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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돌연변이 식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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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1.11.24 18:03
최근연재일 :
2022.02.10 14:42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62
추천수 :
17
글자수 :
59,834

작성
21.11.24 20:45
조회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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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1화 - 풍경화가 아벨

DUMMY

***

2021 기체공학 (brown) gas engineering, A3, 300dpi.jpg

아벨의 스케치는 거침없었다.


그는 팔꿈치로 펄럭이는 종이를 꾹 누르며 세로선을 쭉 긋고는, 축축한 엄지로 선을 부드럽게 문댔다. 손이 지나가는 곳으로 그림자가 번지고, 빛은 서서히 물러났다. 굽이치는 계곡의 강물처럼 영원히 흐르는 아날로그 풍경이 누리끼리한 종이 위에 하나의 순간으로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대단하구먼요, 화가 양반. 저는 매일 타고 다니는 열기구조차 제대로 그리질 못하는데 말입니다.”


어깨 너머로 그림을 지켜보던 열기구 관리인이 조용히 감탄을 터뜨렸다.


“이전에 아들 녀석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열기구를 그려주었는데, 아니 글쎄, 아들 녀석이 이렇게나 맛없어 보이는 아이스크림은 처음 본다더군요! 애비보다 아이스크림을 더 좋아하는 녀석이 말이에요. 여긴 바리즈의 광장이군요? 정말 똑같은데요? 화가들의 예술 감각이란···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처럼 열기구를 잘 다루지 못하는걸요.”


풍경화가는 집중하느라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제가 그 소중한 증기기관을 건드렸다가는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겁니다. 바리즈 광장이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아드님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더는 먹을 수 없겠죠.”


‘증기의 나라’라고도 불리는 킨들리아의 대표적인 이동수단인 열기구 안에는 모두 다섯 사람이 타고 있었다.


배가 불룩하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열기구 관리인과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챙 넓은 모자를 꾹 눌러 쓴 아낙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열기구 밖 풍경을 굽어보려 애쓰는 남자아이, 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논문 내용을 머리에 집어넣으려 애쓰는 대학원생, 그리고 불안한 듯 발을 덜덜 떨면서도 간결한 손놀림으로 도시 풍경을 그려나가는 풍경화가까지.


이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 풍경화가 아벨이었다.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외투는 마른 체형을 가리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검은 부츠에서는 마른 진흙이 툭툭 떨어졌으며, 기름진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엉켜 어디로 튈지 모를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관리인이 열기구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자 증기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화가 아저씨, 발 좀 가만히 두시면 안 됩니까? 열기구가 흔들리잖아요. 이러다 열기구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책임이라도 질 겁니까?”


대학원생이 안경 너머로 화가를 흘겨보았다.


“배운 사람이 왜 이러실까. 학생, 이건 킨들리아의 열기구라고.”


열기구 관리인이 열기구 밖으로 가래침을 뱉고는 대신 답했다.


“이 정도로는 떨어지지 않아. 여기서 앞구르기를 하든, 치고받고 싸우든지 말이야. 물론 그렇게 하면 승차장에서 곱게 걸어 나가기 힘들겠지. 내가 두들겨 패서 밖으로 던져 버릴 테니까.”


“던져 버린대~ 바보 같아~”


뭐가 그리 웃기는지 남자아이가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를 질렀다.


“리바오! 얌전히 좀 있으렴!”


남자아이가 화가의 그림을 보려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아낙네가 소리쳤다.


“글라시아인에게 가까이 가지 마, 리바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제발 말 좀 들으렴!”


“부인, 방금 한 말은 무례하신 줄 아셔야 합니다.”


대학원생이 안경을 고쳐 쓰며 아는 체했다.


“출신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죠. 아이가 무얼 배우겠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 두셔야-”


“괜한 참견은 집어치우세요.”


아낙네는 얌전한 차림새와 다르게 한 성깔 하는 듯했다.


“무례한 건 당신이죠! 이딴 일로 간섭하다니요! 자식 교육은 부모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저는 아이 교육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아주머니께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게 신경 끄시고, 그 멍청한 종이 쪼가리나 보시라구요.”


“멍청해요? 이건 코어에 관한 아주 저명한 교수님의 논문입니다! 당신이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에요!”


