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돌연변이 식물도감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1.11.24 18:03
최근연재일 :
2022.02.10 14:42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65
추천수 :
17
글자수 :
59,834

작성
22.02.10 14:42
조회
16
추천
2
글자
13쪽

10화 - 숲의 눈 (3)

DUMMY

***


“이야기라도 나눌까요?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아! 제가 누군지 소개부터 해야겠군요. 저는 아벨이라고 해요. 다들 글라시아인으로 오해하는데, 진실은 베이포리아인··· 그러니까, 킨들리아인이죠. 피부색이 하얗다 보니 다들 오해한답니다. 누비 씨는 글라시아인이죠?”


바람이라도 분 건가. 자작나무의 가지와 난생처음 보는 주황빛 덤불이 일순에 흔들렸다. 어쩌면 아이가 조금은 안정을 찾은 걸지도 몰랐다. 화가는 나무줄기에 뻗어 나온 가지를, 가지가 낳은 이파리를, 이파리에 맺힌 이슬을 순식간에 그려냈다.


“저는 풍경화가랍니다. 세상 풍경을 한순간에 담아 표현하죠. 풍경을 그리고 나면, 마치 그곳을 정복한 듯한 기분이 들곤 해요. 마치 선봉대장이 된 것만 같달까요? 무정형의 상태에 있는 세상에 저의 감각을 담았으니, 정복했다는 말이 꼭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 그림 그리기 좋아하시나요?”


화가의 그림은 바깥부터 안으로 점점 들어왔고, 어느새 자작나무와 덤불에 닿았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풍경 정복을 목전에 두면 늘 찾아오는, 신이 주는 보상이었다.


“그림을 좋아한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이 숲에서 벗어나야겠죠. 사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니, 혼자 떠들면서 이곳 풍경을 그리고 있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그리면 스케치는 완성이 되는데···”


아벨은 덤불의 푸른 줄기를 정교하게 그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대지를 뚫고 나온 뿌리, 이리저리 휘어진 줄기와 우거진 잎사귀, 올곧게 뻗은 하얀 나무 기둥,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동그란 무늬들··· 조금만 더 그리면 완벽해질 터였다. 아주 조금만 더 그리면···


“완성이 되는데······”


빛구름펜이 화가의 손에서 미끄러져 분홍빛 이끼 위에 툭 떨어졌다. 아벨은 펜을 줍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명확히 보고 있었다. 몇 발짝 앞에 있는, 자작나무라고 생각한 것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나무가 움직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나무였다. 하얀 줄기와 동그란 자국, 튼튼한 뿌리가 그것이 건강한 자작나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건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는 스스로 줄기를 돌리지도, 구부리지도 않으니까. 세찬 바람이 불지 않는 한···


바람은 불지 않았다.


나무줄기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하더니, 아벨을 향해 천천히 굽어졌다. 움푹 들어간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화가를 굽어보고 있었다.


아벨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대신 딸꾹질을 터뜨렸다. 이빨이 절로 맞부딪쳤고,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는 말을 듣질 않았다. 영감이 폭발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창작의 욕구 따위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공포뿐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발목이 딱딱해지고 무거워지더니 아벨은 결국 딸꾹질 섞인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주황빛 덤불 줄기가 다리를 휘감고 있던 것이다.


아벨은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폴짝 뛰었지만, 덤불 줄기는 매우 억셌다. 그는 버둥거리며 몸을 마구 비틀었다. 분신처럼 여기는 소중한 그림들이 가방에서 이리저리 떨어져 나가는데도, 그는 자신의 사명과 신념을 지킬 여력이 없었다.


화가의 그림들은 순식간에 덤불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너무 크게 소리 지른 나머지 자기 비명에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순간, 아벨은 갑자기 덤불 줄기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살고자 하는 욕구가 아벨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손으로 바지를 잡아당겨 덤불 속에서 다리를 빼냈다.


그 짧은 순간에 화가는 많은 것들을 보았다. 빛구름펜과 빛을 집어삼키는 분홍빛 이끼, 널브러진 그림들을 그러모으는 주황빛 덤불,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주의 깊게 살피는 자작나무. 물론 분명치는 않았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화가는 자신이 지나온 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암말이 히잉 하며 우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수풀과 나무를 피해 허겁지겁 내달려 숲에서 빠져나온 아벨은 드디어 지옥 속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숲 밖으로 빠져나오는 동시에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를 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암말이 앞다리를 풀쩍 뛰어오르며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아벨은 암말이 겁에 질린 이유를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표지판을 삼키던 나무가 말의 고삐를 끌어당기고 있던 것이다.


