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케빈가넷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 배의 주인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케빈가넷
그림/삽화
케빈가넷
작품등록일 :
2020.06.23 22:47
최근연재일 :
2021.06.04 00:00
연재수 :
75 회
조회수 :
5,557
추천수 :
33
글자수 :
501,682

작성
20.07.05 19:45
조회
53
추천
0
글자
12쪽

12화. 다가온 운명 1

DUMMY

1534년 여름. 타란티아, 이탈리아 남부.


타란티아 앞바다에는 꽤 솜씨 좋은 조선소에서 건조했을 법한 육중한 갤리선이 등장했다. 그 배는 빠른 속도로 돌무더기 방파제까지 넘어섰지만 곧바로 닻을 던져야 했다. 내항의 수심이 깊지 않은 탓에 더 이상의 접안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배가 멈춰 서자 신속하게 작은 보트 하나가 내려왔다. 보트는 승객 하나를 선착장에 내리고는 재빠르게 본선으로 되돌아갔다. 닻을 끌어올린 갤리선은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전에 서둘러 뱃머리를 돌렸다. 배는 순식간에 트라몬토 섬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듣던 대로 위치가 훌륭하군.”

부둣가로 올라선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금빛 수염이 덥수룩한 백인 사내였다. 햇볕에 그을려 피부색이 붉고 전체적으로 행색이 남루했지만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지나가는 부둣가의 짐꾼을 불러 세웠다.

“영주님이 계신 성채가 어디인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짐꾼은 아나스 성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을 가리켰다. 사내는 가져온 작은 등짐을 울러 매고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원에서 그를 발견한 비올리가 황급히 안토니오를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전갈을 받고 나온 안토니오는 예정된 손님이 없었기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낯익은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하고 금세 환한 표정이 되었다.

“하하, 아니 이게 누군가? 이것 봐! 발레트잖아?”

안토니오는 마치 죽은 친구라도 살아 돌아온 것처럼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무관님. 아, 이제 영주님 인가요?”

발레트라 불린 프랑스 출신의 사내는 안토니오의 손을 격의 없이 맞잡았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엘레네, 안에 있는가? 여기 발레트 경이 왔소.”

남편의 보기 드문 호들갑에 내실에 있던 엘레네도 급히 응접실로 나왔다. 발레트는 엘레네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응접실의 투박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부인, 영주님의 성 치고는 꽤나 소박하군요. 역시 드니로 가문답습니다.”

발레트는 성 내부를 둘러보며 엘레네와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가요? 이 곳에 온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손님 같은 기분이에요.”

엘레네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래 여긴 우리가 돌아올 곳은 아니었지. 그나저나 기사단이 몰타 섬으로 갔다는 소식은 얼마전에 들었네.”

안토니오는 비올리에게 포도주를 주문하고 발레트의 맞은편에 기대 앉았다.

“네. 생각보다 땅이 척박해서 아직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만 이제 자리는 조금 잡힌 것 같습니다. 성채도 어느 정도 지어졌고요. 단장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죠.”

발레트는 안토니오가 궁금해하던 기사단의 근황을 전했다.

“저는 작년부터 기사단의 훈련교관을 맡고 있습니다. 아직도 새로 합류하는 인원들이 꽤 있어서요.”

안토니오는 옛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졌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몰타 섬으로 가게 될지는 상상도 못했건만······”

안토니오는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살피던 발레트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재무관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안토니오는 발레트의 시선이 엘레네에게 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괜찮네. 편하게 말해도 좋아. 엘레네도 우리 기사단의 일원이지 않은가?”

발레트는 안토니오의 말에도 잠시 망설였다. 이내 포도주로 살짝 목을 축인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흠······ 그럼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릴라당 단장님은 재무관님이 기사단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제가 오늘 긴급하게 이곳을 방문한 이유입니다.”

