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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가넷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 배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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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가넷
그림/삽화
케빈가넷
작품등록일 :
2020.06.23 22:47
최근연재일 :
2021.06.04 00:00
연재수 :
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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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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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3화. 타란티아의 아이들

DUMMY

1528년 여름. 타란티아, 이탈리아 남부.


카린은 이번에도 흔들리는 작은 보트에 누운 채 잠에서 깼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곤 흐릿한 수평선과 잔뜩 찌푸린 하늘뿐이다. 잔잔하던 바닷물이 조금씩 거칠어 지자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긴장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난간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하지만 난간을 때리는 파도는 어느새 너울로 변해 있었다. 이젠 선체가 뒤집힐 정도로 바닷물이 치솟아 올랐다. 마침내 저 멀리 집채 만한 파도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체념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 철푸덕.

순식간에 들이닥친 파도는 결국 보트를 뒤집어 버렸다. 카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다 아래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을 쳐보지만 코와 입으로 사정없이 물이 흘러 들어왔다. 숨을 못 쉬는 건지 숨을 안 쉬는 건지 모호해질 무렵 시커먼 바닷물 사이로 새하얀 손이 나타났다. 그 손은 거침없이 그녀를 향해 뻗어왔다. 카린이 본능적으로 손을 잡아채자 단번에 그녀를 바다 밖으로 끌어올렸다. 그 순간 온 세상이 눈부시게 밝아졌다.

“으악!”

카린은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눈을 번쩍 떴다.

“괜찮니?”

눈 앞에는 로카가 토끼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응?”

카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로카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깜짝 놀란 그녀는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카린은 뻘쭘한 마음에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서 달려왔을 뿐이야.”

그러고보니 열린 문 사이로 루안나도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냥 좀······ 기분 나쁜 꿈을 꿨어.”

로카는 식은땀을 흘리는 카린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가끔 있는 일이야. 걱정 안 해도 돼. 이젠 괜찮아.”

카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난······”

로카는 뭔가 더 말하려다 루안나가 보고 있다는 걸 의식하고 그만뒀다.

“아침 식사하세요!”

아래층에서 평소처럼 비올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로카는 벌떡 일어나 카린의 방을 빠져나갔다.

식사가 끝나고 카린은 평소처럼 선착장 인근의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해변으로 걸어갔다. 타란티아에 온 지도 벌써 한달이 지났지만 그녀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칸디아의 선술집에 있을 때처럼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도 없고 말을 거는 뱃사람도 없었다. 물론 이곳에선 새 식구가 된 드니로 남매가 있긴 하지만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건 쉽지 않았다. 로카는 아침식사가 끝나면 늘 마을 아래로 내달렸고 루안나는 나이는 한 살 밖에 차이 안나도 왠지 모르게 어린애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바위에 앉아 따개비 사이를 기어오르는 게나 구경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어머!”

여느 때와 같이 바위에 앉아 있던 카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다 속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웬 소년이 바다에서 헤엄쳐 나와 돌무더기 위로 올라선 것이다. 그는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부지런히 젖은 머리를 털어 댔다.

“뭐, 뭐야!”

뒤늦게 카린을 발견한 소년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보다 예닐곱살은 많아 보였다.

“깜짝 놀랐네······ 어? 잠깐, 넌······ 얼마전에 시끌벅적하게 나타난 그 꼬마애구나?”

뜻밖에도 소년은 카린을 알아보았다. 그는 머리카락에 묻은 물을 마저 털어내며 말을 걸었다.

“너도 꽤 시끌벅적하게 등장했거든?”

카린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녀는 소년의 피부색이 이곳 사람들과 다르게 짙다고 생각했다.

“그랬니? 난 파미르라고 해.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저기 시장 끝에 있는 대장간 집 아들이야.”

파미르는 그녀가 겁을 집어먹을까 봐 괜히 한번 웃어 보였다. 하지만 카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그는 화제를 바꿔 이번에는 손가락 끝으로 멀찍이 보이는 섬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섬 보여?”

“······”

“저 섬은 트라몬토 섬이라고 해. 방금 저기서 오는 길이지. 저 섬에 재미난 게 꽤 많거든.”

파미르는 더 대화를 걸어 보려다 자기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관뒀다.

“저렇게 멀리까지······ 수영을 엄청 잘하는구나.”

