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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니르 님의 서재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여섯 분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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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아함(阿含)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0
최근연재일 :
2024.05.21 17:00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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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수 :
99,438

작성
24.05.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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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6)

DUMMY

아이가 꿈을 꾸고, 젊은이가 미래를 그릴 때, 노인은 추억 속에 잠긴다.


마치 수면에 비친 달처럼, 노인의 얼굴에 박힌 굴곡진 삶의 조각들은 어떤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


아성의 마지막 회장.

용사의 첫 번째 아내.

이혼을.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부로 아가씨를 모실...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 그보다 나 지금 다람쥐 잡으러 갈 건데 같이 가자!


햇살, 여행, 휴가, 그리움.

만약 그가 그녀를 대상은 책을 쓴다면, 그 주제는 이것들로 잡으리라.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이야기는 존재치 않듯,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했던 첫 장은 결국 끝이 났다.


-나... 떠날 거야.

-아가씨, 갑자기 그게 무슨...?

-아버지께서 그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어. 그이가 얼마나 빛나는 사람이든, 아버지 눈엔 한낱 고아에 불과하더라.


다음에 펼쳐진 건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


부잣집 병약한 아가씨가 요양 차 내려간 시골에서 산골소년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그런 흔한 이야기.


용사, 알렉스...

그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토종 한국인은 누군가의 첫사랑이 되기에 충분한 소년이었다.


그렇게 소꿉친구, 불같은 사랑, 집안의 반대, 사랑의 도피 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둘은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아성이가의 가주, 이겸.


두 사람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아이.

그래도 행복했다.


여인은 아이에게 아성의 오랜 전통대로, 후계자에게만 붙는 외자 이름을, 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떡해? 그이가 죽었어. 시체가 보이지 않아서 실종신고를 하긴 했는데 트럭에 치였으니... 흑, 뱃속에 아이도 있는데 나 정말 어떡해?

-...걱정 마세요. 제가 지키겠습니다. 당신도, 회사도, 뱃속의 아기씨도요.


하지만 그녀가 초음파 사진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집안과는 사실상 의절한 상태.

어디에도 기댈 수 없던 그녀는 한 생명의 무게만큼 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온 동네를 뒤졌다.


그 끝에 알 수 있었던 건 그가 트럭에 치였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시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용사는 더 이상 지구에 없었다.


혼인신고서 대신 내게 된 실종 신고서.

하지만 슬퍼한 겨를도 없이, 지구에 재앙이 닥친다.


용사가 전생하며 생긴 틈으로 마왕이 지구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거대한 차원의 균열.

그 틈새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방대한 양의 마나와 각종 마물들.


...격변의 시기였다.


당시 지구인들에게 마나란 한없이 낯선 물질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마나를 다루는 방법도, 적성도 모자랐던 시기...

마물에게 죽는 사람보다, 마력에 중독되어 목숨을 잃는 이들이 더욱 많았다.


그녀가 아성의 회장직을 물려받는 건, 그런 혼란 속에서였다.


하지만 위기가 재능을 꽃피운 걸까?

놀랍게도 그녀에겐 재능이 있었다.


바로 ‘이끄는 자’로서의 재능이.


그렇게 낮에는 기업의 대표로서 사태를 수습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돌본다.


그러기를 3년, 판게아의 시간으론 20년 만에... 용사가 돌아왔다.


그가 전생한 이세계, 판게아의 힘만으론 마왕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마왕이 새롭게 침략전쟁을 시작한 지구에 동맹을 제의하고자 온 것이다.


하지만 그가 먼저 마주해야할 건, 각국의 정상들이 아니었다.


용사는... 자신의 아이를 품에 안은 소꿉친구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목도한 건...

엘프나 수인과 같은 이종족 아내들을 양 옆구리에 낀 시발새끼였다.


...격변의 시기였다.


어쨌든 용사의 노림수는 제대로 통했다.


쌍수무기가 필패의 상징이듯, 양면전선을 패망의 상징.

지구와 판게아, 두 세계를 동시에 적으로 돌려버린 마왕은 결국 패배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지구와 판게아... 두 곳에 아내를 둔 용사 역시 패배했다.


두 세계의 평화를 이루어낸 용사도 가정의 평화를 이룩하진 못한 것이다.


