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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연재수 :
1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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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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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경매

DUMMY

효민의 뒤에 있던 아저씨는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중년의 남자였다. 볼록 올라온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엘리베이터에 서서 이들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효민과 함께 있던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특유의 너그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이번 지하 전시에서 초 화백님의 그림이 한 점 걸릴 거라고 하더군요. 제 지인이 갤러리에서 일하고 있어서 들었네요.”


“초 화백님의 어떤 그림이 걸린 답니까? 한 점이라면 초 화백의 유명한 ‘쌍으로 된 저울’은 아니겠네요?”


반대머리 남자가 말한 ‘쌍으로 된 저울’은 두 점의 그림을 한 작품으로 만든 초승류 화백의 대표작이었다.

대칭의 저울을 하나의 그림에 반쪽씩 그려 넣은 ‘쌍으로 된 저울’은 독특한 구성과 초 화백의 역작으로 작업 기간만 10년이 넘었고 초 화백의 독창적인 기법이 가감 없이 들어간 그림으로 초 화백의 그림 중 가장 비싼 그림으로도 유명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도 기대가 된 건지 녹색 손수건으로 반들거리는 두피를 닦아냈다.


이어지는 아주머니의 말은 남자의 기대를 좌절시켰다.


“아랍의 기름 부자가 그걸 사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기름 부자가 그걸 팔았다는 소문은 없으니 그게 나오진 않겠죠?”


“그렇겠군요. 그냥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번에 나온다는 그림은, 초 화백님의 연작 중 하나라고 하는데 자세히는 몰라요. 이 이상은 직접 확인하는 재미로 놔두는 게 좋겠죠.”


아주머니의 신비로운 미소에는 감추지 못한 장난기가 삐져나왔다.


남자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다가도 절대 알려줄 것 같지 않자 말머리를 돌렸다. 어쩌면 저 여자도 정확히 어떤 그림인지는 모를지도 모른다.


“허허허, 티에이징 본사에도 초 화백님 그림이 하나 있지요? 그걸 볼 때마다 늘 우리 회사에도 초 화백님 그림 하나 걸어놓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더 벨룸의 제작사 티에이징 임원의 부인으로 반대머리 남자는 그녀 남편의 지인이었다.

둘의 만담은 서로 안면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너그러운 인상을 가졌다지만 콧대 높은 임원 부인이 모르는 남자의 말에 대꾸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동훈의 귀는 더욱 쫑긋 세워졌는데 더 벨룸의 제작사인 티에이징이라는 단어가 그를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티에이징, 더 벨룸의 모태이자 동훈이 사랑하고도 증오했던 회사.


더 벨룸을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낄 것이다. 티에이징을 향한 애정과 증오 양면의 모순적인 감정을. 뒤틀린 애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티에이징이 천년만년 더 벨룸을 서비스하면 좋겠다는 마음과 하루빨리 망해버리라고 저주하는 마음, 티에이징이 돈을 많이 벌어서 오래오래 더 벨룸을 서비스하면 좋겠다는 마음과 이 망할 놈들이 과징금이나 시원하게 처먹고 정신 똑디 차리길 바라는 분노의 마음이 공존했다.


그러므로 티에이징의 관계자와 연이 있는 뉘앙스를 풍기는 아주머니에게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게 저희 남편 것도 아닌걸요. 최 이사님 정도면 초 화백님 그림 정도는 구하실 수 있잖아요? 하나 구매하시지 취향 참 특이하셔.”


“예, 뭐. 아시다시피 제가 화가별로 제 마음에 쏙 드는 작품 하나씩만 사는 기벽이 있어서. 유명한 건 압니다.”


“이사님도 스스로가 특이한 건 아시는군요. 한국 굴지의 플랫폼 회사의 이사가 그런 기벽을 가졌다는 건 뉴스거리긴 해요.”


한국 플랫폼 사이트 2위, 한국에서 가장 정확한 검색엔진이라고 스스로 광고하는 포털사이트 ‘넥스트’의 등기이사 백준기는 머리를 연신 손수건으로 쓸며 덧붙였다.


“그렇지요, 그렇죠. 한국 작가 그림도 많이 사서 한국 예술계 부흥을 위해 힘쓴다는 기사도 나가면 좋을 것 같군요.”


