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윤조지 님의 서재입니다.

리퍼스(REAPERS)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윤조지
작품등록일 :
2014.08.31 20:54
최근연재일 :
2014.11.28 23:50
연재수 :
76 회
조회수 :
24,981
추천수 :
182
글자수 :
548,127

작성
14.11.06 18:59
조회
374
추천
7
글자
18쪽

60 [마지막 남은 나의 성역(聖域)]

DUMMY

REAPERS (리퍼스) 60 [마지막 남은 나의 성역(聖域)]


침묵이라는 커다란 입이 시간의 귀퉁이를 한 입에 베어 물기라도 한 듯 정적이 흘렀다. 정지된 화면처럼 모두가 미동도 하지 않고 소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소운은 코로 한숨을 내쉬며 대놓고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까딱까딱했고, 입을 삐죽거렸다.


“제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데요?”


그가 양쪽 입꼬리를 쭉 찢어 큰 웃음을 입에 띄웠다.


“이상하네요, 이상해. 오늘따라 뭔가가 이상해.”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걷기 시작했다. 라운지 한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되돌아 다른 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평소라면 말이죠. 여러분은 굉장히 상기된 표정으로 소파에 둘러앉아,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제 입만 바라보고 있었을 거예요. 다음 행선지를 알려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요. 그런데 말이죠…… 이상해요. 그게 참 이상해요.”


뚜벅뚜벅 하고 소운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만 조용한 라운지에 시계바늘 소리처럼 울렸다.


“살인과 혼란과 비명과 피 내음에 목을 매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다음 임무만을 기다리던 여러분의 눈빛은 대체 어디로 갔죠? 어째서 그런, 재미없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날 보는 거죠? 왜, 대체, 죽은 해파리가 해류에 쓸려 다니는 것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거죠? 피가 끓지 않나요? 다음 제거상대가 케이듀 로니 경이라고요. 아덴에서 열리는 대대적인 행사에 참여할 케이듀 로니 경을, 철통경비를 뚫고, 호위를 맡을 크루세이더를 제치고, 어떻게든 죽여서, 다시 철통경비를 뚫고, 다시 어떻게든 크루세이더를 제쳐서, 살아서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와야 하는 엄청나게 짜릿하고 어려운 미션이라고요. 그런데도 흥미가 생기지 않나요? 그런데도 계속 그런 썩은 동태 같은 눈깔로 날 바라보고 있을 건가요?”


소파 위에 드러누워 있던 이지가 몸을 일으켰다. 소운은 발걸음을 딱 멈추고 서 그를 주시했다. 그러나 이지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잠시 시간차를 두고 토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미있겠네.”


성의 없이 이렇게 한마디 던지고는 계단을 타고 바깥 발코니까지 성큼성큼 올라갔다.


“세부적인 돌파방법은 라네위가 알아서 맡겠지.”


라네위는 소파에 기대어 서서 피곤한 듯이 미간을 문질렀다.


“역시 또 머리 쓰는 일은 다 내 차지로군. 뭐, 저 놈들 머릿속을 탈탈 털어내 보려고 애써 봤자 나만 고역이겠지. 차라리 나 혼자 생각해내는 게 편해.”


코코는 피곤해 보이는 라네위와, 한 자리에 가만히 멈춰서 남은 두 사람을 부담스럽게 주시하고 있는 소운, 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시선이 소운과 맞닿자 그녀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더니, 황급히 자리를 피해 주방 안으로 달아났다.


그것을 지켜보는 소운의 입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그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놈들의 유통기한이 끝에 다다랐다는 Z님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음? 뭐라고 하셨어요?”


한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라네위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들어 그에게 물었다.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임무수행일 사흘 전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그가 싱긋 웃으며 대충 넘어갔다. 라네위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푹신한 소파 위로 푹 주저앉았다.


소운은 그에게서 등을 완전히 돌리고는 잿빛 상공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놈들을 써먹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 *


토야는 나사처럼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계단을 탔다. 무거운 발을 천천히 끌며. 계단 끝까지 오른 그는 멈칫, 했다. 얇은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놓고, 그 너머의 갑판 위에 흰 옷자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세유가 서 있었다. 그의 짧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바이올린의 현을 켜 듯 부드럽게 일렁였다. 토야는 한 자리에 멈춰서서, 바람 속으로 녹아들 것만 같이 투명한 세유의 모습을 눈 속에 담았다. 그러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유리벽을 살포시 밀었다.


벽이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그의 무거운 부츠가 나무 갑판 위에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바람결에 몸을 맡기고 선 세유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토야의 가슴에 바람이 일었다. 부드럽게, 하지만 강하게 그의 심장을 밀쳤다.


“기력은 차렸는가?”


