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4 부. 예언자들 - 46 화

예언자들 – 46

“제발... 제발 전화를 받아요, 텔리.”

힘든 날의 시련은 끝을 모르는 것인가. 몇 번을 걸어도 텔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그만 풀숲에 주저앉고 말았다.

“흐어어엉... 오늘부터 난 어떡하라고...! 아니, 당장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머니... 아아..... 흐흐흐흑.”

다시 또 터져 나오는 눈물. 지금 당장 세상 그 어디에도 자기를 돕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펠리시아는 무서웠다. 그녀는 풀숲에서 한 동안 서럽게 울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속이 조금 진정되었다. 이제 더 이상 늦지 않게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죽음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연로한 아버지는 큰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그의 건강을 생각하면 몹시 안타까워도 어머니의 죽음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긴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녀의 두 뺨엔 다시 눈물 두 줄기가 뚝 하고 떨어졌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그녀는 울던 것을 멈추고 최대한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펠리시아냐.”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그녀 아버지의 목소리. 그녀는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가슴에 얹고 최대한 울음을 참았다.

“펠리시아, 오늘은 새벽에 너무 일찍 전화했구나. 아하우우움.”

LA는 아직 한 밤중이라 아버지는 잠이 덜 깬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의 아버지는 태평했다.

“아... 아버지. 저 펠리시아예요. 흐흐흑.”

“.....그래, 펠리시아. 무슨 일이 있니? 혹시 우는 거냐?”

아버지는 분명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너무 놀라 쓰러져 큰일을 당할 지도 모른다.

“아버지..... 그게... 어머니가..... 으흐흐흑.”

“얘야, 울지 말고 말을 해보렴. 네 어머니, 쥬니아가 뭐? 그녀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니?”

미스터 화이트는 이제야 그의 아내와 딸에게 무슨 안 좋은 상황이 생긴 걸 깨달은 모양이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으흐흐흐흑!”

“뭐....? 쥬니아가?”

펠리시아는 아버지에게 쥬니아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차마 자세히 알리지는 못했다. 대신 어떤 사고로 죽게 되었다고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지금 강원도라는 곳에 있으며 아버지가 한국으로 와서 자기를 데려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펠리시아. 그래서 강원 프라빈스 어디에 있다는 거니? 거긴 서울이 아니지?”

“예... 흐흑. 몇 시간 떨어진 곳이에요. 그런데 제가 지금 도로를 혼자 걷고 있는데 무서워요. 저 앞에 타운이 보이는데 아무리 걸어도 거기까지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아버지..... 전 어쩌면 좋아요. 어흐흐흑!”

“쥬니아가..... 그녀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 친구 텔리가 한국에 있다고 했었어. 그가 아직 한국에 있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한국에 가는 시간보다는 더 빨리 네게 갈 수 있지 않겠니?”

“전화를 했는데 안 받아요. 지난 몇 달간 어머니도 몇 번이고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그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알렉시스 칼라스의 경호를 맡아서 한국에 왔었다고 하는데.....”

“알렉시스 칼라스? 한국에 갔다가 실종되었다는 그 헐리우드 여배우 말이냐? 그렇다면 그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은데.”

펠리시아는 몇 달 전부터 알렉시스와 함께 지내왔다는 것을 알릴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에뮤니우스나 불새군, 인질로 잡힌 싸이언스, 그리고 M에 관한 이야기 등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펠리시아, 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넌 안전한 곳에 있지 않은 것 같아. 여기 미국도 위험하지만 한국의 도로도 당연히 네겐 위험한 곳일게 분명하니까. 제일 중요한건 안전한 곳으로 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지금부터 얼마나 걸어야 네가 말한 타운까지 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그곳까지 가야 해. 그리고 내게 너가 있을 곳을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렴. 난 지금부터 한국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 내가 거기 도착하면 모든 일이 괜찮을 거니까 신께 기도하면서 조금만 참고 견디렴.”

“예. 알았어요. 아버지, 최대한 빨리 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마친 펠리시아는 그제야 마음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물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괴롭혔던 서러움과 두려움이 좀 가시고 다시 마음속에서 용기를 꺼낼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래! 끝까지 살아남는 거야! 그리고 어머니를 해친 그 흉악한 에뮤니우스의 비참한 최후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겠어. 그 때까지 난 꼭 살아남을 거야. 다시 걷자. 펠리시아. 저 앞에 보이는 타운까지 꼭 가야지!”

지금까지 눈물과 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쓱쓱 닦았다. 그리고 풀숲에서 나와 다시 도로에 들어섰다.

* * *

멧돼지 산신령의 서식지인 산에서 내려온 건수와 일행들은 일단 강원도 아저씨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들은 처음 산에 올 때처럼 아저씨의 트럭 뒤 적재함에 몸을 실었다. 겨울이고 또 지역이 산골이라 추웠지만 텔리는 대기의 온도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춥다고 떨고 있는 미스터 황에게 자신의 상의를 벗어주었다. 그리고는 적재함의 차가운 철판 위에 벌러덩 눕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클로브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야아.... 얘들아. 저기 하늘 좀 봐라. 해가 지고 있다. 황혼이다. 황혼. 하루 중 이 때가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시간이야. 얼마나 황홀한 시간이냐!”

그의 말대로 하늘은 불이 붙은 듯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붉은 구름 사이로 비추는 태양의 마지막 찬란한 빛이 그들의 눈망울에 맺혔다. 그림이 따로 없었다. 미스터 황이 싱긋 웃으며 그의 신에게 물었다.

“텔리님, 의외로 로맨틱한 면이 있으시네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시고 감탄하실 줄은 몰랐어요.”

“로맨틱? 하! 미스터 황. 그럼 내게 그런 면이 없을 줄 알았냐?”

“네. 너무 무서운 분이시니까요.”

“네가 바로 봤어. 내가 황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다음에 깔릴 짙은 어둠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지. 즉, 내 힘이 가장 강해질 때, 신이고 인간이고 괴물이고 모두를 죽일 수 있는 힘이 돌아오는 시간이 오기 때문이지. 너희 인간들도 주말이 시작되는 바로 전 날이 제일 기대될 것 아냐. 그러니 내가 황혼을 보면 가슴이 뛰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내가 참다운 내 자신, 즉 살육의 신이 되어 모조리 다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예? 아..... 예에에에.... 쩝.”

말을 꺼낸 미스터 황과 옆에서 듣고 있던 건수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미스터 황은 건수를 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저 사람.... 아니 저 신 말이야. 난 정말이지 감당할 수가 없겠어. 어쩌지? 건수야. 나랑 사제직을 바꿀래?”

건수는 누워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텔리의 눈치를 보다가 미스터 황에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의 표시인 것이다. 그러자 미스터 황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당연하지. 누가 살육신의 사제가 되고 싶겠어. 어휴.”

그 후 한참을 달리던 강원도 아저씨의 트럭이 점점 속력을 줄이더니 멈춰섰다. 그 때까지 누워서 줄담배를 피우던 텔리가 몸을 일으켰다.

“뭐야? 예의 없는 멧돼지 신수 사제 놈이 잘 달리다가 왜 트럭을 멈춘 거야?”

텔리는 운전석이 보이는 유리창에다 가볍게 노크했다. 왜 트럭을 멈췄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안에서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옮겼던 텔리는 깜짝 놀랐다. 도로를 걸어가고 있는 한 지저분한 차림의 어린 소녀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낯이 익었던 것이다. 그는 트럭에서 일어나서 그 소녀에게 소리쳤다.

“아니! 펠리시아! 넌 펠리시아가 아니냐! 맞지? 펠리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