백준기 이사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당황하는 사이 에스컬레이터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지하층이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안쪽으로 진입하자 본격적인 회랑이 등장했다. 지하의 2개 층을 한 개의 층으로 만든 듯한 높은 층고,


반구 형태의 돔 형식으로 지어진 지하층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정교하게 지어져 있어 지하라는 공간이 주는 답답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의 전경은 VIP들에게도 신선하게 느껴졌는지 이곳에 처음 오는 듯한 이들이 수군거렸다.


“여기 먼저 왔던 언니가 지하를 예쁘게 잘 해놨더더니 정말이네요.”


“지하인데도 세련됐어요. 공기도 텁텁하지 않고. 제가 지하만 가면 알러지가 올라와서 걱정이었거든요.”


“어머, 자기 성진전자 지하에서도 알러지 올라오지 않았어? 성진이 지하에 얼마나 신경 썼는데도 그러기에 이번에도 걱정했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신기하네요.”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경매장에 입장했다.


돔 형태의 경매장에 입장하자 도슨트는 VIP를 지하의 데스크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VIP를 맞았다.


입장객을 등록하는 일에는 본디 VIP가 직접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원래라면 그를 따르는 수행인들이 마치 가는 길에 카펫을 깔 듯 미리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본래 그런 일이었을 텐데 이곳 승화 갤러리 지하 비밀 경매장에서는 달랐다.


직원들이 일일이 VIP에게 붙어 명단을 확인하고 그 밑으로 딸린 수행인의 신원을 조회했다.


“수행원 등록 완료되었습니다. 비밀 유지 계약과 함구 서약은 따로 동의하지 않으셔도 동의한 것으로 처리됩니다. 외부에 정보 유출이 될 경우 유출자에게 제재가 가해진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VIP들의 수행원은 VIP 이름 아래 보증된다. 이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수행원에 대한 책임을 VIP가 지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보통 업체가 VIP를 대하는 방식과는 다른 꽤 강경한 대응. 그럼에도 VIP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느낌이었다.

불쾌하지만 그러라는 태도였다. 표정에서 드러나지 않아도 태도에서 드러나는 법이었다.


보통의 업체가 VIP를 상대로 이런 식의 영업을 이어간다면 VIP들의 예민한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자세를 굽혀야 했으리라.


하지만 승화는 달랐다.


이곳을 떠나면 다른 갤러리는 주지 못하는 감성과 예술, 영업 방식이 승화를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어느 갤러리가 승화의 명성을 따라가겠으며 전속 계약된 예술가들의 이름값에 비기겠으며 은밀하고도 짜릿한 비밀 경매 영업을 시도하겠는가?


승화 갤러리의 독보적인 위치는 갤러리의 높은 콧대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승화가 유난스럽긴 해도 일은 잘해요. 지하에 있는 작품 퀄리티가 대단하네. 이 그림 좀 봐요.”


지하 공동에는 여러 예술품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림은 액자에 담겨 이젤에 올려져 있었고 조각품은 사람을 가로막는 접근금지 펜스 없이 자유롭게 서 있었다.


모든 예술품이 사람들의 접근을 막지 않는 자유로운 전시였다.


가까이 가서 보아도 되고 만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들이 더 교양있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작품은 만지면 사야 한다.


동훈은 이젤 위에 놓인 현대적으로 해석한 수묵채색화가 신비로운 느낌의 조명을 받으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혹여라도 만져서 사야 될 위기에 처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하며.


이곳에 입장하자 직원은 낮은 목소리로 ‘작품을 감상하고 즐기는 것은 자유’라고 말하면서도 ‘작품을 만지면 그건 사겠다는 표시’라며 주의해달라고 했다.


‘이 작품 하나에 3천만원짜리라고 했나. 못 낼 가격은 아니지만 그림 하나 사자고 3천을 태울 수는 없잖아.’


3천만원이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나. 안 그래도 서울에서 집 사겠다는 생각으로 허리가 휘겠는데 큰돈 쓸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동훈은 그림에서 멀어져 지하 공동을 둘러 보았다.


지하 공동 가장 중앙에는 단상이 하나 있고 그 앞으로 의자들이 줄을 맞춰 놓여있었다.


