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계약 조건을 바꿔볼까요?
집 근처의 카페테리아.
별도의 분리된 회의 공간에 나은태 팀장님과 나, 그리고 샹송 그룹의 양지석 변호사가 마주 보고 앉았다.
“몸은 정말 괜찮습니까?”
“네, 변호사님.”
“놀랍군요. 어쨌든 정말 다행입니다. 쓰읍······.”
뭔가 잘 안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나은태 팀장님도 답답했는지, 양지석 변호사를 재촉했다.
“편하게 말씀해주시죠. 도탄이도, 저도 상황을 알아야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럼 좋은 소식부터 들려주시죠.”
“유도탄 선수가 말했던 토트넘 하스피탈 FC와의 계약이 잘 성사되었습니다.”
“오!”
나은태 팀장님이 감탄성과 함께 내 손을 잡았다.
팀장님도 나만큼이나 기쁜 모양이다.
잠깐, 그럼 나쁜 소식은 뭐지?
“나쁜 소식은 뭡니까?”
“그 계약이 보류됐다는 겁니다.”
“에?!”
양지석 변호사가 서류를 꺼내 보여 준다.
영어로 되어 있는 서류 더미.
하지만 한글 요약본으로도 준비되어 있어서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토트넘 하스피탈 FC이 수원 그리폰 FC에게 이적료 20억을 지급하고 나를 영입하는 계약.
하지만, 수면 아래에 있는 계약 조건에는 첫 5경기 출전조항이 숨어 있었다.
선발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어쨌든 90분 안에 출전시키는 출전조항이었다.
그 대가는 샹송그룹의 200억 원 마케팅 협찬 조항.
이런저런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대가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실상은 나를 영입하는 대가로 주는 돈이었다. 그중에서 20억 원이 수원 그리폰 FC로 다시 돌아가는 구조였고.
“유도탄 연봉 조건은 없네요?”
“네. 일단 영입을 확정한 후 선수 의사를 파악해서 연봉 조건을 협상하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유도탄 선수는 토트넘 하스피탈만 원했으니까요.”
“아······.”
“그런데 아시다시피 아주 큰 자동차 사고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나은태 팀장님은 어차피 영입 대가로 주는 돈이 있는데, 사고가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이었다. 나도 사실 그게 궁금했다.
“첫 5경기 출전조항에서 이견이 생겼습니다.”
“네?”
“선수가 부상이라면, 돈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출전시킬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보다시피 도탄이는 멀쩡합니다.”
“다행이군요. 사실 경기 출전은 토트넘보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항입니다.”
“이로미 양 때문인가요?”
“맞습니다.”
이로미가 날 좋아하는 이유는 경기장에서의 역동적인 모습 때문이라고 했다.
예측할 수 없는 플레이, 누구보다 빠르고 전투적인 모습.
여기에 잘생긴 얼굴과 훌륭한 몸매. 흠흠.
어쨌든 병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는 모습은 내가 경기에서 열심히 뛰는 모습이라는 것.
경기에 뛰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의 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EPL선수에게 200억 원을 쓸 이유가 이태영 회장에게는 없는 것이다.
“토트넘 하스피탈의 감독도 부담스러워하고요. 감독으로서도 부상 선수를 무조건 출전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현재 토트넘 하스피탈 FC의 감독은 ‘언제 포스터로갈래’였다.
호주 축구 선수 출신으로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과 아시아 프로축구 감독을 경험한 전략가.
스코틀랜드 리그에서의 좋은 모습을 바탕으로 토트넘 하스피탈 FC의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이로미 양이 받을 충격을 고려해 현재 유도탄 선수의 기사를 못 보도록 조치했습니다. 하지만 오래 갈 수는 없죠. 그래서, 일단 두 가지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부탁이라고 포장한 계약 이행 요청.
이미 돈을 썼으니 최대한 맞춰서 따라야 한다.
“첫째, 오늘 중으로 이로미 양을 깜짝 방문하셔서 7월 20일 홈경기에 초대한다고 하십시오.”
이로미가 사고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기 전에 내가 멀쩡함을 직접 인증하라는 것.
하긴,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무사함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고였으니까.
“둘째, 7월 20일 홈경기에 반드시 출전하고, 반드시 골을 넣을 것.”
“아니! 양변호사님! 출전이야 뭐 가능하겠지만, 골은 그렇게 간단히 넣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축구라는 게, 공은 둥글다는 말 들어보셨죠? 강팀도 약팀에게 지는 것이 축구입니다!”
나은태 팀장님의 열변에도 양지석 변호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뭔가 준비된 논리가 있는 모양인데?
“보통은 그렇지요. 하지만! 최근 유도탄 선수는 골을 넣을 수 있는데도, 어시스트만 하더군요. 아닌가요?”
어라, 들켰네.
어떻게 알았지?
“도탄아, 정말이냐? 왜 그런 거야?”
“이로미 양과 약속한 골 세리머니 때문입니까?”
이것도 들켰네.
감이 좋은 변호사일세.
할 수 없이 다 말해야겠다.
“네······.”
“이로미 양이 의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닐까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은 병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죠. 아니, 오히려 병을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비약이 조금 있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 약속을 한 내 잘못이다.
이태영 회장과 맺은 시크릿 계약 조건에는 이로미와의 정기적인 만남 외에 일정 횟수의 비정기 만남 조항이 있었다.
그리고 이로미 양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라는 조항도 있었고.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런 상황까지 예견한 거였구나.
“골을 넣을 수 있는 찬스가 왔을 때, 일부러 피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로미 양을 만났을 때 그 마음을 전해주시죠. 그러면, 이로미 양도 안심할 겁니다.”
