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케빈가넷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 배의 주인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케빈가넷
그림/삽화
케빈가넷
작품등록일 :
2020.06.23 22:47
최근연재일 :
2021.06.04 00:00
연재수 :
75 회
조회수 :
5,621
추천수 :
33
글자수 :
501,682

작성
20.07.09 10:00
조회
48
추천
0
글자
16쪽

16화. 피의 복수 1

DUMMY

1534년 여름. 타란티아, 이탈리아 남부.


- 뎅. 뎅.

발레트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희미한 종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와 동시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방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젠장!”

그 답지 않은 실수였지만 자책할 시간은 없었다. 순식간에 머리맡에 둔 단검을 잡아챈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침대 위에 우뚝 섰다. 하지만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이내 맥이 빠졌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워낙에 시급한 사안이라······”

그의 방에 무단으로 들어온 자는 뜻밖에도 안토니오가 친히 잡아준 여관의 주인이었다. 발레트가 벼락같이 일어나 공격자세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초로의 여관 주인은 미동조차 없이 서 있었다.

“깜짝 놀랐잖소. 이 밤중에 어쩐 일이오?”

여관 주인은 들고 있던 등불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발레트의 얼굴을 확인하듯 살폈다.

“발레트 님이 맞군요. 아무래도 성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이리 실례했습니다.”

뜻밖에도 여관 주인은 발레트를 알아보았다.

“내 이름을 어찌 아시오? 알리지 않고 숙박한 것 같은데.”

“저는 제롬이라고 합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로도스 섬에서 영주님을 모시던 마부였습니다.”

발레트는 그제서야 노인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밖을 한번 봐주세요.”

제롬이 손을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 발레트는 경계심을 풀고 밖을 내다보았다. 모두가 잠에 들었을 캄캄한 밤중 치고는 아나스 성 주변이 지나치게 밝았다. 게다가 경비탑에 걸어 둔 종을 누가 치는지 쉴 새 없이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 것 같소?”

발레트는 서둘러 무기를 챙기며 제롬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해적들이 습격한 것 같습니다만······ 이 구석진 도시에 해적들이 쳐들어오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섣불리 예단하기가 어렵네요.”

산전수전 다 겪은 제롬도 지금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혹시 여관에 말이 있소?”

“네. 마을 길을 잘 아는 말을 밖에다 준비해 뒀습니다.”

발레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관 앞은 아직도 축제의 여흥이 가시지 않은 지 곳곳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제롬의 말대로 문 앞에 검은 말 한 마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말에 올라탄 그는 어둠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로카는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에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다시 눈을 감으려 했지만 고래기름 따위가 타는 냄새 때문에 더 이상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복도로 나가기 위해 방문으로 다가섰다.

“무슨 소리지?”

로카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문밖에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만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꺅!”

그 순간, 숙직하던 하녀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뭐, 뭐야?”

로카는 엉겁결에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래층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후······ 침착해야 돼······’

잠이 확 달아난 로카는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엉금엉금 기어서 아래층이 보이는 난간까지 다가갔다. 놀랍게도 계단으로 올라오는 한무리의 침입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로카는 잽싸게 다시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궜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머리를 부여잡고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입자들은 위층으로 올라왔다. 곧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장, 이거 잠겼는데?”

누군가 로카의 방문 앞에서 자신의 우두머리를 불렀다.

“오 이런······ 시간이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일일이 묻지 말고 도끼로 부셔버려. 그리고 너희 둘은 저 옆방이랑 끝에 있는 방도 가봐. 그년부터 찾아야 돼.”

졸지에 방에 갇힌 로카에게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정신없이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외벽으로 통하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리곤 재빠르게 벽장 안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구겨 넣었다. 다행히 벽장이 깊고 걸려있는 옷가지들도 제법 많아서 몸을 가리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조금만 옷 사이를 뒤져 본다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콰직!

