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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연재수 :
122 회
조회수 :
53,807
추천수 :
1,137
글자수 :
928,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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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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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중앙지대와 여기사

DUMMY

[낭만혈기사] lv.91


동훈의 눈에만 보이는, 최 사장 머리통 옆에 떠오른 네임텍.


그가 키웠던 군주 캐릭터의 닉네임과 레벨이 맞았다.


남의 아이디를 사서 키웠던 건 아니네. 그의 본계정으로 키웠던 캐릭터였으니 이렇게 집착하는 것 아니겠나.

물론 더 벨룸이라는 게임에서 혈맹에 들어가는 돈, 계정에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그걸 망쳐놓은 동훈을 원수 잡듯이 사람 써 돈 써 해가며 찾아내는 게 이상한 일은 또 아니었다.


더 벨룸에 한두푼이 들어가야 말이지.


최 사장은 동훈이 더 벨룸 커뮤니티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잠적한 뒤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최 사장의 단톡 내용이 필터링 없이 고대로 커뮤니티를 떠돌기 시작하니 동맹혈들은 난리가 났고 울트란 서버는 라인 혈맹의 구설수에 입을 모아 씹어댔다.

당연히 혈맹끼리의 동맹은 파탄이 났고 서버의 패권을 쥐기 위해 숨어있던 반대 세력이 들끓고 어제의 동맹이던 이들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


현재 울트란 서버는 지배자 없는 무주공산의 상태.


어제까지만 해도 최 사장은 동맹 혈과 전쟁을 벌이고 왔다.


과거 혈맹이 누렸던 서버에서의 영광과 위세는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라인 혈맹의 군주로서 위풍당당하게 더 벨룸을 누볐던 최 사장은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울트란 서버에서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혈맹의 몰락은 동훈의 부재 역시 컸다.

혈맹의 창설 이후 살림이며 잡일은 동훈이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사라지니 일을 할 중추, 간부와 일반 혈원들 사이의 윤활제마저 없어 혈맹은 영 삐거덕거리기만 했다.


“그 짓거리를 해놓고 평생 나 안 볼 줄 알았지? 혈맹에 똥을 뿌려놓고 말이야. 그랬겠지. 그러니까 그딴 짓 하고 잠수 탄 거 아니냐.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너랑 친하다던 간부새끼들이 네놈 번호 하나 모르고. 내가 배신자를 가만 둘 줄 알았냐? 나 문월동 최사장이야. 너 같은 놈 찾는 건 일도 아니야.”


문월동 최 사장.

인천 동부 외곽에 위치한 문월동은 인천 재개발 시기에 소외된 치안의 사각지대였다. 허름한 집과 건물이 많은 문월동은 인천의 높아지는 월세에 밀려난 하층민과 질 안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각종 범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했다.


최 사장은 그런 가운데 치열하게 살아남은 이였다. 문월동에서 작은 사무실도 내고 좁은 골목의 상권이지만 보호비도 받고 말이다.

그런 최 사장이 배신자를 얼마나 많이 만나봤겠나. 거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의리를 외쳐대는 건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최 사장은 자신이 한국 땅에 숨은 사람을 꽤 잘 찾는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일례로 그의 돈을 갖고 튄 꼬붕 하나를 경남 태안까지 가서 잡아온 일은 그가 아직도 자랑하는 일이었다.


동훈은 그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


최 사장은 저 비리비리해 보이는 동훈이 감히 제 발로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 한심했다. 대가리가 돌아버렸나? 저 믿을 것 없어 보이는 몸뚱이를 이끌고 죽을 자리를 찾아오다니.

자신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 어렴풋이 알았을 텐데도.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이라면 정치겜이라고도 불리는 더 벨룸을 그리 오래 했을 리도 없다.


“하긴, 그래. 직장까지 알아내서 괴롭힌다는데 안 나오고 배기겠어? 뒤질 자린 거 알고도 나올 수밖에.”


