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소설을 좋아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능성이란 인물이 성장하며 보여줄 수 있는 능력과 그 소설의 스토리가 안고 있는 기대치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때문에 서장부터 창조주의 등짝에 비수를 꽂을 기세로 힘을 과시하는 주인공보다는, <붉은 고원>의 주인공인 제럴드처럼 ‘7년차 기사 후보생’이 나오는 소설에 더 이끌립니다.
가끔, 아주 가끔 밥값을 하는 ‘페니’, 싸움만 잘 하는 ‘뱅가드’, 어두운 과거가 느껴지는 ‘타나퀼’. 그리고 만년 기사 후보생 ‘제럴드’. 이 네 사람이 모여 만들어내는 화음은 썩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적이고, 거칠고 투박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어떤 ‘균열’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결이 나지는 않은 작품이지만 <붉은 고원>의 이야기는 이들의 균열을 추적하고,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균열은 작품이 보여주는 세기말적 분위기와 묘한 어울림을 연출합니다. 그 세기말적 분위기는 ‘촉수 괴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달라붙는 순간 뇌수가 파헤쳐져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개인 차원에서의 세기말이라면, ‘아뉜의 아홉 자식들’이 꾸미고 있는 것은 세계 차원에서의 세기말일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은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촉수 괴물’을 베어내어 스스로를 구원하고, 나아가서는 ‘아뉜의 아홉 자식들’의 뒤를 밟으며 세계를 구원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붉은 고원>의 부분과 전체는, 늘 세기말적 분위기의 극복이라는 대명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붉은 고원>은 인물의 활동 반경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소설 중 하나입니다. 어찌 보면 판타지 소설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그 특유의 상상력을 거세해 버린 것 같은 느낌입니다. <붉은 고원>에서는 행성을 이동하거나, 때로는 차원까지 바꾸어 버리는 판타지적 상상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판타지로 읽히는 이유는, 등장인물의 동선 너머로 그들이 살아왔던 과거가 교묘히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려져 있는 것은 그들의 삶뿐만이 아닙니다. ‘아뉜의 아홉 자식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 또한 마찬가지로 암막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들이 살아 숨 쉬는 배경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 혹은 현실을 가리고 있는 암막을 벗겨 보려는 시도 또한 ‘판타지스러움’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하나쯤은 균열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러한 균열을 가지고 있고, 늘 목이 마름을 느낍니다. 때문에 균열을 채우거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오늘도 소설을 읽습니다.
<붉은 고원>은 그러한 자격을 충분히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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