무심코 던져 본 말처럼, 세유의 목소리가 바람에 쓸려 솟았다가 저 멀리 날아가 사라졌다. 질문을 해놓고도 그는 대답에는 관심이 없는 듯 고개를 돌려 난간을 손으로 쓸며 바람 속을 걸었다. 그는 맨발로 서늘한 나무바닥 위를 걸었다.


세유는 아름다웠다. 그의 옷자락은 흰 돛처럼 펄럭였고, 얇은 천 아래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다리가 투명하게 빛났다. 그의 눈동자는 새벽이슬처럼 영롱했고, 잿빛 하늘과 대비되어 따뜻하고 포근한 빛을 품었다. 그 작은 몸으로 멋대로 불어대는 바람을 가슴 안에 끌어안았다.


“오늘은 울지 않는군.”


세유가 시를 낭송하듯 말했다. 그리고 토야는 사아 숲에서의 그날 밤을 생각했다. 뺨에 와 닿은 세유의 손길 하나에, 엉겨 붙은 땀과 피와 흙 사이로 흘렀던 그의 눈물을 생각했다.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창피함이 밀려왔다.


“그날, 나를 왜 기다린 거야?”


토야가 바람 속을 거니는 세유를 향해 물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울고 싶은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어째서지? 어째서 내가 울고 싶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토야의 질문에, 그가 뒤를 돌아 토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을 관통할 것만 같은 그의 투명한 시선이 토야의 얼굴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지금, 울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가? 왜지? 나는 당연히 울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된 건가? 결국엔 울었지 않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레일을 따라 너울너울 걸었다.


“그날 밤의 너는,”


세유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울고 싶어 죽겠는데 고집과 아집이 심장 속 혈관을 꽉 틀어막고 앉아있어, 울지도 화내지도 웃지도 어쩌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울었으면 해서.”


토야는 그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무기력하게 검을 질질 끌며, 핏자국을 긴 꼬리처럼 남기며, 마음을 다잡을 길이 없어 무작정 걷고 또 걷다 보니 세유 앞에 서 있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날도 세유는 오늘의 평온한 모습 그대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세유의 손길 하나에 모든 것이 툭 하고 무너져 내렸었다. 그 손길 하나에, 긴 세월 동안 꾹꾹 눌러 담고, 꽉꽉 눌러 밟아 씨앗조차 남아있을 리 없다 생각했던 눈물이, 둑이 터진 것처럼 흘러내렸다. 그렇게 쉬웠다.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웃기는군. 인간이란 원래 다 그런 것인가? 울고 싶으면 울면 될 것을, 고집스럽게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아예 등을 돌려버리는군. 손톱 밑 때만큼이나 작고 시시콜콜한 일에도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인간도 있다 하던데, 뭐가 다른 거지? 그렇다면 인간은 눈물에 강한 것인가 약한 것인가? 도무지 인간이라는 것은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워지기만 한다.”


세유의 저런 말투를 싫어했었다.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초월한 듯한 저런 말투를 너무도 싫어했었다. 어딘가 붕 떠있는 듯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세유를 둘러싼 공기를 싫어했었다. 그의 생각 하나하나, 떨리는 감정 하나하나를 다 읽고 있는 듯한 투명한 눈초리를 싫어했었다. 그리고 그 말투에, 분위기에, 시선에 흔들리고 화를 내고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자신을 무엇보다 가장 싫어했었다. 굳어지고 차가워지고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세유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유지해온 평정이 무너지는 것을 싫어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갑판 위를 춤추듯 걸으며, 바람을 작은 품 안에 끌어안은 세유의 등이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지금 갑판 위에 선 두 사람 사이의 열다섯 발자국 남짓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그 자신이 너무도 더럽게 느껴졌다. 자신은 이토록 피에 절었는데, 더럽혀지고 타락하고 지옥의 바닥까지 떨어져있는데, 세유는…… 세유는 투명했고, 깨끗했고, 순수했다. 자그마한 티끌 하나 없는, 신비로운 청정함의 결정체……였다. 감히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가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더럽혀질까 두려워, 토야는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한 채 망설이다 곧 체념했다.


세유의 말 그대로, 고집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숨기는 게 너무도 많은 그의 앞에 선 세유는 그 무엇도 숨기는 것이 없었다. 생각난 것을 그대로 말했다. 너무도 간단명료하게 짧은 말로도 그의 마음의 정곡을 푹 찔러버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주위의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은 그리도 자기 손바닥 내려다보듯이 들여다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그 어떤 감정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 얼마나 기이하고 가련한 존재인가.


“내 이야기를 들어줘.”


세유의 작은 발이 갑판 위에서 멈칫했다.


토야로서는 가까스로 꺼낸 한마디였다.


세유의 청명한 두 눈이 토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다리는 듯이. 토야는 저도 모르게 손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가 음절 하나하나를 토해내듯 말했다.