로카가 열심히 옷가지들을 이용해 몸을 숨기는 동안 문고리를 도끼로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놋쇠로 만든 문고리는 서너 번의 도끼질에 맥없이 부서졌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 한 사내가 유유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뒤따라 달려들어온 자가 침대보에 손을 갖다 대더니 황급히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바로스, 아직 침대가 따뜻한 걸 보니 방금 도망친 거 같은데?”

야밤을 틈타 아나스 성을 습격한 자들은 놀랍게도 바로스 일당이었다. 한 달 전 하심을 통해 빅토르의 부재를 알게 된 바로스는 고심 끝에 타란티아를 약탈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본 자의 말만 믿고 움직이는 게 불안하긴 했지만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기로 했다. 그만큼 타란티아에 대한 그의 복수심은 깊고도 오래되었던 것이다.

“흠······ 여기로 뛰어내렸나 보군. 쥐새끼 같은 놈.”

바로스는 활짝 열린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로카는 벽장 문틈 사이로 숨을 죽인 채 침입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던 중 한 사내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창가에 다가선 그의 얼굴 위로 달빛이 비쳤다. 로카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저놈은······’

로카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그는 분명 6년전에 자신이 던진 뱀에 목이 감긴 바로 그 해적이었다.

‘저 자들이 어떻게 여길 온 거지?’

로카가 생각에 잠길 겨를도 없이 바로스가 벽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 저건 옷장인가?”

로카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바로스의 섬뜩한 눈빛이 마치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벽장 앞까지 다가온 바로스는 벽장의 양쪽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그렇네. 옷장이로군.”

다행히 로카는 이미 옷가지 뒤로 몸을 숨겼다. 단념하고 뒤돌아서려던 바로스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사내 놈 치고는 옷이 꽤 많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로스는 다시 벽장 앞에 섰다. 그는 침착하게 옷가지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낮이었다면 벌써 알아봤겠지만 한밤중의 벽장 안은 동굴처럼 캄캄했다. 숨소리가 들릴까 호흡까지 멈춘 로카는 최대한 벽장 안으로 몸을 붙였다. 바로스는 수색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로카는 발각이 된다면 그대로 달려나가 창문으로 뛰어 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꺄악!”

일촉즉발의 순간, 자지러지는 듯한 소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바로스의 부하들이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대장! 영주의 딸년들을 찾았습니다!”

곧이어 카린과 루안나가 머리채를 잡힌 채 방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자고 있던 그녀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해적들의 억센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절반만 성공이군. 결국 브로치는 못 찾았어. 일이 틀어졌으니 이년들이라도 잡아가야겠다. 그나마 얼굴들은 꽤 쓸만 하구만.”

소녀들의 얼굴을 확인한 바로스가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숨어서 지켜보던 로카는 얼굴이 불에 데인 것처럼 달아올랐다. 당장 동생들을 구하러 나가야 하지만 그 순간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놈들에게 머리채가 잡혀 있던 카린의 처연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카린은 해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보일 듯 말 듯 입모양을 움직였다. 로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만류보다도 눈 앞에 다가온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여기 볼일은 끝났으니 이제 빚을 갚아줄 시간이 왔군.”

바로스가 잘려 나간 왼쪽 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대장! 성 아래에서 경비병들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아래층에서 올라온 부하가 다급하게 보고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빅토르가 없다면 어차피 풋내기들 밖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 참에 영주 아들놈과 날 찌른 그 배신자 놈까지 싹 다 잡아 들여야 돼. 지금부터 마을로 내려간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바로스는 온몸이 달아올랐다. 덕분에 벽장에 대한 남은 수색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순식간에 문 밖으로 사라졌다.

- 쿵

문밖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더 숨어있던 로카가 구르듯이 벽장 밖으로 떨어졌다. 이미 해적들은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성 아래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얼마 후 멀리서 들려오던 희미한 종소리마저 사라져갔다. 성 안은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만이 가득하였다.


