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타자씨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 머리 용병은 군주가 되기로 했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새글

타자씨
작품등록일 :
2024.03.07 20:13
최근연재일 :
2024.05.20 19: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109,695
추천수 :
3,624
글자수 :
172,543

작성
24.04.29 18:59
조회
3,840
추천
131
글자
12쪽

3. 결정은 내가 한다. (2)

DUMMY

3. 결정은 내가 한다. (2)


대리 영주가 머무는 저택은 생각보다 작았다.

방이 한 10여 개쯤 있을까 싶은 정도?

정원은 제법 넓었지만, 영지의 주인이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는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지구로 치면 중세에 해당하는 문명.

정치가가 비서 한 명 데리고 돌아다닐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다.


경호하는 사람, 시중드는 사람, 필수적인 관리들까지.

대리 영주의 곁에 반드시 있어야 할 수행원의 숫자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작은 저택에 머무른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영지의 통치에서 손을 뗐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건물은 크기뿐 아니라 상태도 별로였다.

군데군데 낡고 손상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벽의 일부는 손질을 하지 않은 티가 났고, 건물의 장식 중에는 아예 파손된 것도 있었다.

무기력하게 칩거하고 있는 대리 영주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했다.


여기까지가 대리 영주가 머무는 곳을 보면서 지구에서 쌓은 지식, 한제국에서의 겪은 경험, 말론의 기억을 토대로 판단한 내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그러나 여러모로 부정적이던 내 감상은 저택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싹 다 날아갔다.


저택 내부의 분위기는 방치된 듯한 느낌을 주던 외부와 달랐다.

미니멀리즘 연상케 하는 내부의 장식은 극한의 효율성을 추구했고, 손님맞이를 하는 시종들 역시 느슨한 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청소가 안 되어 있거나 낡고 파손된 곳은 억지로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저택에 들어선 내게 야쿠프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영지의 재무관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꼬장꼬장한 느낌이 드는 야쿠프 또래의 남자였는데 억센 팔과 얼굴에 남아있는 흉터는 이 사람이 책상물림만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

어디에 갖다 놓아도 전천후로 몇 사람 분의 역할을 충분히 하겠다 싶은 느낌이랄까.

뒤이어 모습을 나타낸 3명의 중년인들 역시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외부의 눈을 속이려는 것 같은데?


그런 내 생각에 확신을 준 것은 대리 영주였다.

그녀는 무장을 한 두 명의 남자와 함께 내가 대기하고 있던 공간으로 들어왔다.

간편한 흉갑과 검이 무장의 전부였지만, 단련된 몸과 절제된 움직임을 보니 보통 잘 훈련된 자들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용병들과는 수준을 달리하는 자들, 아마 기사라고 불리는 부류일 것이다.


대리 영주는 좌우에 기사를 세워둔 채 내 앞에 앉았다.

나는 선 채로 가볍게 목례하며 그녀에게 예의를 표했다.


“레슈나의 통치자를 뵙습니다. 이한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이한 경. 요즘 외지에서 온 자들을 종종 보게 되는군.”


이곳에 도착한 후로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은 대리 영주가 처음이었다.

나는 놀라움이 섞인 시선으로 눈앞의 늙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작고 아담한 체구.

흰머리와 주름살로 인해 젊은 시절의 미모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태도에서 드러나는 우아함은 잘 교육받은 귀족 여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눈빛에서 엿보이는 총기도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당당했다.

작고 아담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여기 있는 자들 중 누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타고난 지배자, 태어나면서부터 지배 계급에 속한 자의 분위기였다.

어디에서도 소극적이거나 무기력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여자, 아직 현역이다.

그것도 팔팔한.


그리고 그녀는 대화를 질질 끄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대를 만나보겠다고 한 이유는 간단하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지. 야쿠프는 그대가 내 손자일 수도 있다고 하더군.”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야쿠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야쿠프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태연한 기색이었다.

이미 이와 관련하여 언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분명히 야쿠프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 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흥미롭다는 거요. 내게 손자를 자처하며 찾아오는 사기꾼이 일 년에 두셋은 된다오. 그런데 내 손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았음에도 아니라고 단언하는 자는 그대가 처음이오. 그래서 만나보고 싶었소.”


“아니라고 단언했기에 오히려 관심이 갔다니 당황스럽습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명확하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대리 영주님의 손자가 아닙니다. 제 성이 ‘이’인 것은 맞습니다만, 레슈나 영지의 ‘이’ 가문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라는 성을 가진 가문이 이곳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소. ‘이’ 가문 자체가 동방에서 왔으니 아마 동방 제국에도 ‘이’ 가문이 있겠지. 그러나 레슈나는 물론이고 레슈나를 아우르는 폴레비아 왕국에도 ‘이’라는 성을 가진 가문은 이곳 하나뿐이라오. 그것은 주변의 다른 나라들로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일 거요. 혹시 그대는 자신이 동방 제국에서 왔음을 주장하는 것이오?”


