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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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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7.07 21:42
연재수 :
30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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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2
글자수 :
1,720,011

작성
19.09.04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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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9쪽

하이엘프

DUMMY

“하아...”


류아는 오늘만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퐁당.


대충 던진 자갈이 호수의 잔잔한 표면을 깨어 파문을 만들었다. 걸터앉기 좋은 넓적바위가 있어 아무 생각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 덕분에, 어느새 류아의 단골 쉼터가 되어버린 이곳은 아주 옛날에는 신성한 의식을 치르던 장소라고 했다.


신과 제일 가까운 장소라나 뭐라나.


오솔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푸른 호수를 처음 본 자는 그 아름다움에 순간 호흡하는 것도 잊어버린다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이라고 해도 그 안에 영원히 갇혀 살아야 한다면 그건 감옥이나 다를 바 없다.


류아가 주위를 열심히 둘러봐도 이곳이 조용한 숲 한가운데라는 건 변하지 않았고,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편해질 정도의 고요는 여전했다.


오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장로들은 중앙회관에서 회의가 있을 때마다 하이엘프의 수천 년의 평화는 위대한 조상이 만든 것이라 칭송했지만, 아직 어린 축에 속하는 류아는 80년가량 살아온 삶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똑같이 계속될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지겨웠다.


숨이 턱턱 막힐 것처럼 단조로운 일상이 매일 반복될 뿐이다.


하이엘프가 나이가 차면 의무적으로 가야하는 학교에서 기본소양을 골고루 갖추고 졸업하면 섬 안에서의 일을 맡게 된다. 아주 드물게 섬 밖을 왕래하는 직책을 받게될 수도 있지만 보통 그런 건 특정 가문이 전담하는 일이고, 나머지는 섬이 하나의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번에 학생 딱지를 뗀 그녀 또한 섬의 주민으로서 일하게 되었지만, 그 일이라는 게 너무나도 따분한 것이 문제다.


숲 여기저기 설치된 결계석이 잘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라니. 어떤 외부자도 절대 들어오지 못하는 섬에서 그것보다 더 지루한 일이 있을까. 인마대전이 있었을 때 그녀가 너무 어리지 않았다면 운 좋게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뭐야, 류아. 오늘도 점심은 땡땡이치는 거야?”


어째서 자신은 이런 섬에 갇힌 인생이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류아의 뾰족한 귀에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으로 자갈을 날리니 둔탁한 소리가 탁, 하고 났다. 명중이다.


“뭐...하는 거야, 류! 아!”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소년이 자빠진 채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씩씩댔다. 류아와 마찬가지로 금방이라도 찰랑일 것 같은 금발이 조금 헝클어져있었다.


“놀래 켰으니까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야지.”

“기껏 숲 한가운데까지 찾으러왔는데!”

“누가 그러래? 왜 온 건지 다 알거든? 나 바쁘니까 빨리 돌아가.”


류아는 혀를 내밀어보였다. 그걸 본 라이네스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손가락을 류아에게 번쩍 쳐들었다.


“이... 이거나 먹어라!”


당연하지만 단순한 삿대질은 아니었다. 피할 새도 없이 녹색 빛이 류아의 발치에 터진 것이다.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류아가 뒤로 나자빠지자 라이네스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꼴좋다, 자갈이나 더 던져대지 그래 류아?”

“라이 너...”


섬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장로총회의 결정문에도 나와 있듯, 사적인 다툼에서 함부로 마법을 쓰는 건 엄금이다. 역사 깊은 섬의 절대적인 규칙이라고 귀가 박히게 들은 것을 류아도 잘 알고 있었지만 한 번 당한 이상 갚아주지 않으면 억울해서 못 참는다.


“하하하핫, 하하하... 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어대던 라이네스는 뭔가 불길한 흐름을 느끼고 류아 쪽을 보았다. 자신이 쏘았던 것보다 몇 배는 큰 빛의 덩어리가 팔짱을 낀 류아 앞에서 흔들리며 부유하고 있다.


“잠까ㅡ”


잠깐이라는 짧은 단어를 외치기도 전에 팡, 하며 라이네스는 허공을 날아 호수에 퐁당 빠졌다.


둘이 방금 쓴 것은 공기를 응축시켜 날려 보내는 마법이다. 하이엘프는 기본적으로 높은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니 위력을 조절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 이런 식으로 장난치는 것에 쓸 수도 있었다.


