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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님의 서재입니다.

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연재수 :
2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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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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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77,846

작성
21.02.0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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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지룡地龍의 소굴로(5)

DUMMY

“꼬리라고 보기는 힘들겠는데.”


그레이트 데쓰웜으로부터 기껏 몇 미터 정도 떨어져있는 거리.


유논은 수십 미터 높이의 불길한 핏빛 거대 지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그들이 위치한 곳은 꼬리라기보다는 꼬리의 위쪽, 정확히는 괴물의 허리 아래 즈음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불길하고 요사스러운 붉은빛이 잠자며 꾸물대는 그것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데쓰웜이 누운 자리는 정체불명의 새빨간 점액질로 잔뜩 뒤덮여 있어 다가가기조차 만만치 않았다.


노아는 멍하니 눈을 껌뻑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부패한 것의 냄새가 훅 밀려들어 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본능적인 생존의 감각이 이 이상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어차피 다가갈 생각도 없었기에 괜찮기는 하지만···.


‘젠장, 정신 차려야 한다. 네가 넋을 놓으면 안 돼. 넌 이들을 이끄는 대장이다.’


침착함을 잃고 멍하니 데쓰웜의 붉은 육벽肉壁을 바라보고 있었던 노아였으나, 그런 그의 정신을 일깨우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있었다.


[대적불가對敵不可.]


흑색의 마법사의 도움에 힘입어 성장의 단계에 서 있는 기계 정령이 그에게 경고를 보낸다.

유논의 경우에는 이해할 수조차 없다는 ‘불가해’의 메시지를 들었다면, 이번에는 대적이 불가하므로 결코 싸우지 말라는 신호였다.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저 괴물을 상대로 결코 이길 수는 없다. 파고들만한 약점 하나 없다. 사람의 몸으로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저것은 괴물이라기보다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창조물이었다.

사람의 지성으로 홍수나 지진, 태풍의 원리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적할 수는 없다. 비슷한 이야기였다.


‘그래, 어차피 맞서 싸울 생각도 없었다.’


작전에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하려던 대로만 하면 된다.


노아 프로스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말했다.


“작전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작전대원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것 같은 그 말을 내뱉은 뒤, 설명을 덧붙였다.


“작전 구상 단계에서 추정한 내용대로라면 이쪽에 꼬리가 있을 확률이 높아 편의상 꼬리라 지칭한 것이지, 꼭 꼬리 부근에서 작업을 시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정도 오차는 얼마든지 수용 가능한 범위 내이니까요.”

“꼬리를 찾아 더 움직일 필요는 없나 보군.”

“예. 어디까지나 우리가 가야 할 길에서 저 괴물을 치우기에 적합한 방향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방향은 정확합니다. 이전 원정대가 자리를 잘 잡았어요. 이제 마지막 물건을 설치하기만 하면 끝납니다.”


곧이어 데쓰웜으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 푸른 금속 물체를 심는다.


위치가 바뀌는 일 없도록 확실하게 고정시켜 둔 뒤 고비 하나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돌아가서 설치한 물품들을 작동시키면 된다. 그러면 데쓰웜은 잔뜩 놀라 잠자리를 이동할 것이고, 그리하여 괴물이 사라진 철도의 보수 작업을 시행하면 된다.

그리하여 길이 다시금 완전해지면, 유논 일행을 옛 황도 카라얀으로 안내하는 것으로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작전이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며 ‘이제 돌아갑시다.’ 라 외치려 했을 때였다.



끼기기기긱─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스멀스멀 몰려드는 해일과 같은 압도적인 수의 소음. 왜 여태껏 저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하는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원정대를 몰살한 괴물들은 이 자리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후속 병력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 마냥,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매복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리만 들어도 알겠군. 지저의 암벽을 타고 다니는 괴수, 땅 밑 지하에서 생활하다 순식간에 위쪽을 파고들어 무엇이든 낚아채 잡아먹어 버리는···.’


지저의 경험 많은 드워프라면 모를 수가 없는 괴수였다.


‘변종 땅거미다.’


지저의 가장 은밀하고 신속한 괴수.


개체 하나하나의 위험성 자체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번식능력이 뛰어나 숫자가 대단히 많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


‘변종 땅거미들은 결코 자기들끼리만 다니지 않는다는 것.’


이 끔찍한 괴수들은 다른 변종 괴물들과 공생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도 변종 땅거미 못지않게 지저도시와 사람들에게 굉장한 해악이 되는, 한층 더 사악한 괴수종과.


“······.”


노아 프로스트는 고개를 젖히고 위쪽을 바라보았다.

