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케빈가넷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 배의 주인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케빈가넷
그림/삽화
케빈가넷
작품등록일 :
2020.06.23 22:47
최근연재일 :
2021.06.04 00:00
연재수 :
75 회
조회수 :
5,556
추천수 :
33
글자수 :
501,682

작성
20.07.06 10:05
조회
50
추천
0
글자
14쪽

13화. 다가온 운명 2

DUMMY

1534년 여름. 타란티아, 이탈리아 남부.


조반니와 헤어진 로카는 성 안젤로 성당에서 나와 해변 옆 둑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수평선 위로 아름다운 노을이 피어올랐지만 상념으로 가득 찬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조반니가 카린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보다 다른 것이 더 신경이 쓰였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었다.

어느 날부터 동생이 된 그녀와 지금까지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마음 한구석엔 항상 알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해왔다. 그로서는 더 키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척할 수도 없는 그런 이상한 감정들이었다. 그는 그 아스라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자기만 모른 척한다면 그대로 흘러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오늘 조반니의 고백은 그의 마음 속을 송두리째 헤집어 놓았다.

“카린이 동생이지 뭐. 루안나랑 다를 게 뭐야.”

하지만 가슴 속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그는 괜히 발에 걸린 돌멩이를 힘껏 걷어찼다. 힘차게 날아간 돌멩이는 누군가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간 뒤 멈췄다. 그에게 다가오던 익숙한 그림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로카!”

로카는 그제서야 맞은 편에서 카린이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미안. 앞에 오는지 몰랐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길래 불러도 듣지를 못할까?”

카린이 반갑게 달려와 로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여긴 어쩐 일이야?”

로카의 입에서 평소와 다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영주님이 찾아오라고 해서 잡으러 왔지.”

카린은 로카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내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날?”

“응.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함께 오라고 하셨어.”

카린은 가볍게 로카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발걸음과 맞춰 걷기 시작했다. 로카는 여느 때와 달리 그녀와 나란히 걷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기분이 별로인가 봐?”

카린은 로카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그러한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조반니하고 싸웠구나? 아까 성당에서 내려오는 길 같더니.”

그녀는 아예 몇 걸음 앞서가서 뒷걸음 치면서 말을 걸었다.

“싸우긴 무슨······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했어.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이야? 안 입던 드레스를 다 입었네.”

대답하기 곤란해진 로카가 화제를 돌렸다. 그의 말대로 카린은 또래 소녀들이 흔히 입는 드레스를 거추장스러워했다. 물론 엘레네가 옷차림을 간섭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외향적인 성격 탓이 더 컸다. 그녀는 고상한 취미보다 남자아이들처럼 활을 쏘거나 들판을 뛰어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렇다 보니 걸치는 옷들도 바지나 셔츠가 대부분이었다. 손재주가 좋은 그녀는 자신의 몸에 맞게 천을 직접 재단해서 만들어 입곤 했다.

“축일인데 입을 드레스가 없어서 한 벌 얻었어. 나를 딱하게 여긴 루안나가 빌려줬지 뭐야. 그녀의 말로는 드레스가 지금은 자기에게 좀 크대. 좀더 자라서 자기 몸에 맞을 때 까지만 내가 입으라네. 웃기지?”

카린은 그 자리에서 한 바퀴 휙 돌아 보였다. 몸에 꼭 맞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붉은 석양을 한가득 받아 황금 들녘처럼 빛이 났다. 로카는 화사한 카린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거 입고 말 타면 볼만하겠다.”

기분이 이상해진 로카가 일부러 심술궂게 말했다. 그의 놀림을 받은 카린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하지만 자신의 색다른 모습을 그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챘다. 살짝 어색해진 둘은 다시 비탈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건 그렇고 카린, 넌 왜 아버지를 꼬박꼬박 영주님이라고 불러?”

침묵이 길어지자 이번엔 로카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응?”

“아니,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본인이 직접 아버지로 불러 달라고 말씀하셨는데 너는 항상 영주님이라고 부르니까······ 당연히 아버지도 서운해하시고······ 문득 생각이 나서 물어보는 거야.”

로카는 뒤늦게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평소에 그 이유가 궁금하긴 했었다. 카린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걸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그녀가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영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왠지 우리가 진짜 남매 사이가 된 거 같잖아.”

카린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남매지. 그게 무슨······”

로카는 별 생각없이 대꾸했다. 그는 카린의 말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그게 아니라······ 아직 난 친아버지가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거든! 그래서 죄송하지만 아직은 영주님이라고 부르는 게 마음이 편해.”

