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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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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연재수 :
1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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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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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갤러리의 비밀 모임

DUMMY

***


“동훈 씨.”


“이현 씨.”


2층 비상구 앞에서 기다린다고 했던 이현은 정직하게도 비상구 문 바로 앞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동훈을 먼저 발견한 이현이 동훈을 부르자 동훈은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더니 마주 손을 흔드는 이현의 표정은 쑥스러운 듯했다. 남이 보기에는 얼굴을 굳히고 로봇처럼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런 이현을 보며 동훈은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꼭 사회성 부족한 아이가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랄까.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뇨, 23분 정도 기다렸어요.”


“어이쿠, 많이 기다리셨네. 제가 친구하고 같이 들어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래도 몇 번 봤다고 조금은 편해진 동훈이 이현과 말 몇 마디를 나누며 이현의 인도에 따라 약속된 곳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이현의 비서가 이현에게로 후다닥 달려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전에 봤던 비서가 없고 직접 데리러 왔나 싶었더니 안 데리고 왔나, 했는데 모종의 방법으로 떼어놓은 듯했다.


“아가씨! 손님은 역시 제가 모셔와도 됐는데요.”


“내 손님인걸.”


“아가씨의 손님은 제 손님이기도 합니다.”


“아냐. 내 손님이야.”


이현은 여전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비서는 이현의 고집에 두손두발을 다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가 그러면 어디로 가시는지는 알려주고 가시라고 사정을 한 끝에 이현이 동의했고, 이현이 비서의 항복을 받아내는 동안 동훈은 그 옆에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웬 노인이 이현과 비서의 말씨름이 끝나니 그림을 보던 몸을 슬며시 돌려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바로 뒤 그림 앞에 있었는데도 동훈은 두 사람이 입씨름을 하는 바람에 그의 존재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바로 동훈과 약속된 교수였는데 노인의 연륜 덕인지 그는 어색한 상황이 끝나고서야 스윽 등장한 것이다.


“교수님, 이쪽은 동훈 씨에요. 동훈 씨, 이쪽은 김태환 교수님입니다.”


이현의 소개가 이렇게 끝날 것 같자 입이 근질거리는 이현의 비서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김태환 교수님은 경영학 경제학의 대가십니다. 집필하신 ‘경제 길라잡이’, ‘학문으로서의 경영’, ‘경영학원론’은 각 1백만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특히 교수님의 ‘경영학원론’은 대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교재 중 하나입니다. 젊으셨을 때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학에서 교수를 지내셨고 귀국 후 한국 송정 대학교 경영학과 명예 교수직을 맡으셨습니다. 현재는 미래조선에서 자문위원을 해주고 계시고요.”


비서의 이력 줄줄 읊기는 감탄이 나올 정도의 수준이었다. 어떻게 외웠지, 라는 의문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막힘 없이 파바박 줄을 잇는 이력 행진은 비서로서는 만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말이 조금 많아서 문제지.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학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송정 대학교는 알았다. 송정 대학교는 한국의 대학을 꼽을 때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는 명문이었다.

과연 김태환 교수에게서는 평생을 학문에 바친 사람이 가질 법한 온유하고 깊은 기질이 드러났다.


동훈은 노학자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손동훈이라고 합니다.”


노학자는 이현의 비서가 이력을 읊을 때부터 멋쩍은 웃음을 허허롭게 띠고 있었다. 이런 칭찬에 익숙하지만 그것을 즐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김태환 교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동훈의 손을 잡고 흔들며 대답했다.


“은퇴한 늙은이 얼굴에 금칠하십니까. 김태환입니다.”


동훈의 시선은 노학자의 얼굴 근처를 떠돌다 그보다 살짝 옆으로 향했다. 타인이 보면 꼭 노학자 옆에 있는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 처리였다.


동훈의 눈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짤막한 문구가 나왔다.


[방랑여행객] lv.68


고상하게 생긴 노교수도 게임을 할 수 있지. 아이디만 보면 중립으로 라인 생활은 안 하신 것 같기도 하고.


우선 노교수가 게임을 즐겼던 시기를 몰랐다. 시기를 알아야 68레벨이라는 레벨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알겠는데.