육안으로는 제대로 바라보기도 어려운 수십 미터 상공, 그레이트 데쓰웜의 등 부근.


산만한 크기의 꼭대기를 감싼 핏빛 빛무리의 안개 사이로 무언가 거뭇한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반응하는 기계 정령이 외골격 마스크 눈 부분의 광학 렌즈를 확대시킨다.


배율을 두 배로 끌어올리자 그제야 모습이 보였다.


“······!”


마침내 드러난 괴물은,

지저의 숯과 탄으로 몸을 칠한 것 같은 새카만 생명체.


체고가 일 미터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땅거미의 위에 올라탄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고약해진다.


괴물의 존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동적으로 뇌리에서 떠오르는 그것.


후각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뇌는 분명 악취를 맡고 있다.


‘유황 냄새!’


첫째로 모습을 드러낸 흑색의 구부정한 인영을 필두로 데쓰웜의 등허리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땅거미들과 그 위에 올라탄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외골격과 기계 정령에 힘입어 증폭된 감각에 들리는 괴물들의 소리.


어두운 공동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어두운 시대의 언어.


“ալբուծիուս նոլուիսսե ծոնսեծթեթուեռ ութ սեդ!”

“ծոռպոռա նոլուիսսե ոպոռթեաթ դուո ադ!”

“իպսում մենանդռի ծոնվենիռե ադ!”


일견 듣기에는 뱀이 쉭쉭대는 것 같다가, 또 어느 순간은 날벌레들 특유의 퍼덕이는 소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 징그러운 소음처럼 들린다.


사람의 성대와 뇌의 구조로는 결코 구사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지저 괴물들의 전유물.


지저에서 저런 냄새를 풍기며, 저런 괴성을 뱉으며, 땅거미를 타고 다니는 괴수종은 단 하나밖에 없다.


‘변종 지저 고블린···!’


지저도시의 주적, 더러운 것들이 세운 왕국의 괴물들이 어째서 여기까지.


노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지저가도 근처에서 고블린 무리를 마주친 것이 징조였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놈들이 이렇게까지 도시에 가까이 접근했을 줄이야!’


게다가 눈앞의 것들은 유논과 시드를 도시까지 안내하던 도중 마주친 낙오병들과는 격이 달랐다.

숫자도 고작 몇 마리에 불과했던 그때와 비교하면 셀 수도 없을 지경으로 가득 들어차 있을 뿐만 아니라, 질 면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땅거미는 지저의 고블린 종족에게 있어서는 기사의 말과 비슷한 느낌이다.

저 땅거미를 타고 있는 괴물들은 전부 지성체들의 세상으로 따지면 기사 급의 위험종이라는 것이다.


그런 홉 고블린 라이더가 기십만 되어도 벅차다 느낄 것인데.


눈앞에 보이는 숫자는 수백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수준에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 암흑에 뒤덮인 공동 속을, 얼마나 많은 고블린들이 채우고 있을 것인가. 지옥에서 올라온 유황과 흑탄의 괴물들이 어떤 숫자로 들끓고 있을 것인가.


온통 시끄럽고 어지럽던 소음들을 깔아뭉개는 단 하나의 야만적인 포효가 있었다.


“ծոթիդիեքուե մեի նո────!”


그 단 한 번, 괴물의 외침 한 번에 공동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올려다보니 맨 처음의 그 고블린이었다.


가장 거대한 땅거미를 타고 제일 먼저 데쓰웜의 등 위로 올라왔던, 가장 덩치 크고 악취와 거뭇한 오오라까지 배로 짙은 홉 고블린 대장.


그것이 샛노란 안광을 번뜩이며 원정대를 가리키고 소리쳤다.


“նեծ վոծենթ վոլուպթուա եի, թե ֆեուգիաթ դենիքուե թռածթաթոս դուո!”


아무리 귀담아 들어봐야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다.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구조부터 다른 짐승들의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그러나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성 아닌 본능이 괴물들의 언어 속 담긴 함축된 의미를 뇌리에 우겨넣었다.



사람이다. 잡아먹어라.


잘근잘근 씹어 먹어라. 눈알과 내장, 뼛조각 하나 안 남게 거미의 먹이로 주어라. 저것들의 쫄깃한 코와 귀를 간식 삼아라. 야들야들한 살을 포식해 배를 채워라. 심장과 간을 물어뜯어 피를 마셔라.


사람들을 죽이고 지저를 암흑으로 물들여라. 더러운 왕국의 영역을 넓히자.



그것만이 놈들이 존재하는 목적이자 이유다.


맨 이터Man Eater.


오로지 사람의 살코기를 먹고,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가장 사악한 지저의 변종들.