류아는 쳇하고 고개를 돌렸다. 공기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오더니 라이네스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푸하ㅡ! 빠져 죽는 줄 알았네. 연하라고 해서 절대 안 봐줘, 류아는. 반격 용서 없네...”

“그래봤자 세살 차이잖아!”


류아는 호숫가의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며 앙칼지게 반응했다.


“집에서 시켜서 부르러 온 거지? 본인이 직접 오면 될 것이지 왜 옆집 자식까지 동원해서 괴롭히는 거람.”

“아, 그래서 말인데 아저씨가 빨리 돌아와서 밥 먹으래.”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어, 라이. 나는 별로 점심 먹을 기분 아니야. 모처럼 휴일인데 좀 내버려둬.”

“아저씨한테 혼난 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래두! 아빠는 관계없어!”


류아는 넓적바위 위에 아예 누워버렸다.


“절대 섬을 나가면 안 된다느니 바보 같은 규칙을 바보 같다고 말한 게 뭐가 나빠. 인마대전 때는 섬사람들도 많이 나갔잖아. 이런 섬에 갇혀 사는 게 좋다니 다들 바보밖에 없어.”

“류아는 참 특이해.”


홀딱 젖은 라이네스가 호수 밖으로 나오자 그의 옷이 빠른 속도로 말라갔다. 의복에 기본으로 부여되어 있는 생활 마법 덕이다. 옷을 상시 청결하게 유지시켜주는 덕분에 세탁도 필요 없다. 이런 생활마법은 하이엘프의 삶에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도 밖은 인간들이 있잖아? 엘프 귀를 잘라가는 게 취미인 미치광이들이라고 학교 선생님도 자주 그러셨어.”


라이네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류아는 벌떡 일어났다.


“우리가 인간들이 무서울 게 뭐야? 하이엘프잖아. 손가락만 튕기면 숯덩이가 되는 놈들 때문에 못 나간다니 웃음거리도 안 돼.”

“하긴 류아는 학교 졸업도 수석으로 했으니까. 하지만 저번 대전에서는 인간들이ㅡ”

“이겼지. 근데 이번은 다를 거야.”

“이번?”


라이네스가 묻자 류아는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아~ 라이는 모르는구나. 마왕군 사자가 저번에 섬 찾아왔던 거. 나도 그제까지는 몰랐는데 어제 중앙회관에 심부름 갔다가 우연히 할아범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잠깐, 바깥사람이 섬에는 어떻게 들어왔던 거야?”

“바람의 정령이 하도 어슬렁거리기에 보초가 들여보내줬대.”

“부외자를 들여보내줬다고?”


라이네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섬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 게 이 섬의 규칙 아니었어?”

“그건 그래. 근데 이번에는 조금 특수한 경우인가 봐. 정령이랑 보초가 구면 이였다나 뭐래나”

“그래서 그 정령은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글쎄,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우리들도 참전하라고 왔다나봐.”

“근데 그게 이번은 다를 거라는 거랑 뭔 상관인데.”


라이네스는 별로 관심은 가지 않다는 듯 말했다.


“라이, 그 정령 말에 따르면 이번에 새로 등장한 마왕님은 엄청 강력하다는 거야. 대륙에 갔다 온 다나 언니 말 못 들었어? 혼자서 군대를 상대해서 인간 나라를 벌써 하나 쓰러뜨리셨대.”

“그런데 우리는 어차피 섬에만 있으니까 그런 바깥세상 이야기는 별 의미 없지 않아?”

“라이도 참 바보네, 이게 섬을 탈출할 절호의 기회라니까! 언제까지 이 작은 땅덩어리에 살고 있을 거야?”


류아는 답답하다는 듯 팔을 빙빙 휘둘러댔다.


“장로들이 섬 밖에 보낼 사람들을 모을 땐 나도 지원할거야. 그럼 아무도 뭐라 하는 일 없이 대륙에 나갈 수 있거든.”

“... 결국 전쟁보다 그냥 바깥 구경하고 싶은 속셈 아니야?”


류아는 마지막 남은 자갈을 던져 호수에 통통 튀겼다.


“뭐, 그것도 어차피 우리가 참전해야 할 수 있는 거지. 일단 저번에는 바로 승낙은 힘들다고 정령을 돌려보냈대. 아~ 그 노인들, 마음 좀 바꾸어주지 않으려나.”

“알았으니까 슬슬 가자, 류아. 이러다 아저씨 정말로 화내.”

“쳇쳇.”