시골 바닥에서 공연이라도 하는 것처럼 세팅되어 잇는 중앙은 단색으로 추레하지 않게 오브제를 배치했는데 그 결과 단상과 데스크, 의자들만 있는데도 싼마이는 나지 않았다.


예술품들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곳에 온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듯 조금씩 그쪽으로 향했다. 그건 물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흐름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렇게 움직였다.


VIP를 안내한 도슨트는 잠시 물러났다.

사람들을 안내하고 입장객을 등록한 뒤 그제야 도슨트처럼 지하 공동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는 작품들을 돌아다니며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동훈과 이현은 예술품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도슨트의 설명을 듣지는 않았다. 대신 중앙에 있는 단상 근처로 가장 먼저 도달했다.


의자에는 번호가 있었으며 동훈과 이현은 자신들을 데려온 회장님이 오길 기다린 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이곳으로 와서 자리에 앉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슨트가 그렇게 물러난 뒤 승화 갤러리는 새로운 이를 전면으로 내세웠다.


이 지하의 진정한 목적, 경매를 진행하는 진행자, 쇼의 진행을 맡은 엔터테이너.


경매사였다.


***


경매사는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경매사는 길게 찢어진 눈과 좁은 코, 얇고 길쭉한 입술까지 어딘가 뱀을 연상시키는 외모를 가졌다.


훅-하는 마이크 테스트 이후 경매사는 능숙하게 인사말로 포문을 열었다.


-“와주신 귀빈 여러분, 감사합니다. 승화 갤러리에서 진행하는 VIP 경매가 곧 시작됩니다. 경매에 참여하실 분들은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경매사의 주도 아래 경매는 천천히 진행되었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에게는 좌석 번호가 적힌 패널을 하나씩 나눠줬는데 그걸 주면서 하는 말이 ‘패널을 들면 매수 금액을 높일 수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가장 높은 매수 금액을 부른 분께 매수 기회가 돌아갑니다.’라고 했다.


대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VIP들이었다. 수행원들은 모두 뒤에 서거나 다른 곳에서 지켜보았다. 의자가 충분히 남아 있는데도 그랬다.

의자에 앉은 수행원은 동훈과 이현뿐이었다. 극동 건설 양 실장도 경호원과 함께 저 뒤에 서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경매를 진행할 경매사 사이먼 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귀빈 여러분께 귀한 작품 소개해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경매사의 인사말은 간단하지만 힘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신뢰감 있는 단단한 목소리였고 표정과 제스쳐는 꽤나 훈련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건 경매사 사이먼이 경매사로서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VIP를 대상으로 하는 비밀 경매에 범상한 사람을 세우겠느냐마는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사이먼은 유독 난 구석이 있었다.


-“승화 갤러리에서 개최하는 이번 경매의 주제는 ‘한국의 작가들’입니다. 이미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번 경매에서는 한국 국적을 가진 작가님들의 작품이 경매에 올라옵니다. 한국의 얼과 멋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죠. 그건 우리 한국 작가님들 작품의 가격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경매사의 움직임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의 손짓 하나, 말씨 하나까지 사람들은 이야기꾼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청중처럼 몰입했다.


이현은 경매 자체보다 경매사의 말에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예술을 어느 정도 알지만 예술에 큰 관심이 없는 이현은 그런 것들에 관심을 더 가지곤 했다. 이현은 경매사의 말을 분석적으로 들었다.


-“하하, 예술을 즐기러 오신 분들께 가격 이야기나 하고. 제 직업이 경매사다 보니 불쾌한 얘기가 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이 예술품의 가격이 예술품의 가치를 논할 때 편한 수단이 되리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으실 겁니다. 제가 하는 일이 그거거든요! 하하하.”


물론 경매사 사이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말실수를 했다는 기색이 없었는데 그건 다 그의 멘트가 미리 준비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술을 즐기는 이들의 허영과 우월감은 예술품의 가격을 올리는 데에 일조하기도 한다. 잘 이끌 수만 있다면.