이를테면 게임의 초창기, 더 벨룸1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68레벨이면 거의 최상위권을 논할 수준이었다. 흔히 말하는 랭킹 1위도 노려볼 법한 레벨이지.

하지만 동훈이 하던 시절, 더 벨룸2 때는 높긴 하지만 랭킹권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라인의 레벨 높은 간부 수준은 됐지.

요즘에는? 68레벨이면 어디 가서 가슴 펴고 다니지도 못했다. 혈맹에서 그리 레벨 높은 편에 속하지 못하던 동훈도 71레벨이지 않던가.


‘옛날 본캐를 내가 계속 키웠으면 80은 넘었으려나? 어쩌면 90을 바라봤을지도. 에라, 급전 필요해서 팔아버린 계정 생각해서 뭐해. 그리고 지금 하지도 않는 게임을.’


동훈은 미련을 지워버렸다. 지나간 일을 되새겨서 뭐하나. 그때 처분한 돈으로 급한 일을 처리했었으니 속 쓰릴 일도 아니었다.


“이제 은퇴하고 공부나 하는 늙은이를 창창한 젊은 사람들이 무슨 일로?”


동훈은 상념에 잠겨 있고 이현은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결국 다시 입을 여는 건 김태환 교수였다.


연장자로서 먼저 입을 여는 일은 피하고 싶었지만 이현은 미래조선의 따님이고 동훈이라는 남자는 그런 여인이 데려온 손님이니 김태환 교수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격으로 용건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김 교수의 물음에 이현은 동훈을 물끄러미 쳐다봤고 상념에서 빠져나온 동훈이 대답했다.


“공부가 모자라서 지혜를 좀 빌리러 왔습니다. 금융 시장과 상품에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게 많아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호, 그래요.”


학자풍의 노교수는 온화한 인상답게 주름 역시 입 주변과 눈가에 웃는 듯 졌다. 이미 다니던 대학에서도 은퇴했고 바깥 활동도 자제하고 있지만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건 여전했다. 그는 배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이는 김 교수의 특별한 신념이기도 했다.


공부가 깊은 교수, 그러면서 동훈과 같은 게임을 즐겼던 동지. 동훈은 김태환 교수에게 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그가 이름난 교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말씀 낮춰주세요. 제 연배가 한참 아래인 걸요. 말씀 올리시면 오히려 제가 불편합니다. 학생이다, 생각하고 대해주세요.”


말을 낮추라고 말하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냥 막무가내로 낮추라고 하면 상대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


동훈의 말솜씨는 유려해서 은근한 어조와 상대를 기분 좋게 추켜세우는 여러 제스쳐로 분위기를 푸는 한편 노교수의 경계심을 낮췄다.


물론 노교수도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동훈의 사근사근한 거리 좁히기를 알아보았지만 수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둘의 나이 차이가 아버지와 자식뻘은 되기에 노교수는 너그럽게 그를 받아들였다.


“오늘 난 여기 강의하러 온 건 아니고, 그냥 수다 떨러 왔다 생각하고 왔어요. 그러니까 궁금한 거 물어보고 가볍게 내가 아는 건 얘기해주고, 모르는 건 같이 얘기해보는 시간을 갖자고.”


동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면, 가장 궁금한 게 뭔가? 이 늙은이를 찾아온 이유 말이야.”


“교수님 전공이 경영학과 경제학이시니 이런 얘기를 많이 들으실 거 같아 여쭙기 쑥스럽긴 한데,”


“나한테 많이 물어보는 것들은 다 돈 문제지. 돈 벌고 싶네, 어떻게 쉽게 버느냐, 뭐 그런 거 말이야. 자네도 그게 궁금한가?”


“예, 교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때 동훈은 살짝 긴장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이런 세속적인 질문을 많이 받기 마련이었다. 그 학계에 무지한 일반인들이 흔히 하는 질문들. 그 학문이 돈이 되느냐 같은 질문, 학문의 효용에 관한 얄팍한 질문은 문외한이 하기 쉬운 질문들이었다.


그런 질문들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전문가들도 종종 있었다. 그것을 무례하다고 받아들이는 이들도 존재했다.


노교수의 전공상 그런 질문을 더욱 많이 받았을 거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했다.