그건 몰랐다.

상식의 부족이 이런 것에서 드러난다.

말을 보태서 새로운 문제를 만드느니 차라리 말을 아끼기로 했다.

나는 입을 닫고 대리 영주를 쳐다보았다.


무례하게 보일만한 행동이지만, 대리 영주의 어조가 추궁하는 투가 되어서인지 예의범절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럴 상황도 아닌 듯하고.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질 것에 대비하여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지 사람들은 거실의 가장자리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야쿠프와 재무관, 세 명의 중년인 모두 가장자리의 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대리 영주인 노파와 그녀의 좌우에 있는 젊은 기사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야쿠프는 그대에게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나 우리가 그대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그대는 여기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하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오해 마시오. 이것은 그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일단 그대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후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대리 영주의 말이 마치자마자 그녀의 좌우에 있던 두 명의 기사가 검을 꺼내어 내게 겨눴다.

나는 준비하라는 듯 검을 겨눈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짐승 가죽으로 둘둘 말려 있던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광택은 죽어 있지만, 날은 여전히 날카로운 검이 묵빛의 검신을 드러냈다.


오!

정말이구나!


가벼운 감탄사가 중년의 남자들로부터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내가 검을 뽑자마자 두 명의 기사는 약간의 지체도 없이 곧장 내게 검을 뻗어왔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가볍고 빠른 검이 하나.

도끼를 연상시키는 묵직한 검이 또 하나.

두 종류의 검이 내 가슴과 목을 노리고 공격해 왔다.


한 발걸음, 쭉 뻗은 팔, 그리고 내게 찔러오는 검의 조합은 기사들과 나 사이의 공간을 지워버렸다.

대부분의 인간은 움찔하지도 못하고 죽기 딱 좋았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에 속한 인간이 아니었다.


가슴을 찔러오는 검끝을 보면서 몸을 비틀었다.

검은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갔고, 그 검을 잡은 자는 나와 얼굴을 맞댔다.

바로 코 앞에서.

나는 겨드랑이로 상대의 검을 붙잡은 채 검자루끝으로 상대의 머리를 가격했다.


머리뼈를 부술 정도로 강하게 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투구를 쓰지 않은 자가 버틸 수 있는 충격도 아니었다.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려는 기사를 잡아서 세운 후 다른 기사의 공격을 피해 그를 중심으로 빙빙 돌았다.

기둥을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이것은 실전보다는 대련에 더 가까운 상황이다.

아무리 강력하게 검을 내리칠 수 있다고 해도 자기편까지 내려칠 수는 없으니 손발이 절반 정도 묶인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다급하게 나를 따라붙으려던 상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후 그에게 의식을 잃은 동료까지 던져주었다.


의식을 잃은 기사와 제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 기사가 대리 영주의 발아래에서 함께 뒹굴었다.

나는 자신을 덮은 동료를 치우며 허둥지둥 일어나려던 기사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그제야 대리 영주가 한 손을 들었다.

멈추라는 의미였다.


“되었소. 이한 경. 그대가 쉽게 죽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했소.”


“내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짓인지 설명해 주셔야 할 겁니다. 내가 납득하지 못할 설명이라면, 내가 납득을 할 때까지 여러분이 대가를 치뤄야 할 겁니다.”


나는 검을 손에 쥔 채 대리 영주에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멍청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리 영주가 너무도 의외의 말을 내게 한 것이다.


“이한 경. 레슈나의 영주가 되어 주시오.”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맞게 이해한 건가?

테라 공용어가 이상하게 변질되어서 발음이 세지고 경박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게 말이 되나?


나는 닳을 만큼 닳은 사람이다.

내가 경험한 전장과 죽음이 얼마나 되는데.

사람들의 민낯을 얼마나 많이 봐 왔는데.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제안에는 말도 되지 않는 조건이 걸린다는 것쯤은 잘 안다.

아니면 아예 사기이거나.

그냥 박차고 나가야 한다.

그게 최선이다.


그러나 만약 협상을 하고 싶다면

오히려 화를 내야 한다.

거부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협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용만 당하다가 잡아먹힌다.

혹하는 순간 골로 가는 거다.

욕심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지금 다들 뭐 하자는 수작입니까?”


나는 다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 항의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대리 영주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게 터무니없는 제안을 건넨 대리 영주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터무니없는 제안을 건넨 사람답게 대리 영주의 눈은 영활함을 넘어 약간의 광기마저 띠고 있었다.


