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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일 님의 서재입니다.

우사인 볼트 씹어먹는 괴물 육상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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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정하일
작품등록일 :
2024.05.08 11:43
최근연재일 :
2024.06.15 08:30
연재수 :
42 회
조회수 :
21,988
추천수 :
522
글자수 :
281,222

작성
24.06.01 08:30
조회
350
추천
11
글자
19쪽

EP4. 이홍섭호, 날개를 달다.

DUMMY

정철민.

서울, 초등교사.

나이 만 27세.


“-저도 여기 길이 말처럼 기대고 싶은 어른도 되고 싶고요.”


일순 이홍섭은 정철민의 말에 감복하여 너스레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철민은 처음부터 꿈이 초등교사가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까지 열심히 뛰었다.

그랬다.

한때 그도 트랙 위의 러너였다.


초등부 경기까진 가히 파란만장했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볼 적에도, 일취월장하는 자신의 기록에 잠 못 이룰 때도 많았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정철민의 질주에도 제어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리 많은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단, 2년.


마지막까지 남은 한 줌의 고집까지 꺾는 데엔, 그로부터 딱 2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급격한 성장기에 접어드는 청소년기.

안타깝게도, 정철민의 키는 중학교 1학년에서 멈춰 버렸다.


169cm.

그래서 이젠 정철민이 가장 싫어하는 세 자릿수이기도 했다.


초등부란 범주 안에선 훤칠한 키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월등한 피지컬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안에서의 얘기였다.


한데.

자신의 키는 멈췄는데, 왜 옆 레인 아이들은 몇 달 새에 또 훌쩍 커버린 걸까.


탕-!!

총성과 함께 터뜨린 스타트는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하나, 대지를 쾅쾅 찍어 대며 피니시 라인까지 질주하는데, 영 그때의 맛이 아니다.

중간 지점부터 옆 레인의 선수들이 한둘씩 자신을 추월하며 우월한 기럭지를 연신 뻗어 댄다.

경쟁자들의 보폭과 미치도록 성장한 피치를 따라잡기엔 정철민은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하늘에 이렇게 사무치게 애원하면 ‘언젠간 나도 크겠지, 친구들의 정수리를 나도 손쉽게 확인할 수 있겠지’란 망상에 가까운 소망을 더 고이 간직하며 오롯이 훈련에만 전념했다.


달릴 때만큼은 잡념이 사라지는 건 다행히도 같았으니까.


그런 자기 위로 속에서 몇 달을 더 버텼다.



***



역시 안 컸다.

더럽게 크지 않는다.


문득 거실 소파에 앉아 단란하게 사과를 집고 있는 부모님을 돌아봤다.


‘오, 신이시여.’


이해가 됐다.

빌어먹게도 키는 유전이 맞았다.


3년 전, 초등학교 선생님이 ‘키는 유전이니까 그렇게 아등바등 노력하지 말거라’했던, 그 농담이 정철민에겐 서늘한 진담이 되어 찾아왔다.


철민의 엄마가 인기척에 고갤 돌렸다.


“으음? 철민이, 너도 먹을래?”

“아니······.”

“쟤가 요즘 왜 저렇게 얼굴이 죽상일까?”

“아냐, 그냥 나 먼저 잘게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우울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찌 부모를 탓하겠는가. 지금껏 다치지 않고 트랙에 줄곧 있었던 건 비단 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정철민은 의젓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어찌 가증스러운 키 하나에 그간 쏟아부었던 달리기를 접을 수 있겠는가!

한 번 사는 인생, 굴복보단 극복이 더 멋있지 않겠나!

이 곤조 하나로 마음을 또다시 다잡았다.


다음날에도 정철민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란 아픈 격언을 마음속 깊이 새긴 채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게 마주한 소년체전.

정철민은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하윽······.”


후회는 없었다.

주어진 조건에서 할 만큼 했기에.


하나, 흐르는 눈물은 감추지 못했다.

그날만큼은, 부모님 품에 안겨 마구 울어 댔다.


그제야 그 나이에 맞는 정철민이었다.



* * *



교대에 진학해, 세부 전공으로 체육교육과를 선택했다.

