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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돌연변이 식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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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1.11.24 18:03
최근연재일 :
2022.02.10 14:4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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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글자수 :
59,834

작성
22.01.2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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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화 - 숲의 눈 (2)

DUMMY

***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킨들리아와 글라시아 사이에 위치한 무역도시 ‘라마 카’의 강 건너 마을인 ‘고샨’은 조용한 편이었다. 주민 대부분이 라마 카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적을수록 풍경이 목가적으로 좋아진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상업지구가 발달하며 미술용품을 구하기 쉬운 라마 카가 멀지 않고, 마을은 풍경이 좋으니 그림 그리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숙식 문제가 지겹도록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지식이 해박한 라마 카의 주민들은 예술을 아름다움이 아닌 경제성으로 판단했다. 이 그림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높아질까? 이 음악은 소비자의 돈주머니를 열 수 있을까? 그들은 유행에 민감했고, 풍경화는 인물화나 가곡만큼 경제성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고샨은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아무리 유능한 풍경화가라 할지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제쳐두고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아벨은 다른 날들과 달랐다. 그는 새빨간 사과를 베어 물며 여유롭게 거리를 거닐었다. 부츠에 날개라도 달린 듯 발걸음이 가벼웠고, 사과를 베어 무는 입가는 연신 씰룩였다.


암말은 주인이 그간의 문제를 해결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히잉 거리며 기분 좋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벨은 사과를 반쪽 베어먹고는 남은 것을 암말의 입에 넣어주었다.


“세상 참 혼란스럽군.”


아벨이 통나무 지붕에 업힌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급진파와 정통파가 내전을 치르더니, 글라시아가 전쟁을 준비하고, 게다가 괴물까지 나타났다고? 무시무시한 폭풍이 오는 갑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다들 뭐 이리 어렵게들 사는지 원. 안 그래, 친구?”


아벨의 질문에 암말이 눈을 끔벅였다.


“그놈의 세상이 어떻게 되는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됐지. 전쟁이 어쩌고, 정치가 저쩌고, 사상이···”


암말의 엉덩이에 올려둔 그림 가방이 떨어지려 하자 풍경화가가 없다시피 하는 몸재주까지 발휘하며 재빨리 가방을 낚아챘다.


“소중하게 다루라고, 친구! 이건 내 분신과도 같다고!”


아벨이 소리치자 암말이 질책하듯 재갈을 질겅거리며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이라고. 계속 이런 식이라면 널 팔아 치워버릴 거야!”


아벨은 비난하듯 말했지만, 그의 손은 갈기를 쓰다듬으며 암말을 진정시켰다.


“바리즈로 돌아가기 전에 호수 좀 둘러가자, 친구. 루가니 씨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정말 숲 쪽으로 가는지 말이야. 음···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괴물이라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무얼 조심해야 한다는 거지, 글라시아인?”


마을 입구 쪽에서 누군가 불쑥 물었다. 처음 루가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경비병이었다.


“세상은 조심할 것 천지이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도적 떼라든지, 세금징수원이라든지··· 아, 같은 말인가? 그리고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는 글라시아인이 아니랍니다.”


“그럼··· 야만인인가?”


“하하!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


아벨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경비병의 표정이 놀라우리만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경비병은 암말 엉덩이 위에 고정해둔 가방을 슬쩍 보고는 말을 이었다.


“베이포리아 시절에 나라에서 보급한 가방이군. 어디서 놨지?”


“당신이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라 보급품이라고요.”


“그래서 어디서 놨냐고 묻는 거다.”


“합리적인 판단이 안 되는 겁니까? 이 정도면 제가 베이포리아와 킨들리아 출신이라는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나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중이다. 킨들리아의 경비병으로서.”


경비병이 허리춤에 찬 검자루에 손을 얹으며 나름 근엄하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굳이 합리적일 필요도 없지. 당신 같은 백인들이 지금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코흘리개도 아는 사실이니까.”


“참 멋진 궤변이네요. 대학교수였나 봅니다.”


아벨이 허공에 눈동자를 굴렸다.


“루가니 부인께 접근할 걸 봤다. 무슨 이유로 부인께 접근한 건지 알아야겠어.”


“일거리를 받았을 뿐입니다.”


아벨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미소지었다.