이정도 예술품에 돈을 아끼지 말아야지, 숫자로 예술품을 생각하면 안 되지, 하는 생각들을 불러일으킴으로 예술품을 사는데에 돈을 쓰는 행위에 아까움이라는 감정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그런 경매사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경매사 사이먼은 예술품의 가치를 올리는 데에 가격이라는 요소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 그림의 가치를 어떻게 매길 것인가, 얼마나의 가치를 당신이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사이먼의 의도였다. 그리고 사이먼의 이 의도는 예술 애호가들의 허영에 가치 판단이라는 덤태기를 영리하게 덧씌운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예술에 다분히 비관적인 이현인지라 삐뚜룸하게 생각하는 것일지 몰라도 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충분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경매사는 옆으로 스태프에게 손짓하며 지시했다.


본격적인 경매로 들어갈 때다.


-“이제 그림 올려주시겠습니까? 예.”


스르륵!


경매사가 올라온 그림의 베일을 걷었다.


오오-!


그림은 크기가 작은 종이에 그려진 흑백의 수묵화였는데 어느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풍경이었다.


수묵화의 특징적인 기법이 유려하게 사용되었으며 쭉쭉 뻗은 선에는 호쾌한 기풍이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자 그린 수묵화다, 라고 느낄만한 그림은 종이의 재질이 다소 떨어지는 것을 제외하면 훌륭해 보였다.


이 경매에 나올 수 있는 그림이 잘 그린 명작임은 당연하다. 그건 기본 조건에 불과했다.


기본 조건 다음으로 가는 정말 중요한 조건은 그림이 그저 잘 그린 그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범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경매사 사이먼이 사람들에게 그림을 감상할 시간을 충분히 준 뒤 설명을 시작한다.


-“첫 번째로 올릴 그림은, 예, 풍수 화백님의 수묵화입니다. 이번 경매의 주제는 ‘한국의 명화’인 만큼 첫 번째 그림의 벨류부터 만만치 않죠? 섬세한 농담의 대가 풍수 화백님의 ‘유백에서의 경(景)’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잠시 일었다.


풍수 화백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버린 화백 풍수는 예술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알만한 인물이었다.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해외 매체에서도 은근히 명성이 있었고, 몇 후원자가 다른 풍의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했지만 한국적인 그림 그리기를 고집해서 강단 있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었다.


여기까지가 풍수 화백의, 어느 정도 팬층이 있는 예술가의 평범한 삶이었다.


경매사 사이먼은 익히 알고 있는 그런 사실을 건너뛰고 풍수 화백이 정말로 유명해진 사건으로 바로 들어갔다. 물론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동훈은 몰랐지만 몰라도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풍수 화백님은 68년에 태어나셔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유리걸식하신 경험이 있으시죠. 당시 빚이 60억이었나? 사기를 크게 당하셨습니다. 제리코 주가조작단 사건 아시죠? 그거에 당하셨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풍수 화백님은 동양화 쪽에서 그때도 이미 알아주시던 분인데요. 수묵화의 대가로 불리시던 화백님은 그 충격으로 심한 불안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을 얻은 뒤 행불 상태가 되셨습니다. 집 잃고 차 잃고 머리는 봉두난발을 한 채 전국을 떠도시기 시작한 거예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같은 이야기도 다른 사람에게 들으면 다른 재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경매사 사이먼은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재밌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 동훈을 제외하고는, 다들 아는 내용의 이야기건만 경매사 사이먼이 이야기하자 괜히 풍수 화백의 내면과 그의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가족들이 찾지 않았느냐고요? 천만에요. 잘 나가는 화가였을 때는 떠받들던 가족들도 재산을 다 잃으니 그를 찾을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걸인이 된 채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도 우리 화백님께서는 붓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조금씩 그림을 그리셨죠. 강 근처 도시에서 걸식하셨으면 강으로 가서 한 줄기 그려 넣으시고, 산 근처 도시에서 주무셨으면 산 하나를 그려 넣으셨습니다.”


경매사는 풍수 화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을 오락처럼 만들기 위해 기묘한 열기를 띠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의 화법은 유려했다. 사람들은 풍수 화백의 불운한 인생 굴곡을 절절히 느끼면서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유백에서의 경(景)’은 풍수 화백님의 삶이 전부 녹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랑 생활 막바지에 그리셨던 그림인데 어때요? 삶의 애환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주 예민하신 분들은 시원시원하게 그어진 선들 사이에서 고통을 느끼시기도 하죠. 풍수 화백님은 이 그림을 남기시고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나이 지천명일 때였습니다. 그분의 사후에 남겨진 그림은 유명해졌고 얼마 전 옥션에서 그분의 다른 그림이 3억7천만 원에 팔리기도 했죠.”