육상이란 종목은 당연히 없었으니 정철민은 영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날 눈물을 한 바구니 쏟아 내면서 걷어 냈다고 생각했지만, 늘 정철민의 심중엔 질주했던 트랙이 붉은 줄처럼 선명히 남아 있었다.

묵힌 한이 은연중에 마구 쌓여 마음 한구석에 멍울로 남았다.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진해진 탓에 어떻게라도 달려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4년 내내 축구만 열심히 했다.

대신 욕구를 풀어 줄 창구가 그것뿐이라 여겼다.


3년 뒤.

어찌저찌 임용을 통과하고, 신규 발령이 난 학교에 발을 들였다.


예쁜 정원이 있고, 그만큼 더 꽃 같은 아이들이 정철민을 반겼다. 하여, 교사로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단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출근하는 길의 자기 표정이 해맑았기 때문이다.


한데, 자신이 일찍이 선배들에게 전해 들었던 학교의 분위기는 이곳과 거리가 멀었다.


인상만 좋은 교감이 고래고래 언성을 높이고, 코치라는 양반이 걸쭉하게 욕을 뱉었다.


몇 달 뒤. 둘은 언제 또 화해라도 했는지 서로 허허거리며 웃는다.


하지만 그날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득달같이 서로 달려들며 이를 갈았다.


‘학교도 사람 사는 곳이라 그렇구나’라고 여길 즈음, 갑자기 정철민은 교장실에 호출 당했다.


실상 정철민, 그도 피해자였다.

그날은 일찍 조퇴하고 소개팅을 나가려던 아주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덕분에 약속을 파토 낼 수밖에 없었다.


‘잘 가, 이어질 수도 있었을 내 사랑······.’


그리고 그날.

옅어져 갔던 자신의 야망을 교장실에서 찾았다.


실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아이였다.


그 아이의 이름도 참 멋있다고 여겼다.


‘한길.’


정철민은 소개팅보다 더 갈구하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EP4. 이홍섭호, 날개를 달다.





“헉, 헉!!”

“하, 하······.”


초여름의 아침 공기를 가르는 숨소리가 운동장을 메웠다.


이젠 군말 없이 뛰는 선원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체력이란 건 이 악물고 정신 무장만 했다고 습득되는 손쉬운 아이템이 아니었다.


선장, 이홍섭은 낙오되는 선원이 없도록 더 질타했다.


“할 수 있잖아!! 한걸음에 집중하면 안 돼!! 멀리 봐!”


역시.

5바퀴째, 자연스레 4학년짜리 동생이 퍼진다.

치켜들던 무릎 높이가 점차 낮아지더니, 이젠 아예 자포자기하며 걷기를 시전한다.

자기도 힘드니깐 이젠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일 거다.


하지만 그렇게 걸어 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수찬아아아!! ”


이홍섭의 중저음 고성이었다.


“하, 네네······ 달릴게요.”


그렇게 겨우 7바퀴째.

5학년 동생들이 무슨 단지 동맹이라도 맺은 듯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 하나둘씩 뜀박질을 관둔다. 배신하는 놈 하나 없다. 의리 하나는 뒤지게 좋다.


이에 맨 뒤에서 뒤따르던 이홍섭이 괴로움에 포효했다.


“제에에발!! 이놈들아! 짰냐, 너네?!!”


실은 이런 게 문제다.

분명 부모가 낳아 준 신체는 이것보다 더 사력을 다해 뛸 수 있는 시스템이 출중히도 탑재되었을 거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저 ‘이쯤이면 됐겠지.’ ‘봐봐, 내 옆도 퍼졌잖아.’라는 약하디 약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여, 선두의 한 놈이 느려지면 멘탈이 약한 아이들은 같이 무너졌다.


‘쟤도 멈췄으니 뭐, 나도 걸어야지.’


대안 없는 선택이 도미노처럼 이어진다.

이홍섭의 심경이 이해가 간다.


역시나 8바퀴를 들어가기 직전에 6학년 밑은 모두가 퍼졌다.


“와, 길이형은 진짜 지치지도 않나 봐······.”

