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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조지 님의 서재입니다.

리퍼스(REAPERS)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윤조지
작품등록일 :
2014.08.31 20:54
최근연재일 :
2014.11.28 23:50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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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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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글자수 :
54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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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2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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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48 [죄인]

DUMMY

리퍼스 (REAPERS) 48 [죄인]


투명한 바닥 아래로 익숙한 지형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르시스는 나르크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울창한 숲과 가파른 산등성이가 발 아래로 흘러 지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이 거인처럼 키가 큰 나무들이 이어졌다. 귀신의 숲이라 불리는 ‘사아 숲’이었다.


토야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척 눈을 돌렸다. 소파에 길게 누워, 등받이에 고개를 처박고 등을 돌렸다.


라네위는 탁자 위에 종이를 여러 장 펼쳐놓고 이것저것 열심히 들춰보고 있었다.


“기억을 되살려서 우선 생각나는 만큼 써 봤어.”


코코가 탁자 가까이 엉덩이를 끌어 와 앉았다. 이지는 바닥에 앉아 등만 소파에 뒤로 기대고 있었다. 지나가는 구름만 바라보며 라네위가 할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르크는 국토의 40%가 울창한 숲으로 덮인 나라야. 그리고 지금 밑으로 보이는 사아 숲이 그 숲 전체 면적의 30% 가량을 차지하고 있어. 우리가 가게 될 우닌은 이 사아 숲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작은 산골 마을이야. 이 마을의 모든 경제활동은 뒤편으로 펼쳐진 사아 숲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유명한 도공(刀工)의 작업실이 이곳에 있어서, 물어 물어 이곳까지 찾아오는 기사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이 마을에서 사흘을 꼬박 걸어가면 주몬이라는 나르크 최대 규모의 경제도시와도 이어져서, 그곳에 물건을 날라다 팔아 생계를 유지해.”


라네위의 펜이 서걱서걱하고 종이 위에 나르크의 간략한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나르크의 동부를 거대한 사아 숲이 잡아먹고 있었다. 그 앞에 자그마한 점이 우닌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닌에서 가느다란 선이 주몬을 지칭하는 커다란 원까지 이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사아 숲’이야.”


라네위가 펜촉으로 검게 칠한 부위를 톡톡 쳤다.


“이 ‘사아 숲’은 ‘귀신의 숲’이라고도 불리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숲의 중심부에는 사람의 심장과 간을 꺼내 먹는 무시무시한 귀신들이 살고 있대. 그래서 사람들이 일정 거리 이상 숲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나무에 십자 표시를 해놓아 경계를 표시해 놓는다고 해. 경고를 무시하고 그 경계를 넘어 들어가는 사람들은 실제로도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이 된다는 거야.”


“이 숲은 사람들의 생활의 터전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인 거네.”


코코가 말했다.


“그래. Z가 보낸 임무 종이에는 우닌의 귀족들을 말살하라고 쓰여 있었지? 산골 마을에 무슨 대단한 귀족이 살고 있을까 생각할 법도 하지만, 수도에 사는 귀족들이 우닌에 별장을 지어놓고 자주 와서 쉰다고 해. 자연으로 둘러싸인 우닌만큼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는 곳도 드물거든. 우닌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귀족 집안은, 대대로 왕의 스승을 배출했던, 그러나 지금은 명망만 남은 반더온 가, 한때는 대단한 세도를 자랑하던 외척가문 아즈안 가, 그리고 주몬에서 일어난 신흥 귀족 새던 가...... 이렇게 세 가문이야.”


토야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대화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막상 가 봐야 어떤 가문들이 휴양 차 우닌에 와 있는지 알겠지만, 지금쯤이면 숲의 신을 기리는 토속축제가 한창일 시기라 별장에 묵고 있을 확률이 높아. Z가 이런 일정까지 고려해서 시기를 잡은 것이 분명해. 이러나저러나 약은 놈이야.”


라네위가 펜 끝을 툭툭 내려치며 말했다. 코코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빠, 8년 전에 우닌에서 대사건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맞아? 강간죄로 잡혀 들어간 죄수가 탈옥을 해서 자기를 고발했던 가문 일가를 전부 베어 죽여 버리곤, 자기 마을 사람들까지 죽인 사건이 있지 않았어? 내가 생각하는 거기가 여기 맞나?”


라네위도 덩달아 생각에 잠겼다.


“으으응......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사건이 있었던 듯도 하네. 으음, 맞아, 그랬어. 어수룩한 시골 사람들만 사는 고요한 마을에서 그런 일도 일어난다면서, 라바이가 재미있어하면서 나르크 지역신문을 보여줬던 기억이 있어. 그때 몰살당했던 가문 이름이 분명......”


