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불운과 행운
오전의 한산한 카페 안으로 말끔한 정장의 사내가 들어왔다.
귀 양쪽 옆머리가 희게 보이는 것이 50 초반은 되어 보인다.
널찍한 내부를 돌아보는 그의 시선에 자신을 향해 손을 들고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그런 남자의 옆에 앉아있던 큰 덩치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들을 향해 다가가던 정장의 사내가 그런 그를 보며 주위를 흘끗 둘러보았다.
“야, 야. 내가 조폭 두목이냐? 적당히 좀 해라.”
목소리를 낮추고 손을 내젓는 사내에게 다시 슬며시 고개를 숙여 보인 떡대.
몸을 돌려 카운터로 발을 옮긴다.
“다 끝났다니까. 별일도 아닌데 청주에서 여기까진 뭐 하러 올라와?”
그들의 건너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내가 얼굴을 찌푸렸다.
“기분이 여-엉 찜찜한 게, 우리한테도 혹시 무슨 불똥이라도 튀는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하기도 하고.. 설마, 형. 우리 사업에 문제 생기는 건 아니겠지?”
그런 남자의 걱정스런 표정을 보는 정장 사내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럴 일 없다. 이미 이번 일은 적당한 선에서 처리했으니까. 비서실 한주환이하고 북아프리카 팀 남일우 대리 선에서 마무리 봤다. 물론 청주 윤 씨도 마찬가지고.”
“형. 그거 확실한 거야?”
“확실해. 어젯밤 늦게까지 사장하고 곽 이사하고 나하고 셋이서 회의하고 결정한 거니까.”
“하긴 형이 회사 총괄팀장이니까 힘도 막강하겠지. 그래도 형 위로 곽 이사하고 사장이 있잖아.”
그 말에 정장 사내가 입꼬리에 희멀건 웃음을 흘렸다.
“사장은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고, 곽 이사는 내 손안에 있다. 제 성질도 못 다스리는 다혈질에다 시야도 좁아서 회사를 경영할 인물과는 거리가 멀어. 단순한 놈 적당히 구슬리고 가스라이팅 좀 해놓으니 내 말이면 껌뻑 죽는다.”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까지 흘리는 정장 사내.
왜 안 그렇겠는가?
자신은 어두운 그림자 뒤에 숨어 곽 이사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는데.
그렇진 않겠지만 아무리 큰 문제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책임은 곽 이사에게 있다. 실질적으로 모든 결정을 곽 이사가 했기 때문.
자신을 잡으려 그물망을 던진다 해도 그림자를 잡을 수는 없는 일.
그런 그의 옆으로 다가온 떡대가 커피잔을 그의 앞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요전에 사장이 어디서 한 놈 데려왔길래 곽 이사한테 뒷조사 좀 해보라고 슬쩍 찔렀더니 득달같이 확인해서 나한테 보고하더라.”
말을 마친 사내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는다.
“어떤 놈?”
“있어. 멍청하고 별거 아닌 새끼. 몸집이 주먹만 하고 비리비리한 게 얼굴도 생기다 만 거 같은 놈.”
“저, 형님. 혹시...”
정장 사내의 말에 눈빛이 변한 떡대.
“형님이 말씀하시는 그놈이 이놈은 아닌지 한번 봐주십시오.”
품 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낸 떡대가 사내에게 내밀었다.
“CCTV로 찍힌 걸 인화한 거라 화질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알아볼 만은...”
사진에 시선을 흘끗 던진 사내.
그런 사내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떡대가 말끝을 흐렸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얼마 전에 창고 경비 윤 씨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형님. 재고조사를 한 지 2주 만에 또 누가 재고조사를 왔다고요. 혹시나 하고 창고 앞 CCTV를 확인해 봤는데 그게 이놈이었습니다. 형님.”
미간을 찌푸리며 사진 속의 흐릿한 남자의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정장 사내.
그런 사내를 바라보면서 떡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제 배송을 왔던 놈이 어딘가 눈에 익다 한 게 그놈 같았습니다. 형님. 항상 보던 화물차 기사가 아니길래 눈여겨봤는데 아무래도 같은 놈 아닌가 싶어서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시 더 사진을 뚫어져라 보던 사내가 떡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내일 다시 한번 와라. 추레하게 보이지 않게 그럴듯한 정장 입고 오도록 해. 그놈 목요일마다 출근하니 와서 직접 확인해봐. 그놈과 네가 본 놈이 맞는 놈인지.”
“알겠습니다. 형님.”
“우리 사업을 방해하려는 놈이 맞는다면, 또 그걸 그냥 놔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사진을 쥐고 있던 정장 사내의 미간이 점점 더 좁혀졌다.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 남자.