“저한테는 그딴 논문보다 제 자식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요!”


아낙네가 정신이 팔린 사이에 리바오가 화가 옆으로 얼른 달라붙었다.


“엄마! 이 아저씨 그림 되게 잘 그려!”


“리바오! 이리 오지 못해?!”


풍경화가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까지는 참을 순 없었다. 아이는 항상 솔직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참 즐거운 여행길이구먼.”


관리인이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얌전한 꼬마 도련님에, 현명한 철학 교수에, 친절한 아가씨까지! 여행 길동무가 이토록 훌륭하신 분들뿐이니 지루할 틈이 없다니까.”


“좋은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대학원생이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말했다.


“하지만 제 전공은 철학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교수는 더더욱 아니고요. 전 증기 역학과 코어 에너지 분야를 전공으로-”


“아이고 그럼요. 당신 말이 맞고 말고요, 증기 역학 어쩌고저쩌고, 교수는 아닌 똑똑한 양반.”


관리인은 한숨을 쉬었다.


“사소한 것도 넘어가지 않고 신경 쓰실 분이란 것을 제가 간과하고 말았네요. 그래도 재밌으신 분이라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화가 양반?”


“그림이나 그리는 글라시아인이 무얼 알겠어요?”


아낙네가 모자를 벗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더니 아랫입술을 신경질적으로 비죽이며 말했다.


“잘난 화가였다면, 아니, 아무리 못해도 우리와 같은 킨들리아인이었다면 조용하고 편안한 곳에서 여유롭게 그림을 그렸겠죠. 그렇지 못하니까 이렇게 바람이나 숭숭 부는 열악한 곳에서 이러는 것이지 않겠어요?”


“당신의 무례함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네요.”


증기 역학과 코어 에너지 분야를 배우는 학생이 잘난 척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 화가분께서 글라시아인일지라도 무시당할 권리는 없습니다. 저들에게도 고유의 문화가 있고, 또 이성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야만적으로 보일지라도-”


“글라시아인은 글라시아인이에요!”


아낙네가 빽 소리쳤다.


“그 사실은 변치 않아요! 당신은 킨들리아인이면서 왜 이들을 대변하는 거죠? 도통 이해할 수가 없네!”


“이해할 수 없는 건 접니다!”


“토론 중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던 당사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는 글라시아인이 아니랍니다. 여러분과 같은 킨들이라인이죠. 이곳, 바리즈에서 태어나고 자랐거든요.”


“어머! 그랬군요.”


화가를 바라보는 아낙네의 눈빛이 갑자기 유순해졌다.


“피부가 하얘서 제가 오해를 한 것 같네요. 안 그래도 억양이 우리와 비슷하다고 생각은 했어요.”


“통계자료에 따르면 킨들리아에 검은 피부는 88%에 달하는 데 반해, 하얀 피부는 2%에 불과하죠.”


학생은 놀랍게도 부러운 기색이었다.


“킨들리아인이면서 백인은 그만큼 흔치 않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자부심을 가져도 돼요.”


화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대꾸하지 않는 편이 가장 좋다는 것을 그는 지난 수많은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눈에 띄게 줄어든 증기만큼 아래로 내려온 열기구는 어느새 덴구르트 선착장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화가는 깜짝 놀라 스케치한 종이를 가방 속에 잘 넣어놓고는 정강이까지 덮는 부츠를 고쳐 신었다. 아낙네는 선착장을 내려다보려 애쓰는 아들의 손을 잡아끌며, 학생은 논문을 외우질 못했다고 한탄하며 내릴 준비를 했다. 덴구르트 열기구 승차장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놓고 내리는 것 없는지 확인하세요. 처음 출발할 때도 말했지만, 잃어버린 물건은 책임지지 않아요.”


관리인이 기계장치의 줄을 힘껏 잡아당겨 증기량을 최소한으로 낮추었다.


“열기구가 바닥에 닿기 전까지 내리지 마시고요. 저기, 화가 양반?”


“예?”


화가는 난간에 기대어 바닥까지 높이를 헤아렸다.


“옆에서 엿본 게 전부이긴 하지만, 당신의 그림을 보면서 감명받았달까요? 저는 열기구에서 살다시피 하다 보니, 당신 같은 자유로운 사람을 보면 더 그런 것 같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지 않습니까? 혹시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안될 것 없죠.”