펜 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던 라네위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펜을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새던’이었어.”


그가 천천히 토야가 돌린 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이 없는 벽처럼 그의 등이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라네위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한 코코도 토야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라네위는 생각해냈다. 다크실드 산맥의 어두운 터널 안에서 홀로 외로이 무덤을 지키고 있던 썩은 시체 같던 남자를. 그리고 그 남자가 꺼낸 단 한마디에 이성을 잃었던 토야의 모습을. 그 남자는 분명 ‘새던’이라고 말했었다. 그가 모시던 아가씨의 친정이 ‘새던’이라고.


라네위는 심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그래...... 이제 기억이 나. 새던 가문은 주몬에서 급속도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늘려 성장한 귀족 집안이야. 원래 상인 출신의, 굉장히 낮은 직급의 귀족이었는데,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성장을 하면서 고위 관직을 사고 또 사서 지금의 지위에 올랐지. 돈이 필요한 성도의 귀족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뇌물을 먹이면서 영향력이 급상승세를 탔었어. 지금의 지위를 누린지는 겨우 4대째야. 그러다가 3대째에 이르러 가주가 살인자의 손에 비명횡사하고, 우닌에 와 있던 가주의 가족들이 어린 아들과 며느리만 제외하고 전부 살해당하면서 가세가 기울었어. 그래서 주몬에 있는 가주의 둘째 동생이 집안의 어른 역할을 물려받았지만, 위세가 예전만은 못한가 봐.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죽은 가주의 아들이 3년 전에 지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더라고.”


마지막 말에 토야의 등이 움찔했다.


“그때 새던 일가를 전부 살해했던 살인범은 같은 동네에 살던 이웃들까지도 모조리 죽이고 그날로 도주......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는 후문이야. 하루아침에 주민 모두가 살해당하고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던 곳 이름이......”


“‘바우곤도샤’.”


토야의 목소리가 대신 대답했다. 기억 속을 헤집고 있던 라네위가 고개를 들었다.


토야가 몸을 일으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읽을 수 없는 텅 비어버린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검을 만드는 자가 사는 언덕’이라는 뜻의 나르크 동부 사투리다.”


“그래, 바우곤도샤......”


라네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우닌의 가장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촌락 이름이로구나.”


코코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라네위 대신 펜을 집어 들고 우닌의 북쪽에 작은 점을 끼워 그려 넣었다.


“‘검을 만드는 자가 사는 언덕’이라면 아까 오빠가 말했던 도공이 사는 동네였을 수도 있겠네?”


“그랬지.”


토야가 불쑥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을도, 도공도, 그 어디에도 없지. 다 죽어버렸으니까.”


“다른 것보다도,”


코코가 골똘히 생각하는 투로 말했다.


“‘새던’이라는 이름이 낯설지가 않아.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야.”


라네위는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겠지. 들어본 적이 있을 테니까.”


토야가 벌떡 일어섰다.


“답을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 마. 내가 바로 그 살인범이다.”


그 말을 뒤로 하고 그가 성큼성큼 걸어 문을 뻥 걷어차고 나갔다. 라네위는 피곤한 듯 두 눈을 꾹 눌러 감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레 열린 현관문 사이로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본 하인들이 안절부절 못해하며 그에게 다가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아, 아이고, 루크 도련님. 이렇게 갑자기 통보도 없이 찾아오시다니......”


늙은 집사가 루크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나이 많은 하녀가 무릎을 꿇어 루크의 신발을 벗기고 실내 슬리퍼를 앞에 내려놓았다. 젊은 하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차를 내어올까 손을 닦을 물수건을 내어올까 왔다 갔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루크는 별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집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갔다. 옆에서 하인들이 졸졸 따라오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아아......! 내 아들, 자랑스러운 우리 크루세이더 대장님이 오시는구나......! 어서 오거라, 루크. 어찌 연락 한번 하지 않고 이리도 갑자기 오느냐? 이리 올라 오거라. 메일린에게 차를 내오라 해야겠다.”


층계 위에서 머리가 희끗해진 그의 아버지가 두 팔을 장황하게 벌리고 서 그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의 과장된 반가움에서 그를 보고 어찌 대할 줄 몰라 하는 당황스러움과 어색함이 비쳤다. 루크는 차가운 시선으로 계단 위에 선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늙은 아버지에게는 층계 위에서 내려와 아들을 가까이서 맞을 용기가 없었다.


“담소를 나눌 시간까지는 없습니다. 용무만 간단히 하고 가겠습니다.”