“근데 멋있지 않아? 얼굴도 잘생기고 달리기도 잘하고, 들어보니까 반에서도 1등한대.”

“뭐 진짜아? 성격도 좋은데, 완전 다 가졌네.”


나는 아이들의 선망 어린 눈빛을 애써 무시한 채, 뜀박질에 기세를 더했다.


파바바박-!!


타다다닷!

‘음?’


멀고도 가까운 내 동료, 오승탁은 내 옆을 착실히 따라잡고 있었다.


“근데 승탁이형도 빠르긴 하다, 그치?”

“하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

“아니, 저 형은 달리기말고 딴 게 문제야.”

“으음? 그럼, 뭐가 문젠데?”


날아든 질문에, 오승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이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여기가 문제야, 여기.”

“하긴······.”

“저 형은 눈부터가 이상해.”


아무도 그 아이가 내린 진단에 반기를 들 순 없었다.


그렇게, 9바퀴.

오승탁과 나는 선두, 그리고 그 뒤엔 이홍섭과 정철민이 꼬리를 담당했다.

보아하니, 이홍섭은 마지막 스퍼트를 내기 전 자신의 가르침을 제대로 인지하고 행동으로 옮기는지 그걸 확인하려는 생각 같았다.


“야, 야. 승탁아, 팔꿈치!! 가슴 위를 올라가면 어떡하냐!!”

“아, 안다고요!”

“얌마, 알면 해 좀!”


“길아, 상체가 바빠야 한다!! 달리기는 마지막엔 상체야!!”

“옙!”


그 뒤에서-


“후욱, 후욱, 후욱!!”


둔탁하면서도 규칙적인 호흡이 내 귀에 들려왔다.


‘정철민?’


얼굴만 봐선, 20대 중후반 정도 같았는데 생각보다 체력이 좋아 보인다. 오늘 아침 처음으로 훈련에 참여한 것치곤 한 번도 주춤하지 않고 잘 따라오고 있었다.

하나, 우릴 추월하진 못했다.


잠깐 돌아보니, 정철민의 표정은 제법 여유로웠다. 늘 해오던 달리기를 이어서 하는 느낌처럼 입에선 숨을 짧게 내뱉는 소리만 끊어 들렸다.


‘원래 러닝도 좀 하셨나?’


마지막 바퀴.

다시 말하지만, 이건 워밍업이었다.

그래서 나도 오승탁도 앞으로 계속 있을 스프린트 훈련과 쳐다만 봐도 거지 같은 저항성 운동이 있을 게 뻔하니, 딱 그 정도의 체력은 비축할 요량으로 뛰고 있었다.


한데.

내 뒤에서 뜀박질 소리가 더 빨라졌다. 대충 귀로 듣자 하니, 이건 보폭을 늘린 게 아니라 차라리 피치를 더 빠르게 돌린 사운드였다.

혹여나 또 오버하는 오승탁일까 하는 생각에 돌아봤지만 얘는 아니었다. 말대꾸는 꼬박꼬박 했어도, 이홍섭 말은 자기 엄마 말보다 더 잘 듣는 녀석이었으니까.


게다가 하염없이 소리치고 있는 이홍섭도 그렇게 호흡을 무너뜨릴 짓을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예전에 저도 중학교 때까진 선출이었어요.’


정철민이 뱉은 말이 내 머릿속을 스칠 때 즈음, 이미 그는 날 제친 뒤였다.


파바바박-!!!


“와아, 체육쌤 겁나 빨라!”

“표정은 엄청 힘들어 보이던데!!”

“야, 야! 어른이잖아! 어른이면 당연히 우리 이기지!”


‘뭐야, 스퍼트를 낸다고?! 20m 남은 것도 아닌데?’


정철민은 바람막이를 흩날리며 점차 간격을 벌렸다. 마치 지난날 운동회 때, 먼저 바통을 받고 냅다 튀어 버린 청팀, 진우주가 겹쳐 보였다.


저릿한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설마······ 일부러 내 뒤에?’


아까부터 뒤에서 속도를 유지하던 정철민이었다.

더 빨리 달리지도, 뒤처지지도 않았다.

딱 내 속도만큼. 더도 덜도 달리지 않았다.