발레트는 단숨에 시장 거리를 지나 아나스 성으로 가는 골목길로 꺾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한 무리의 병사들이 그를 멈춰 세웠다. 발레트를 알아보지 못한 지휘관이 먼저 장검을 꺼내 그에게 겨눴다.

“우린 타란티아의 해안 경비대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는 오스발도의 아버지이자 작년에 해안 경비대장에 부임한 라몬 칸디아노였다.

“나는 영주님의 방문객이오. 낮에 섬으로 들어오는 걸 본 자가 있을 것이오.”

발레트는 일부러 구체적인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다행히 뒤에 선 병사 하나가 시장에서 본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주간에 근무를 섰거나 휴가를 받았던 병사들이었다. 그들 역시 갑작스럽게 울린 소집 종소리를 듣고 급하게 달려 나온 모양이었다.

“침입자가 있다고 들었소.”

발레트는 정확한 상황을 알고 싶었다.

“아나스 성에서 먼저 신호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경비가 허술한 동쪽 해변으로 상륙한 것 같은데, 하필 오늘 같은 날 쳐들어와서······”

라몬이 자책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발레트는 치고 빠지는 해적들의 특성상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품에서 기사단의 표식을 꺼내 보였다.

“나는 성 요한 기사단의 훈련교관을 맡고 있는 발레트요. 해적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나 그들은 배로 달아날 수도 있고 마을로 내려와 약탈을 할 수도 있소. 그러니 병사들을 둘로 나눠 한 조는 배를 쫓고 다른 한 조는 이 길을 지켜야 될 것이오. 여기를 지키는 조는 최대한 횃불을 많이 밝혀 병력이 많아 보이도록 하시오.”

발레트는 신속하게 병사들을 지휘했다. 라몬은 낯선 사내가 발레트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들 중에서도 그의 이름은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자가 왜 이 시간에 여기 나타났는지는 의아할 뿐이었다.

“그리고 뒤에 둘은 말을 타고 나를 따라오시오. 본대를 추격할 거니까.”

지시를 모두 내린 발레트는 라몬 뒤에 선 두 명의 병사를 지목했다. 잠자코 있던 라몬이 그를 제지했다.

“잠깐만. 이 아이는 병사가 아니고 내 아들이오. 손이 부족할지도 몰라 데리고 왔소. 하지만 아직 내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의 말처럼 혼자 전투복을 입지 않은 사내는 오스발도였다. 어리지만 덩치가 큰 덕분에 어른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날래 보여서 지목을 했소. 정 그렇다면 그 아이는 빼고······”

마음이 급한 발레트가 다시 말에 올라탔다.

“아닙니다. 제가 따라 갈게요.”

치기어린 오스발도가 앞으로 나섰다.

“안돼! 넌 여길 지키고 있어야 한다!”

발레트는 더 이상 이 부자의 실랑이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병사 하나만 데리고 서둘러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경비대원들은 라몬의 지휘를 받아 둘로 나눈 뒤 뿔뿔이 흩어졌다.

“젠장! 하필 빅토르도 없을 때 이놈들이······”

발레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기! 해적들입니다! 놈들이 이쪽을 향해 뛰어내려 옵니다!”

함께 가던 병사가 고함을 질렀다. 예상과 달리 그들은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기선제압이 필요하다고 느낀 발레트는 말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그리고는 가장 선두에 선 해적의 목을 단칼에 날려 버렸다. 뜻밖의 기습에 놀란 해적들은 다급히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자신들을 막아선 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기겁을 하였다.

“노, 노란 머리의 발레트다!”

해적들은 그의 이름만 듣고도 허겁지겁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말머리를 돌린 발레트는 미처 달아나지 못한 또다른 해적들을 쫓았다.

“무슨 일이냐? 왜 되돌아오는 것이야?”

뒤따라오던 바로스는 부하들이 다시 올라오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숲길은 이미 도망쳐온 자들과 내려가는 자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로스! 이 앞에 빌어먹을 발레트가 있어!”

앞서 갔던 켈리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달려왔다.

