적을 앞에 둔 지구와 판게아는 동맹을 맺었다.


두 세계는 서로 교류하며 빠르게 발전했으며, 과학과 마법을 접목시킨 마공학이란 학문은 귀족의 전유물이던 마법을 좀 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두 세계를 대립시킨다면 어떨까?


...100년도 못 간 평화였다.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각심을 심어주기엔 아직 부족했다.


-괜찮아. 던전은 이렇게 얌전한 걸?


-어차피 판게아 놈들, 차원문만 막으면 넘어오지도 못하잖아.


-던전도 지구에만 있고 말이야.


그들은 몰랐다. 몰랐을 뿐이다.


던전이라 해봤자, 주인 잃은 힘의 조각.


그래서 누구나 취할 수 있지만, 정명한 주인이 나타나면 회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용사의 손자야말로, 마왕을 부활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그릇이란 걸 몰랐던 나처럼...


오늘은 내가 마왕의 제물이 되는 날이다.


“차세대 용사라 불리는 구성(九星). 그중에서도 최강이라 칭송받는 아성(亞星)의 유언이라기엔 범부와 다를 게 없구나.”

“유언도 전달받을 사람이 있을 때에나 의미가 있는 거지... 아직도 살아있는 놈이 있다고 생각해?”


답을 기다리는 놈을 보고, 나는 그가 날 떠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있으면? 직접 찾아가 죽이기라도 하려고?”


놈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치사한 새끼.”


막상 싸우려고 할 때는 나타나지도 않더니, 내가 군단장 둘을 죽이고 빈사 상태가 됐을 때를 노려 기습하더라.


그게 아니었다면 놈이 아무리 가장 오래된 사도라 해도, 저렇게 멀쩡히 서있지는 못했을 거다.


적어도 뼈마디의 절반은 가루가 됐겠지.


“...그런가. 정말로 끝인가. 너를 마지막으로 우리 마신교에 대적할 자는 남지 않은 것인가.”


죽임 당하거나,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는 한, 영생을 사는 리치에게도 80년의 기다림은 길었던 걸까, 놈의 독백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기쁨, 성취감...

약간 회한에 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만나면 서로 주먹부터 들이대던 우리가 처음으로 ‘대화’란 걸 하게 된 건.


“어째... 후련해 보이는구나.”


놈은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럴지도.”


그 말처럼, 생각만큼 미련이 남진 않았다.


“...어째서냐. 내가 기억하는 너라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결코 포기하는 일만은 없었을 거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자에게 죽는다더니, 나 자신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대적자에게 죽는 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야 할 수 있는 건 다했으니까.”


어쩌면 내 삶 그 자체를 관통하는 질문이었으나, 답은 생각보다 쉬웠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고, 하고 싶은 대부분의 것을 해보았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게 나의 최선이었다.


‘이 정도면 나름 선전한 거겠지... 정략혼으로 태어나, 든든한 외가를 둔 형제들 사이에서, 낳아준 어미의 얼굴도 모르던 사생아치곤 말이야.’


‘신 앞의 불평등’이라 불렸던 재능도 재능이지만, 천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으리라.


‘그래도 만약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후, 마지막엔 누구나 감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까?

쓸데없는 가정이다.


언제나 의연하고 당당하게, 내 마지막 모습은 정해져 있다.


나는 지난날을 후회하는 대신,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는 너희야말로 아쉬워서 어떡하냐?”


패자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유쾌함.


“여기 내 목을 노리는 놈이 한둘이 아닐 텐데... 너희 마왕님이 되게 생겼네?”


마지막 가는 길, 놈도 더 이상 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래, 아쉽구나. 네가 그분의 그릇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분의 사도가 아니었다면...”


사람이 아니라 영웅이, 영웅이 아닌 국가가 수없이 피고 지는 것을 봐왔을 ‘퇴적된 죽음’이 드러낸, 날 것 그대로의 투쟁심.


“용사와 못 다한 승부를... 너와 내었을 텐데.”


내 삶은 누군가의 후회가 되기에 충분했다.


-푸욱!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놈의 단검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내 가슴을 갈랐고, 뼈마디만 남은 놈의 손은 그 안에 깃든 심장을 끄집어냈다.


-두근! 두근!


몸 밖에 나온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면서...


“뭐... 뺑이 쳐라.”


나는 늘 곁에 머무르던 죽음을 오랜 여정의 동반자로 받아들였다.


“허무한 승리로고...”


그 앞에서 죽음의 손을 잡는 법을 잊어버린 망자의 왕은... 영원히 잊지 못할 이 순간을 영혼에 새겼다.


“모든 승리는 달콤할 줄 알았거늘. 너무 달았던 탓일까, 석밴 혀에 쓴맛마저 도는구나.”


***


따스하다.


온몸에 칼을 겨눈 듯한 서늘함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봄날의 따스한 햇살만이 나를 반긴다.


‘이건... 주마등(走馬燈)인가?’


그래, 그날의 이별도 이런 화창한 봄 날씨였다.


내 첫 번째 후회.


고개를 드니-


익숙한 골목길.

익숙한 가로등.

익숙한 담벼락.


마지막으로...


‘유모...?’


저 혼자만의 작별인사를 마치고, 떠나가는 유모의 뒷모습이 보인다.


동시에-


멋대로 달싹이는 입술.


“자, 잠깐만...!”


멋대로 튀어나가는 다리.


“가지 마요!”


내 팔이 멋대로 그녀를 붙잡았고, 멋대로 끌어안았다.


이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게 망상에 불과하단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내 눈앞에 있다.


“하아, 하아, 가지 말아줘요, 제발...!”


그러니 전해야 했다.


전하고 싶었던 말,

전해지 못해 후회한 말,

혼자 거울을 보며 몇 번이고 흉내 낸 말을...


나는 떨리는 손으로 기억을 되새겼다.



처음은 새끼손가락이다.


다음은 검지와 엄지를 곧게 펴고...


검지를 내린 뒤, 다시 새끼손가락을 올린다.



언젠가 그녀가 그랬듯이...


이 모든 감정을 전하기에 말은 너무 가벼웠으니까.


말로 전할 수 없는 건 행동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래, 나의 유모는 말을 하지 못한다.


가문에선 이것을 이유로 유모를 내쫓았지만, 나는 그런 거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런 유모가 좋았다.


말 대신 필담을 나누는 것도,

눈빛으로 감정을 전하는 것도,

입모양을 읽어 단어를 유추하는 것도,


그 온갖 비언어적인 표현들이 난...


오늘은 유모와 헤어지는 날이자,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을 깨닫게 된 날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난 수화가 뭔지 몰라서,

떠나기 전 유모가 보여준 행위가 무엇인지 몰라서,

이별이 이별인지 모르고, 작별이 작별인 줄 몰라서.


‘따라해보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유모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

내 마지막 미련이다.


‘전해졌을까?’


경직된 몸.

확장된 동공.

그리고 가쁜 숨.


‘전해졌다.’


마치 자신이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잊은 사람처럼,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유모는 우리가 숲의 오두막에서 함께 지냈을 때 그랬듯이 오직 입모양으로만 뜻을 전했다.


「...어서 와.」


-이것으로 계약은 연장되었다.


유모는 무언가 알고 있는 걸까?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곁을 지켜주던 유모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묻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다녀... 왔습니다.”


나를 받쳐 든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애써 밀어내고 있던 잠기운을 받아들였다.



작가의말

석배다: 썩어 없어지다의 옛말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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