서얼마, 나를 바람막이로 삼은 건가?!!?!

진짜로?!


힘차게 팔을 내저으며 달리는 저 모습을 보니, 헐.

맞는 것 같다.


‘정철민 씨, 당신······. 어른이잖아.’


중장거리의 묘미처럼, 교활한 정철민은 내 뒤에서 바람 저항을 최소화했고, 곡선 주로를 마치자마자 날 제친 것이었다.

더는 내가 필요 없었을 테니까.


‘히야, 이거 재밌네.’


그랬으면, 안 됐는데.

나도 더 치고 나아갔다.


기록은 앞에 멀어지는 무언가가 있을 때, 더 단축되는 법이니까.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볼이 그렇고, 네트를 넘어오는 배구공이 그렇듯 목표물이 있으면 인간은, 아니 동물은 더 초인적인 여분의 힘을 더 끌어내게 된다.


파바바박-!!


“야, 야! 한길! 천천히 달려!”


그때, 정철민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입을 앙다물고 쫓아오는 날 확인하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내 예상이 맞았다.

정철민은 방금 날 추월한 것에 ‘희열’을 느낀 거다.


그러다 어른, 정철민은 또 스퍼트를 냈다.

어째 아까보다 보폭을 더 늘리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타닷, 타다다닥!!


그렇게 아이인 날 상대로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짧은 새에 쳐다본 그의 자세는 나쁘지 않았다. 상체의 부지런한 움직임과 팔치기 그리고 보폭과 피치까지 딱히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숱하게 달려본 솜씨였다.


다만,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면-


저건 오랜 시간 동안 다져진 근육과 골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저 순수한 ‘어른의 힘’이었다.

정철민은 순전히 힘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직 나와 오승탁은 지금 따라 하려야 따라 할 수 없는 그런 움직임이었다.


타다다닥-!!


내가 연쇄적으로 간격을 벌리니, 그 도미노가 이젠 오승탁까지 넘어가 버렸다.


그렇게-

겨우 정철민을 따라잡는가 싶을 때, 정철민은 피니시 라인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해 댔다.

바로 멈추지도 않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까지.


‘이 사람, 배웠다.’


근데, 뭔가 배알이 꼴린다.


당연히 외모만 초딩인 나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오승탁과 날 이겨 먹을 생각으로 달린 것 같다. 아니다, 확실하다.


지금 정철민이 날 돌아보며 환히 웃고 있다.


저 웃음은······.

아이를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너 이겼다’라는 표정이다.


하, 정철민.

우릴 추월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다.


그리고 자기 기분을 여과 없이 뱉어 냈다. 뉘앙스를 보니, 딱히 악의는 없었다. 근데 묘하게 배가 아프다.


“이야!! 빠르긴 하네! 한길! 하지뫈~ 내가 이겼죠?”


귀를 의심했지만, 고개만 주억였다.


“하······ 덕분에 오버페이스했네요.”


정철민의 가슴팍이 부풀어 올랐다 수그러들기를 반복했다.


“근데. 설마설마했는데, 너 진짜 잘 달리는구나?”


정철민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 눈빛마저 2년 전 이홍섭과 제법 많이 닮았었다.

마치 젊은 이홍섭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는 행동은 영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그랬으면, 안 됐어요. 선생님.”


“응?! 무슨 소리니?”


“뒤를 보세요.”


내 말에, 뒤를 돌아본 정철민은 오승탁을 마주했다.


눈이 반쯤 돌기 직전인 오승탁이었다.


그래, 우리 승탁이.


“얘, 얘 눈이 왜 이래, 이거!”


그야, 자기보다 앞선 애들한텐 항상 드러내는 눈빛입니다만?


예전엔 싸대기 마려운 오승탁의 눈빛이었지만 지금은 살짝 반갑기도 하다.


“다시 뛰어요, 비겁했으니까······!”


“야, 야! 이, 이런 게 다 전략이야, 전략!”


“다. 시. 뛰. 어. 요.”


승탁아, 물어!


정철민의 도발 덕분에 오늘 아침 훈련엔 좀 더 생기가 돌았다.