발레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털어놓았다. 편안하던 안토니오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중요한 목적을 갖고 방문했을 것이라고는 짐작했지만 그의 요청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미소를 띈 채 앉아 있던 엘레네도 일순간에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일개 재무관인 내가 간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안토니오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그게 사실······ 지금 단장님의 건강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성채 축조 중에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가 상태가 더 악화된 것 같습니다.”

발레트의 얼굴에서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안토니오는 그제서야 기사단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게 정말인가? 얼마나 안 좋은가?”

“아마도······ 치료를 맡고 있는 생제르 경의 판단으로는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합니다.”

발레트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단장님께선 드니로 경이 기사단으로 돌아와 젊은 기사들의 중심을 잡아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발레트의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엘레네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폰테 공작이나 생제르 경도 있지 않나? 게다가 난 전투를 담당하는 기사가 아니네.”

안토니오는 기사단장이 왜 자신을 지목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기사단을 이끌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방금 말씀하신 분들은 단장직을 오래 수행하기엔 너무 고령입니다. 그렇다고 아직 젊은 제가 그 자리를 맡기에는 경륜이 부족하구요. 지금은 모든 것이 과도기입니다. 그런 이유로 로도스 방어전을 이끌었던 세대의 지도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발레트는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머리가 복잡해진 안토니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현재 기사단 내의 동요가 심합니다. 본토에서 오는 지원은 점점 줄어들고 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단장님이 계셔서 잘 버텨왔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런지······”

발레트의 충심 어린 부탁에도 안토니오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발레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드리는 요청이라 고민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그럼 시간을 좀 더 갖고······”

“발레트, 난 로도스 요새가 함락된 이후로 자네나 다른 젊은 기사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쉽게 지워지지가 않아. 우리가 좀더 현명했더라면······ 우리가 좀더 치열했더라면······ 하는 후회들이 가슴 속에 가득해.”

이제 마흔이 조금 넘은 안토니오의 얼굴에 회한이 서렸다.

“그런 말씀을 듣고자 요청을 드린 게 아닌데······”

발레트는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안토니오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발레트를 응시하였다.

“로도스를 떠나와 이곳으로 돌아온 지 12년간, 단 한번도 흰 십자가를 잊은 적이 없네. 오늘 자네를 보니 내게 주어진 숙명을 저버린 채 산 것 같아 마음이 무겁네.”

내실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엘레네의 손끝이 떨렸다.

“내가 돌아가겠네. 결국 기사단은 내가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무덤이야. 그곳이 신이 주신 숙명이자 안식처이니 신의 부름에 응답하겠네.”

장고를 거듭한 안토니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발레트는 그의 사명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다만 가족들을 데리고 갈 순 없으니 내게 시간을 주게.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대로 바로 넘어갈 테니.”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발레트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임무를 띄고 온 그로서는 이제야 긴장이 풀렸다. 오랜만에 해후한 둘은 그 뒤로도 이런 저런 지나간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나눴다. 해가 기울 무렵이 되어서야 발레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긴 협소하니 선착장 근처의 여관에 숙소를 마련해 두겠네. 기왕 멀리 온 거 푹 쉬었다 돌아가게.”

“저도 그러고 싶지만 오래 머물진 못합니다. 워낙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지라.”

그의 말대로 현재 성 요한 기사단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고보니 빅토르가 보이지 않는군요.”

안토니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발레트가 물었다.

“아, 맞아. 내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 빅토르는 고향에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웠네. 한달 전에 출발했으니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에 다시 여기로 돌아올 걸세. 그러고보니 자네와 빅토르는 막상막하의 상대가 아니었나?”

“하하하, 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저도 그 친구 못 본지가 똑같이 12년이 지났네요. 적어도 얼굴은 보고 귀환해야겠군요.”

