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죽음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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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스 (REAPERS) 01 [죽음의 신]
「그들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은 우리들 틈 속에 있었고, 우리의 가장 깊은 공포 속에 존재하며 우리를 서서히 질식시켜 왔다. 그들은 사악했고, 무자비했으며, 악마와도 같이 잔혹했다. 그들은 자비를 몰랐고, 생명을 몰랐으며, 심지어는 그들이 본디 가지고 태어났을 ‘인간다움’조차 잊고 알지 못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그들은 전 안티크 시민의 공포심 속을 파고 들었고,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그들을 ‘죽음의 신’, 또는 ‘리퍼스 (REAPERS)’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콰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뜨겁게 치솟았다. 비명소리가 주변의 공기를 난도질하듯 날카롭게 울려 퍼졌고, 피비린내가 코를 매섭게 찔러 올라왔다. 그는 부서져 가는 건물의 통로를 달렸다.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그를 환대하듯 맞았다. 쥐새끼들이 달아나고 있군, 하고 생각하며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막아! 놈들에게 중앙부까지 내어주어선 안 된다!”
검은 제복 차림의 남자가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픽 하고 웃었다. 그가 공중에 검을 휘두를 때마다 뜨끈뜨끈한 액체가 그의 얼굴에 튀었고, 그는 혀로 검붉은 피를 핥으며 웃음을 뱉어냈다.
‘아아— 짜릿해—‘
그는 희열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휘두른 검에 피 비가 내렸고, 그는 그 속을 달리며 쾌감을 맛보았다.
“막아! 막아야 하느니라! 이테리야 님이 계신 곳만은—“
말을 끝마칠 틈도 없이 제복 차림의 남자는 피를 내뿜으며 바닥 위로 고꾸라졌다. 꿈틀거리는 그 시체 너머로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포함해, 침입자는 고작 네 명이었다. 고작 네 명의 침입자를 상대로, 백 명이 넘는 전투력을 보유한 헤드니 가(家) 저택의 방어선은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저택 곳곳에서 도축되는 병사들의 울부짖음이 무전기 너머로 끔찍하게 울려댔다. 자비를 베풀기를 간청하는 울먹이는 목소리들이 살이 썰리는 소리들과 함께 무참히 바스라졌다.
“치지직— 백작님, 호위병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습니다…...! 치지직— 백작님, 이것은— 치지직— 투쟁이 아니라— 치직— 학살입니다…...! 으, 으아악!!”
“호, 호엘스!”
저택의 중앙부에 정예 호위무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해있던 헤드니 백작은 무전기 너머를 향해 소리질렀다. 무전기 너머 부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비명을 지르듯이 그 이름을 반복해 외쳤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몰랐다.
“제기랄, 호엘스, 호엘스!!”
무전기를 쥔 그의 손이 겉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리퍼스라니, 이런 때에…...!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죽음의 사신이 지금 그의 저택에 침입해 있다니…...!!
“그것만은, 그것만은 절대로 내줄 수 없어! 내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손에 넣은 물건인데......! 그것만은!!”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동공이 공포에 질려 초점을 잃었다.
치지직—
그때 무전기에 신호가 잡혀왔다. 헤드니 백작은 발작적으로 무전기를 집어 들어 신호 끝의 상대방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누구냐! 호엘스! 호엘스 자넨가!”
치직— 치직—
무전기가 이상한 소리를 보내오고 있었다. 잡음 사이로 들려온 것은 낮은 웃음소리. 아마도 그런 듯 했다. 상대편의 누군가가 끅끅거리고 웃고 있는 소리였다.
“누, 누구냐!”
웃음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이내 다시 시작되었다.
“글쎄, 내가 누굴까?”
끅끅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음침한 웃음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헤드니 백작은 당황해 무전기를 떨어뜨리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살갗이 뼈 마디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듯이 온몸이 경직되었다.
갑작스레 웃음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여어, 헤드니, 우리 재미있는 게임 하나 할까?”
헤드니는 얼른 무전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무전기를 꽉 쥐고는, 떨고 있는 육중한 몸을 바닥에 파묻듯 웅크렸다.
“게, 게임?”
“그래, 재미있는 게임. 숨바꼭질을 하는 거야. 내가 눈을 감고 오십까지 셀 테니까 그 동안 너희들은 잽싸게 도망가는 거지. 대신, 잡히면 나한테 곱게 죽는 거고.”
“뭐, 뭐야?”
“이봐, 머리가 나쁜 거야? 내가 일일이 설명해야 해? 이것 참 성가시군. 다리털도 안 보일 정도로 어디 한번 꼭꼭 숨어봐. 발견하는 순간 네놈의 통통한 머리를 썰어줄 테니, 잡히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서.”
무전기 너머의 남자는 상당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헤드니는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이 가까이에 있는 걸까? 아니, 호엘스가 있었던 곳은 그가 지금 있는 곳에서 다소 떨어진 후문 부근이었다. 후문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그래, 아무리 적게 잡아도 십 분은 걸릴 거리였다. 하물며 저택의 구조에 익숙지 않은 외부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적이 가까이에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비웃고 있다면?