“안 돼! 내 분신과도 같은 그림들이!”


화가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아벨은 허우적거리는 암말의 앞발에 차일 수 있다는 위협을 무릅쓰고 가슴걸이와 굴레를 벗겨냈다. 암말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로 물러서더니 재갈을 뱉어내며 다시 앞발을 쳐들었다. 그 바람에 안장이며 짐이며 말에게 얹어놓은 것들이 이리저리 떨어져 나갔다. 아벨이 붙잡을 틈도 없이 암말은 호수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야! 지금 날 배신하는 거야?! 나는 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벨이 안절부절못하며 나뒹구는 짐들을 질질 끌었다.


“어딜 가는 거야! 얼른 돌아와! 너 없으면 어떻게 돌아가라고! 젠장! 야! 이··· 이름이 뭐였더라···?”


아벨은 자유를 향한 질주를 하는 암말을 향해 욕설을 퍼붓다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나무가 표지판으로도 모자라 가슴걸이와 굴레, 그리고 재갈까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런 망할··· 친구고 뭐고··· 루가니 씨 말이 맞았어··· 사람들에게 알려야··· 젠장··· 말도 없이 어떻게 돌아가냐고··· 짐이 이렇게나 많은데···”


아벨이 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짐들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그의 뒤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기뻐서 폴짝 뛰었다.


“친구! 역시 돌아올 줄 알았···”


“자네와 친구 한 적 없소만.”


마을의 경비병이 아벨을 굽어보고 있었다.


“물론 친구는 아니죠··· 하지만 잘 왔어요! 당신에게 알릴 게 있어요! 제가 봤어요! 숲 안에서-”


“당신에게 알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


경비병이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마을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는 거야. 얼른 짐 챙겨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단 말입니까?”


“경비병으로서 명령이다. 당장 여길 떠나.”


“그래요. 당신은 경비병이죠. 정확히는 이곳 숲의 경비병이 아니라 마을의 경비병.”


아벨이 화가 나서 공격적인 어조로 말했다.


경비병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더니 말에서 내려 아벨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한 손을 칼자루 위에 얹는 것이 누가 보아도 위협적인 행동이었다. 아벨 역시 가슴을 쫙 펴며 상대하려 했지만,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마저 막을 순 없었다.


“다, 당신은 마을의 경비병이잖아요. 마을의 안전을 우선시해야죠! 그리고 이건 마을의 안전이··· 아니, 모두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란 말입니다!”


“내 관심사는 진실뿐이다, 화가 양반. 좋은 말로 할 때 마을로 돌아가. 알겠나?”


“그래요! 알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못해도 숲에서 누비라는 아가씨를 찾아보려 시도라도 해보세요. 경비병으로서 말입니다. 이곳까지 온 김에 숲에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더 이상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하지 마.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당신이 하는 말에 아무런 관심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이상한 소문도 퍼트리지 마시고. 알겠나?”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단 말입니다!”


아벨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당신 관심사가 진실이라면서요! 그런데 제 눈에 당신은 진실에도, 경비병이라는 직업에도, 쥐똥만큼의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잠시만, 당신 방금 이상한 소문이라고 했습니까? 도대체 무슨 소문을 말하는 겁니까?”


“괴물이잖소.”


경비병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당신에게 괴물 얘기를 한 적 없는데요. 적어도 이 자리에서···”


아벨은 기분이 이상해져서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당신 설마··· 알고 있던 겁니까? 이미 저 숲속에··· 그러니까, 이상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거죠? 당신 지금··· 진실을 부정하고 있는···”


“너, 진실이 뭔지 알아?”


경비병이 한걸음, 공격적으로 다가오며 조용히 말했다. 그의 검은 눈에는 냉소로 반짝였다..


“다수의 사람이 믿는 것이 진실이야. 그리고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믿는 게 중요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뭐겠어? 망할 글라시아인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거야! 우리의 안정과 질서를 망가뜨리려고! 그 망할 글라시아인들이!”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그건 바보 같은 정치싸움일 뿐이지. 그리고 당신은 진실을 감추려는 겁쟁이에 불과해!”


“겁쟁이?”