가늘어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그가 입가에 잔인한 웃음을 흘렸다.
* * *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그래. 거기 좀 앉아봐.”
2층 이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사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내 건너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고 이사.
잔뜩 굳은 얼굴에 불편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래. 이게 다 내가 사람 한 번 잘못 봐서 이리된 일인 거, 다 인정한다. 사장님께도 대구 전영도네 오더 좀 미루자고 말씀드렸어. 사장님도 그러자고 하셨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내 말에 고 이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감사받을 일이 아니지. 차 과장.”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한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전영도네 회사 도움 못 주게 되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나, 이래 봬도, 우리 인천특수철강을 위해서 반평생 바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한쪽 눈이 충혈까지 된 것이 내가 한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게 큰 부담이 되었던 건 틀림없었나 보다. 생각보다 애사심이 꽤 깊었나 보네.
“그래도, 차 과장 일하는 걸 보면서 회사 말아먹을 녀석은 아닌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 큰 거래를 못 하게 하는 걸 보고 너 진짜 상종 못할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지난밤에 한숨도 못 잤다.”
잔뜩 굳은 표정에 귓불까지 새빨개진 고 이사.
마치 나를 세상을 팔아먹은 놈인 것처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
“너, 어디 솔직하게 말 좀 해봐라. 내가 어디 가서 아뭇-소리 안 할 테지만 들어보고나 싶어서 하는 말이다. 너, 차 과장! 우리랑 비슷하게 압연해서 팔아먹고 사는 명성철강 같은 데서 뒷돈이라도 받은 거냐?”
예상치 못했던 말이 이사의 입에서 나오는 걸 듣고 있자니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졌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런 나의 표정에 기분이 더 나빠졌나 보다.
이사의 표정이 한순간 와락 일그러졌으니 말이다.
“너. 진짜!”
“죄송합니다. 이사님. 이사님 말씀이 너무 예상 밖이라서...”
공손한 말투로 사과하고 여전히 번뜩이는 눈을 부라리고 있는 이사를 바라보았다.
“이사님. 제 의도를 좀만 지나면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 이사님이 좋은 결정 하신 걸 얼마 뒤에는 알게 되실 테니까요.”
당장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거래에 재를 뿌려놓고 엉뚱한 말을 이렇게 늘어놓고 있으니 이 세상 어느 누가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이 상황이 답답한 건 고 이사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
이번에 얼씨구나 좋다 하고 납품했다간 회사 직원들 4개월을 손가락만 빨게 된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이사님.”
“......”
“더도 말고 넉넉잡아 두 달입니다. 그 사이에, 어떻게든 제 말이 맞다는 게 밝혀지면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남은 제 부탁 2개를 틀림없이 들어주세요. 이사님.”
“네 말이 틀린 거면?”
“이사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씀하실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으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약속 꼭 지켜라.”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나를 노려보는 이사를 보고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사님도 꼭 약속 지켜주십시오.”
-♪♬♪~ ♬♪♩♬~
쟈켓 안주머니에 넣어놓았던 휴대폰이 울렸다.
“받아봐.”
손을 집어넣어 휴대폰을 꺼내서 액정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사모님이십니다.”
“알았다. 나가 봐.”
부지런히 발을 옮겨 이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예. 사장님. 차 실장입니다.”
두 사장에, 두 직책.
무심코라도 전화응대에 상대방과 나의 호칭을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
“차 실장. 혹시 지금 많이 바빠요?”
“아닙니다. 바쁜 일은 모두 끝냈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럼 나 좀 잠깐 볼까요? 지금 남동공단에 와 있는데.”
“예? 무슨 일로...”
“나야 뭐, 돈 되는 일 찾아다니는 게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한 사모.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는지 까르르 웃는다.
급변한 사모의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창고를 기습, 벽 뒤에 은밀하게 숨겨놓은 불량 원자재를 찾아내지 않으셨나?
직영공장 직원들마저 작업하던 손을 멈추고 모두 창고로 소환되었다 했다.
가위와 작두까지 대령하게 한 사모.
자신이 보는 앞에서 남아있던 원자재가 마치 종이파쇄기를 거쳐 나온 것처럼 분쇄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서울 사무실로 돌아갔다 했다.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 경비였던 윤태복이 이마를 뾰족한 힐로 가격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
밤늦도록 비상 회의까지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벌써 남동공단에 와 있단다.
“사장님한테는 내가 그러겠다고 미리 얘기해 놨어요. 잠깐 나와서 같이 바람 좀 쐬고 점심만 같이 먹고 들어가요. 괜찮죠? 차 실장.”
“...알겠습니다. 사장님.”
통화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큰 변화의 파도들이 갑자기 내게 밀려들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정도.
