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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조지 님의 서재입니다.

리퍼스(REAPERS)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윤조지
작품등록일 :
2014.08.31 20:54
최근연재일 :
2014.11.28 23:50
연재수 :
76 회
조회수 :
24,983
추천수 :
182
글자수 :
54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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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2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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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52 [회상편 – 토야(2)]

DUMMY

REAPERS (리퍼스) 52 [회상편 – 토야(2)]


여름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의 생활은 예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말이 조금 없어졌고, 웃음이 조금 엷어졌고, 혼자 있는 시간이 조금 많아졌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일에 몰두했다. 뜨거운 불길 속에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벌겋게 타오르는 쇳덩이를 땅땅거리며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익숙해졌다. 사람들이 하는 소리에 상처받지 않고 혼자서도 익숙하게 장에서 용무를 마쳤고 아버지 심부름을 다녀왔다. 겉으로만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갔다. 안으로는 그의 심장이 껍질이 까진 채 날것의 상태로 여전히 아프게 뛰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거냐.”


그의 옆에서 묵묵히 작업만 하고 있던 아버지가 짐짓 무심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그는 대답 없이 그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버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좋은 계집 만나서 마음을 다잡도록 해라. 우리는 그 집 아가씨와는 격이 맞지 않았다. 아무리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해도 그쪽은 귀족이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그녀와 함께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에 대해 단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지나고 나서야 아버지가 담담하게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신분의 벽 따위가 머릿속에 들어올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고 사랑을 했다. 다 지나고 나니 그제야 냉엄한 현실이 보였다. 너무 일찍이 찾아와버린 현실을 원망할 수 있기도 전에 단념을 해야 했다.


그러나 단념을 배운 그의 심장은 아름다웠던 추억의 마지막 장에 멈춰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앞으로 나아갈 힘도, 뒤로 물러날 힘도 없이 무기력하게 한 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그 아가씨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그리고 머릿속엔 한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만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젓가락질을 할 때에 젓가락을 쥐는 그 흰 손가락이 좋았다. 바람이 불 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가지런히 넘기는 그 손짓이 좋았다. 그와 이야기할 때에 가만히 눈을 맞춰오는 그 부드러운 시선이 좋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문득 너무 크게 웃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쑥스러워하는 그 모습이 좋았다.


그 작은 것 하나하나가 좋았다.


그랬기에 갈 곳을 잃은 그의 심장은 멈춰진 시간 속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있었다.







그녀가 찾아온 것은 혼례식을 올린지 세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가 땀을 흘리며 담금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발소리도 듣지 못하고, 그는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일에 열중했다. 한참을 작업하다 한숨을 돌렸을 때에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야.”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 한마디가 그의 심장에 와 콱 박혔다. 죽어있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자 멀찍이 그녀가 서 있었다. 연꽃색의 의복을 입고 얼굴에는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천천히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거짓말처럼 그녀가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인생에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대문 앞에, 그는 작업실 앞에 서서, 채워질 수 없는 공간이 그들 사이에 너무도 크게 존재했다.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어리둥절해하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그가 자기 코끝을 손등으로 문지르자 검은 숯과 기름이 묻어 나왔다. 그의 얼굴이 벌개졌다.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얼른 우물가로 달려가 얼굴을 벅벅 문질러 씻어냈다. 검은 기름이 바닥 위로 줄줄 흘렀다.


얼굴을 깨끗이 씻은 그가 헛기침을 하며 그녀 앞에 다시 섰다. 귀까지 붉게 물들어있었다. 얼굴은 어찌나 세게 문질렀는지 시뻘개져 있었다. 그녀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멋쩍게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예전 여름의 푸른 언덕 위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꾸만 웃음이 나왔던 열넷의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때를 기억해냄과 동시에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색한 공기만 둘 사이에 흘렀다.


“잘...... 지냈어요?”


그녀가 먼저 물었다. 그러나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잘 지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다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럭저럭.”


토야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둘 다 조용해졌다. 시아레는 다소곳하게 모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일 하는데 제가 방해했나 봐요. 어서 가서 일 마무리하세요.”


