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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의 판타지 모험담

전쟁 후 우리는

웹소설 > 일반연재 > SF, 드라마

Toary
작품등록일 :
2023.07.17 00:45
최근연재일 :
2023.08.29 03:47
연재수 :
12 회
조회수 :
349
추천수 :
5
글자수 :
21,916

작성
23.08.22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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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쪽

09

DUMMY

숨죽은 아침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거사를 앞에 두고 몸이 가벼우니 이것은 길할 징조인가.


태평양횡단열차가 출발하는 시각보다 이르게 일어난 나는 캘리포니아의 모든 짐을 정리했다.


열차에 탑승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제하고.


반복되는 짐정리에 이제는 5분도 걸리지 않게 되었다.


깔끔하게 다린 맞춤정장을 입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눈에 담으니, 피비린내 나는 무중력의 공간과는 퍽 안울리게 신수좋은 남자 하나가 서있지 않던가.


거울을 보며 읊조렸다.


"좆까."


나는 웃고 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캘리포니아.


지진이 다분하기에 수백년간 마천루 대신 아기자기한 모습을 유지했다지.


그 덕에 마치 캘리포니아 전역이 눈에 담기는 듯 했다.


'작별인가.'


다시 캘리포니아를 찾을 일이 생길까.


나는 출발 시각이 다가오는 태평양횡단열차에 탑승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 앞에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여기 사람이 아닌가 봐요?"


기사가 넉살 좋게 물었다.


"네. 딴데서 왔죠. 티가 나나요?"


"그럼요. 캘리포니아에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어울려 살아도 수십년 살아온 냄새는 못빼죠. 하하. 관광하러 오셨나?"


"일 때문이죠."


"어디서 왔어요? 런던? 느낌은 딱 그쪽인데. 아니면 소노라?"


"하하, 아녜요. 카이로에서 왔죠."


"음. 그래서 그런가? 태어난 곳도 카이로인가봐요?"


"프리토리아에서 났죠."


"반쯤 맞았군요."


"반쯤 맞은 건가요?"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을까요? 양간열차역이라니. 멋진 일 하시나 보네."


양간열차역. 태평양횡단열차가 출발하는 역이었다.


택시는 산 페드로 광장을 쭉 에둘러 나아갔다.


산 페드로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으므로, 절로 눈길이 갔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카이로는 상황이 좋나보네요."


"네?"


"피켓을 들고 있잖아요. 인플레이션 해결을 요구하는 시위대죠. 산호세 뿐이 아니라 다른 데도 다 이렇다더라구요."


그의 말대로 사람들의 무리에 붉은 스프레이로 휘갈긴 피켓들이 많이 보였다.


"어쩔 수 없죠. 최근엔 실직자도 굉장히 많이 늘었으니까요. 다들 먹고 살기 바쁘다, 그런 거죠."


누군가는 형장의 이슬이 될때 밥 걱정이라니.


팔자가 좋다 해야할 지 팔자가 나쁘다 해야할 지 웃음이 났다.


정말로 웃긴 일이었다.


'아무도 관심 없다는 건가.'


이 나라의 정치가 어떻게 흘러가던.


그저 배만 부르면 된다는 건가.


'세베로 마리노는 이런 이들 위에 군림하고 싶다는 거고?'


그야말로 돼지들의 왕이 아닌가.


'이미 저들은 군인을 잊었다.'


나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대었다.


전쟁의 책임은 모조리 군인에게.


그야말로 제 격에 어울리는 정부를 가진 꼴이 아닌가.


배 부르기만을 원해서 더러운 짓거리를 해대는 에른스트 대통령이던.


저들이던.


실소가 났다.


'내가 살만해야 동정도 해볼만 하다는 거겠지.'


이 순간, 세베로 마리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하지만 전쟁에 대한 패배는 져야겠죠. 일당체제는 그런 거에요. 다당제 아래서는 국민이 그 책임을 분담하지만, 일당체제는 당이 그 책임을 진답니다. ]


책임 지기 싫은 국민과 일당제.


저들에게 민주주의는 너무 일렀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둔한 이에게 권리와 책임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인류가 민주주의에 대해 한 가지 얻을 교훈이 있었다면 그것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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