“네.”
“이렇게 경기에 출전해서 골까지 넣으면, 이로미 양 문제도 또 토트넘 하스피탈 FC와의 문제도 잘 마무리될 겁니다. 그러면 최대한 빠르게 절차를 밟아서, 8월에는 EPL에서 뛸 수 있을 겁니다.”
양지석 변호사가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커피를 마저 마시고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요?”
“영입 관련 계약 조건을 바꿨으면 합니다.”
“네?”
“수원 그리폰 FC에게 줄 이적료 20억 원은 너무 적습니다.”
내가 새롭게 제시한 조건은 이적료 20억 원 플러스 이번 시즌 공격포인트 10을 기록할 시 30억 원 추가 이적료 지급, 그리고 공격포인트 5를 추가할 때마다 5억 원의 추가 이적료 지급이었다.
시즌 중에 팀을 옮기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내 첫 팀인 수원 그리폰 FC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그 정도 기록을 올리는 선수라면 EPL 팀 입장에서도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아니 대박이죠. 겨우 50억 원에 공격포인트 10을 기록하는 선수라? 이야, 이 정도면 EPL에서는 껌값으로 장어를 산 거나 다름없어요!”
내 속마음을 이해한 나은태 팀장님의 지원사격.
고맙습니다.
“흠······. 그렇다면 조율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가 첫 해에 공격포인트 20을 기록하면, 샹송그룹이 토트넘 하스피탈에 제공한 200억 원을 반환하는 조건입니다.”
“뭐라고요?”
“저는 시간이 문제지, 단계를 밟으면 언젠가는 EPL에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더 빨리 갈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하고 싶지도 않고요. 다만 저 자신과 샹송그룹, 특히 이태영 회장님에게 제 실력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런······.”
“EPL에서 공격포인트 20이면 대박이에요! 지난 시즌에 20명 밖에 없었어요! 걔들이 몸값이 얼만 줄 아십니까?”
내가 말할 때 휴대폰으로 열심히 검색을 하시더니, 기록을 찾아보셨구나.
또 한 번 고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 입장에서는 그런 조건을 안 받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만약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샤날 FC에 제안을 하겠다고 하시죠.”
토트넘의 북런던 더비 상대인 아샤날.
라이벌 팀에게 이 계약을 빼앗기는 건 싫을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혹시라도 정말 20포인트를 올리는 선수가 라이벌 팀에게 간다면?
생각만 해도 악몽일 테니.
“흠······. 알겠습니다. 재미있는 계약이 되겠군요. 회사 입장에서도 손해볼 것이 없는 수정 조항이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습니다.”
“또?”
그래, 또 있다.
그리고 이게 핵심이다.
“제가 20포인트 이상을 기록해서 샹송그룹이 토트넘 하스피탈에 제공한 200억 원을 되돌려 받게 된다면, 50%를 저와 계약한 매니지먼트에 투자하는 조건입니다.”
나은태 팀장님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나은태 팀장님이 운영하는 <NA 스포츠>를 말하는 겁니까?”
변호사답게 꼼꼼히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이런 꼼꼼함이 나도 좋다.
“네, 그리고 리버풀에 있는 토니 유의 매니지먼트도 포함입니다.”
나의 아빠, 토니 유가 얼마 전 세운 회사, <토니 스포츠>.
아빠! 제가 투자금 밀어드릴게요!
얼른 키우세요!
***
양지석 변호사가 먼저 가고, 우리도 집으로 돌아왔다.
“팀장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어차피 너도 방금 생각했을 거 아니냐?”
“네. 듣다 보니 떠올랐어요.”
“나야 좋지, 투자금이 생기면! 25억 원이나 50억 원이나! 그게 그거······는 아니지만, 어쨌든 난 좋다! 아, 이 소식을 토니 유에게 알리기에는 아직 이르지?”
“네. 설명하셔야할 게 많을 것 같아요.”
“그래. 성사되면, 그냥 우리가 땄다고 하고 연결해주자. 설명하기에 너무 복잡해.”
오랜만에 아빠 이야기를 했더니, 아빠가 보고 싶다.
다리 재활은 잘 되고 계실까?
아빠가 세운 <토니 스포츠>는 잘 돌아가고 있을까?
직원은 뽑으셨나?
“도탄아. 그럼 너도 얼른 팀으로 돌아가서 훈련해야지. 그래야 경기 뛸 거 아니냐.”
“아, 그런데 오늘 이로미를 보러 가기로 해서요.”
“아, 맞네.”
“내일 아침 일찍 클럽하우스로 복귀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오랜만에 철진이랑 너랑 나랑, 남자 셋이서 고기 파티 해볼까?”
“팀장님이 쏘시는 건가요?”
“그렇지!”
“그럼 한우집 찾아볼게요!!”
“냉장고에 있다. 어제 장 봐놨어.”
“아······. 너무해.”
“짜식이. 야, 얼른 깻잎부터 씻어. 열 묶음 사놨으니까 다 씻어라.”
“고구마랑 버섯은요?”
“당연히 사놨지. 그것도 씻어라!”
“네!”
고기를 먹고, 저녁이 되어 이로미를 만났다.
같이 사고 영상을 보면서 충격을 완화해 주었고, 다음 경기 골 약속도 했다.
비겁하게 어시스트만 하면서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일주일이 지나고 23R 충북청주 사자 FC와의 홈경기 날인 7월 20일 토요일이 되었다.
그리고 토트넘 하스피탈 FC의 EPL 개막전인 8월 13일 일요일, 브렌트피드 원정 경기까지는 23일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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