긴 전쟁이 끝나고... 용사의 이종족 아내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용사는 지구에 남아, 소꿉친구와 못다 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게 벌써 50년 전.


이야기의 본편은 이미 옛저녁에 끝났고, 지금은 본편이 끝난 외전, 원래라면 잊혀졌을 조연들의 이야기다.


***


‘개판이네.’


기껏 미래를 봤는데 생각대로 진행되는 게 하나도 없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거지? 쌍둥이랑 부딪친 거? 아니면 유모와 함께 있게 된 거? 그도 아니면...’


당연히 어느 정도 변화가 동반될 거라곤 예상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본 미래를 바꾸기 위해 행동한 건데, 바뀌는 게 없다면 그게 더 곤란하다.


하지만 계획의 밑바탕이 된 몇몇 전제는 결코 달라져선 안 됐다.

사실 가주가 여자였다고 하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같은 이유로 양 집사는 나를 적대해야 했다.

그는 첫만남 때부터 그랬으니까.

태도는 정중했으나, 기저에 깔린 것은 깊은 혐오감이었다.


‘마지막 날, 나보고 가주를 닮았다고 했던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이외에는 달라진 거라고 해봤자, 만나게 된 시간하고... 나.


‘잠깐, 내가 달라졌다고?!’


그래, 내가 달라졌다.

그것도 ‘내면’이 아닌, ‘외면’이.

단순히 어려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성장의 비약을 먹기 전이잖아.’


아무리 30년 전이라지만, 이걸 잊다니.


제작자 미상, 성분 미상의 그 약은 무슨 숫퇘지 거세시키는 것마냥 성장에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주는 힘이 있었다.


대충 1년 치 성장을 한 달 안에 끝내주는 정도.

나는 가주가 내 존재를 기억하기까지의 넉 달 간, 이 약을 도합 네 번 복용했다.


당연히 약은 효과가 뛰어난 만큼 독할 수밖에 없기에, 근골이 틀어지는 등의 부작용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어떤 대가도 그 앞에 목숨을 갖다대면 빛이 바래는 법이니까.


성장한 나는 누가 봐도 가주를 닮아있었고, 그 덕에 첫 대면에서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나이 차가 두 배가 넘는 형제들 틈바귀에서.


‘그런데 나이나 성별도 아니고, 고작 외모가 달라진 정도로, 이렇게까지 상황이 바뀔 수 있나? 후우, 증명식도 없이, 오직 외형적 특징만으로 호적에 들어간 내가 할 말은 아닌가...’


나는 잠시 양 집사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분명 나를 보고 회장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아성이 아직 기업이었을 적의 이야기라는 건데...’


그때,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양 집사가 입을 열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그리운 분을... 너무 많이 닮으신 터라.”


손짓 몇 번에 흐트러진 복장이 완벽히 정돈된다.


눈가에 남은 불그스름한 기운만 아니라면, 방금 전까지 오열하던 사람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도련님께는... 친할머니가 되겠군요. 이렇게라도 그분의 피가 이어진 것을 확인하게 되어, 이 노 집사...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그는 다시 울컥했는지, 중간중간 말을 늘였다.


‘나쁘지 않아...’


양 집사는 아군으로 끌어들였을 때, 실보다 득이 많은 인물이다.


‘인연을 만들어두면, 가문을 벗어난 뒤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유모는 아직 지구에 신분이 없을 거고, 아직 미성년자에 불과한 내가 혼자 사업을 벌이는 것도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물론, 양 집사도 위치가 있으니, 직접 신원을 보증해주는 건 어렵겠지만...’


그가 보유한 인맥으로 적당한 인선을 알아봐주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다.


“그래서 이제야 절 찾은 이유가 뭐죠? 몇 달은 더 방치할 거라 생각했는데요.”


나는 이것저것 재지 않고, 곧장 용건을 물었다.

비꼬는 거라 생각했는지 양 집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께서 도련님을 찾으십니다. 막내 도련님뿐만 아니라, 직계 가족분 전원을요.”


그는 그러면서 방을 막 빠져나가려는 쌍둥이를 불러세웠다.


“이상하네요. 아직 제 뒷조사가 안 끝났을 텐데. 신분이 확정되지 않은 외부인을... 아, 없어진 거군요. 증명할 필요가.”