“아......”


그가 작업실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 잠시 앉아서 일하는 거 잠시 구경만 할게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토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저쪽 마루로 가 살포시 앉았다. 그는 돌아 서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집중이 되지 않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자신이 매일 해오던 행동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면,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는 머리에 두른 땀에 젖은 수건을 풀어 내리고는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그리고 새까매진 얼굴을 물로 닦아내고 그녀에게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녀는 나무기둥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이 든 것도 같았고 깨어있는 것도 같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 그녀 앞에 섰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가까이서 그녀를 보자, 그제야 그녀가 닿을 수 없는 더 먼 곳으로 가버렸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녀의 의복은 동방 상인에게서 들여온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손가락에는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땀 범벅이 되어 그녀 앞에 선 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토야.”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바람 속에 묻힐 것만 같이 작은.


“나는 아직도......”


그리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그를 사랑했다. 흐느끼지 않았다. 매달리지도 않았다. 쓸쓸한 목소리와 떨군 고개만으로 그것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녀의 방문은 이어졌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그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고, 그는 묵묵히 일만 했다. 한참을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먼저 다가올 용기를 낸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마루 한쪽 끝에 앉고, 그는 다른 쪽 끝에 앉아 별 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 날씨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무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토야의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시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또 그녀에게 일부러 묻지도 않았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금기어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항상 밝은 이야기를 했지만, 표정에서부터 읽을 수 있었다. 많이 외롭다는 것을.


“간섭하기는 싫다만,”


하루는 아버지가 말했다.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잘 판단해서 처신하거라.”


그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이상 그녀를 밀어낼 힘이 없었다. 그녀가 찾아오지 않을 나날을 버텨나갈 용기가 없었다.


“아니꼽게 듣지는 말아라. 이미 너를 떠나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기로 스스로 정한 사람이다. 제대로 생각이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자의였든 타의였든 네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떠나놓고 다시 엉거주춤 돌아와 네 마음을 흔들어놓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야 하겠지.”


그녀의 처신을 나무라는 아버지의 말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스스로도 그녀의 행동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었을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찌됐든 그를 한 번 떠났다. 그런데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를 다시 찾아왔다. 외로움과 미련이라는 것에 발목이 잡힌 것처럼.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는 그녀를 자꾸만 돌아오게 만드는 외로움과 미련이라는 것이 아릿하게도 기뻤다. 그녀는 나를 아직 사랑하는구나, 아직 나를 사랑해 잊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행복한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에 대해 떠들어댔다. 차갑고 냉랭한 집안에서 그녀는 말 붙일 사람 하나 없이 혼자였다. 어린 남편은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아 마르고 신경질적인 그녀의 남편은 어려서부터 갖은 질병에 시달렸다. 안색은 푸르죽죽했고, 자리에서 제대로 몸을 일으킨 적이 없을 정도로 병약했다. 가난한 가문에서 팔려오다시피 한 그녀는 비천한 하인들에게조차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 어두운 그늘 속에 숨어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불행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홀로 된 그녀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무시당하는 삶을 택한 조건으로 얻어낸, 그녀가 누리게 된 어마어마한 부에 대해 수군거렸다. 작고 허름한 집에 살던 그녀의 부모님은 하루아침에 방만 열 칸이 넘는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는 온종일 짐꾼들이 대문 문지방이 닳도록 물건을 들여왔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값비싼 보석이 반짝였고, 온갖 장신구로 치장을 한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흘렀다. 그렇게 화려하게 장식한 그녀가 그의 작업실 앞에 서서, 그가 검은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일하는 것을 가만히 구경하고 서 있을 때면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찾아오곤 했다. 그녀는 어디에 속해 있었을까? 금빛에 휩싸여 있는 귀족의 모습인 그녀와, 그의 집 작은 흙 마당에 서 있는 수줍은 미소의 그녀, 그 양극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가슴은 불안하고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서서, 그녀의 황홀하도록 익숙한 미소와 향기를 느끼노라면 그 불안감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날’이 더욱 그랬다. 확실히 ‘그날’은 달빛에 취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질 무렵 그녀가 찾아왔고,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나무 아래서 그녀가 그에게 안겨왔다. 호흡이 떨렸고, 처연히 흘린 그녀의 눈물이 앞섶을 적셔왔다. 그리고 그는 두 팔로 그녀의 등을 감쌌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달빛 아래 조용히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다였다. 그는 그녀를 보내주었고, 그녀는 숨 막히는 검은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작은 마을에서 지켜지는 비밀이란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난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새던 가가 무서워 전부 쉬쉬한다고는 했지만 비밀이 지켜질 리 만무했다. 두 사람을 둘러싼 별별 소문이 장터에서 나돌았다. 결국 소문은 지체 높으신 새던 가 당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새던은 이익과 손해의 계산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당초에 사사얀 가의 외동딸을 며느리로 들였던 것도 철저히 실리를 계산해 결정한 바였다. 자긍심 강하다는 사사얀에 대한 대외적인 평과는 달리, 그 집 노인네는 유약했고 힘이 없었다. 돈 문제로 허덕이던 그는 새던이 던진 제안을 단번에 꿀꺽 받아들였고, 그의 아리따운 딸자식은 무너져가는 가문을 살린다는 명목 하에 거저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이 혼례식을 올렸다.