싸늘한 말만을 남기고 루크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는 어색하게 치켜들었던 팔을 내리며 작게 더듬거렸다.


“그, 그래...... 내 아들, 많이 바쁠 테지. 일 보, 보고 가거라......”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더니 몸을 홱 하고 돌려 방 안으로 피신했다.


루크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귀찮게 달라붙는 하인들을 전부 물리고는 저택을 곧장 가로질러 뒤뜰로 나갔다.


그의 집은 거대한 저택이었다. 왕궁만큼이나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로드카서 저택은 흰 대리석과 보석으로 지어, 아침에는 햇살이 비쳐 반짝였고, 밤에는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저택 내부는 호화로운 연회장과 무도회장, 백 여 명이 식사를 할 수 있는 다이닝 홀, 그리고 미로처럼 얽어진, 저택의 주인조차도 다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수많은 신비로운 방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 당연하게 그의 것이 된 그의 소유물이었다.


루크는 고대의 진귀한 조각상이 서고 외국에서 들여온 희귀한 꽃들이 만발한, 잘 가꾸어진 정원을 지났다. 저택 본관의 뒤편에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별채가 정원을 바라보며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시선을 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별채의 깜깜한 창문들을 가린 커튼 틈으로 한 쌍의 눈이 그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퀭하고 희뿌연 눈이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커튼 뒤로 숨었다. 그는 발걸음을 다시 옮겨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다시금 예의 그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는 지하 문을 열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축축한 지하 냄새가 짙어졌다. 그가 계단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벽에 걸린 횃불이 하나씩 켜져 그가 가는 길을 밝혔다. 계속해서 내려가자 벽을 빼곡히 채웠던 벽돌 대신 거친 검은 돌 벽이 나타났다. 박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계단이 끊겼다. 그는 둥근 바닥 한중간으로 나와 섰다. 그곳에는 원기둥 모양의 승강기가 놓여있었다. 그 아래로는 또 끝없는 하강이 이어졌다.


한참을 내려가고 나서야 바닥이 나왔다. 루크는 승강기에서 내려 거대한 돌문 앞으로 걸어갔다. 돌문 앞에는 문만큼이나 키가 큰 석상이 서 있었다. 루크가 그 앞에 서자 석상의 눈알이 빙그르르 하고 돌아 루크를 향했다. 붉은 빛 마법 문양이 석상을 중심으로 검은 동굴을 가득 메웠다. 루크의 몸 위에도 붉은 문양들이 돋아났다. 몸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기를 반복했다. 혈관 속의 피가 흐르고 멈추었다. 기나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석상이 쩌적 하고 굳은 몸을 움직이더니 한쪽으로 비켜났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루크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그의 뒤로 쿵 하고 닫혔고, 석상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루크의 피가 쿵쿵 뛰었다. 방 안은 온통 붉은 빛이었다. 둥근 원형의 돌 방 중앙에 둥근 홈이 깊게 파여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커다란 구멍을 두른 난간 앞에 섰다. 구멍 아래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붉은 빛으로 타올랐다.


쿵, 쿵쿵.


먼저 거대한 뿔이 눈에 들어왔다. 뿔을 따라 기괴한 모습을 한 시퍼런 몸체가 나타났다. 붉은 빛을 강하게 뿜어내는 쇠사슬이 그 육중한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문 앞의 석상만큼이나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의 시체가 묶인 채 영원의 잠을 자고 있었다. 구멍의 바닥에는 붉은 빛의 고대 마법진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마법의 불이 그의 몸을 감싸고 타오르고 있었다.


쿵쿵, 쿵쿵쿵.


퀴뮈시엘 이그낙시온조차도 손에 넣지 못하고 침만 흘렸던 대마왕 투르카익의 시체가 그의 발밑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로드카서의 가주들과 후계자들만이 들어올 권한을 갖는 비밀스러운 공간 속에서.


「루크, 보이느냐? 마족의 왕이란 자는 저런 것이다.」


어린 시절, 당시 가주였던 할아버지가 그의 손을 이끌고 이곳까지 내려와 구멍 안을 가리켰다.

「거대하고, 사악하고, 고혹적인 것이지? ‘악’이라는 것은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떨리게 매혹시켜 버린다. 잘 보아라.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이것이 아니라, 이것에 쉽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우리 인간 자신이다.」


쿵, 쿵쿵쿵, 쿵.


불길이 점점 더 거세게 타올랐다. 타는 듯한 눈빛이 붉은 불빛에 삼켜져 일렁였다.