“직장은 어떻게 알아내실 생각이셨습니까?”


“나랑 장난 까냐? 됐다. 정말 무서워서 머리가 돌아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넌. 손해배상은 배상이고, 넌 일단 내 기분 좀 풀리게 맞아야겠다. 얘들아, 잡아라.”


“예, 사장님.”


줄곧 최 사장 곁에서 양아치처럼 서 있던 최 사장의 직원들이 동훈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움직였다.


동훈을 무릎 꿇리기 위해 가장 먼저 다가온 남자는 팔을 뻗어 동훈의 어깨를 잡아채려 했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어깨를 잡은 뒤 무릎 뒤를 차면 사람은 자연히 무릎을 꿇게 되니까.


하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더듬었는데 동훈이 그 손을 붙잡고 확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무슨 힘이,’


거기까지가 남자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사람이 아닌 곰에게 잡힌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남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쾅!


동훈의 엎어치기에는 정성이 있었다. 사람을 중력에 힘입어 내던지는 게 아니라 잡은 팔과 가슴 옷깃을 꽉 잡아 바닥으로 힘줘 메다꽂기에 보통의 엎어치기가 아닌 것이다.


“이쉐끼가!”

“니, 니 좀 치나!”


동훈의 돌발 행동에 직원들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몸무게도 적게 나가 보이고 잘 쳐줘도 체조나 했을 법한 동훈의 체구에서 폭발적인 힘이 튀어나오자 당황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동훈이 사람을 메쳐버릴 힘을 가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 새끼 꼴에 유도 배웠나 보다! 옷깃들 조심하고 잡히지만 않게 해! 가서 때리라고!”


최 사장은 노련하게 동훈의 움직임을 보고는 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물론 최 사장 역시 속으로는 당황한 상태였다.


직원들은 동훈과 거리를 벌리며 쉽게 소매를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동훈은 아무렴 어때, 상태였다. 동훈은 유도를 배운 적도, 유도로 이들을 상대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직원 중 타격에 능한, 복싱을 6개월 정도 배웠다는 젊은이 하나가 주먹을 쥐고 엉거주춤한 복싱 자세를 취한 채 슬금슬금 다가왔다. 옆에 있던 고참 직원에게 등 떠밀린 듯했다.


“개새끼야, 죽어!”


슉!


동훈은 젊은 직원이 어설프게 휘두른 주먹을 어깨로 넘긴 뒤 무방비하게 열린 젊은 직원의 턱과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퍽! 퍼퍽!


물론 힘 조절은 한 상태였다. 힘껏 때렸다가는 이 자리에서 줄초상이 나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


그 뒤로는 일방적인 폭력 사태였다.


양아치스러운 직원들은 동훈을 향해 발악했지만 동훈에게 닿는 공격은 하나도 없었다. 동훈은 모든 주먹과 발차기를 유려하게 피하며 직원들을 향해 참교육의 펀치를 선사해줬다.


직원이 오른팔로 주먹을 내뻗으면 동훈은 이미 그 공격을 알고 있다는 듯 회피했다. 위빙으로 흘리고 미리 고개를 틀어 피하면 직원은 알아서 동훈이 주먹을 뻗어놓은 곳에 급소를 가져다 댔다.

전투 모드에 들어선 동훈은 전투에 있어서는 예언자를 방불케 했다.


“억!”

“악! 이 새끼,”

“끄아악!”


싸움은 악과 깡이라고 생각하는 건달들이 더한 악과 깡을 가진 동훈에게 깨져나갔다. 무식한 힘과 지구력, 내구성은 마치 동훈을 전차처럼 만들었다. 한낱 피륙으로 이루어진 깡패들은 동훈의 전진에 무참히 갈려나갔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는 다른 직원들의 얼굴은 점점 탈색되어갔다.


저런 괴물이라니.


몇 사람이 달려드는데도 저자는 지친 기색도 없이 직원들을 차근차근 쓰러뜨리고 있었다. 폐건물에서 홀로 분투하는 동훈의 모습은 현실적이지가 않았다.