카린이 부러운 마음에 혼잣말을 했다. 여기서 섬까지 헤엄쳐서 다녀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자주 물에 빠지는 악몽을 꾸지만 그녀는 아직 수영을 해본적이 없다. 그녀에겐 물에 대한 공포증이 있기 때문이었다. 헤엄을 칠 수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회가 된다면 가르쳐 줄게. 그럼 또 보자. 꼬마야.”

파미르는 매고 있던 꾸러미를 풀어 다시 등에 단단히 고정하였다. 그리곤 바위 사이를 풀쩍 풀쩍 뛰어넘으며 숲으로 향했다. 카린은 아나스 성 사람들을 제외하고 마을에서 처음 만난 상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기 잠깐······ 앗!”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던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딛고 있던 바위가 살짝 흔들리면서 신발이 쭉 미끄러진 것이다. 모래 해변과는 달리 돌무더기가 쌓인 이 천연 방파제 아래는 수심이 제법 깊었다. 순식간에 몸이 떠버린 카린은 손을 쓸 새도 없이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누군가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잠시 카린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으음······”

얼마가 지났을까? 카린은 눈꺼풀을 간지럽히는 햇살을 참지 못하고 살며시 눈을 떴다.

“금방 정신을 잃더니 깨어나는 것도 엄청 빠르네.”

파미르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금세 환하게 웃었다. 포플러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까무잡잡한 그의 얼굴을 싱그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멍하게 눈을 뜬 카린은 그제서야 자신이 물에 빠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구해줘서 고마워.”

카린은 여전히 누운 채로 담백하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파미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릎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녀는 사실 물에 빠져 기절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풉, 별로 안 고마워하는 거 같네. 수영 못하는 애들은 종종 봤지만 너처럼 물에 빠지자마자 정신을 잃는 녀석은 처음 봤어.”

파미르는 카린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마을로 되돌아 가려다 말고 갑자기 카린이 누워있는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도련님에게 감사해야 될 거야.”

카린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달려와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네가 빠진 걸 알았거든.”

카린의 뒤편에는 놀랍게도 로카가 앉아있었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격렬하게 토악질을 하는 중이었다.

“고함만 질렀으면 좋았을 텐데······ 수영도 잘 못하면서 겁도 없이 바다에 뛰어 들었어. 덕분에 둘 다 건져낸다고 내가 고생 좀 했지. 아차차, 완전 늦어버렸네. 이젠 진짜 가볼게.”

파미르는 그녀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나무 숲 사이로 사라졌다. 카린은 뜻밖의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왜 날 따라온 거야?”

그녀는 아직도 삼킨 바닷물을 게워내고 있는 로카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잠시 후 호흡이 진정된 로카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따라다니기는······ 근처에 지나가다가 바보같이 물에 빠지길래 달려온 거지. 침대 위나 바다 위나 허우적거리는 건 똑같네.”

그녀를 구하려다 오히려 바닷물만 잔뜩 먹은 로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바위에서 벌떡 일어섰다.

“옷이 다 젖었으니까 얼른 성으로 돌아가. 감기 들면 또 골치 아프니까.”

그 역시 파미르가 사라진 숲 속으로 쏜살같이 뛰어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카린은 몽롱한 표정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아!”

그녀는 갑자기 목에 걸린 펜던트를 꺼내 살펴보았다.

“역시······ 또 줄어들었네.”

물에 젖은 펜던트는 처음 타란티아에 왔을 때보다 아주 미세하게 크기가 줄어들었다. 그녀는 다시 옷 안으로 목걸이를 밀어 넣었다.

“이게 마지막인데 이 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

모든 이들이 그렇지만 카린 역시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을 처음 인식할 무렵부터 그녀의 집은 ‘미케네’ 라는 이름의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그 술집은 크레타 섬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칸디아 항구의 번화가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의 엄마이면서 술집의 주인이기도 한 나탈리와 줄곧 지내왔다. 하지만 모녀의 평온한 일상은 영원하지 않았다.

“카린, 지금부터 내 말 똑똑히 들어.”

손님들이 모두 떠난 어느 늦은 밤, 나탈리는 평소와 다른 얼굴로 딸아이를 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네 친 엄마가 아니야. 넌······ 아직 아기였을 때 나무 궤짝에 담겨 내 고향 바닷가로 떠밀려 왔어······ 난 그냥······ 그냥 널 불쌍히 여겨 키웠을 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 하겠니?”