경비병이 피식 웃더니 무시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누가 누굴 보고 겁쟁이라는 거지? 내가? 아니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벌벌 떠는 당신?”


“어린 꼬마 아이 하나 구하지 못하는 주제에! 내가 이 자리에서 바지를 적셔도 당신이 겁쟁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아!”


“그놈의 글라시아년! 그년은 이미 뒤졌어!”


경비병이 장갑 낀 손으로 아델의 멱살을 강하게 움켜쥐며 소리쳤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지! 살아 움직이는 나무들이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걸 말이야! 망할 것!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 망할 글라시아년이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아벨은 눈 깜짝할 사이에 충격이 입술에서 머리를 거쳐 목 아래로 퍼지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경비병은 연이어 아벨의 부풀어 오른 입술을 향해 거침없이 가격했다.


아벨은 비명을 지르며 경비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경비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양팔로 얼굴을 가리자 이번에는 옆구리 깊숙이 통증이 밀려들었다. 화가는 숨이 턱 막혀 헛기침을 쏟아냈다.


경비병은 아벨의 머리끄덩이를 움켜쥐더니 질질 끌고는 고삐가 축 늘어져 있는 나무줄기에 밀어붙였다.


“너는 내 호의를 무시한 거야.”


경비병이 한 손으로 아벨의 목을 짓누르며 속삭였다.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쇳소리가 들렸다.


“내 말대로 했으면 멀쩡히 살아서 돌아갔을 것 아니야.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나?”


“너는 지금···”


아벨이 힘겹게 말했다.


“널··· 스스로··· 망가뜨리는···”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리는군.”


경비병이 칼을 장난감 다루듯 휙휙 휘두르며 말했다.


“하긴, 말하면 뭐 하겠나.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텐데. 잠깐··· 뭐야?”


칼이 나무에 박히는 소리가 나더니 경비병이 당황한 듯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나뭇가지가 남자의 칼을 붙잡고 있었다. 경비병이 칼을 빼내려 애썼지만, 잘 안 되는 듯했다.


아벨은 문뜩 등 뒤쪽에 무언가가 자신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상체를 다급히 들썩였지만, 몸이 자꾸만 나무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런 망할 것들!”


경비병의 칼은 나뭇가지 안에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새 깊게 박혀버렸다. 경비병은 욕설을 퍼부으며 주머니에서 유리로 밀봉한 무언가를 꺼냈다. ‘바포르’라고 불리는 증기상자였다. 경비병은 바포르의 응축된 증기를 곧장 나무에다가 쏘아대기 시작했다.


뜨거운 증기가 순식간에 나무줄기와 아벨을 뒤덮었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아벨은 어떻게든 옷을 벗으려 버둥거렸다. 그러나 굳이 옷을 벗지 않아도 아벨은 나무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무가 고통스러운 듯 줄기를 비틀어서 오히려 밖으로 튕겨 나간 것이다.


아벨은 자기 몸을 살펴보기도 전에 끔찍한 비명소리를 들었다. 나무가 흥분한 듯 줄기를 마구 비틀더니 나뭇가지로 순식간에 경비병을 휘둘러 감싼 것이다.


경비병은 계속해서 나무에 증기를 쏘아댔지만, 그것은 좋지 못한 선택처럼 보였다. 경비병은 비명을 질렀다.


“신이시어! 나를··· 사, 살려줘! 어머니!”


아벨은 나무에 다가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증기에 휩싸인 나무는 뿌리가 뽑힐 것처럼 마구 몸부림쳤고, 뾰족한 나뭇가지를 주변에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무괴물이 경비병을 찢어발기는 것을.


아벨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어린 풀 위에 먹었던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돌연변이 식물도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10화 - 숲의 눈 (3) 22.02.10 17 2 13쪽
9 9화 - 숲의 눈 (2) 22.01.27 14 1 13쪽
8 8화 - 숲의 눈 (1) 22.01.20 12 1 15쪽
7 7화 - 적 (6) 22.01.13 18 1 13쪽
6 6화 - 적 (5) 22.01.06 13 2 14쪽
5 5화 - 적 (4) 21.12.31 15 2 14쪽
4 4화 - 적 (3) 21.12.25 22 2 13쪽
3 3화 - 적 (2) 21.12.19 35 2 14쪽
2 2화 - 적 (1) 21.11.30 37 2 11쪽
1 1화 - 풍경화가 아벨 21.11.24 83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