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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가넷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 배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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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가넷
그림/삽화
케빈가넷
작품등록일 :
2020.06.23 22:47
최근연재일 :
2021.06.04 00:00
연재수 :
7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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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01,682

작성
20.07.0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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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화. 서로 다른 길 2

DUMMY

1534년 봄. 타란티아, 이탈리아 남부.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사이 해가 많이 기울었다. 어느새 길어진 땅거미가 모래사장을 타고 내려왔다.

“이제 그만 슬슬 일어나는 게 어때?”

친구들의 수다에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던 조반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서야 다른 아이들도 시간이 늦었음을 인지하였다. 서둘러 일어난 그들은 또 만날 날을 기약하며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로카와 조반니 그리고 카린 만이 해변에 남게 되었다. 로카도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카린.”

성당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조반니가 카린을 불러 세웠다.

“우리 새로 생겼다는 알레 등대에 가보지 않을래? 거기선 바다가 한눈에 다 보인다더라.”

“알레 등대에? 지금?”

조반니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로카와 조반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응, 지금 올라가면 아주 멋진 석양을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조반니가 붉어지는 태양을 한손으로 가리며 대답했다.

“하하. 조,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어. 어머니에게 저녁 식사 전까지는 돌아간다고 했거든.”

로카는 잠시 당황했지만 웃으며 그를 만류했다.

“그래? 그럼 로카는 영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먼저 올라가던지. 그리고 난 카린에게 물어 본거야.”

조반니가 살짝 비꼬듯 대꾸하였다. 그는 로카가 카린 대신 나서서 거절하자 기분이 상한 듯했다.

“아니······”

로카는 그제서야 조반니의 얼굴이 굳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낮에 각자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던 조반니였다. 부모가 없는 그로서는 당장 내년에 고아원을 나와야 될 처지이기에 그런 배부른 소리들을 나눌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조반니, 미안해. 아니 내 이야기는······ 오늘 대화도 많이 했고 지금은 시간도 꽤 늦었으니까······”

친구의 처지를 배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든 로카가 애써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조반니는 이미 울분이 가득해 보였다.

“무슨 대화? 오후 내내 나눈 그 빌어먹을 아버지 가업 잇는 이야기? 아, 난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듣기만 했네.”

조반니는 오스발도가 추천장을 받고도 나폴리로 가기를 내켜 하지 않는 걸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내심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에게는 그런 도움을 줄 부모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카린도 하루 종일 듣고만 있었잖아. 그래서 그냥 기분전환이나 시켜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면 안되나?”

그는 자기처럼 말수가 줄어든 카린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다. 영주의 가문에 입양되긴 했지만 그녀 역시 친부모가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를 알레 등대에 데려가 우울한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미안해, 조. 내가 생각 없이 말한 거 같다. 사과할게.”

로카는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조반니가 화를 내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야. 내가 감히 누구에게 사과를 받겠니? 네가 영주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잠시 잊었다.”

조반니가 푸념하듯 중얼거리고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해변에는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섰던 카린이 조반니의 팔을 넌지시 잡았다.

“조반니, 난 시간 괜찮으니까 우리······ 등대 구경가자. 가서 바람 좀 쐬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카린은 자기라도 나서서 그를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반니는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아 보였다. 그는 들고 있던 나무 가지를 숲 쪽으로 던지며 양 팔을 활짝 펼쳤다.

“하아······ 아니야. 내가 오늘 좀 예민했었나봐. 생각해보니 카린은 또 나와는 처지가 다른데 말이야. 알레 등대는 다음에 가자. 오늘은 먼저 들어 갈게.”

서둘러 말을 마친 조반니는 성당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난감해진 로카와 카린은 굳은 듯이 서있었다.

“조반니가 요즘 고민이 많은가 봐.”

볼에 바람을 가득 넣은 카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조반니를 바라보았다. 로카 역시 조반니의 뒷모습을 보았지만 지금으로선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와, 늦겠다! 이제 그만 가. 아주머니께서 기다리겠어.”

갑자기 카린이 쾌활한 목소리로 귀가를 재촉하였다. 로카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돌렸다. 성으로 돌아가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둘은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로카가 몇 걸음 뒤쳐져서 따라오는 카린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괜찮니?”

로카는 문득 그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뭐가?”

카린은 살짝 미소 지으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항상 밝은 모습 때문에 그녀가 가진 고민들을 궁금해해 본적이 없었다. 조반니처럼 그녀도 마음 한 구석에 어두운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어쩌면 기억에도 없는 친아버지를 그리워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야, 카린. 아무튼 넌 이 오빠만 믿으면 돼. 다른 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로카는 괜한 걱정보다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뜬금없는 그의 허세는 카린을 웃게 만들었다.

“하하하, 어디 부유한 왕국의 왕자님이라도 구해 놓았나 봐?”

실컷 웃은 카린은 로카를 앞질러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석양이 드리운 그녀의 뒷모습은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씩씩하게 올라가던 그녀가 갑자기 발걸음을 늦췄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로카, 사실 난 부모님 얼굴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어렸을 때는 아버지 얼굴이라도 언뜻언뜻 떠올랐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거의 사라지고 없어.”

로카는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그늘을 느꼈다.

“그래서 특별히 그리운 것도 없지. 다만 아직 살아 있다면 한번쯤은 만나보고 싶어. 날 버린 건지, 아님 무슨 일이 생겨서 못 오는건지······ 목에 난 이 상처는 무엇인지. 그래서······ 조만간 꼭 아버지를 찾아 나설 계획이야. 지금도 늦었지만 더 늦으면 영영 못 찾을 수도 있으니까.”