또래 아이들보다 조숙한 편이긴 해도 아직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은 카린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내가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너는 곧 여길 떠나야하기 때문이야. 어제 본 오베르망 씨를 기억하니? 그분이 말하길 너를 찾고 있는 아주 명망 높은 귀족이 있대. 그래서 그 곳으로 널 보내기로 했단다. 그러니까······ 앞으로 거기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그렇게 잘 살면 돼······ 알아들었어?”

나탈리는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내며 힘겨운 고백을 마쳤다. 카린은 그제서야 어제 만난 낯선 손님이 배를 타본 적 있냐고 물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음으로는 당연히 그녀의 곁을 떠나기 싫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카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그녀는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미지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탈리는 거친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술집보다 그녀가 더 훌륭한 환경에서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나탈리가 자신의 친모가 아닌 걸 알게 된 이상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졌다.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내게 엄마는 나탈리 밖에 없어······ 맘탈리······”

카린은 의자에서 일어나 울고 있는 그녀의 가슴에 가만히 얼굴을 파묻었다. 그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떠나기로 한 날, 나탈리는 카린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지며 또 한번 오열하였다. 카린은 그때 생각이 나자 또다시 코 끝이 찡해졌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가까스로 눈물을 참아낸 카린은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위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이 시간에 돌아가 봤자 지루할 게 분명했다. 그녀는 멀리 보이는 아나스 성 대신 성 안젤로 성당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 타란티아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그녀는 오솔길 옆으로 펼쳐진 숲속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엇!”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눈앞에 솟아난 커다란 나무 줄기에 강하게 꽂혔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카린은 비명조차 못 지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야! 여기 함부로 들어오면 안돼!”

울창한 숲 사이에서 튀어나온 소년이 고함을 질렀다. 커다란 활을 등에 맨 그는 단숨에 카린의 코앞까지 달려 나왔다.

“아니, 여긴 우리가 수련하는 곳이라······ 밧줄까지 묶어 표시해 뒀는데 그냥 들어오면 어떡해?”

공포에 질린 카린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짓자 소년의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그러고보니 숲은 평범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군사 훈련장처럼 곳곳에 나무 과녁과 잘라 놓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었다.

“미, 미안해. 딴 생각을 하다가 못 봤어. 흐엉헝······”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활을 쏜 사람이 자기 또래라는 것을 알고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소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필요이상으로 소리를 지른 것 같아 슬며시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괜찮아. 뭐, 못 봤을 수도 있으니까······ 어라? 어디서 본 얼굴인데······”

소년은 울고 있는 소녀의 얼굴이 낯익은 기분이 들었다.

“맞아! 넌 아나스 성에 새로 온 아이구나?”

카린이 떠들썩하게 등장한 덕분에 마을 아이들은 모두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로카는 어디 가고 왜 너 혼자야? 아무튼 안녕, 난 조반니라고 해. 로카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보면 돼.”

소년은 카린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다. 숲속 비밀 훈련장의 주인은 바로 통나무 위에서 로카와 겨루던 조반니였다. 카린은 그제서야 울음을 멈췄다.

“씩씩하네. 일어날 수 있겠어?”

조반니는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카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린은 조반니의 손을 잡는 대신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럼 로카와 친해?”

카린의 엉뚱한 질문에 조반니가 웃었다.

“하하하, 당연하지. 사실 그 앤 내 검술 제자야.”

“로카의 스승? 그래서 이런 데서 사는 거야?”

카린의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럴 리가. 난 저기 보이는 성 안젤로 성당에서 살아.”

“성당? 왜 성당에서 살지?”

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반니는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그는 사실 고아였다. 성당 뒤편의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지내기 때문에 성당에서 산다고 말한 것이다.

“음······ 말하자면 길어.”

“성당에서 산다면 주일마다 사람들이 예배하러 올 테니 심심하진 않겠다. 나는 커다란 항구에 있는 술집에서 살았어. 선원 아저씨들이 많이 와서 외롭지는 않았는데 재밌지도 않았어. 내 또래 친구들은 별로 없었거든.”

말을 마친 카린이 조반니의 손을 잡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너는 엄마가 있니? 나는 나탈리가 엄마인 줄 알았는데 진짜 엄마가 아니래. 게다가 술집에서 더 이상 지내면 안된다고 그녀가 여기로 날 보내 버렸어. 그래도 그녀를 미워하진 않아.”