클라이막스. 사람들은 풍수 화백의 삶이, 그의 그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주관적 지표와 객관적 지표로 내면화했고 기꺼이 그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잠시 흥분을 숙성한 뒤 본게임에 들어가는 것.


경매사 사이먼은 풍수 화백의 굴곡진 삶을 애도하듯 잠시 눈을 감고 침묵한 뒤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그가 가장 잘 하는 문장을 읊었다.


-“풍수 화백님의 그림입니다. ‘유백에서의 경(景)’, 최초 경매가 8천만 원부터 시작합니다.”


경매사가 노련한 입담으로 진행하는 경매는 일종의 공연 같기도 했다. 그림에 관한 설명, 화가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는 사람을 빨려들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이야기의 순서와 어조, 사용한 단어에도 그의 의도가 녹아있었다. 치밀한 화법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둘 홀린 듯 패널을 들어 올려 입찰했다.


-“8천만원! 8천5백만원! 9천만원 나왔습니다!”


***


동훈은 옆자리 사람들이 속닥이는 소리를 들었다. 저 그림을 살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가 더 잘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동훈의 옆에는 남녀가 같이 앉아있었는데 커플로 보이지는 않았다. 중년 여인과 젊은 남자는 남녀 사이에서 보일 법한 감정 없이 친밀함만 엿보이니 둘의 관계는 가족으로 보였다.


젊은 남자가 중년 여인에게 물었다.


“죽기 전에 그린 그림이면 희소성이 대단한 거 아닌가요? 왜 8천만원부터 시작이에요? 다른 그림은 3억이 넘었다면서.”


“3억이 넘은 그림은 빚이 생기고 파산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이에요. 화백님이 직접 파신 그림인데다 옥션에서 공식적으로 경매를 진행했죠.”


“그럼 이 그림은요?”


“5선 국회의원 하나가 탈세하고 부정축재로 걸렸던 거 기억해요? 사민당에. 그 국회의원 창고에서 나왔던 물건인데 수사 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거예요. 근데 여기 있네요.”


“아하, 드러내놓고 못 파는 장물이라는 거죠?”


“그렇죠. 여기서 사면 개인 소장이나 할 수 있겠죠. 장물 처분을 따로 하는 게 아니라면.”


동훈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동훈이 자신들끼리 아주 작게 속삭이는 말을 엿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저 동훈의 고개 끄덕임은 경매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만 보였다.


그림 하나에도 이처럼 많은 이야기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부자들의 유희라고 여겼던 예술은 한편의 인생 드라마를 한 폭의 그림으로 옮겨놓은 것과 같았다.


아직도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예술이라는 게 뭔지, 어느 부분에서 재미를 느끼는 건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


이현은 경매사의 입담에 빠져들어 경매를 구경하다가 하마터면 입찰하려 패널을 들뻔했다.


이현은 역시 홀린 듯 단상을 보고 있는 동훈을 향해 물었다. 이현 자신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데려와 준 극동건설 사장님께 안마라도 해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어떤가요? 제 이번 은혜 갚기는 썩 나쁘지 않죠?”


이런 비밀 경매가 있다니. 동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


지하는 위층만큼 세련되진 않았다. 형태가 반구의 돔 형태를 하고 있는 만큼 비밀 기지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곳곳에 놓인 오브젝트나 심지어 플라스틱으로 된 이 의자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났다. 나은이 있었으면 이 의자는 어느 브랜드에서 어느 디자이너가 제작한 거라고 알려줬겠지.


동훈은 이 공간을 위해 승화 갤러리가 들였을 재화에 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업을 위해 돈 깨나 들였겠는걸.


동훈이 나은에게 승화 갤러리의 위상에 대해 익히 들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모든 갤러리가 이런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착각할만했다.


“신기하군요. 제가 전시 관람 경험이 적어서 하마터면 모든 전시에 이런 비밀 경매가 있는 줄 알뻔했어요. 덕분에 이런 곳도 와보고 좋네요.”


동훈의 너스레에 이현이 살풋 웃었다.