“사, 사장님. 이 새끼 좀 치는데요?”


최 사장의 직원들은 날렵한 동훈의 움직임에 겁을 먹고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동훈의 주변으로 무형의 막이라도 생긴 것처럼 동훈이 앞으로 나서면 물러서고, 옆으로 움직이면 옆으로 우루루 물러서 공동을 만들었다.


그건 동훈을 포위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동훈을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동으로 보였다.


최 사장은 답답한 심경을 담아 살찐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소리쳤다.


“새끼들, 쪽수로 밀어붙이면 되잖아! 한꺼번에 달려들어!”


한참 눈치를 보던 건달 직원들은 역시 짬이 낮은 순서로 순차적으로 달려들었다. 대신 이번에는 고참들도 반템포쯤 늦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는 점이 달랐다.


“이 씹새야! 뒤져!”

“어억!”


하지만 그런 모든 시도는 동훈의 힘 앞에서 무산으로 돌아갔다.


젊은 놈들이 앞서서 동훈의 시선을 끌고 동훈을 공격하려 했지만 동훈은 가벼운 것은 맞고 힘껏 치는 놈은 반격해서 쓰러뜨렸다.

뒤에 오는 노련한 놈들은 앞에 있는 젊은 놈들을 방패 삼고 괜히 페인트를 주며 오타격을 유도했고 겁먹은 건달 직원들은 속수무책으로 그에 속았다.


퍽 퍼벅!

털썩, 털썩!


또다시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최 사장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최 사장은 다급하게 명령했다.


“연장 꺼내! 연장 있는 놈들 꺼내! 조져! 내가 책임진다!”


챙!


최 사장의 호언장담에 직원들은 안주머니에 있는 맥가이버 나이프며 금속 너클 같은 것을 꺼냈다.

금속으로 된 날붙이들은 작은 빛도 반사해서 서슬 퍼렇게 번득였다. 날붙이를 든 직원들은 그것이 주는 묵직함에 자신감을 찾았다.


그래, 사람이 뱃가죽 뚫리고도 멀쩡하겠어? 그러면 괴물이지 사람이야?


“이야아아아!”

“전부 달려들어! 저 새끼도 사람이야!”

“죽어! 제발!”


최 사장네 직원들은 어쩌면 마음속 바람을 말하며 달려들었다. 그들은 어찌 보면 불을 향해 달려가는 부나방 같았다.


쓕! 휙, 슉! 휙!


날붙이가 무서운가?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날붙이가?


동훈은 고개를 저었다. 동훈을 둘러싼 초자연적인 AC는 아마 물리법칙을 비틀어서라도 동훈의 목숨을 구할 터였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장르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저들이 저예산 액션 느와르라면 동훈은 판타지 액션이다. 현실을 넘어서는 초현실 앞에 저들이 뭐라고 대항하겠는가.


‘억울하면 나처럼 더 벨룸에서 구르던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말이야.’


동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털었다.


그 많던 최 사장네 직원들이 모두 먼지투성이 폐건물의 2층 바닥에 드러눕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차 한 잔도 마시지 못할 시간이었다.


동훈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최 사장을 향해 물었다.


“뭐, 더 준비한 거 있으세요? 이게 다예요?”


이건, 꿈인가?


최 사장은 당장이라도 눈을 비비고 스스로의 뺨을 때려보고 싶었다.

오늘 자신의 직원을 데리고 서울까지 오면서 열 명은 너무 많나? 별것도 없는 일반인 겁주러 가면서 이렇게 많이 데려가는 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생각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직원들을 데리고 봉고에 실어 서울까지 나르면서 너무 화에 못 이겨 많은 수를 데려온 게 아닌가 싶었는데 옆 사무실에서라도 사람을 빌려 와야 했을 수준이라니.