“나는, 나는 내가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할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마음이 곱고, 순수하고, 곧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어. 나를 쓸모 없다고 말하고 있었어. 내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바람이 찼다. 그래서 몸이 떨리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고문실에서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정신이 멍해지고 눈앞이 하얘졌어. 갑작스러운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처음에 그녀가 시아비라는 놈에게 협박이라도 당한 줄 알았어. 나를 정말 사랑했지만, 보호해주고 싶었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그녀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지 모른다고. 그런데 아니더라. 그녀는 놀랍도록 차분했어. 한 순간에 마음 속으로 모진 결정을 내렸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택한 길로 나아갔어. 그런 그녀의 등 뒤에선 내가 버러지 새끼처럼 땅에 얼굴을 비비며 꾸물거리고 있었어……!!”


그가 잿빛 하늘 속으로 소리질렀다. 그의 외침은 울림도 메아리도 없이 공허하게 사라졌다. 세유의 두 눈이 맑은 샘물처럼 그의 상기된 얼굴을 잔잔하게 비추었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생각을 한 건 처음이었어. 별의별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엉키고 들러붙고 뭉개져서, 억지로 꾹꾹 눌러 담은 생각들이 머리통을 비집고 새어나올 것만 같았어. 그녀가 돌변해야만 했을 이유들을 찾고 또 찾았어. 내가 내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이유들을……! 그런데 아직도 찾지 못했어. 여전히 찾고 있어. 지금도……”


예고도 없이 눈이 시큰거렸다. 호흡이 떨렸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누가 봐도 쇠나 두드리는 검 장인 집 아들보다는 돈 많은 영주 아들을 택하는 게 합리적이니까? 시아비의 노여움이 무서우니까? 나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본인은 살고 싶으니까? 모든 것을 버릴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시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살더라도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을 먹고 싶으니까? 나 같은 거 하나 아무리 서럽게 죽어봤자 티도 안 나니까? ……그게 뭐가? 고작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내 삶을, 목숨을, 마음대로 해도 되었다는 거야? 영주 놈에게는 나 하나 죽이는 거야 입김을 훅 불어 촛불 끄는 것보다 쉽겠지만, 나에게는…… 나에게 죽음이란, 내가 살아가던 세계 하나가, 우주 하나가 내 죽음과 함께 안개 속으로 영영 사라지는 거야. 그거 알아? 이 세상에는 이 세상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만큼의 우주가 있다는 것. 그 우주는, 그 우주를 살아가는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모든 우주 하나하나를 다 합친 것보다도 방대하고 큰 유일무이의 세계야. 그걸 개미새끼 눌러 죽이듯이 대수롭지 않게 파괴해 버리는 거야. 거대한 우주 하나를 없애버리는 거라고. 그런데 그걸……? 고작 그런 이유들로……?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수는 없어.”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던 세유가 입을 열었다. 차던 바람마저 멈추었다.


“너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을 텐데. 검을 휘두르며 많은 목숨을 빼앗고, 그들의 우주를 파괴하고 있지 않나.”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네 우주를 파괴하려 한 그녀는 잘못되었고, 똑같이 수많은 타인들의 우주를 파괴하고 있는 너는 옳다는 건가?”


“그게 어때서? 나의 우주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내 우주를 파괴하려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이 무기를 들기 전에 내가 놈들의 우주를 미리 다 부숴서 흔적까지도 없애버리는 거야. 그게 왜?”


자기 자신을 방어하듯, 토야가 되물었다.


“내가 알고 있던 나의 우주가 나를 배신했어. 내가 알고 있던 수많은 다정한 얼굴들이 나를 모함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았어. 권력 앞에서 입을 싹 씻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나 정도 짓밟는 것 따위 우습다는 식으로……! 세상이 나를 업신여기고 조롱해? 그러기 전에 내가 세상을 업신여기고 조롱해주어야지. 세상이 나를 증오해? 세상이 나를 증오한다면 증오하는 만큼의 끔찍한 악이 되어주면 돼. 왜 나만 희생되고 상처입고 쓰러지고 철저하게 고립되어야 하지? 불공평하잖아. 세상이 강자가 되어 약자인 나를 찍어 누르려고 한다면, 나는 강자 이상의 강자가 되어서 그놈들이 내세우는 약육강식이라는 똑같은 논리로 그놈들을 찍어 누르면 돼. 그게 세상의 이치라며? 지들이 내세우는 논리에 지들이 뒈져보라지. 내 방식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개의치 않아. 다 파괴해 버릴 거라고. 그런 추악한, 썩은 내가 진동하는 새끼들은 죽어도, 파괴되어도 싸.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고, 약자는 고만고만한 약자들끼리 아웅다웅 다투면서 개중에서 더 약한 자를 가려내 억누르지. 강자에게 들러붙어 딸랑딸랑거리면서, 아주 근소한 차로 최하위층을 면한 별 볼 일도 없는 것들이 허세를 부려. 그런 게 이 세상이야. 그런데도 없애버리면 안 돼? 더 이상 오물을 싸지르지 못하도록 다 죽여버리면 안 되는 거야?”