“왜 대답이 없는 거야? 매너 없게 먼저 시작한 거야? 그럼 나도 가도록 하지—. 1, 2......”
헤드니 백작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그는 허둥지둥 호위무사들을 밀치며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12, 13......”
무전기를 통해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헤드니 백작은 팔을 황망히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 나를 보호하라! 나를 보호하라!!”
“......26, 27......”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뭣해! 잠가, 잠그라고, 지금 당장!”
“......39, 40, 41......”
“보호해! 나를 엄호하란 말이다!”
“......50.”
그리고 그 순간, 콰앙—! 하는 파괴음과 함께, 세상이 붉게 번져갔다.
* * *
저택의 중심부. 수많은 목숨들이 자신을 버려가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그 곳은 폭발로 인해 반쯤 무너져내려 있었다. 아직도 벽면이 매캐한 냄새와 함께 불타고 있었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무너진 천장과 기둥 사이로 작고 흰 빛이 피어 올랐다.
아수라장 속에서 세유는 투명한 유리알 같은 눈을 깜박였다. 부서진 가구 조각과 파편이 흩어진 폐허 속에서, 그는 무릎을 고이 접고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긴 검은 머리의 여자가 방금 전의 폭격으로 인해 생명이 뜯겨나간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죽은 여자를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여자가 그랬듯이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뺨에 대보았다. 죽음이 한 겹 씌어 이미 무거워진 손은, 그가 놓자마자 힘없이 툭— 하고 떨어졌다. 핏속에서 나뒹굴고 있는 그녀가 입가에 띠고 있는 미소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세유는 숨이 끊어진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이, 어이.”
뒤쪽에서 웬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비릿한 피 냄새가 세유의 코를 찔러 올라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방 안에 들어선 불청객에 시선을 맞추었다.
“아까 그 돼지새끼가 하도 ‘중앙부, 중앙부’ 하고 빽빽대길래 와봤더니, 역시나 여기 뭔가 있긴 있었네. 보아하니 여기 네 놈 하나만 빼면, 이 저택에 있는 인간은 모조리 다 저승 행 티켓 끊은 듯한데. 그럼 이 상황은, 체스로 치면, ‘체크메이트’라는 건가?”
남자는 무엇이 우스운지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뚜벅뚜벅, 그가 가까워져 올 때마다 그의 무거운 부츠와 대리석 바닥이 맞닿아 둔탁한 소리를 울려왔다.
그리고 뚜벅. 마지막 한걸음과 함께 그는 세유의 앞에 섰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에는 피가 튀어있었고, 핏줄기 사이로 세유를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는 텅 비어버린 것만 같이 공허했다. 뻥 뚫린 검은 구멍 두 개가 세유의 작은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멈칫. 남자는 눈썹을 무섭게 찡그렸다.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순백의 소년은 두려움도, 공포도, 그 어떤 감정도 없는 눈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껍데기만 남은 존재처럼.
그보다, 소년이었던가? 흰 빛 중앙에 앉은 그는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중성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인간이 맞았던가? 소년의 얼굴에 피어 오른 표정은 인간사를 초월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흥, 그게 무슨 문제야.”
그는 한 쪽 입꼬리를 뒤틀어 올렸다.
“너만 죽이면 게임 오버. 나의 승리다.”
그는 빛 틈으로 보이는 작은 형체를 향해 무지막지한 힘으로 검을 휘둘렀다.
“잘 가라—“
그때였다. 굉음과 함께 그의 검이 튕겨나간 것은.
순간, 보이지 않는 검의 칼날이 그를 강하게 밀쳐낸 듯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칼날과 맞닿은 찰나, 칼끝을 따라 그의 손에 전해져 왔던 형언할 수 없는 느낌—.
칼날과 함께 튕겨나간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빛 속의 소년은 멍하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유만만하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 건방진 자식! 내 앞에서 같잖은 재주......”
그는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부리지 마!!”
그 다음 느껴진 건 다시 한 번 그를 밀쳐낸 거대한 힘. 흰 빛 자체가 그를 막아서고 밀어낸 듯했다. 눈부신 빛 속에 앉아있던 그 알 수 없는 소년은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오도카니 앉은 자세 그대로였다.
정말 인간이 맞았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의 검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튕겨낼 만한 인간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그게 더 기분이 나빴다.
“이...... 개자식이!!”
“그만둬, 토야.”
어디선가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텅 빈 눈동자의 남자는 검을 내려치려던 자세 그대로 멈칫했다. 폐허가 된 방 안으로 키가 큰 세 사람이 들어섰다. 헤드니 저택에 침입해 들어온, 그의 동료인 나머지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뚜벅뚜벅 세유를 감싼 흰 빛을 향해 좁혀 들어왔다. 그러고는 중앙의 세유를 향해 셋 다 일제히 검을 겨누었다.
“이 꼬마가 우리가 노리던 바로 그 물건인 듯하군.”
세유는 눈을 깜박였다. 세 사람 모두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를 노리는 검 세 자루가 하나같이 피에 엉긴 채로—.
“성녀의 눈물— 삼 천 년이 넘은 안티크의 보물 중의 보물. 꽤나 재미있는 모습으로 우리 수중에 떨어졌어.”
- 작가의말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세요.
윤조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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