최 사장이 동훈에 대해 뒷조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못 찾아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동훈이 정말 유명한 운동선수라면, 직원 열을 다 때려눕힐 정도로 대단한 놈이라면 어디에서 이름 좀 날렸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다면 조사 도중 최 사장이 그걸 못 알아낼 리 없었을 텐데.


“너, 너 뭐야. 너 누구야. 너 선출이냐? 아니지. 선출도 너처럼 싸우진 못하겠다. 월드 챔피언도 말이야. 씨발, 너 뭐냐?”


최 사장은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체급.


기껏해야 70키로도 나가지 않을 것 같은 동훈에 비해 자신은 100키로가 넘어가는 거구 아니던가.

아무리 훈련된 운동선수라도 체급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체급에서 오는 압박감과 맷집의 차이, 펀치의 파괴력은 물리법칙 그 자체였으니.


직원 열을 때려눕히면서 저놈이 또 얼마나 힘을 많이 썼겠나. 아닌 척하고 있지만 지쳤을 게 뻔했다.


최 사장은 마치 최종 보스처럼, 육중한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 동훈을 덮쳤다.


퍽! 퍼벅! 퍽! 퍽!


동훈은 떡이 되어 먼지 바닥에 드러누워있는 최 사장과 그의 직원들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이걸 다 어쩐다.”


때려눕히는 거야 일도 아니었는데 치우는 게 막막하네.


***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와 황금빛 밀의 물결. 규격화된 농토와 수확하는 사람들. 막 아침의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고즈넉한 기분이 들었다.


잘 포장된 길은 마차가 다니기에 충분했고 핏줄처럼 뻗어나간 도로는 드넓은 대륙 곳곳으로 퍼져 있어 물류 운송이 숨처럼 이루어지니,


여러모로 전쟁하기 좋은 땅이었다.


컹컹!


키야오오옹!


반다르의 사냥개와 니아 아가씨가 앙숙처럼 다투고 그 앞으로 일행이 걸었다.


일종의 포로인 기사의 시종 둘은 가운데에 끼어서 어른들의 걸음에 맞춰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 주변으로 동훈과 반다르, 애스톨이 시선을 먼 곳에 두고 일행을 이끌었다.


동물 두 마리와 애송이 둘, 젊은 남성 둘과 중년 남성 하나.


이상할 것도 없는 일행이었다. 이들 모두가 무장하고 있다는 것 역시 중앙지대에서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


“말들을 데려올 걸 그랬어요. 다음 도시에 훨씬 일찍 도착했을 텐데. 아리따운 아가씨도, 노래하는 악사도 없는 여정은 고달프군요.”


“어차피 말들은 연이은 전투에 모두 죽었을 거야. 폴트란에서 처분한 게 현명한 선택이었지. 말은 다음에 묵을 마을에서 구해보자고.”


“이 방향으로 반나절 정도만 더 걸으면 ‘사과가 맛있게 익는’ 마을이 나와요.”


애스톨과 반다르의 만담에 포로인 종자, 엔솔이 길잡이를 자처하며 방향을 짚었다. 동북쪽으로 향하는 일행의 여정에는 방만한 여유가 있었다.

아직은 대륙의 중앙보다 남부 변방에 더 가까운 지역. 진정한 복된 땅에 이르기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반왕의 요새 중 최남단에 있는 요새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이곳에는 도적이나 가끔 돌아다니지 제대로 된 세력이랄 게 많지 않았다.


중천에 떴던 해가 뉘엿뉘엿 져 갈 만큼 한참을 걷는 동안, 동훈 일행은 여행객 몇과 작은 상단만 만났을 뿐 사람과 마주치지 못했다.


“평화롭군요. 곡식이 익어가는 시기라 그런가요? 추수에 여념 없을 시기긴 하죠.”


“중앙지대라고 모든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진 않네. 전쟁이란 시기를 타는 괴물이고 많은 것을 잡아먹기에 그 많은 것을 비축할 시간 역시 필요하지.”