반면, 정철민의 입엔 핏기가 돌았다.



* * *



KBS배 전국 육상경기 대회.

대한 육상연맹과 KBS가 공동 주최하는 이 대회.

이번만은 그 규모가 좀 다르다.


내가 지금 한참을 손톱만 물어뜯는 이유였기도 했다.


이홍섭에게서 받아든 ‘대회 요강’에 즐비하게 적힌 다른 문구는 하등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이 하나.

-국가대표 선발대회 병행.


이 문구가 내 시선과 사고까지 멈춰 세웠다.


전생에 정말 목전에 뒀던 내 인생의 목표였으니까.


마치 전국 체육대회 때의 3레인에서 내뱉었던 그 숨소리마저 다시 귓바퀴에 맴도는 것만 같다.


그런 내가 돌고 돌아, 또다시 이 스타디움에서 치를 종별은 더는 남고부가 아닌 5, 6학년 통합부. 심지어 전생에 고교 전지훈련까지 포함해 도합 다섯 번은 넘게 들렸었던 경기장이다.


“그래, 장소는 예천이다, 얘들아. 그래서 이날은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해. 뭐, 만일 일찍 탈락하면 바로 올라와야겠지만 통과하면 아마 근처 숙소라도 잡아야 할 거다. 어차피 2주일 뒤라 다시 얘기하겠지만. 그리고 이젠 체력 관리뿐만 아니라 어쭙잖게 무리하다가 다치는 일 없도록 해. 알겠지?”


““네!””


오승탁과 나.

그리고 5학년 셋.


다른 인원들은 제각각의 이유가 대회보다 더 앞섰다.


그날이 공교롭게 학원 레벨 테스트 날이라서, 가족 캠핑 날짜와 겹쳐서, 할머니 생신이어서.

갖가지 다양한 이유로 아이들이 대회를 건너뛰었다.


그럴 적마다 오승탁은 동생들의 사연을 들으며 이를 바득 갈았다.


“허수 새끼들.”


“야, 부랄탁. 네가 거기 가서 예선 탈락하면 너도 바로 허수 행이야, 인마.”


“내가 그럴 것 같아?”


“너 진심 정신 감정 좀 받아 봐.”


어째 높아지는 기록이 이놈을 더 망치는 것 같다.


뒤이어 이홍섭은 요강에 대한 설명을 어느 정도 마친 뒤에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래도 이때 아니면 내가 또 너네한테 뭘 사주는 날이 잘 없을 거 같아서-”


아이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직감했다.


어른들이 갑자기 말을 어눌하게 늘어뜨리며 주머니를 만지작거릴 땐, 필시-

‘베풂’의 덕목을 행하는 것이리라.


“이 카드 받고 너희들 같이 모여서 아이스크림이나 맛있는 분식이라도 좀 먹고 가. 오늘 오후 훈련도 고생했다, 더웠을 텐데.”


경이로운 지갑이 열렸고, 아이들의 시선은 더는 이홍섭에게 가지 않았다.

오직 카드 한 장에 온 시선이 꽂혔다.


“우, 우와아아!!”


“그 길아, 여기 동네에 탁이랑 동생들까지 먹을 만한 곳 좀 아냐?”


“움? 코치님은 안 가세요?”


“아, 나는 급히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대신 인솔 좀 부탁할게. 카드는 내일 내 책상에 올려 두면 돼, 영수증은 필요 없다.”


필요 없긴.

지금 보니까, 오늘 애들이 아주 뽕을 뽑을 기센데.


5월 초긴 하지만, 슬슬 무더워질 때라 애들이 빙수에 코라도 박을 것 같았다.


“아 네네, 애들 데리고 제가 갈게요.”


이홍섭은 그렇게 동생들을 내게 떠넘기고 자리를 떴다.



* * *



“형! 딸기 빙수도!”

“아, 얘 먹을 줄 모르네~ 먼저 매운 것부터 먹고 차가운 걸로 달래야지!”

“길이 형, 꼭 튀김도 시켜 줘!”

“빨리 가서 자리 잡기나 해.”


주문서가 무자비하게도 길게 뽑힌다.