카린은 담담하게 그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고민들을 풀어놓았다.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긴 했지만 그녀의 귓불 아래에는 여전히 칼에 베인 듯한 흉터가 남아있었다.

“난 네가 이곳에서 마냥 행복한 줄만 알았어. 사는 게 불행하지 않아도 부모님이 보고싶고 찾고 싶은 게 당연한 일일 텐데······ 한번도 그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 미안해 카린.”

로카는 그녀가 얼마나 인내하며 살아왔을 지 이해되기에 가슴이 아팠다.

“아하하······ 왜 그래? 난 요즘 정말 행복해. 그냥 그건 내게 지워진 운명 같은 거라 어쩔 수 없을 뿐이야.”

카린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애써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마. 네가 부모님을 찾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 줄게. 콘스탄티노폴리스든 어디든 남아있는 흔적을 따라가 보자. 나도 이제 몇 년 후면 성인이 되니까 오늘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야.”

로카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은 늘 수호신처럼 자기 곁을 지켜주는 그를 듬직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아스라한 떨림이 느껴졌다. 애써 외면해 보려고 해도 떨림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그녀는 이 뜨거운 감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로카, 나 조반니와 둘이서 알레 등대에 구경가도 괜찮아? 아까 조반니가 다음에 같이 가자고 해서 물어보는 거야.”

크게 심호흡을 내쉰 카린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로카에게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마음이 이유 없이 긴장되었다.

“응? 아······ 알레 등대······”

카린의 질문은 로카에게도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뭐······ 원하는 대로 해. 네가 누굴 만나든 그건 너의 자유이니까. 일일이 내게 물어볼 필요는 없어.”

로카 역시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서둘러 대답하였다.

“그래? 그렇구나······ 잘 알겠어.”

카린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서 아나스 성으로 올라갔다.


한편 친구들과 헤어진 파올로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파올로! 어딜 갔다가 이제 기어들어오는 거야?”

집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에드아르도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친구들 좀 만나고 왔어요.”

파올로는 일부러 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친구들은 얼어 죽을······ 오늘같이 바쁜 날은 가게에 붙어있어야 될 거 아니야! 네 놈이 늦게 돌아온 덕분에 다른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니? 그렇게 자기만 생각해서는 가족들을 건사할 수 없어!”

에드아르도는 쉴 새 없이 아들에게 야단을 쳤다. 결국 참지못한 파올로가 대거리를 하고 말았다.

“아버지, 누누이 말했지만 전 돼지 따위나 잡아 파는 일에는 관심 없어요. 진짜! 전혀! 완벽하게 제 적성에 맞지 않아요. 필요한 돈만 모으면 베네치아로 가서 상선을 탈 생각이니까 제발 날 좀 놓아주세요!”

파올로는 해가 갈수록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었다. 큰 형이 배를 타다 재작년에 죽은 이후로 둘 사이의 다툼은 더욱 잦아졌다. 푸줏간을 물려받길 원하는 에드아르도와 어서 타란티아를 벗어나 대도시에서 큰 돈을 벌길 원하는 파올로는 애초부터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네 놈이 무슨 배를 타? 제 명에 살고 싶으면 이 일을 해야 돼. 네 형을 봐라. 바다에 나갔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렇게 날렵하던 놈도 그 모양이 되었는데 제 한 몸도 제대로 건사 못하는 놈이 무슨 배를 타며, 무슨 장사를 한다고······ 정신차려라. 이 녀석아!”

에드아르도는 아들에게 쉽게 져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바다에서 죽어버린 큰 아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기 자식이지만 저렇게 뚱뚱하고 굼뜬 파올로를 누구도 선원으로 써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배에 태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필시 사기꾼일 것이다. 그런 자들을 따라 나선다면 저 허영 가득한 아들은 큰 돈을 잃을 게 분명했다.

“에잇! 망할 집구석!”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파올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곧바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뒤에서 무어라 소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한쪽 귀로 흘렸다. 그는 어두컴컴해진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제길, 딱 뱃삯 제외하고 은전 열 개 정도만 모으면 미련없이 떠날 텐데······ 빌어먹을!”

파올로는 나름의 계획들을 셀 수없이 머리속에 그려왔다. 하지만 늘 발목을 잡는 것이 부족한 자금이라고 여겨졌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아버지의 일을 도와야 된다는 매번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은 혼자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툴툴대며 걷다 보니 어느덧 돌무더기가 쌓인 해변이 나타났다.

“응? 이 시간에 누구지?”

파올로는 웬 사내가 석양을 등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무더기 위는 이제 어둑어둑해서 사내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미지의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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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화. 다가온 운명 2 20.07.06 52 0 14쪽
13 12화. 다가온 운명 1 20.07.05 54 0 12쪽
12 11화. 세 사람 20.07.04 54 2 17쪽
11 10화. 완벽한 제안 20.07.03 59 1 18쪽
» 9화. 서로 다른 길 2 20.07.02 62 1 12쪽
9 8화. 서로 다른 길 1 +2 20.07.01 78 2 14쪽
8 7화. 트라몬토 탐험 4 20.06.30 71 2 14쪽
7 6화. 트라몬토 탐험 3 20.06.29 73 2 14쪽
6 5화. 트라몬토 탐험 2 20.06.28 85 2 15쪽
5 4화. 트라몬토 탐험 1 +2 20.06.27 160 2 16쪽
4 3화. 타란티아의 아이들 +2 20.06.26 208 2 18쪽
3 2화. 새로운 식구 2 20.06.25 236 0 15쪽
2 1화. 새로운 식구1 20.06.24 457 1 11쪽
1 Intro. 그리스도의 검은 뱀 +2 20.06.23 644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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