지저 고블린을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이다.


그리고 그것들 대장이 지른 포효가 곧 놈들에게는 신호였다.



─────────────!



지저 전체를 냄새 나는 소음으로 가득 채운다.

오염된 광석으로 벼린 창칼을 맞부딪히고, 사냥한 사람들로부터 얻은 수집품을 뒤흔들며 사방팔방에서부터 달려든다.


어둠의 종자들이 몰려들었다.


수십 미터 높이의 선홍빛 벌레 벽을 타고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혐오스럽게 시커먼 것들.


지저의 왕자 노아 프로스트는 황급히 등 돌리고 소리쳤다.


“후퇴합니다! 어서!”


그러나 울부짖는 괴물들로 가득 찬 땅굴 속에서 그게 제대로 들릴 리 없다.


행동으로 먼저 보여야만 한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탕───!



손대포로 천장에 총알을 발사했다.

총탄이 박히고 찢어지는 소음이 울린다. 찌그러진 탄환이 떨어지며 모두의 시선을 붙잡았다.


“돌아갑니다! 왔던 곳으로!”


목청이 터져라 악을 지른다.


그제야 멍하니 굳어 있던 게 풀린 사람들을 이끌고 가장 뒤에서 뛰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허겁지겁 도망가는 드워프들의 무리, 그리고 어느새 데쓰웜의 거체를 전부 내려오는 데 성공한 땅거미들.

몇 미터 남지 않은 거리에서 득시글거리는 다리 많은 것들이 새카만 괴물들을 태우고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따라잡힌다.


‘···뭔가, 방법이 필요하다.’


저도 모르게 품 안의 장치에 손길이 닿았다.


이걸 발동시킨다면···.


적어도 뒤따르는 고블린과 땅거미들은 전부 압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다 같이 죽을 거다.’


노아 프로스트는 장치에서 손을 뗐다.


이걸 사용하려면 적어도 땅굴을 벗어나, 샛길에 닿은 뒤여야만 했다.


‘아니, 위력을 생각하면 샛길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사실상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봉인해 둬야 해.’


하지만 그렇다면 눈앞의 위기는 도대체 어떻게 해쳐나가야 한다는 말인가?


다른 드워프 전사들에 비해 팔다리가 더 길 뿐더러, 외골격을 착용해 신체 능력까지 증폭된 그는 이동속도가 배로 빨랐다.

덕분에 뒤쳐지는 이들을 지키고 뒤쪽에서 총탄을 쏘아대며 몰려오는 적들을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었으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다.’


홉 고블린들에게 총을 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괴수들 주위를 휘감는 오염된 마력, 새카만 먼지의 오오라는 총탄으로도 뚫기가 쉽지 않다.


차라리 땅거미들의 다리를 노리는 편이 이로웠다.


때문에 계속해서 달리는 도중 뒤를 조준하고 땅거미들의 다리를 사격했으나,


몇 발 쏘지도 못하고 가로막혔다.



캉────!



그 홉 고블린 대장이다.


거대한 거미를 타고 앞장서는 놈이 석탄 가루 흩날리는 기다란 광석의 봉을 휘둘러 총알을 쳐냈다.

도탄된 질량이 인근 벽에 틀어박혔다.


“······!”


노아는 그 엇나간 총알의 궤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조금만 방향이 달랐더라면 다른 작전대원에게 맞았을지도 몰랐을 상황.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다.


노아는 그 모습을 보고 총을 집어넣었다.


총은 저 괴물을 상대로 아주 조금도 쓸모가 없다. 자칫 아군을 다치게 만들지도 모를 도박수를 더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놈들의 속도는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내야만 한다.


노아 프로스트는 칼을 꺼내들었다.


멀리서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직접 무기를 맞붙여서라도 막아내야 할 따름이다.


그런 결심을 담아 도망가던 것을 멈추었다.


지저세계 제일의 야장이 벼린 칼날이 열기를 품고 땅을 긁는다.

훅 솟구치는 열기와 전신의 기관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소된 마력의 증기.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흥분한 듯, 홉 고블린 대장은 땅거미에 박차를 가하며 봉을 들어올렸다. 그 속에 함유된 방사성 마력이 날카롭게 피부를 쑤신다.


‘저것, 분석할 수 있나?’


일반적인 홉 고블린들이라면 한참도 더 전에 분석이 끝난 상대였다. 쉽지 않은 괴물들이지만, 죽여본 적은 많았다.

그러나 대장의 경우에는 달랐다. 한눈에 보아도 덩치나 근육의 밀도부터가 보통의 홉 고블린들과는 격이 달랐다. 싸우는 방식도, 반사 신경도···모든 면에서 한 단계 진화한 개체라는 것이 느껴졌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분석 중···7%.]