***


한편 갤러리 지상.


동훈이 사라지고 나은은 이상한 촉이 발동했다.


얘, 어디 간 거야? 여자를 만나러 간다는 동훈이 대체 누굴 만나나 궁금해서 갤러리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도중에 일이 대충 마무리된 희연도 합류하여 동훈 찾기에 열을 올렸지만 동훈의 행방은 오리무중. 초대 작가의 권한까지 이용해서 스태프만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여러 번 돌았는데 동훈의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 나은은 묘한 오기가 생겼다.


얘는 여자 만나는데 어디에 숨어서 만나는 거야? 얼굴 보여주기가 그렇게 어려워? 여자는 여자가 봐야 잘 보는데.


출입을 관리하는 스태프에게 물어봐도 벌써 나간 VIP는 없다고 하니 나은은 동훈이 아직 갤러리 안에 있다고 확신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번 둘러봐서 발견하지 못했으면 꼭꼭 잘 숨었네, 하고 넘어갈 법도 한데 나은은 포기할 수 없었다. 옛날부터 승부욕이 예사롭지 않던 나은이었기에 못 찾으면 못 찾을수록 찾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어쩌면, 초능력으로도 값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동훈을 향한 호기심이 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외의 복잡한 감정이 숨어있는지는 몰라도 나은이 인정하지 않는 감정들은 다 없는 것이겠지.


“여긴 어디지? 어! 엘리베이터!”


나은의 집념은 결실을 보았다.


끝내 어딘지 수상쩍은 엘리베이터까지 발견하고 말았으니.


“나, 나은아. 거기는 못 가는 곳이야.”


창고와 스태프 휴게실 사이에 있는 작은 방에는 어디론가 향하는 수상쩍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스태프들도 지나치기 쉬운 작은 방을 집요한 나은은 발견하고야 말았다.


나은은 희연 몰래 엘리베이터의 냄새를 맡았다.


‘음, 낮게 잡아도 억 단위. 비싼 엘리베이터네. 허투루 만들어놓은 것 같진 않고. 보통 엘리베이터 설치 비용보다 많이 비싸네. 뭐가 비싼 거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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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지저족 +1 24.04.16 20 2 14쪽
120 옳은 쪽에 서라. 천문을 짚고, 지문을 훑어라. +1 24.03.18 24 2 15쪽
119 위대한 탐험가 벨로페스트 +1 24.02.14 26 2 12쪽
118 용병대의 의뢰 +1 23.09.03 37 2 14쪽
117 잔비어 요새의 풍운 +1 23.06.24 58 2 20쪽
116 왕의 축복과 장군 자넷싱 23.06.18 58 2 19쪽
115 잔비어 요새 +1 23.06.16 66 3 19쪽
114 비밀 경매(4) +1 23.05.20 65 2 28쪽
113 비밀 경매(3) 23.05.13 65 2 15쪽
112 비밀 경매(2) 23.05.07 85 2 20쪽
» 비밀 경매 23.05.05 91 2 23쪽
110 갤러리의 비밀 모임(2) 23.04.28 94 2 16쪽
109 갤러리의 비밀 모임 23.04.20 134 2 22쪽
108 나은과 희연 23.04.18 111 2 19쪽
107 승화 갤러리 23.04.13 115 2 14쪽
106 그린드래곤 갈라그루드(2) +1 23.04.08 115 2 22쪽
105 그린드래곤 갈라그루드 +1 23.04.04 122 3 20쪽
104 용종(龍種) 몬스터(2) +1 23.03.30 117 3 14쪽
103 용종(龍種) 몬스터 23.03.25 129 3 20쪽
102 전쟁무새 23.03.22 128 3 19쪽
101 무기 강화 23.03.19 135 3 13쪽
100 기사 라피드 23.03.12 162 3 15쪽
99 약탈 허가증서 23.03.11 143 3 15쪽
98 반왕의 영지 23.03.09 160 3 13쪽
97 중앙지대와 여기사 23.03.05 149 3 20쪽
96 전(前) 군주 형님 23.03.04 159 2 14쪽
95 세원휴먼테크 23.02.26 172 2 16쪽
94 다른 돈벌이 23.02.22 172 1 18쪽
93 보스 컷! +1 23.02.12 216 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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