새던은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그의 관자놀이가 불룩거렸다.


“그래서, 그 놈에 대한 정보는 좀 알아왔나?”


그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심부름꾼에게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예, 굳이 돈을 찔러주지 않아도 시장에 있는 것들이 술술 불더군요. 이름은 ‘토야 시리우’라고 합니다. 바우곤도샤에 사는 유명한 검 제작자의 열아홉 살 먹은 맏아들이라고요. 새아씨와는 동갑이고, 오 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합니다.”


새던이 들고 있던 부채로 다리를 탁 내리쳤다.


“며느리로 들일 때부터 그놈을 잘 처리했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물렀군. 겁도 없이 시집 간 여자를 버젓이 만나고 다닐 놈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흥, 고작 쇠붙이나 두드리고 입에 풀칠하는 게 고작인 놈이.”


“마을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평이 좋은 놈이더군요. 어려서부터 큰 말썽을 부리지도 않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착실히 수행을 하고 있다면서요. 말주변도 없고, 어릴 적부터 검만 만들고 살아서 그런지 순진하고 세상 흘러가는 물정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이지. 그놈 하나 때려잡지 못해 우리 가문의 모양새가 여간 우스운 꼴이 된 게 아니야. 천한 것들이 이제 우리를 어떻게 보겠나? 안 그래도 본디 상인 집안이라고 틈만 나면 우리를 헐뜯으려고 하는 통에, 이런 추접한 소문까지 터지면 그 동안 아등바등 쌓아온 우리 가문의 평판이 어떻게 되겠냐 이 말이야. 성도에 있는 양반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해 봐. 옳다구나 하고 나를 잡아 먹으려 들 걸? 내가 먹인 돈은 내미는 족족 잘도 받아먹으면서, 다 소화시키고 나면 딴 맘 품고 나를 못 괴롭혀 안달이니까 말이야, 그 음흉한 노인네들. 그래, 소문이 커질 때까지 내버려둘 수야 없지. 그 전에 어떻게든 그놈을 잡아다 족쳐야지. 모양새가 그럴 듯하게 이야기도 꾸며야 하고.”


새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며느리를 불러오너라.”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천천히 떠올랐다. 기막힌 묘수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일러라.”







토야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에 몰두했다. 이따금 그녀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대문 너머 언덕길을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헛된 기대였다. 그는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을 계속했다.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무겁고 둔탁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언덕길 너머에서부터 시끄럽게 울리며 가까워졌다. 어머니는 무슨 일인가 싶어 앞치마 차림 그대로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서 놀고 있던 어린 여동생 루미도 하던 놀이를 멈추었다. 마른 헝겊으로 손을 닦으며 아버지도 작업실 밖으로 나와 어머니 옆에 섰다.


검은 옷을 입은 덩치 큰 남자 대여섯이 험상궂게 인상을 쓰며 마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어머니가 루미의 손을 끌어당겨 아이를 치마 뒤로 숨겼다. 아버지가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오?”