“발레트? 노란 머리의 발레트? 몰타 섬에 있어야 될 놈이 왜 여기에 나타나나?”

“젠장! 그건 나도 모르지! 어찌되었건 저 아래에서 악마처럼 칼을 휘두르고 있는 놈은 발레트가 맞아!”

“그럴 리가······”

바로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튼 우린 어서 도망쳐야 될 거 같아. 그 놈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같이 왔는지 마을을 지키는 병사들 숫자가 만만치 않아.”

켈리는 마을 쪽에 늘어선 무수한 횃불들도 목격했었다. 바로스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 빌어먹을 꼬맹이들을 몽땅 다 잡아들여야 되는데······”

“대장! 이럴 시간이 없어. 얼른 달아나지 않으면 전부 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바로스가 머뭇거리자 켈리가 길길이 날뛰었다. 바로스는 결국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제길······ 전원 배로 퇴각하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적들이 배가 있는 해변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발레트는 더 이상 쫓지 않고 말을 달려 아나스 성으로 향했다.

겨우 기운을 차린 로카는 구르다시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성채 경비대와 해적들이 맞붙은 중앙 홀은 그야말로 참담함 그 자체였다. 바닥에는 해적들의 예상치 못한 기습에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한 병사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빅토르도 없는 데다가 성모 승천 축일을 맞아 병사들 대부분이 귀가한 탓에 피해가 더욱 컸다. 성에 남아있던 소수의 근위병들로는 작심하고 밀고 들어온 해적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쿨럭······컥, 커럭······”

로카는 온통 선혈이 낭자한 홀에서 망연자실하게 서있었다. 그러다 언뜻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아!”

정신이 번쩍 든 로카는 한달음에 부모님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곧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이······”

로카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가 목도한 침실 안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 곳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모든 집기들이 부서진 가운데 바닥은 피로 뒤덮여졌다. 그리고 그 핏물의 끝에 안토니오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움켜쥔 옷자락 위로 숨을 내쉴 때마다 피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더욱 기가 막힌 건 엘레네가 그의 어깨에 기댄 채로 이미 숨을 거뒀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낯빛은 벌써 하얗게 변한 뒤였다.

“커헉······. 헉······ 로크······아······”

안토니오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로카를 불렀다.

“아······ 아버지······”

사시나무처럼 떨던 로카는 쓰러지듯이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뿜어져 나오는 피를 멈추기 위해 엉겁결에 손으로 막아보지만 허사였다. 안토니오는 온 힘을 다해 아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강해져야······ 크헉······ 동생들을······ 흡!”

토하듯이 유언을 남긴 안토니오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숨을 거뒀다.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아꼈던 영주 부부는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뜻밖의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황망하고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안토니오의 신음소리마저 사라진 아나스 성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 배의 주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 14화. 아버지의 과거 1 20.07.07 57 0 13쪽
14 13화. 다가온 운명 2 20.07.06 53 0 14쪽
13 12화. 다가온 운명 1 20.07.05 56 0 12쪽
12 11화. 세 사람 20.07.04 55 2 17쪽
11 10화. 완벽한 제안 20.07.03 59 1 18쪽
10 9화. 서로 다른 길 2 20.07.02 62 1 12쪽
9 8화. 서로 다른 길 1 +2 20.07.01 79 2 14쪽
8 7화. 트라몬토 탐험 4 20.06.30 71 2 14쪽
7 6화. 트라몬토 탐험 3 20.06.29 75 2 14쪽
6 5화. 트라몬토 탐험 2 20.06.28 86 2 15쪽
5 4화. 트라몬토 탐험 1 +2 20.06.27 160 2 16쪽
4 3화. 타란티아의 아이들 +2 20.06.26 210 2 18쪽
3 2화. 새로운 식구 2 20.06.25 236 0 15쪽
2 1화. 새로운 식구1 20.06.24 459 1 11쪽
1 Intro. 그리스도의 검은 뱀 +2 20.06.23 645 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