지금은 이현의 소개로 왔기에 교수가 질문의 무례함이나 불편함을 따지고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허허, 이거 다행이야. 그래도 내가 평생 돈 관련된 것만 공부해서 그건 좀 알거든. 물어보게.”


노교수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질문을 무례하다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학문의 길은 어디에나 있으므로 이런 세속적인 질문 역시 학문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노교수의 긍정적인 반응에 동훈은 힘을 얻었다.


조심스러웠던 질문을 조금 더 자신감 있게 만들었달까.


동훈의 요즘 관심사는 재테크 중에서도 변동성이 크다는 ‘코인’이었다. 사실 이게 재테크라고 해야 할지도 의문이긴 했으나 동훈의 능력은 변동성이 아무리 커도 리스크를 기회로 바꾸는 ‘통찰’이라는 능력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면 ‘통찰’만 믿고 가면 되는 거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동훈은 그래도 전문가 의견은 듣고 판단하는 게 맞지 않냐는 견해였다. 기왕이면 많은 의견을 듣는 것도 좋지 않겠나.


“요즘에는 코인이라 부르는 가상화폐가 재테크 수단으로 많이 떠오르던데요? 교수님이 보기에 그건 어떤가요?”


코인 이야기가 나오자 노교수의 표정이 곤란하게 변했다. HTML로 프로그래밍한다는 소리를 들은 개발자의 표정이랄까. 동훈의 동생이 코딩 일을 하다 보니 그 농담을 듣고 분노를 토하던 게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허허, 나는 그걸 재테크라고 보지 않네. 가상화폐니, 블록체인 기술이니 내가 깊이 파본 게 아니라 기술적으로는 잘 모르겠으나 재테크는 아니야. 자네, 초기의 주식시장이 어땠는지 아나?”


“모릅니다. 경청하겠습니다.”


“법이 없던 시절 주식판은 무법지대였어. 말 그대로지. 법이 없으니. 신고하지 않고 증자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벌이고, 주식 증서를 총 들고 뺏는 일도 예사였어. 당시 주식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강도남작이라 불렀지. 자본가들 말이야.”


노교수의 설명은 강의를 할 때보다 더 알기 쉬운 용어로, 편한 말투로 이어졌다.


“사람은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있지. 내 가상화폐에 관해 잘은 모르지만, 짧은 식견에 의하면 작금의 가상화폐 시장은 초창기 법이 없던 주식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강도남작이 총 대신 돈을 들고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는 상황이라는 거지.”


법이 없는 무법지대는 곧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것이 당연하므로 이를테면 현 코인계는 돈 많은 공룡들이 먹잇감을 찾으러 다니는 야생이었다.

소자본의 개미가 운 좋게 먹이를 구해 돈을 조금 벌 수 있을진 몰라도 끝내는 공룡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사건의 당연한 귀결일 것.


“이런 상태는 가상화폐 시장 전체에도 좋은 영향이 아니네.”


“좋지 않다고요?”


경쟁은 흔히 발전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했다. 노교수의 말에 따르면 지금 코인 시장은 무한경쟁의 세계 아니겠나. 그럼 무한발전 아닌가?


“대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이로운 상태가 아니네. 게임에서처럼 말일세. 더 벨룸이라는 게임에서도 규칙을 세우는 거대 혈맹이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이들이 싸우네. 어떨 때는 사냥보다 사람들끼리 싸우는 때가 더 많기도 해. 그런 상태에서 거래소를 본 적 있나?”


유명한 게임이니 동훈도 알 거라는 사설을 덧붙이며 말을 이어갔다.


동훈 역시 신서버가 열렸을 때, 아직 라인과 세력이 자리 잡지 못했을 때의 상황을 잘 알았다. 그때는 아주 싸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 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그마저도 물량이 없어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유저들은 그런 거래소 상황을 활성화됐다고 여긴다. 어떤 템이든 잘 팔리니까.


노교수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그때의 거래소는 아주 열악하지. 게임 자체가 덜 진행되어 그렇기도 하지만 싸움에 역량을 소모하기 때문이네. 규칙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다른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지.”