아 맞다, 한 놈을 잊고 있었다.


“야 부랄탁, 너는?”

“부랄? 동생들 앞에서 뒤지게 처맞고 싶냐?”

“빨리 주문하라고, 그니까.”

“-애플망고 빙수.”


애플망고라······.

아니, 이런 저능한 원숭이가 진짜.


“적어도 메뉴판은 보고 주문하는 게 상식 아니냐? 네 눈에 저기 애플 망고가 있어?!”

“새끼가, 난 그게 좋다고. 날도 더운데 아까부터-”

“줄 기니까, 얼른 시키기나-”


그렇게 계산대 앞에서 나와 오승탁이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일 때.

뒤에서 기다리던 다른 무리 중 하나가 매섭게 한 방을 날렸다.


“시발, 야. 전세 냈냐? 대충 주문하고 꺼져.”


나와 오승탁은 동시에 뒤를 향해 고갤 돌렸다.


우리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녀석들.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아주 띠꺼운 얼굴로 서 있었다.

하나같이 주머니에 손을 한껏 찔러 넣고, 얼굴엔 가오를 풀 장착한 채로 말이다.


오승탁의 폭풍의 전학 첫날을 방불케 하는 인상이었다.


무리 중 유독 덩치가 있는 녀석 하나가 고개를 까닥거린다.


그 녀석이 다시 한번 묵직하게 쏘아붙였다.


“야. 뭘 봐, 보긴.”


무리를 쭉 훑어보다 내 눈은 그 덩치 뒤에 있는 키 큰 녀석에게서 멈췄다.


어, 어엇?


“안 들리냐, 꺼지라고.”


비슷한 야수의 심장을 지닌 자를 만나서였을까.

오승탁이 옳다구나 반응했다.


“시발이라 했냐, 이 시발 새끼야.”


아 안 돼, 오승탁!


“어이쿠, 시발 한 대 치겠다, 돈 많냐?”


“너 하나 줘패 줄 정도는 있을 걸?”


내가 다급하게 오승탁을 감싸 안으며 말렸다.

하나, 제대로 화가 뻗쳐버린 오승탁이었다.


몸을 자꾸만 그 녀석에게로 들이밀려 했다.

정말 이 손을 놓으면, 여긴 그냥 아주 개난장판이 될 거다.


“놔 봐, 새끼야. 왜 맨날 시발 나만 말려.”


“그야, 너만 참으면 평화로우니까!”


오승탁의 상대 뒤에 있는 녀석은, 엮여서 좋을 놈이 절대 아니다.

나는 지금 관상으로 판단한 게 아니었다.


“하오, 이 쫄보 새끼!”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당연히 경기도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도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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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4. 이홍섭호, 날개를 달다. 24.06.03 336 8 14쪽
29 EP4. 이홍섭호, 날개를 달다. 24.06.02 343 10 17쪽
» EP4. 이홍섭호, 날개를 달다. 24.06.01 351 11 19쪽
27 EP4. 이홍섭호, 날개를 달다. +1 24.05.31 391 8 15쪽
26 EP4. 이홍섭호, 날개를 달다. +1 24.05.30 389 11 13쪽
25 EP4. 이홍섭호, 날개를 달다. +1 24.05.29 417 11 16쪽
24 EP4. 이홍섭호, 날개를 달다. 24.05.28 453 14 12쪽
23 EP3. 꿈나무들아, 미안하다. +1 24.05.27 436 13 17쪽
22 EP3. 꿈나무들아, 미안하다. 24.05.26 423 14 13쪽
21 EP3. 꿈나무들아, 미안하다. 24.05.25 432 10 13쪽
20 EP3. 꿈나무들아, 미안하다. 24.05.24 422 11 15쪽
19 EP3. 꿈나무들아, 미안하다. 24.05.23 431 10 12쪽
18 EP3. 꿈나무들아, 미안하다. 24.05.22 464 13 16쪽
17 EP2. 떡잎부터 다르다. 24.05.21 462 10 15쪽
16 EP2. 떡잎부터 다르다. 24.05.20 456 12 16쪽
15 EP2. 떡잎부터 다르다. 24.05.19 487 1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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