류아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괜히 고지식한 아버지의 신경을 너무 긁어도 좋을 게 없었다. 점심이라고 해도 아침에 잡은 생선이 전부겠지만, 불평을 말했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야속한 마음을 담아 하늘을 바라보던 류아는 중얼거렸다.


“있지, 라이.”

“어?”

“밖은 어떻게 돼있을까?”

“학교에서 배웠잖아. 인간들이 서로 전쟁을 반복해대서 땅은 다 죽어가고 식인까지 하고 있다고.”

“그거,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못 믿겠어.”


류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인간들이 어리석다고 해도 전쟁을 이겨서 그 넓은 땅을 독차지해놓고도 그러고 있을까? 다나 언니는 물어봐도 가르쳐주지 않지만 나름 잘 살고 있을 거야.”

“잘 살고 있다니, 어떤 식으로?”

“그게... 으음... 음...”


류아는 고민해봤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인간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떻게 사는지 별로 아는 게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류아?”

“어쨌든! 나는 꼭 알아낼 거야. 아빠부터 설득시켜야지.”


살짝 얼굴이 붉어진 류아는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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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사전 준비 +3 19.09.01 544 15 10쪽
62 그들의 이야기 +1 19.08.29 556 12 10쪽
61 신의 사자 +1 19.08.25 562 12 10쪽
60 제물 +1 19.08.22 551 13 9쪽
59 반격 +4 19.08.18 591 13 10쪽
58 승전 +3 19.08.15 613 15 10쪽
57 기폭 +3 19.08.11 562 12 9쪽
56 습격 +2 19.08.08 588 13 9쪽
55 초전 +1 19.08.03 625 13 9쪽
54 군복 +2 19.07.25 602 12 10쪽
53 첫 번째 함락 +1 19.07.22 649 13 10쪽
52 제국의 침공 +1 19.07.18 692 15 9쪽
51 환청 +1 19.07.14 660 14 10쪽
50 아침 +3 19.07.11 742 17 10쪽
49 잃어버린 기억 +2 19.07.06 751 33 9쪽
48 노트북이 고장나서 잠시 휴재합니다 +3 19.06.18 820 12 1쪽
47 빙의 능력자 +1 19.06.06 766 17 9쪽
46 살인 청부업자(11세) +1 19.06.02 809 17 9쪽
45 대(對)인간병기 +1 19.06.01 801 17 11쪽
44 전쟁의 피스 +1 19.05.30 810 17 11쪽
43 밤하늘 +1 19.05.26 869 21 10쪽
42 신화의 괴물 +2 19.05.25 904 20 11쪽
41 선전포고 +3 19.05.22 949 24 10쪽
40 헬하운드와 펜리르 +1 19.05.19 969 19 11쪽
39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 +2 19.05.17 937 23 8쪽
38 다크엘프 +2 19.05.16 1,016 22 10쪽
37 시찰 +1 19.05.12 1,008 23 9쪽
36 목적과 이유 +2 19.05.11 1,065 24 9쪽
35 전쟁의 준비 +4 19.05.09 1,132 24 9쪽
34 네이아르 백작 +2 19.05.06 1,158 29 10쪽
33 죄의 운반 +2 19.05.05 1,201 29 9쪽
32 유일한 생존자 +7 19.04.25 1,222 32 10쪽
31 앞으로의 연재 공지 및 1권 후기 +3 19.03.25 1,447 21 1쪽
30 모두 죽었다 +4 19.03.25 1,411 35 8쪽
29 피의 연회가 열렸다 +3 19.03.24 1,420 38 10쪽
28 명령을 내리다 +4 19.03.23 1,397 35 8쪽
27 연회는 시작되려고 했다 +2 19.03.23 1,448 37 9쪽
26 선배의 텃세는 통하지 않는다 +2 19.03.22 1,404 34 8쪽
25 한밤중의 불청객이 찾아오다 +6 19.03.20 1,526 3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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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모두 붉게 물들었다 +4 19.03.18 1,519 37 8쪽
21 던전의 주인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 19.03.17 1,529 37 8쪽
20 한때 사람이었던 것을 만나다 +3 19.03.16 1,567 38 8쪽
19 광맥의 던전에 가다 +3 19.03.15 1,550 37 8쪽
18 그는 시비 걸어야 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 +2 19.03.12 1,562 37 9쪽
17 사슬은 묶었다 +3 19.03.12 1,605 43 7쪽
16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2 19.03.11 1,608 40 8쪽
15 대련을 하다 +2 19.03.11 1,729 37 8쪽
14 몰살은 성공적이었다 +6 19.03.10 1,725 3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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