거래소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듣고 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의 거래소 상태에서 판매자들은 거래소가 흥한다 말하지만 그걸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조금만 안정되면 이런 터무니없는 가격을 내지 않고도 살 텐데, 하는 생각만 들 것이다.


거래에 참여하는 이들 행복의 총량 면에서도,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품목의 종류와 양적인 면에서도 거래소가 성숙한 상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동훈은 납득이 가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벨룸도 하셨습니까? 유명한 게임이긴 하죠.”


“험험, 연구차 조사한 걸세.”


닉네임과 레벨이 빤히 나오는데 뭘 시치미 떼시고 그러시나. 하지만 같이 더 벨룸을 했던 사람으로서 저렇게 아닌 체 발뺌하는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았다.


아무튼, 코인은 위험하다는 뜻은 잘 알겠다. 동훈은 궁금한 것을 조금 더 물어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노교수가 살아생전 가장 적은 수강생을 데리고 연 작은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갤러리 입구로는 아직도 VIP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


승화 갤러리 입구, 정장 차림의 여직원이 젊은 부부의 신원을 확인하고 참가자 명부와 맞춰본 뒤 꾸벅 인사했다.


“오장근 씨, 윤효민 씨, 확인됐습니다.”


“감사해요.”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남자, 오장근과 화사한 새댁 스타일의 여자, 윤효민은 커플이 아니었지만 커플처럼 팔짱을 끼고 함께 입장했다. 참가 신청을 부부로 했기 때문이었다.


부부가 아닌데 부부 행세를 하는 이들은 꽤 잘 어울렸다.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는 오장근과 사기꾼 출신 술집 마담 윤효민은 서로를 깔보는 모습까지 비슷했다. 끼리끼리 모이라면 둘이 모이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표정을 능숙하게 지어내며 윤효민은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의심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못 듣고 오장근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정보는 확실해요? 비밀 모임, 승화에서 열리는 거 맞죠?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전시 같은데.”


갤러리를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던 오장근은 특유의 양아치 같은 웃음을 지으며 장담했다. 그의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는 차분하고 세련된 갤러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는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엄. 나 못 믿어? 확실하다니까.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 왔겠어? 그림이라고는 화장실에 걸어두는 손바닥만한 그림밖에 안 보는 사람인데, 내가.”


“그런 말을 갤러리에 와서 해야겠어요? 정말 분위기 깨는 데에 뭐 있다니까.”


“낄낄, 갤러리니까 이런 말이 나오지 다른 데였으면 그림 얘기가 나왔을 거 같아? 아무튼, 중요한 건 내가 그림 좋아하느냐가 아니지.”


두 사람은 승화 갤러리에서 열린다는 비밀스러운 모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어렵게 갤러리 프레스 데이에 참석할 수 있는 자리를 얻었다.


승화 갤러리 프레스 데이 참석 티켓은 정말 구하기 어려웠다. 기존 VIP는 좀처럼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았으니 두 사람이 힘을 합치고야 한 자리를 얻었고, 훗날에 큰 대가를 치르기로 약속하고서 또 한 자리를 얻었다.


둘은 모두 혼자였다면 한 자리도 얻지 못했을 것임을 알지만 막상 두 자리를 얻으니 갚아야 할 빚이 아까워지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둘 다 얻은 자리 하나는 제 것으로 생각하고, 빚을 내서 얻은 자리는 상대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이기심으로 충만한 동맹은 내면이야 어떻든 간에 겉으로는 화목했다.


“중요한 건 장근 씨가 들은 정보가 정확하냐는 거죠. 그리고, 그 비밀 모임이 뭔지도.”


“내 정보는 정확해. 정확하고말고. 믿을만한 곳에서 나온 소스야. 어딘지는, 말해줄 수가 없네.”


“참내. 어디 찌라시 보고 온 게 아니길 바라요. 이번에 허탕이면 장근 씨가 빚낸 거 다 갚으면 되지. 비밀 모임이 뭔지는 장근 씨가 짐작 가는 게 있다면서요? 말해봐요. 전화로는 절대 못 말하겠으니 만나서 말하자면서.”


이들이 갤러리 로비 구석에서 쑥덕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도 일종의 작전 회의인 셈이었다.


장근이 작게 손뼉 치며 확언했다.