유논이나 변종 그레이트 데쓰웜처럼 측정이 불가능하다거나, 대적이 불가능한 종류의 괴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강력한 변종이다 보니 분석하는 데 걸리는 시간 자체가 길었다.


이미 고블린과 홉 고블린들을 넘치도록 많이 분석해 놓아 그 유사한 형체에서 나오는 동작 패턴을 읽는 데에 드는 노력도 훨씬 적어졌을 텐데 이 정도다.


지상의 변종 미어캣들과 비교해도 몇 배는 느린 속도.


결국 정령으로부터 대단한 원조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질 수도 있겠지만, 아니 지겠지만···상관없다.’


그 덕으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야.


지저의 왕자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막강한 기세를 타고 내려치는 어두운 빛 광석의 봉과 불꽃 담은 태도가 서로 부딪힌다.

서로의 힘이 정면에서 충돌하고, 팔이 떨린다. 한 합만으로도 괴물의 주위를 휘감은 검은 덩어리 때문에 숨이 괴로웠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덜미가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기침이 턱 끝까지 밀려왔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노아 프로스트가 다시금 무거운 칼을 휘두르려 했을 때.



“······!”




─────빛이 밝았다.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맞았다.


이 깊숙하고 어두운 지저에서 무슨 빛인가 싶지만, 정말로 눈부시게 밝은 섬광이 굴을 비추고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비벼보아도 틀림없었다.


은빛 빛줄기가 정지한 시야 속에서 더없이 유려하게 흘러갔다.

반딧불이 한 마리 날아오르듯, 별빛 한 줄기가 갈라진 땅의 틈 사이로 스며들듯.


나아가 괴물 대장의 가슴팍에 닿는다.



툭.



순간 난데없이 나타난 선연한 은빛 광채에 두려워하고, 주춤하며 물러서던 변종들의 입가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겨우 이것뿐이냐며 비웃는 간사한 것들의 소리.


그러나 진짜는 그 다음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



소리는 빛이 뿜은 다음에 뒤늦게 찾아온다.


터져나가는 은빛 번개의 춤사위와 함께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고막을 직격한다.

암순응을 거친 눈이 강렬한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질끈 감은 눈꺼풀을 다시금 들어올렸다.


은빛 파도가 지나친 흔적은 과하게 깔끔했다.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오던 거미, 고블린, 모든 괴물들이 돌과 흙의 토사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한참을 굴러 떨어져 십 몇 미터는 족히 거리가 벌어진 그것들의 아우성대는 소음을 들으며, 지저의 왕자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은빛 금속제 핸드캐논을 들어 올린 채 태연히 바라보는 흑색의 마법사가 있었다.

총구에서는 아직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지도 않은 채였다.


“과연 최고급 드워프제 총탄이라 그런지 효과가 확실하군. 전에 쓰던 건 이것에 비하면 싸구려나 다름없었어.”

“······.”

“이게 전부 네 아버지, 라이칸 프로스트가 준비해 준 총알이지.”


마법사는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행을 위해 솔선수범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스스로의 안위도 조금은 지켜야 할 텐데, 왕자.”


네가 죽으면 내 지저의 왕 라이칸 프로스트한테 무어라 말해야 하겠느냐.


그리 꾸짖는 듯한 유논의 무심한 눈길에 노아 프로스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다시금 일행에게 내뱉는다.


“···다시 출발합시다.”


기어오는 괴물들의 어둠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다시금 빛을 이고 길을 올랐다.


작가의말

민초우유님, 후원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민초우유님을 위해서 <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의 세상 속으로 떨어졌을 때 사용할 수 있는 히든 피스를 하나 더 풀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지저도시에 들를 일이 있다면, 그리고 유논과 시드가 이용한 고급 여관에 방문하게 된다면 그곳 주인장에게 ‘늙고 병든 트롤의 고기를 먹고 싶다.’ 고 말해 보세요! 주인장에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억하세요! 늙고 병든 트롤의 고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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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황도 카라얀(2) +4 21.02.16 657 3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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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벌레가 파먹은 구멍(7) +14 21.02.13 647 3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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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벌레가 파먹은 구멍(2) +10 21.02.07 668 3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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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룡地龍의 소굴로(5) +16 21.02.04 724 43 17쪽
149 지룡地龍의 소굴로(4) +12 21.02.03 799 41 16쪽
148 지룡地龍의 소굴로(3) +14 21.02.02 762 40 13쪽
147 지룡地龍의 소굴로(2) +8 21.02.01 778 3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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