아버지의 굵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장정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가 뒤에 선 부하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부하들은 가족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다짜고짜 집 안으로 불쑥 몸을 들이밀었다.


“이보시오! 지금 내 집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에 우두머리인 자가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어 아버지의 턱 아래에 들이밀었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목이 남아나길 바란다면 잠자코 지켜보기나 하시오.”


그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어머니의 비명소리를 들은 토야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작업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있다!”


갑자기 장정 다섯이 그에게로 달려들어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포박했다.


“우리 애에게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당장 놔주세요!”


어머니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어머니의 외침을 듣지 못한 척 토야를 끌어냈다.


“새던 가의 새아씨를 겁탈하려 한 죄로 이놈을 끌고 가겠소. 섣부른 저항은 하지 마시오! 그랬다간 이놈의 목도, 댁들의 목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아시오!”


어안이 벙벙해진 토야는 그를 조여 오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발길질이 날아와 그의 배를 걷어찼다. 헉 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날카롭게 울렸다. 화가 난 아버지가 앞으로 나섰고, 토야에게 붙어있던 장정 둘이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몽둥이로 마구 내리쳤다. 여동생이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우두머리가 그를 대문 밖까지 자루처럼 질질 끌고 나갔다. 숨을 쉴 수 없어 컥컥거리던 그는 끌려가며 흐릿하게나마 보았다. 언덕에 사는 이웃들이 담장 너머로, 창문 너머로 그가 끌려가는 모습을 빼꼼 훔쳐보고 있었다.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그들은 얼른 모르는 척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몇몇 사람들은 아예 따라오면서까지 그가 끌려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나와서 이것 좀 보라고 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달려가 일러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눈앞이 점점 더 흐릿해져 갔다. 회색으로 점점 더 뿌옇고 뿌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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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76 (完) [마지막의 마지막] +2 14.11.28 533 2 8쪽
75 75 [모든 것이 끝난, 그 후] 14.11.27 360 0 19쪽
74 74 [끝을 향해] +2 14.11.27 441 1 21쪽
73 73 [그 남자] 14.11.25 367 4 16쪽
72 72 [처형식] 14.11.24 363 0 16쪽
71 71 [뿌리] 14.11.21 367 2 21쪽
70 70 [드러낸 발톱] 14.11.21 403 1 14쪽
69 69 [민중의 영웅] 14.11.19 401 3 16쪽
68 68 [모든 것의 끝] 14.11.18 448 1 12쪽
67 67 [인간] 14.11.17 419 1 19쪽
66 66 [자백] 14.11.14 397 2 19쪽
65 65 [도망] 14.11.13 361 2 12쪽
64 64 [‘벽’] 14.11.12 259 2 12쪽
63 63 [까발려지다] 14.11.11 405 1 18쪽
62 62 [진실은 잔혹했다] 14.11.10 356 2 18쪽
61 61 [치닫다] 14.11.07 395 3 15쪽
60 60 [마지막 남은 나의 성역(聖域)] 14.11.06 375 7 18쪽
59 59 [서서히 돌아가는 룰렛] 14.11.05 402 3 20쪽
58 58 [재] 14.11.04 400 4 19쪽
57 57 [‘툭’] 14.11.03 457 3 20쪽
56 56 [‘성’이라는 감옥] 14.10.31 432 3 14쪽
55 55 [회상편 – 토야(5)] 14.10.30 470 2 16쪽
54 54 [회상편 – 토야(4)] 14.10.29 379 3 17쪽
53 53 [회상편 – 토야(3)] 14.10.28 329 0 21쪽
» 52 [회상편 – 토야(2)] +1 14.10.27 458 0 17쪽
51 51 [회상편 – 토야(1)] 14.10.24 311 2 17쪽
50 50 [잔혹한 재회] 14.10.23 386 1 16쪽
49 49 [귀신의 숲] 14.10.22 474 1 19쪽
48 48 [죄인] 14.10.21 381 1 16쪽
47 47 [순항] 14.10.20 404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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