당황한 카린이 얼른 친아버지 이야기를 덧붙였다.

“내 말 들었어?”

로카는 갑자기 카린의 뒷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린이 왜 자신과 남매가 되기 싫다고 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로카, 나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돼?”

카린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재빨리 다른 질문을 했다.

“응? 무슨 소원?”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가 줄 수 있어?”

카린의 입에서 또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도시이름이 나왔다. 로카는 문득 어릴 적 트라몬토 섬으로 노를 저어 가던 때가 떠올랐다.

“혹시 아버지가 거기 계실 것 같아서 그래?”

로카는 무심코 되물었다. 이내 자신의 질문이 경솔한 것 같아 속으로 자책했다.

“아니야. 거기 살고 있다면 크레타 섬에 있는 날 찾아왔겠지.”

카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나탈리가 그랬어. 내가 타고가던 배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던 배일지도 모른다고. 주로 그 도시를 드나드는 배들이 자기 고향 앞바다를 지나다닌데. 그래서 혹시 모르잖아. 거기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

“나탈리? 나탈리가 누구지?”

로카는 생소한 이름에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이야기 안 했나? 그녀는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지내던 선술집의 여주인이야. 날 키워준 엄마이기도 하고.”

“엄마라고?”

로카로선 처음 듣는 그녀의 과거 이야기였다.

“응. 날 너무 사랑해서 당연히 친엄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어. 나탈리 말로는 폭풍우가 몰아친 다음 날 바다에 나가보니 내가 누워 있었대. 나무 궤짝에 담겨서 해변가로 밀려왔다고 그랬어. 난파된 배의 부유물들도 같이.”

카린은 오랜만에 나탈리에 대한 기억을 꺼냈다. 어릴 때 숲 속에서 만난 조반니에게 말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 해변이 그럼······”

“거긴 사리아 섬이야. 작은 어촌 마을인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길목에 있대. 나탈리의 고향이기도 하고. 그녀는 나를 먹이고 키우기 위해 크레타 섬으로 넘어왔다고 했어.”

카린은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탈리는 좋은 사람이었나 보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나탈리의 얼굴을 떠올린 카린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땐 너도 어렸을 텐데 꽤 많은 대화를 나눴구나.”

로카는 그녀의 과거 이야기가 신기했다.

“그건······ 그녀 역시 외로웠으니까. 내가 아직 말귀를 못 알아듣던 때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게 많이 한 것 같아.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뭐······ 난 그녀를 ‘맘탈리’ 라고 불렀어. 그때의 우린 정말 행복했었지. 그래서 그녀가 날 이곳으로 보내 버린 것에 대해 한때는 원망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나를 위해서 어려운 결단을 내린 거니까 이젠 다 이해해. 맘탈리도 엄청 힘들었을 거야.”

카린은 나탈리와 헤어지던 날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떠올렸다. 로카는 나탈리의 입장을 이해하는 그녀의 속 깊은 마음에 내심 감탄했다.

“너에겐 나탈리가 어머니였네. 그래서 늘 아버지만 찾는 거야?”

“글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맘탈리가 엄마의 자리를 채워줘서 그런가······ 날 낳아준 엄마가 누구인진 별로 궁금하지 않아. 게다가 이상하게 아빠의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를 때가 있어도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거든. 아빠는 선명하지는 않아도 때때로 생각이 나. 심지어 꿈에 나타난 적도 있으니까······”

“그렇구나······ 혹시 아버지를 찾을 만한 다른 단서는 없어?”

그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음······ 글쎄······ 워낙에 아무것도 없어서······ 아! 날 감싼 포대기에 뭔가 적혀 있었어. 하지만 그땐 나도 그렇고 나탈리도 그렇고 글을 읽을 줄 몰랐거든. 손님들 중에도 글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뜻은 몰라도 유일하게 알아본 글자가 ‘카린 미케네’였어. 그게 내 이름인가 했지.”

골똘히 기억을 떠올리려던 카린이 갑자기 이마를 탁 쳤다.

“그 포대기를 가지고 올 걸! 이젠 나도 글을 읽을 줄 아는데.”

“그랬으면 좋았겠다. 그래도 괜찮아. 지금이라도 칸디아 항구에 가서 찾아보면 되니까.”

로카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슬며시 웃었다.

“내 생각엔······ 영주님이 우리 아버지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아. 아마 내가 멋대로 떠나버릴까 봐 이야기를 안 하는 거 같았거든.”