하지만, 나쁠 건 없다.
그럴수록 성취하고 싶은 욕망이 비례하듯 점점 더 커지고 있으니.
이제 운이 좋아 공짜로 모든 것을 얻은 서른넷의 홍두식은 없다.
이번 생에는 내 힘과 노력으로 그 모든 것을 쟁취할 차진구가 있을 뿐이다.
아니, 얼마나 높은 곳까지 내가 오를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그렇게 잠들어있던 야망이 눈을 뜨고 용트림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 * *
“....흐음.”
낡아 보이지만 널찍한 건물 안을 돌아보는 사장의 눈이 반짝인다.
“가구 전시장으로 쓰던 곳인데 여기저기 손 좀 보면 나쁘진 않을 것 같군요.”
남동공단 맨 외곽.
인천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빈 건물을 어떻게 찾아낸 건지.
“차 실장. 어때요? 꽤 쓸만해 보이지 않아요?”
“예. 마당도 넓어서 주차 공간도 충분해 보이고 진입로도 넓고 좋아보입니다.”
“맞아요. 또 바로 앞이 경인 제3 고속도로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편리하고요.”
그렇게 말하는 사장의 표정도 밝은 것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다.
이곳을 사 놓고 새로 건물을 지은 후에 다시 팔아 돈을 버는 갭투자를 하려는 것일까?
하긴, 사장이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하는 일이 많아 지금 회사의 경영에 온전히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역시 돈이 돈을 버는 세상.
투자라는 것의 대상도 클라스가 다르긴 하다.
“차 실장이 맘에 들면 이곳으로 할까요?”
그렇게 묻는 사장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하다.
“...예에? 사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요전에 우리 그이한테 사업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네에?”
아, 물론 말을 꺼낸 적은 있다.
하지만 진짜 사업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호주에 있는 두 군데 양모수출업체를 체크해 보겠다고 한 말이었다.
T-renders 와 Trans-Original 사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데 사모의 회사가 Trans-Original과 계속 거래해야 한다면 확실하게 확인하고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해서 이곳저곳 파보자고 한 말이었다.
혹시라도 두 곳이 어떤 이유로라도 관련이 있고 구린 구석이 있다면 최소한 그것을 알고 피하자고 사장한테 낸 의견일 뿐.
물론 나중에 능력이 된다면 작은 오퍼상으로 시작해서 차곡차곡 쌓아 올려 키워나갈 계획은 있지만 말이다.
“사장님. 그건 그냥 유령회사를 하나 차려서...”
“까짓거. 진짜로 해보세요.”
“......”
“그이 얘기 듣고 투자가치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예상치 못했던 말에 눈만 똥그래진 나를 바라보는 사모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나, 이래 봬도, 이익이 안 될 거 같다고 판단되면 두 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아이디어 괜찮을 거 같아요. 차 실장이 책임지고 고품질 원자재 수입해서 청주공장에 공급해주면 지금과 같은 일은 안 생길 거 아녜요? 그렇게 되면 나도 한시름 놓게 되니 명줄도 길어질 테고요.”
“......”
“경원실업에서 생산하던 수출품 대신 만들어줄 다른 곳도 급히 찾아야 하는데, 뭐,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이 근처에서 자그마하게 생산 공장 시작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고요.”
“...사장님. 생각할 시간이..”
“지금 당장 말해달라는 건 물론 아니에요.”
그녀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26일에 2박 3일 싱가포르 다녀오기로 되어있죠?”
“...예. 사장님.”
“돌아와서 그때 말해 주면 돼요. 그때까지 여기 홀드 해달라고 할게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강 부장한테 말해서 비행기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해 놨어요.”
“......”
“어려서부터 검소함이 몸에 배어있는 분이시라서 그럴 줄 알고 제가 확인해봤거든요.”
사장의 품성은 알고 있다.
깍두기처럼 생긴 소형차를 타는 걸 보는 순간부터 이미 파악한 내용.
나는 다르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혼잣말로 하는 루틴이 있다.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곧 성공을 움켜쥐고 그에 어울리는 럭셔리한 삶을 살 것이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케이. 그럼 갈까요? 싱가포르 다녀온 다음에 호의적인 대답 기대할게요.”
예상보다 더 빠르게 기회가 오고 있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오를 것이다.
용솟음치는 기대감.
터질듯한 설레임과 욕망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제, 이곳은 나의 시작점이다.
내 얼굴을 흘끗 본 사모.
만족스러운 듯 웃음 짓는다.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이 표정으로도 이미 모두 드러났을 것.
어깨를 펴고 이제 내 눈에 완전하게 다르게 보이는 건물 내부를 하나하나 눈여겨 본다.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오롯이 나의 미래.‘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사모를 따라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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