“그러니까, 승화에서 여는 비밀스러운 모임은 분명 비밀 경매일 거야. 어디 내놓고 못 파는 물건들, 문제가 있거나 있을 거라고 의심받는 물건들을 구매력 있는 VIP만 모아놓고 경매하는 걸 거라고.”


어디에 내놓고 팔지 못하는 비밀 경매.

둘이 그런 의심을 한 건 구매력 있는 VIP만 모아놓고 비밀스러운 모임을 가진다는 부분에서였다.

갤러리에서 왜 모이는 거며 왜 돈 많은 사람들만 부를까. 갤러리는 그림 파는 곳이고 돈 많은 사람들은 그림 사는 사람들이니 그림 파는 일로 사람을 모으는 것 아니겠나.


탈세, 출처에 문제가 있는 예술품, 아는 사람만 아는 거래 등등.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오장근과 윤효민에게는 오히려 좋은 수식어들뿐이다.


그렇기에 큰 대가를 치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흠, 저도 그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런 경매일수록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진짜 그걸 사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거니까.”


“그래서 이번에 회사 자산을 매각하고 현금을 확보했지.”


“이 경매 때문에요?”


효민은 장근이 말하는 회사 자산이 기껏해야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며 모은 가상화폐와 어디 제3국에 숨겨져 있는 출처가 불분명한 검은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범죄 자금이잖아요, 찌르기에는 효민 역시 이번에 준비한 돈이 합법적인 곳에서 나오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모른 체했다.


“그래! 승화에서 여는 비밀 경매라니, 여기서 구하는 건 밖에서는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물건들일 거야. 지금 사놓으면 나중에 세탁해서 팔 때 훨씬 비싸게 받을 수 있을걸?”


“흐음, 작품을 너무 돈으로만 보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얘기하며 어딘지 고혹적인 몸짓으로 머리카락의 끝을 꼬는 효민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돈, 예술도 좋지만 돈이 최고니까.


물론 예술은 효민의 허영심을 채우고 출신에 대한 열등감을 지우는 수단이기도 하므로 이 무식한 예술도 모르는 장근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 돈 아니면 뭘로 본다는 거야? 이상한 소리 하고 있네. 됐고, 경매에서 누가 우리 경쟁자가 될지나 가늠해보자고. 어차피 여기 온 사람들 돈 깨나 있다는 사람들인데 얼굴 눈에 익잖아?”


“그래요. 오늘 돈 좀 쓸 것 같은 사람들로 짚어 보죠.”


자본주의의 젖과 꿀, 돈으로 대동단결한 둘은 경쟁자를 추리기로 했다.


한국 땅에 돈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을 다 추려보면 장근과 효민은 그들의 발가락 때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하지만 오늘 같은 날 중요한 건 오늘 과연 가용할 수 있는 돈이 얼마냐는 거다. 장근과 효민은 그런 점에서 다른 이들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람 하나를 꼽은 건 장근이 먼저였다.


“저 여자, 강남에서 유명한 마담뚜야. 중매도 서고, 사람도 찾고 뭐 여러 일 한다지. 아무튼 저 여자는 땅 부자라는 말이 있어. 현금은, 많을까? 모르겠네. 그 옆에 남자는 누구지?”


그 옆에 선 남자는 효민이 알았다.


“저 사람은 승평 건설 사장이잖아요. 이번에 대형 프로젝트 하나를 마쳤다고 하니 현금은 남부럽지 않을걸요? 알잖아요, 건설사가 뭐 하나 지을 때마다 떨어지는 게 여러 가지로 많다는 거.”


“오케이, 그럼 승평 사장은 눈 여겨두자고. 다음은....”


그렇게 몇몇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들이 가용할 현금 정도를 가늠한 뒤 간단한 작전 회의를 마쳤다.


일단의 아줌마 무리가 둘을 지나쳐 조잘거리며 전시관 쪽으로 향했다. 우루루 몰려다니는 대여섯 명 정도의 아줌마 집단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 아줌마 무리가 주목받는 건 저 대여섯 명의 아줌마 무리가 모두 VIP인데다 그림을 잘 사기로 유명해서였다.