루크는 어린 시절 혼자서 지하 문을 열고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땅 속까지 내려와, 붉은 불길 속에 잠든 마왕의 시체를 홀린 듯 한없이 바라보았던 기억을 돌이켰다. 가까이 서서도 손을 뻗어 만져서도 안 되는 죽은 괴물을 넋 놓고 바라보며, 갈비뼈 너머로 떨림이 새어나올 정도로 작은 심장이 뛰었었다.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그는 다시, 다시 또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다시 여기 서 있었다.


「아아......! 내 아들, 자랑스러운 우리 크루세이더 대장님이 오시는구나......!」


아버지의 얼굴이 불길 속에서 일렁였다.


아버지에 생각이 미치자 루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는 그를 꺼려 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꺼려 했다. 하인들조차도 그를 꺼려 했다.


아버지는 오랜 역사를 가진 검가(劍家) 로드카서 가문의 실패작이었다. 로드카서 가문의 장남으로서 자부심도, 자긍심도 높았지만 그뿐이었다. 크리올의 왕실 기사단은 로드카서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실력이 형편 없는 아버지에게 왕실 호위관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루크를 앉혀다 놓고 가문의 위대함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읊어대곤 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뿐이었다.


루크는 쉽게 아버지의 지위를 제쳤다. 크리올 최고의 기사 자리에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아버지는 호기롭게 호화로운 파티를 열어 아들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지만, 실상은 축하한다는 말뿐이었다. 아들의 그늘에 가려 위축되었고, 아들을 슬그머니 피했다. 휘황찬란한 커리어를 가진 아들의 발끝에도 아버지는 미치지 못했다. 성공한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초라해졌고 안절부절못했다. 아버지는 실패했다.


루크는 바로 위의 형까지도 먹어 치웠다. 태어나길 미숙아로 태어난 로드카서 가의 장남은 정신지체자였다. 검을 배울 수 있기는커녕 말도 잘 못 배웠고, 아버지는 그런 형을 별채의 어두운 방에 가두고 죽은 사람 취급을 했다. 루크는 햇살 가득한 뒤뜰에서 뛰어 놀고 말을 타고 검술을 배우며 후계자로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형이 별채의 어두운 방 한켠에서 먼지와 거미줄 속에 뒤엉켜 숨을 죽이고 살아가는 동안.


그의 속에 있는 거센 불길은 제 형도, 제 아버지도 잡아먹었다.


혼자만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 속에서, 루크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신비로운 마왕의 시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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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76 (完) [마지막의 마지막] +2 14.11.28 533 2 8쪽
75 75 [모든 것이 끝난, 그 후] 14.11.27 360 0 19쪽
74 74 [끝을 향해] +2 14.11.27 441 1 21쪽
73 73 [그 남자] 14.11.25 367 4 16쪽
72 72 [처형식] 14.11.24 363 0 16쪽
71 71 [뿌리] 14.11.21 367 2 21쪽
70 70 [드러낸 발톱] 14.11.21 403 1 14쪽
69 69 [민중의 영웅] 14.11.19 400 3 16쪽
68 68 [모든 것의 끝] 14.11.18 448 1 12쪽
67 67 [인간] 14.11.17 419 1 19쪽
66 66 [자백] 14.11.14 397 2 19쪽
65 65 [도망] 14.11.13 361 2 12쪽
64 64 [‘벽’] 14.11.12 259 2 12쪽
63 63 [까발려지다] 14.11.11 405 1 18쪽
62 62 [진실은 잔혹했다] 14.11.10 356 2 18쪽
61 61 [치닫다] 14.11.07 395 3 15쪽
60 60 [마지막 남은 나의 성역(聖域)] 14.11.06 374 7 18쪽
59 59 [서서히 돌아가는 룰렛] 14.11.05 402 3 20쪽
58 58 [재] 14.11.04 400 4 19쪽
57 57 [‘툭’] 14.11.03 457 3 20쪽
56 56 [‘성’이라는 감옥] 14.10.31 432 3 14쪽
55 55 [회상편 – 토야(5)] 14.10.30 470 2 16쪽
54 54 [회상편 – 토야(4)] 14.10.29 379 3 17쪽
53 53 [회상편 – 토야(3)] 14.10.28 329 0 21쪽
52 52 [회상편 – 토야(2)] +1 14.10.27 457 0 17쪽
51 51 [회상편 – 토야(1)] 14.10.24 311 2 17쪽
50 50 [잔혹한 재회] 14.10.23 386 1 16쪽
49 49 [귀신의 숲] 14.10.22 474 1 19쪽
» 48 [죄인] 14.10.21 381 1 16쪽
47 47 [순항] 14.10.20 404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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