중앙지대, 진정한 전쟁의 땅에 이르렀다고 바로 눈앞에 전쟁의 전경이 펼쳐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변방에 비해 비옥한 토지, 더 많은 사람과 많은 자원이 펼쳐져 있을 뿐.


땅과 자원은 잘못이 없었다. 그것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지.


“해가 져요. 지금쯤이면 ‘사과가 맛있게 익는’ 마을이 보일 텐데. 저기 보여요!”


여기, 욕심이 화를 부른 일례가 피를 보고 있었다.


동훈 일행이 거의 도착한 ‘사과가 맛있게 익는’ 마을인 애플 타운.


한 무리의 도적들이 말을 타고 무기를 휘두르며 마을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야성적이고 잔인한 피비린내가 났다.

전원이 가죽갑옷과 천갑옷으로 무장한 도적떼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을을 향해 경쟁적으로 달렸다.


그중 가장 혈색 좋은 말을 타고 최선두에서 달리던 기골 장대한 두목이 칼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범해라! 오늘 밤 축제를 열자!”


그에 호응하는 도적들의 환호에는 달뜬 숨이 섞여 있었다. 추잡하고 끈적한 숨에는 이들이 저지른 악업이 진하게 묻어났다.


“이-히! 다 죽여! 오늘 밤 회포를 풀자!”

“대장이 허락하셨다! 죽이고 털자! 죽여, 죽여!”


잔인한 환호를 터뜨리는 도적떼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마을의 자경대원이었다.

사과 장수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처럼 사과 파는 일을 하고 싶지도 않고, 놈팡이처럼 마을에서 퍼질러있자니 눈치가 보여 자경단원이 된 이였다. 직업에 대한 숭고한 책임감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십수명에 이르는 도적떼의 등장에 비명을 지르며 마을 경종을 울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땡땡땡땡!


“도적이다! 도적떼가 나타났다!”


퓩!


“아악!”


그런 그의 노력에도 그는 도적떼에 의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한 마을 주민이 되었다. 마을 가장 외곽에서 파수를 보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죽임 당한 자경단원의 마지막 발악이 헛되진 않았으니 마을 사람들은 적어도 도적떼가 습격한다는 사실을 몇 분은 더 빠르게 알고 죽게 된 것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도적떼가 사람들을 살육할 때에야 도적의 습격을 알아차렸을 테니.


무장한 도적떼가 마을로 들어와 양떼를 도륙하듯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건 최초의 자경단원이 죽고 고작 수 분이 흐르고 나서였다.


도적떼의 말들은 무자비하게 발걸음을 내달렸고 무정하게도 그들의 발굽은 마을의 땅을 밟았다.


“죽여라! 무기도 들 줄 모르는 겁쟁이들이다! 여긴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와! 죽여! 목을 매달아!”

“어딜 감히 농기구를 들이대! 죽어!”


마을을 지키는 자경대의 조잡한 무기로는 말과 갑옷으로 무장한 도적들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끝이 철로 만들어진 농기구를 들고 마을 장정 몇이 저항했지만 몇 합을 부딪히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칼과 죽음을 밥 먹듯이 겪어온 도적들에게 마을 주민들은 무른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하물며 수도 많고 조직력도 월등함에야.


“아, 아악!”

“전능하신 신이시여, 제발 저희를 구원하소서,”

“도망쳐! 다 죽을 거야! 도망가라고! 으아아악!”


수십에 이르는 마을 주민들은 세렝게티의 가젤처럼, 숲속의 사슴처럼 달아나려 했지만 말을 탄 도적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동훈 일행이 ‘사과가 맛있게 익는’ 마을에 당도한 것은 해 질 녘의 학살이 막 진행될 때였다.


반다르가 코를 찡긋거리며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피비린내가 나는군. 마을 방향이야.”

“이런 변방까지 약탈이 일어나던가요? 도적들은 뭐 먹을 게 있다고 이런 곳까지 내려왔을까요?”