속칭 강남 부인 클럽, 자칭 장미 클럽이라고 하는 그룹은 거침없었다. 요구사항을 가감 없이 말하고 바라는 것이 확실했다. 이들은 스스로들이 VIP라는 사실을 잘 알고 이를 잘 활용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을 보는 효민의 눈이 반짝였다.


효민은 이곳에 처음 온 초짜. 저렇게 무리를 이루고 활보하는 이들 틈에 끼면 그보다 도움 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럼 저기 아줌마들은 제가 상대할게요. 뭐 하나 물어보는 척하면서 끼면 끼워줄걸요.”


“괜찮겠어? 상류층 아줌마들 성깔 장난 없어. 괜히 가서 성질만 건들면 오히려 손해야.”


장근은 걱정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돈 좀 있네 하는 사람 중에서도 그걸 타고 태어난 이들이 가지는 프라이드를 알았다. 게다가 무리를 이뤘으면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이 있어야만 무리에 받아들이는 배타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효민은 괜한 걱정을 하는 장근을 비웃으며 코웃음 쳤다. 지금 내가 누군데, 저런 아줌마들을 상대로.


“흥, 나 윤효민이에요. 내가 아줌마들 못 구워삶을 거 같아?”


***


잠시 뒤, 효민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샵에서 세팅 받고 온 머리칼은 처음처럼 부푼 기가 많이 죽었고 그에 따라 효민은 기도 많이 죽었다.

그녀는 여러 브랜드의 명품 옷을 두르고 있었지만 자신의 통일성 없는 차림새가 초라해만 보였다. 효민은 명품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 급에 따라 사람을 나눠볼 수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알게 되었다.


웬걸 평범한 샤널이나 구치는 평상복이나 다름없었다. 효민의 자켓과 치마는 평상복과 같다는 소리. 이 모임에 있으니 효민은 평상복을 입고 갤러리에 온 사람이 되었다.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두른 50대 정도의 우아한 여인이 내리 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상류층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우두머리인 듯 그녀 중심으로 형성된 분위기가 있었다.


나 상류층이요, 하는 듯한 느낌과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옷태가 돋보이는 여인은 매끄럽게 세팅된 머리칼을 넘기며 효민에게 물었다.


“아가씨, 이런 자리는 처음인가 봐? 아니면, 위에 카페 오려고 했는데 잘못 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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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위대한 탐험가 벨로페스트 +1 24.02.14 26 2 12쪽
118 용병대의 의뢰 +1 23.09.03 37 2 14쪽
117 잔비어 요새의 풍운 +1 23.06.24 58 2 20쪽
116 왕의 축복과 장군 자넷싱 23.06.18 58 2 19쪽
115 잔비어 요새 +1 23.06.16 66 3 19쪽
114 비밀 경매(4) +1 23.05.20 66 2 28쪽
113 비밀 경매(3) 23.05.13 65 2 15쪽
112 비밀 경매(2) 23.05.07 85 2 20쪽
111 비밀 경매 23.05.05 91 2 23쪽
110 갤러리의 비밀 모임(2) 23.04.28 94 2 16쪽
» 갤러리의 비밀 모임 23.04.20 134 2 22쪽
108 나은과 희연 23.04.18 111 2 19쪽
107 승화 갤러리 23.04.13 115 2 14쪽
106 그린드래곤 갈라그루드(2) +1 23.04.08 115 2 22쪽
105 그린드래곤 갈라그루드 +1 23.04.04 122 3 20쪽
104 용종(龍種) 몬스터(2) +1 23.03.30 117 3 14쪽
103 용종(龍種) 몬스터 23.03.25 129 3 20쪽
102 전쟁무새 23.03.22 128 3 19쪽
101 무기 강화 23.03.19 135 3 13쪽
100 기사 라피드 23.03.12 162 3 15쪽
99 약탈 허가증서 23.03.11 143 3 15쪽
98 반왕의 영지 23.03.09 161 3 13쪽
97 중앙지대와 여기사 23.03.05 149 3 20쪽
96 전(前) 군주 형님 23.03.04 159 2 14쪽
95 세원휴먼테크 23.02.26 172 2 16쪽
94 다른 돈벌이 23.02.22 172 1 18쪽
93 보스 컷! +1 23.02.12 216 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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