침이 튀었다. 굉장히 짧은 시간 안에 굉장히 많은 단어들을 담아내어 입 밖으로 뱉고 또 뱉었다.


“이 세상에 수억 개의 작은 우주들이 있다면, 나는 그 수억 개의 작은 우주들을 하나하나 차례차례 다 없애버릴 거야. 좀먹을 대로 좀먹고,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나의 초라한 우주를 그 누구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무시하지 못하도록, 세상에 그 무엇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파괴하고 또 파괴할 거야.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그 몇 만 배, 그 몇 백만 배로 되갚아줄 거야. 아저씨도, 아줌마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꼬마들까지도, 이 세상 모든 인간이란 인간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상대를 밟고 깨부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나를 깨부수기 전에 내가 깨부수어 주겠다고. 이기적으로 살 거야. 난 그래도 돼. 미친 듯이 이기적으로 살 거라고.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치고 몰아치던 말들이 조그맣게 떨리는 한숨 소리로 끝을 맺었다. 토야의 눈동자가 유리잔에 비친 불빛처럼 흔들렸다.


세유는 그를 예의 그 맑고 투명한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맑고도 맑아, 오히려 목을 옥죌 듯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향해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를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도 않았다. 동정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한 무관심을 담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세 핑그르르 돌아 등을 돌리고 갑판 위를 사뿐사뿐 걸으며 바람과 춤추었다.


그리고 토야는 허망해졌다. 자기가 뱉어내고 뱉어냈던 말들도 바람에 실려 땅끝으로 휭 밀려나버렸다. 그가 혼신을 다해 쏟아냈던 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목구멍 위로 뜨거운 숨이 울컥 솟아올라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삼키려 해도 무시하려 해도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감정들이 솟구쳤다. 요즘 들어 아주 작은 사소한 일에도 그랬다. 사춘기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감정들을 토해내는 것이 버거웠다. 세유는 그의 이런 번잡한 감정들을 다 알고 있겠지.


“이봐……!!”


그가 잿빛 하늘 아래 하늘하늘거리는 세유를 향해 소리쳤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


세유의 작은 등이 자꾸만 멀어져 갔다.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끝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번뇌와 분노와 허망함 속에서 질척거리며 그가 헤매도록 버려두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리퍼스(REAPERS)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6 76 (完) [마지막의 마지막] +2 14.11.28 533 2 8쪽
75 75 [모든 것이 끝난, 그 후] 14.11.27 360 0 19쪽
74 74 [끝을 향해] +2 14.11.27 441 1 21쪽
73 73 [그 남자] 14.11.25 367 4 16쪽
72 72 [처형식] 14.11.24 363 0 16쪽
71 71 [뿌리] 14.11.21 367 2 21쪽
70 70 [드러낸 발톱] 14.11.21 403 1 14쪽
69 69 [민중의 영웅] 14.11.19 400 3 16쪽
68 68 [모든 것의 끝] 14.11.18 448 1 12쪽
67 67 [인간] 14.11.17 419 1 19쪽
66 66 [자백] 14.11.14 397 2 19쪽
65 65 [도망] 14.11.13 361 2 12쪽
64 64 [‘벽’] 14.11.12 259 2 12쪽
63 63 [까발려지다] 14.11.11 405 1 18쪽
62 62 [진실은 잔혹했다] 14.11.10 356 2 18쪽
61 61 [치닫다] 14.11.07 395 3 15쪽
» 60 [마지막 남은 나의 성역(聖域)] 14.11.06 375 7 18쪽
59 59 [서서히 돌아가는 룰렛] 14.11.05 402 3 20쪽
58 58 [재] 14.11.04 400 4 19쪽
57 57 [‘툭’] 14.11.03 457 3 20쪽
56 56 [‘성’이라는 감옥] 14.10.31 432 3 14쪽
55 55 [회상편 – 토야(5)] 14.10.30 470 2 16쪽
54 54 [회상편 – 토야(4)] 14.10.29 379 3 17쪽
53 53 [회상편 – 토야(3)] 14.10.28 329 0 21쪽
52 52 [회상편 – 토야(2)] +1 14.10.27 457 0 17쪽
51 51 [회상편 – 토야(1)] 14.10.24 311 2 17쪽
50 50 [잔혹한 재회] 14.10.23 386 1 16쪽
49 49 [귀신의 숲] 14.10.22 474 1 19쪽
48 48 [죄인] 14.10.21 381 1 16쪽
47 47 [순항] 14.10.20 404 1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