“탈영병일지도 모르고, 자리를 옮겨 다니는 도적일지도 모르지. 그들의 이동 경로에 불운한 마을이 있었을 뿐일 거야.”


일행은 걸음을 더 재촉해서 마을로 향했다.

작은 마을에는 회색 연기가 봉화처럼 피어올랐고 시끄러운 고함과 비명, 금속성과 불타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동훈 일행이 쉬어가려던 마을은 습격당하고 있었다.


원래 이야기 속이라면 간악한 도적들 앞에 평민들을 지키는 멋진 기사님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 떠돌이 기사가.

그 기사는 실력도 강해서 도적들을 모두 무찌르고 보답하겠다는 마을 사람들의 손길마저 뿌리친 뒤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가겠지.


마을 사람들은 그런 정의로운 기사를 칭송하고....


현실에 그런 낭만에 찬 방랑 기사 따위는 없다. 언제나 힘없고 나약한 평민들은 이렇듯 쉽게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구전되는 건 사실 평민들의 바람, 혹여 그런 일이 있었다면 대단히 드문 일이니 그걸 기리기 위함이 컸기 때문이다.


반다르는 그를 잘 알았다.


저들에게 다행인 것은 그런 정의로운 기사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디오르.


가여운 이들을 그냥 보내지 않고 그들을 도우며 안개의 도시 폴트란까지 구한 영웅. 전설적인 용력의 기사.


반다르가 명령을 기다리는 눈으로 디오르를 바라보자,


디오르는 마치 마을의 끔찍한 광경을 감상하듯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도적들이 마을을 도륙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걸세. 무슨 문제가 있나?”


“잠시 기다리죠. 아직 한 분이 등장하지 않은 것 같으니.”


동훈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반다르와 일행들.


때마침, 동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을 안쪽에서 누군가 등장했다. 버럭 큰 소리가 들리고 무기가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니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도적과 칼을 맞댈 만큼 용맹하고 실력도 뒤떨어지지 않는 이였다.


동훈 일행의 시야에 들어온 실력 있는 이는,


은색의 체인메일을 두른 금발의 여기사였다.


도적떼를 가로막은 기사는 노을을 반사하는 은색 장검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고함쳤다. 그녀야말로 죄 없는 양민을 돕는 이야기 속 신실하고 정의로운 기사 그 자체였다.


“당장 멈춰라, 무도한 야적들아! 죄 없는 양민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다니, 신께 부끄럽지도 않더냐!”


동훈은 저 여기사를 알았다.


중앙지대에 들어가면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이벤트.


중앙지대가 얼마나 잔혹하며 무정한 곳인지를 목도하게 하는 이벤트였다.


잔인한 도적떼들은 저 여기사를 죽이고 마을 사람들을 다시 학살하기 시작한다.


플레이어는 그 광경을 시네마틱으로 보고 중앙지대가 얼마나 혼란한 곳인지, 얼마나 전쟁으로 황폐한 곳인지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저 여기사는 이벤트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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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승화 갤러리 23.04.13 115 2 14쪽
106 그린드래곤 갈라그루드(2) +1 23.04.08 115 2 22쪽
105 그린드래곤 갈라그루드 +1 23.04.04 122 3 20쪽
104 용종(龍種) 몬스터(2) +1 23.03.30 117 3 14쪽
103 용종(龍種) 몬스터 23.03.25 129 3 20쪽
102 전쟁무새 23.03.22 128 3 19쪽
101 무기 강화 23.03.19 135 3 13쪽
100 기사 라피드 23.03.12 162 3 15쪽
99 약탈 허가증서 23.03.11 143 3 15쪽
98 반왕의 영지 23.03.09 160 3 13쪽
» 중앙지대와 여기사 23.03.05 149 3 20쪽
96 전(前) 군주 형님 23.03.04 159 2 14쪽
95 세원휴먼테크 23.02.26 172 2 16쪽
94 다른 돈벌이 23.02.22 172 1 18쪽
93 보스 컷! +1 23.02.12 216 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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