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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462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19.03.25 01:01
조회
1,410
추천
35
글자
8쪽

모두 죽었다

DUMMY

혼자 남은 나는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실내라 피 냄새가 더 진하게 났다. 아름다웠던 연회장에 붉은 색을 입히니 한층 더 아름다워진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음식이 올려져야 할 테이블에는 시체가, 음식을 썰어야 할 날붙이는 인간의 몸에 박혀있다.


이 모순.


이 아이러니.


말도 안 되는 게, 말도 안 되기에 진정한 예술을 만든다.


궁중악사 둘이 기사단장에 손에 연행되어 왔다. 아까의 악사들 중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다. 이 둘은 안주를 더 맛있게 해주는 감초 역할을 해줘야겠다.


“왕국기사단은 '반란군'을 처형중입니다.”


기사단장이 보고했다.


이 연회장과 같은 일이 왕성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대대적인 인테리어 레노베이션 작업이 필요하겠군. 피는 한 번 묻으면 잘 안 지워지니까.


나는 아까 미리 준비한 악보를 꺼냈다.

그걸 단장이 공손하게 받아들고 악사들에게 건넨다.


“비탈리의 샤콘느. 참, 이쪽에는 없겠지. 이쪽 기준으로 악보를 작성해두었으니 연주해라.”


악보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든 피아니스트는 노트와 템포를 읽는데 정신이 없고, 바이올리니스트는 물었다.


“여, 여, 여기서 바로 연주하면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이제 우리는 죽었다는 생각이 엿보이는 악사들의 떨림은 심해져만 갔다.


“하아. 그거 줘봐.”


나는 한숨을 쉬며 바이올리니스트를 가리켰다.


“악보 말고. 네 악기 말이다.”

“예...!”


바이올린과 활을 받아든 나는 우선 현을 조율하며 대략적인 악기에 대한 느낌을 파악했다. 내가 있던 세계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곡이라는 건 말이지. 해석이 중요하거든. 누가 지은 곡이든 간에 해석하는 놈이 그걸 잘못하고 있으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가 되지. 한번 연주해 줄 테니 이 해석을 따라서 해라.”


내가 전생에서 제일 좋아하던 비탈리의 샤콘느 해석은 Sarah Chang이 한 것이다. 이 10분짜리 곡에 수많은 비극적 감정들이 담겨있다.


슬픔.


분노.


흥분.


좌절.


이 모든 것들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들도 섞여있다.


그래서 나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적당히 섞인 비탈리의 샤콘느를 좋아했다. 내 바이올린 파트 말고도 피아노 파트도 전부 외워버릴 만큼.


음악을 전공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만 절대음감이니만큼 한 번 듣고 바로 따라하는 게 가능하니 악보를 머리에 집어넣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는 정도는 간단하다.


나는 자세를 잡고 활을 들어 연주를 시작했다.

겁에 질린 악사 둘과 꼭두각시가 유일한 관객이지만 상관없다. 진정한 관객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도입부.

솔 솔 파샵 솔 라 시플랫 라 파 레ㅡ 솔 솔 파샵 솔 라 시플랫 라 솔


적절한 강조와 적절한 늦박자.


음이 고조됨에 따라 현 위를 춤추는 활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하이라이트에 다가가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끝을 맺는다는 느낌으로 빠르던 템포를 늦춰간다.


연회장은 음의 반향이 잘 되어 있었다. 소리가 깊이 있고 명확하게 잘 울린다.

스스로 만족하며 나는 연주를 계속했다.


곡은 막바지를 달려가고 있었다.


마지막 솔로 파트에서는 조금 빠르게 연주하다 도 시플랫 라 부분에서 다시 느려진 템포로 강조. 그 부분을 한 번 더 반복하고 낮은 솔과 높은 솔로 끝낸다.


활을 내리며 나는 연주 도중 관객이 둘이나 더 늘었다는 걸 탐지했다.

어떻게 이리 빨리 설득시킬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스의 일처리 실력엔 높은 점수를 줘야겠지.


시이나는 이스에 이끌려 연회장 입구 바로 뒤까지는 온듯하나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어보였다. 이스가 조용히 설득 중이다.


“자, 이제 너희들이 해봐라. 난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 것보다는 듣는 걸 좋아한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받은 악보를 조금 세게 움켜쥐었다.


“저... 저보다 더 잘하시지 않습니까.”

“크... 크레인!”


피아니스트가 어떻게든 말려보려 노력하지만 목숨이 선상에 놓인 이 상황에서 바이올리니스트는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이 더 밀려나온 모양이다.


“너희들의 연주는 나도 고평가하고 있을 셈이다. 그렇게까지 말하고 연주해보라는 거다.”

“그런 연주를 막 듣고 나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분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자 나는 조소했다.


“왜, 못할 것 같나?”

“그건 아닙니다! 제 연주는 완전히 해석이 똑같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해석이 일정 부분 섞여도 괜찮다면... 들려드리죠.”


각오한 바이올리니스트 대신 덜덜 떨고 있는 피아니스트가 바이올린과 활을 받아갔다.

크레인이라 했었지. 음악적 자존심이 강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잠시 피아니스트와 상의하더니 곧 악보 스탠드에 내 자필 악보를 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연주는 곧 시작되었다.


샤콘느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비탈리의 샤콘느.


또 그중에서도 제일 즐겨들었던 새라 창의 해석을 기반으로 한 연주를, 나는 죽고 나서 온 또 다른 세계에서 다시 듣고 있다.


곡은 나의 18번곡.

장소는 피바다가 된 연회장.