카린은 나름 확신을 가지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게도 네 아버지가 그냥 친구라고만 했을 뿐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았어. 내가 좀더 자란 다음에 이야기해준다고 했으니 조만간 알려 주실지도 몰라. 생각난 김에 이제는 말해달라고 여쭤 볼게.”

로카는 어떻게든 카린의 오랜 고민을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와 아버지에게서 들은 단편적인 단서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보들을 모아보곤 했다.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 조금만 더 크면 꼭 네 아버지를 찾으러 가자. 콘스탄티노폴리스든 어디든 있을 만한 곳은 모두 뒤져보는 거야.”

“정말? 약속한 거다?”

기약 없는 약속이지만 카린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응. 그런데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벌써 헤어진 지 12년이나 지났고 또······ 사실은 내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해서는 좀 알아봤는데, 거긴 예전보다 가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대.”

로카는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는 걸 알기에 현실적인 제약들을 먼저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전에 재무대신인 마시모 라비에르에게 그 도시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가기 힘들다고? 왜?”

“아무래도 그 곳은 이제 이교도들의 수도이니까. 시간이 갈수록 우리 같은 이탈리아인들은 방문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 만약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이 전쟁이라도 하게 되는 날에는 아예 드나들 수조차 없게 된다고 했어. 그래도 아직은 정기 상선대가 다니긴 하지만······ 이건 얼마 전에 라비에르 대신에게서 들은 내용이야.”

로카의 설명을 들은 카린이 다시 차분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렇군······ 뭐, 괜찮아! 나도 크게 기대는 안 해. 다만 내가 왜 혼자 떨어지게 된 건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의 다른 가족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정도? 운 좋게 그 곳에 가게 된다면 거기 누군가는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녀는 생각보다 씩씩하고 단단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로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조반니하고는 무슨 이야기했어? 아까 만났다고 들은 거 같은데. 이거 아까 내가 물었었나?”

로카는 카린이 자신과 조반니가 나눈 대화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조반니가 한 말들을 그녀에게 옮기고 싶지 않았다.

“별 이야기 아니었어. 미래에 대한 이런 저런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야.”

로카는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이 참에 그녀가 조반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조반니는 참 강인한 사람인 것 같아. 나와 같은 고아이면서도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게 다 세워져 있더라.”

뜻밖에도 카린이 먼저 조반니의 계획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조반니와 만났었니?”

로카는 무심결에 목소리가 올라갔다.

“어? 아, 그게······ 며칠 전 성당에 심부름 갔다가 잠깐 만나 대화 했었어.”

카린 역시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와 함께 알레 등대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랬구나······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이 있던데?”

로카는 모르는 척 물었다.

“응? 그게······ 구체적으로 들은 건 아니고······ 해군에 입대한 뒤에 성공해서 다시 돌아올 거래. 뭔가 할말이 더 남은 거 같긴 했지만, 더 이상은 말 안하더라구.”

카린도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빼놓고 말했다. 로카는 그녀가 왠지 조반니의 모든 계획을 들었을 것만 같았다.

“카린, 너는 만약에······”

참지 못한 로카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카를 쳐다보았다. 로카는 갑자기 그녀의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워졌다

“아니야, 아무것도. 이러다 늦겠다. 지금부터는 뛰어 가야겠어!"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한 로카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 배의 주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 14화. 아버지의 과거 1 20.07.07 55 0 13쪽
» 13화. 다가온 운명 2 20.07.06 51 0 14쪽
13 12화. 다가온 운명 1 20.07.05 53 0 12쪽
12 11화. 세 사람 20.07.04 53 2 17쪽
11 10화. 완벽한 제안 20.07.03 56 1 18쪽
10 9화. 서로 다른 길 2 20.07.02 61 1 12쪽
9 8화. 서로 다른 길 1 +2 20.07.01 77 2 14쪽
8 7화. 트라몬토 탐험 4 20.06.30 70 2 14쪽
7 6화. 트라몬토 탐험 3 20.06.29 72 2 14쪽
6 5화. 트라몬토 탐험 2 20.06.28 84 2 15쪽
5 4화. 트라몬토 탐험 1 +2 20.06.27 160 2 16쪽
4 3화. 타란티아의 아이들 +2 20.06.26 208 2 18쪽
3 2화. 새로운 식구 2 20.06.25 236 0 15쪽
2 1화. 새로운 식구1 20.06.24 456 1 11쪽
1 Intro. 그리스도의 검은 뱀 +2 20.06.23 643 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