어떤 이유에서든, 가주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그는 날 자식으로 들이기로 결정했고, 이곳 아성이가에서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역시 그분을 닮아 영민하십니다.”


양 집사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갑자기 내가 아는 미래가 변한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펠 삼촌 때문인가?’


다른 원인은 떠오르는 게 없다.


아직 얼굴을 본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해 아는 정보도 없으며, 아는 거라곤 내 신원 보증인이 자신의 형제라는 것뿐이니까.


‘어렵네. 둘의 관계는 워낙 복잡해서...’


어떻게 용자, 펠 스토르게은 ‘용사의 장자’가 될 수 있었을까?


시기상으론 용사가 이세계로 전생하기 전에 가진 자식인 가주가 장자가 되어야 맞을 텐데.


그러나 그들이 가주를 부르는 말은 ‘용사의 장자’가 아닌 ‘용사의 적자’다.


정치적으로 보면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대외적으론 대전쟁 시절, 판게아와 지구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서 그렇다.


전에 말했듯, 마나는 마치 중력처럼 시간에 관여할 수 있는 물질.


높은 마력을 가진 존재일수록 노화가 느리고, 마나의 밀도가 높은 곳은 시간이 다른 곳보다 느리게 흐르며, 그림자 아공간에 보관된 물건은 시간이 정지한다.


그리고 어둠이 빛의 형상을 본따 만든, 어둠의 왕자.

세상을 빛이 있기 전의 어둠으로 되돌리려는 이 번뇌의 왕들은 마침내 별에 닿아 그 정수를 집어삼킬 때, 행성의 시간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행성을 고립시켜, 그들을 ‘별을 삼키는 자’로 만든 마왕의 가장 두려운 권능.


인접한 행성이나 교류하던 차원에서 원군을 보내고 싶어도 시간이 달라 할 수가 없고, 설령 원군을 보내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원정을 꾸리는 며칠 사이,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년까지 시간이 흐르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는 달랐다.

지구... 아니, 태양계는 애초에 마나가 희박한 편이었고, 그래서 시간의 흐름이 기이할 정도로 빨랐다.


우주의 관점에선 너무 찰나의 반짝임이라, 문명이 형성된 지 수천 년이 지났음에도 외계 문명이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 특이점이 이 기묘한 협력관계를 성사시켰다.


무려 마왕의 손에 잡힌 판게아와 시간 배율이 고작 7배밖에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7배다.


늦게 수정된 아이가 먼저 착상된 아이보다 빨리 태어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다.


이럴 때는 수정된 시기를 먼저 봐야 할까, 아니면 태어난 시기를 우선하여 봐야 할까?


이 희대의 난제는 누구보다 ‘장자의 권리’를 중요시 여기는 천신교의 손에 맡겨졌다.


그리고 천신교는... 애당초 자신들의 자랑스런 용사가 지구인과 맺어진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관점에서 지구인들 마나를 쌓고자, 단전호흡이라는 무식한 방법을 쓰는 ‘진화가 덜 된’ 종자였으니까.


‘나한테 삼촌은...’


삼촌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는 ‘요정의 숲’을 지키는 숲지기였고, 나와 유모가 살았던 오두막집은 그의 수많은 은신처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종족이 다르긴 했지만.


엘프, 그것도 ‘작은 세계수’라 칭송받는 하이 엘프가 바로 그의 종족이었다.


가주와 삼촌의 시간이 그랬듯, 나와 삼촌의 시간도 달랐다.


엘프와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차이...


수명은 10배가량, 성장은 4배 가량.

더 길고, 더 느렸다.


삼촌은 어느새 형이 됐고, 친구가 됐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나보다 작아져 있었다.


아마 가주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유년기를 함께 보냈다고 들었으니.


그리고 내가 만약 자식을 가졌다면, 그 아이도 비슷했겠지.

적어도 그 자식의 자식까지는.


‘뭔가 의욕이 솟네.’


왠지 이번 삶의 목표가 정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생에선 그 모습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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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8) 24.05.13 14 1 16쪽
8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7) 24.05.12 13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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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5) 24.05.10 15 1 13쪽
5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4) 24.05.09 14 1 12쪽
4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3) 24.05.09 17 1 11쪽
3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2) 24.05.08 20 1 13쪽
2 꿈속에서 이전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1) 24.05.08 40 1 13쪽
1 용사의 손자 24.05.08 6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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