나는 왕좌에 편한 자세로 앉아 다리를 꼬고 악사들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10분 동안 눈을 감은 상태로 있었다.


예술이 이것이다. 이게 바로 예술.

예술의 극한이다. 장소도, 시간도, 분위기도.

흘러가는 선율에 맞추어 도취한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에서, 따끈한 시체들로 뒤덮인 이곳에서,

왕좌의 자리를 차지한 이곳에ㅡ내가 있다.

창작의 고통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예술을 만들어낸 내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이런 건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피스 하나라도 틀어지면 모든 게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피아노는 어차피 반주 역할. 긴장이 역력했지만 틀린 음은 없다.

중요한 바이올린은 내가 눈여겨보았을 만큼의 실력을 보였다. 중간 중간 가미된 그의 해석은 꽤 나쁘지 않았다. 중요한 트랜지션마다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높낮이가 있는 감정을 과도하지도, 메마르지도 않게 고개를 틀거나 눈을 감거나 뜨거나 하며 잘 살려주었다.


떨지 않고 그렇게까지 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에 저런 연주가 나올 수 있겠지.


10분이라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다른 세계에 있었다. 아무도 간섭할 수 없고, 완벽한 나만의 세계에.


곡이 끝나고 바이올리니스트가 활을 든 팔을 내리자 연회장에 느린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짝, 짝, 짝.


“좋은 연주였다. 어느 세계든 음악은 아름다운 법이지.”


말이 없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보며 내가 말했다.


“돌아가라. 앞으로도 기대하지.”


진심이 받아들여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이올리니스트는 관중에게 하는 절을 했다.

피아니스트는 일단 살았다는 안도감에 주저앉아버렸다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이끌려 나갔다.


“극상의 안주였다.”


쿠테타는 이미 성공했다. 여기는 왕도의 왕성. 큰 병력은 애초에 있지 않다.

위병의 실력은 바닥이다. 졸개들만 남았으니 여차하면 나 혼자서도 처리 가능하겠지.


“네이아르 가는.”

“대관식에 참석하겠다는 밀서를 보내왔습니다.”

“이해가 빠른 남자군. 그 가문은 아직 쓸모가 있다, 그것을 사역하고 있으니.”


충직한 부하처럼 옆에 선 기사단장.


나는 피 묻은 왕관을 집어 든다.

말라붙은 피범벅이 되고도 눈부시게 빛나는 그걸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다가 내동댕이치자, 기사단장이 주워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게 바쳤다.


나는 그걸 보며 말했다.


“자, 이제 진짜 연회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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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첫 번째 함락 +1 19.07.22 647 13 10쪽
52 제국의 침공 +1 19.07.18 690 15 9쪽
51 환청 +1 19.07.14 660 14 10쪽
50 아침 +3 19.07.11 740 17 10쪽
49 잃어버린 기억 +2 19.07.06 750 33 9쪽
48 노트북이 고장나서 잠시 휴재합니다 +3 19.06.18 817 12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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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살인 청부업자(11세) +1 19.06.02 808 17 9쪽
45 대(對)인간병기 +1 19.06.01 798 17 11쪽
44 전쟁의 피스 +1 19.05.30 807 17 11쪽
43 밤하늘 +1 19.05.26 869 21 10쪽
42 신화의 괴물 +2 19.05.25 902 20 11쪽
41 선전포고 +3 19.05.22 948 24 10쪽
40 헬하운드와 펜리르 +1 19.05.19 967 19 11쪽
39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 +2 19.05.17 936 23 8쪽
38 다크엘프 +2 19.05.16 1,014 22 10쪽
37 시찰 +1 19.05.12 1,007 23 9쪽
36 목적과 이유 +2 19.05.11 1,065 24 9쪽
35 전쟁의 준비 +4 19.05.09 1,132 24 9쪽
34 네이아르 백작 +2 19.05.06 1,157 29 10쪽
33 죄의 운반 +2 19.05.05 1,201 29 9쪽
32 유일한 생존자 +7 19.04.25 1,222 32 10쪽
31 앞으로의 연재 공지 및 1권 후기 +3 19.03.25 1,447 21 1쪽
» 모두 죽었다 +4 19.03.25 1,411 35 8쪽
29 피의 연회가 열렸다 +3 19.03.24 1,416 38 10쪽
28 명령을 내리다 +4 19.03.23 1,395 35 8쪽
27 연회는 시작되려고 했다 +2 19.03.23 1,448 37 9쪽
26 선배의 텃세는 통하지 않는다 +2 19.03.22 1,402 34 8쪽
25 한밤중의 불청객이 찾아오다 +6 19.03.20 1,524 36 9쪽
24 이제 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3 19.03.20 1,467 36 8쪽
23 금의환향하다 +3 19.03.19 1,520 38 8쪽
22 모두 붉게 물들었다 +4 19.03.18 1,516 37 8쪽
21 던전의 주인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 19.03.17 1,529 37 8쪽
20 한때 사람이었던 것을 만나다 +3 19.03.16 1,566 38 8쪽
19 광맥의 던전에 가다 +3 19.03.15 1,547 37 8쪽
18 그는 시비 걸어야 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 +2 19.03.12 1,562 37 9쪽
17 사슬은 묶었다 +3 19.03.12 1,604 43 7쪽
16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2 19.03.11 1,605 40 8쪽
15 대련을 하다 +2 19.03.11 1,727 37 8쪽
14 몰살은 성공적이었다 +6 19.03.10 1,722 36 8쪽
13 도적 소탕전을 시작하다 +3 19.03.09 1,777 3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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