카린은 마치 말문이 트인 것처럼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너는 처음 보는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조반니는 별다른 경계없이 온갖 이야기를 다하는 그녀가 신기했다.

“두려울 게 뭐야. 난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익숙해. 우리 가게에는 늘 새로운 손님들로 가득했거든.”

카린은 손으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면서도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조반니는 그녀가 로카의 먼 친척이 아닐까 짐작했지만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배 타고 왔지. 아, 영주님이 예전에 우리 아빠와 친한 사이였대.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그 말을 끝으로 드디어 카린이 입을 다물었다. 조반니는 자기 이야기를 더 꺼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너처럼 처음 보는 사람과 잘 떠드는 편은 아닌데, 나도 엄마가 없어. 당연히 아빠도 없고. 성당에 산다는 건 성당 뒤에 있는 고아원에 산다는 말이었어.”

카린은 조반니가 고아라는 말을 듣고도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두 분다 이 세상에 안 계시니?”

카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반니는 그녀가 나이에 비해 말투가 어른스럽다고 느껴졌다.

“글쎄, 수녀님도 잘 모른데. 아마 내가 어려서 자세한 이야기를 안해주는 것 같아. 더 크면 알게 될 거라곤 하지만 내 생각엔······ 아니다.”

조반니는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카린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렇구나. 나도 부모님이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나탈리의 말로는 어느 날 내가 작은 나무 궤짝에 담겨서 해변으로 밀려 왔대.”

조반니는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상자가 튼튼했나 보다. 안 가라앉고 해변까지 밀려온 걸 보니.”

“풉, 나도 내 무게를 그 상자가 지탱했다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어.”

카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조반니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거야? 이건 다 네가 만든 거야? 와! 너 화살도 쏠 줄 알아?”

주위를 둘러보던 카린이 또다시 질문을 쏟아냈다.

“어, 조금. 여긴 내가 훈련하려고 만든 곳이야. 실제로 내가 다 만든 건 아니고. 드레이가 만들어 준 게 많아. 그는 손재주가 좋은 친구야. 여기서 수련하는 데는 별로 관심 없지만.”

신이 난 조반니가 열심히 설명했다. 카린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근위병이 되는 게 꿈이야. 근사한 근위병이 되어서 해적들을 다 무찔러버리고 싶어.”

조반니는 내친김에 허리에 차고 있던 목검까지 뽑아 허공에 휘둘러 보였다.

“와! 멋지다! 혹시 내게도 가르쳐줄 수 있어? 검술이나 활 쏘는 거.”

“음, 어려울 건 없지만 여자애들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던데······”

조반니는 그녀가 이국적인 외모만큼이나 특이한 취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나도 너처럼 검술 실력을 키워서 선원이 되고 싶어. 그래서 어딘가에 살고 있을 우리 아빠를 찾아갈 거야.”

카린은 마치 인생의 스승이라도 만난 것처럼 기뻐하였다.

“좋은 생각이야. 가능하다면 내일 이 시간에 또 나와. 칼 휘두르는 법부터 가르쳐 줄게. 물론 나도 아직 잘하는 건 아니야.”

조반니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카린 덕분에 괜히 우쭐해졌다. 이게 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이라 여겨졌다.

“좋아. 아! 이제 성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네.”

숲이 더 어두워졌다는 것을 느낀 카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늦게 가면 걱정할지도 모르니까 난 이만 가볼게. 우리 꼭 내일 만나!

카린은 조반니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반대편 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조반니는 사슴처럼 뛰어가는 그녀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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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화. 다가온 운명 1 20.07.05 54 0 12쪽
12 11화. 세 사람 20.07.04 54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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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9화. 서로 다른 길 2 20.07.02 62 1 12쪽
9 8화. 서로 다른 길 1 +2 20.07.01 78 2 14쪽
8 7화. 트라몬토 탐험 4 20.06.30 71 2 14쪽
7 6화. 트라몬토 탐험 3 20.06.29 74 2 14쪽
6 5화. 트라몬토 탐험 2 20.06.28 85 2 15쪽
5 4화. 트라몬토 탐험 1 +2 20.06.27 160 2 16쪽
» 3화. 타란티아의 아이들 +2 20.06.26 209 2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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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화. 새로운 식구1 20.06.24 457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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