발레트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성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을 나온 안토니오는 집무실로 돌아왔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

가만히 앉아 벽을 바라보던 안토니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그것을 넘겨줄 시간인가······”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반대편 벽을 차지하고 있던 떡갈나무 서랍장을 옆으로 밀었다. 육중한 서랍장을 밀어내고 바닥을 덮고 있던 양탄자를 걷어내니 손잡이도 없는 평평한 석판이 나타났다. 안토니오는 무릎을 꿇고 주머니 칼을 돌 틈으로 밀어 넣어 석판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는 벨벳 천과 호두나무를 사용해 만든 정육면체 모양의 작은 보석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 안에 있던 물건을 밖으로 꺼냈다.

“여전히 변함이 없군.”

그것은 하얗고 우둘투둘한 돌을 황금 장식으로 감싸 놓은 독특한 모양의 브로치였다. 돌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돌멩이는 아니었다. 표면이 거칠고 투박해도 인공적인 절삭면과 광택을 지녔기에 광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해 보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광석의 내부에서 희미하게 푸른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브로치를 돌려가며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카이론, 그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안토니오는 공허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나스 성에서 나온 발레트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다시 타란티아의 선착장 쪽으로 내려왔다.

“마을이 원래 이렇게 소란스러운 편인가?”

여관으로 걸어가던 그는 시장 쪽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악기소리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곧 성모 승천일 축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일이지만 벌써부터 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죠. 아마 낮 동안은 많이 시끄러울 겁니다.”

하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마 저 시장안에 여인숙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주 중심부는 아니고 시장이 끝나는 무렵에 위치해 있죠. 너무 걱정 마세요. 해가 지고 나면 지금처럼 시끄럽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하인의 말과는 달리 시장 주변은 점점 더 축제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발레트는 어린 나이에 신에게 육신을 받치기로 맹세한 이후 지금까지 금욕적인 생활만을 해왔다. 당연히 이처럼 웃고 즐기는 분위기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병사들이 아닌가?”

발레트는 술집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한 무리의 병사들을 발견하였다. 병사들이 먼저 하인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이, 페레로. 옆에 그 자는 누구야?”

병사들은 이미 취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축제지만 적당히 마셔요. 난 영주님에게 온 손님을 숙소로 안내하는 중이랍니다.”

하인은 적당히 대거리하고 곧장 다시 걸었다. 병사들은 낯선 이방인을 보고 잠시 행색을 살폈지만 금방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아는 자들인가?”

“네. 아나스 성을 경비하는 근위병들입니다. 병사들 중에 근무 성적이 우수한 자들을 골라 영주님께서 특별히 휴가를 주셨죠.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둘은 여관 입구에 다다랐다. 하인은 발레트를 여관 주인에게 안내하고 성으로 되돌아갔다. 발레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번잡하기 짝이 없는 여관 앞 광장을 노려보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 배의 주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 14화. 아버지의 과거 1 20.07.07 55 0 13쪽
14 13화. 다가온 운명 2 20.07.06 51 0 14쪽
» 12화. 다가온 운명 1 20.07.05 54 0 12쪽
12 11화. 세 사람 20.07.04 53 2 17쪽
11 10화. 완벽한 제안 20.07.03 56 1 18쪽
10 9화. 서로 다른 길 2 20.07.02 61 1 12쪽
9 8화. 서로 다른 길 1 +2 20.07.01 77 2 14쪽
8 7화. 트라몬토 탐험 4 20.06.30 70 2 14쪽
7 6화. 트라몬토 탐험 3 20.06.29 72 2 14쪽
6 5화. 트라몬토 탐험 2 20.06.28 84 2 15쪽
5 4화. 트라몬토 탐험 1 +2 20.06.27 160 2 16쪽
4 3화. 타란티아의 아이들 +2 20.06.26 208 2 18쪽
3 2화. 새로운 식구 2 20.06.25 236 0 15쪽
2 1화. 새로운 식구1 20.06.24 456 1 11쪽
1 Intro. 그리스도의 검은 뱀 +2 20.06.23 643 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