화가는 마지막으로 가방끈을 몸에 맞게 고정하며 내릴 준비를 마쳤다.


“저는 아벨입니다. 아벨 미르라.”


“멋진 이름이네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미르라 씨. 저는-”


아벨은 열기구 관리인의 이름을 들을 수 없었다. 정확히는, 듣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몰랐다. 관리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열기구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잽싸게 뛰어내린 것이다. 바닥까지 그리 높지 않아 아벨은 문제 없이 착지할 수 있었지만, 열기구는 크게 흔들리며 승객들을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아벨은 짧게나마 열기구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이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관리인의 욕설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미안해요! 제게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아벨은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신 용서를 구했다.


간식거리를 구하러 나온 대학가의 학생들과 호객행위를 하는 노점상, 물건을 옮기는 사내들, 놀러 나온 연인들, 유치한 장난에 깔깔 웃는 아이들. 킨들리아의 제 2 도시, 바리즈는 온 거리가 북적였다.


아벨은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길거리의 향신료 냄새를 느끼며, 자신의 고향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거리의 음유시인들이 부르는 음란한 노래도, 소매치기범을 쫓는 경비병의 욕설도 마찬가지였다. 좌우로 넘어질 듯이 늘어선 건축물들과 필기체로 가격이 적인 판자, 그늘서 차를 마시는 노인들.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고향 속에서 향수를 느낄 지경이었다. 그가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차양 끄트머리에 걸린 깃발과 경비병들의 제복, 그리고 아가씨들의 옷차림뿐이었다.


거리를 달리며 가판대와 판자에 적힌 가격들에 곁눈질하던 아벨은 골목 화단에 핀 꽃을 보고는 달리기를 멈출 뻔했다. 아벨은 꽃을 사랑했다. 무(無)에서 피어나 다시 무로 돌아가는, 그러면서도 치열하게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꽃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꽃을 그리고 싶어, 아벨은 화단 옆, 붉은 건물 앞에서 배꼽을 드러낸 채 손짓하는 여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욕망에 끌려가기에는 그가 짊어진 의무는 몹시 무거웠다.


화가가 멈춰선 곳은 붉은빛 벽돌을 담쟁이덩굴이 뒤덮다시피 한, 구식이긴 해도 나름대로 규모 있는 건축물 앞이었다. 3층으로 높이가 꽤 있었고, 아치형으로 난 창도 크게 트여 넓은 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일 듯싶었다.


계단 위에는 6피트 정도 되는 마호가니 목재의 문이, 계단 난간에는 놋쇠로 된 괴상한 형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벨은 이 놋쇠가 도대체 무슨 동물을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삭아버린 것 같았다. 남들은 빠짐없이 걸어놓은 킨들리아의 깃발은 이곳만큼은 걸려있지 않았다.


아벨은 문고리를 두드리곤 불안한 듯 팔짱을 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문이 열고 나왔다. 키는 작지만 어깨가 넓고 탄탄한 남자였다.


“이번에도 말도 없이 찾아왔군, 아벨.”


남자가 건조하게 말했다.


“반갑기는 하지만, 제발 다음부터는 편지라도 보내게. 조금 지겨워지려 하니까.”


“칭찬은 그 정도면 충분해, 스니퍼.”


아벨이 빠르게 말했다.


“언제까지 문 앞에 내버려 둘 셈이야? 얼른 들여보내 줘. 놀러 온 게 아니라고. 네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어.”


“그놈의 호들갑은 나이를 먹어도 나아지질 않는군··· 잠깐, 신발 좀 털어. 내 집 더럽힐 생각 말고.”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돌연변이 식물 도감의 소설 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심문수입니다.

 돌연변이 식물 도감은 판타지 세계관 <블루뮤테이션(Bloomutation)>을 기반으로 한 소설 겸 그림책입니다.

 그림은 기획자 겸 그림작가인 '규수' 님께서 힘써주고 계십니다.

 소설뿐 아니라 이 거대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게임, 아카이브집 등의 작품도 창작 중이오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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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화 - 적 (2) 21.12.19 35 2 14쪽
2 2화 - 적 (1) 21.11.30 37 2 11쪽
» 1화 - 풍경화가 아벨 21.11.24 83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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