“내게 그 검을 잠시만 건네주시겠소?”


대리 영주가 원한 검은 거대 원인의 무덤(?)에서 가져온 검이었다.

어차피 검은 하나 더 있으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검을 건넸다.


대리 영주는 내 검을 받자 한참을 바라보았다.

광기마저 엿보이던 눈빛은 어느새 비통한 울음을 우는 듯 흐느끼는 소리를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소리가 보이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잠시 후 마음을 추스른 대리 영주는 검손잡이와 칼자루 끝을 잡더니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검손잡이 부분이 둘로 나뉘어 나사처럼 회전했다.

몇 바퀴 더 돌리자 검손잡이는 둘로 나뉘어 분리되었다.

분리된 검손잡이 부분에는 양각으로 새겨진 글자와 문양이 있었다.


저것은 어떻게 보아도 도장이었다.


“레슈나 영주의 인장이오. 30년 전. 피우트 남작이 행방불명될 때 함께 사라졌지. 30년 만에 그의 아들과 함께 돌아왔다고 하면 될 것 같군.”


침착함을 되찾은 대리 영주는 내게 다시 검과 인장을 돌려주려고 했다.

나는 손을 뻗는 대신 그녀에게 질문했다.


“나는 당신의 가문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상관없네. 어차피 영주 후보자라고 하는 놈들 역시 ‘이’ 가문과는 관련없는 놈들뿐이니까.”


작가의말

연재 시간을 고정하겠습니다. 

당분간은 매일 저녁 7시로 하겠습니다.

혹시 늦어지거나 휴재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 머리 용병은 군주가 되기로 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시간은 저녁 7시입니다. 24.04.29 191 0 -
공지 글의 방향성에 대해. +2 24.04.24 3,008 0 -
31 7. 이제 진짜 영주가 되었다. (4) NEW +6 17시간 전 1,146 76 12쪽
30 7. 이제 진짜 영주가 되었다. (3) +6 24.05.19 1,660 88 13쪽
29 7. 이제 진짜 영주가 되었다. (2) +4 24.05.18 1,764 95 13쪽
28 7. 이제 진짜 영주가 되었다. (1) +4 24.05.17 1,955 91 12쪽
27 6. 영주가 해야 할 일 (6) +4 24.05.16 2,138 94 12쪽
26 6. 영주가 해야 할 일 (5) +7 24.05.15 2,354 104 12쪽
25 6. 영주가 해야 할 일 (4) +6 24.05.14 2,466 111 12쪽
24 6. 영주가 해야 할 일 (3) +4 24.05.13 2,591 101 12쪽
23 6. 영주가 해야 할 일 (2) +2 24.05.12 2,748 97 13쪽
22 6. 영주가 해야 할 일 (1) +3 24.05.11 2,939 114 12쪽
21 5. 용병에게는 고용주가 필요하다. (5) +6 24.05.10 2,897 113 12쪽
20 5. 용병에게는 고용주가 필요하다. (4) +4 24.05.09 2,913 112 11쪽
19 5. 용병에게는 고용주가 필요하다. (3) +4 24.05.08 2,979 114 12쪽
18 5. 용병에게는 고용주가 필요하다. (2) +1 24.05.07 3,195 113 12쪽
17 5. 용병에게는 고용주가 필요하다. (1) +3 24.05.06 3,300 112 12쪽
16 4. 누구에게나 할 말은 있다. (4) +6 24.05.05 3,326 124 12쪽
15 4. 누구에게나 할 말은 있다. (3) +4 24.05.04 3,357 125 13쪽
14 4. 누구에게나 할 말은 있다. (2) +3 24.05.03 3,369 115 12쪽
13 4. 누구에게나 할 말은 있다. (1) +6 24.05.02 3,538 116 12쪽
12 3. 결정은 내가 한다. (4) +4 24.05.01 3,670 118 12쪽
11 3. 결정은 내가 한다. (3) +4 24.04.30 3,757 121 12쪽
» 3. 결정은 내가 한다. (2) +6 24.04.29 3,841 131 12쪽
9 3. 결정은 내가 한다. (1) +4 24.04.28 4,052 125 12쪽
8 2. 오해하는 사람들 (4) +4 24.04.27 4,128 134 12쪽
7 2. 오해하는 사람들 (3) +6 24.04.26 4,208 134 12쪽
6 2. 오해하는 사람들 (2) +6 24.04.25 4,385 132 12쪽
5 2. 오해하는 사람들 (1) +4 24.04.24 4,759 138 14쪽
4 1. 내가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4) +6 24.04.23 5,184 148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