“저는 풍경화가입니다. 돈이 필요할 때면 의뢰받은 것을 그리면서 적당한 보수를 받고 있죠. 그것이 흥미로운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요.”


“괴물 얘기로군.”


경비병이 한심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숲의 괴물··· 애들이나 좋아할 이야기일 뿐이야. 설마 존재하지도 않는 괴물을 찾겠답시고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아니겠지?”


“시간 낭비인지, 아닌지는 가보면 알게 되겠죠··· 생각해보니까 당신도 숲에 가봐야 하지 않습니까?”


암말이 지루한지 콧김을 씩씩거리자, 아벨은 등자를 밟고 안장에 올라앉았다.


“소녀가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는데. 고상한 경비병 나리께서는 소녀를 찾아야 할 의무가 있어 보입니다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럼 저도 제 일을 하도록 하죠. 알아서 말이에요.”


아벨이 발꿈치로 암말의 옆구리를 차자, 암말이 천천히 마을 밖으로 향했다. 경비병은 미동도 없이 아벨을 쏘아보았다.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면서.


“너도 느꼈니, 친구?”


아벨이 앞을 내다보며 암말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저 멍청한 경비병 말이야. 참견이 너무 많단 말이지. 시간 낭비니 뭐니 하면서··· 보물이라도 숨겨놨나?”


암말이 부드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등에가 달라붙어 그런 것이었지만, 아벨은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


아벨은 손으로 이마 위에 차양을 만들며 갈대 너머를 내다보았다. 비버들의 집들과 개구리 우는 소리가 느리게 흘러가는 물살에 실려 왔다. 강물이 어찌나 깨끗한지, 물고기가 헤엄치며 생기는 작은 물살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물고기의 볼록한 배 아래에는 민물 가재들이 숨어 있겠지. 하얀 물새가 물고기를 홱 낚아챘다.


강기슭 너머, 푸른 이파리가 달린 나뭇가지 사이로 넓은 호수가 반짝였다. 호숫가 주변으로 청둥오리들이 꽥꽥거리며 뒤뚱뒤뚱 돌아다녔다. 호수 뒤로는 풀싹이 고르게 자란 평원이 쭉 펼쳐졌다. 높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평원을 부드럽게 쓸고는 편백나무가 빽빽이 자란 숲 위로 넘어갔다.


“참 놀라운 일이야.”


아벨이 말 안장에 앉아 열심히 스케치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사람 한 명 없다니 말이야. 다른 곳 같았다면 나무꾼이나 낚시꾼들이 넘쳐났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뜻이지. 늑대 떼가 도사리고 있다든지··· 덩치 큰 곰의 구역이라든지···”


아벨은 자세를 고쳐앉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아니지. 그것도 좀 이상한데? 늑대나 곰의 가죽은 아주 비싸게 팔리잖아. 분명 사냥꾼들이 가만있지 않겠지. 분명 곳곳에 올가미를 설치하고, 화살이나 증기 석궁으로 새끼까지 잡아갔을 거야···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암말이 귀찮은 듯 귀를 펄럭였다. 아벨은 스케치 위에 빛과 색의 조화를 상상하며 살랑살랑 흔들리는 갈대의 모습에 감탄했다.


“영감은 언제나 위험 속에 숨어있기 마련이야. 예측 가능한 곳에 어찌 영감이 있겠어? 이것 좀 봐, 친구. 우리가 위험을 감수했기에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거야. 목가적인 풍경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는 이런 목가적인 풍경을 보면 뭐랄까···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아니지, 다시 태어나 본 적도 없잖아? 그럼··· 벨루요크에 처음 간 순간 같달까? 아, 그것과는 조금 다른데 ··· 아무튼 정말이지··· 이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워··· 죽어도 여한이···”


암말이 처진 귀를 쫑긋 세웠다.


“없을 리가 있나. 이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야지! 그것이 풍경화가의 사명이니까!”


암말의 귀가 다시 축 늘어졌다.


“왜 아쉬워하는 거야? 네가 사명이 뭔지는 알아? 이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아벨과 그의 친구는 숲 근처에 다다르자 방향을 바꾸어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했다. 편백나무 잎사귀 아래에 놓인 숲은 너무 어두워 강기슭이나 평원과는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편백나무 숲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숲은 아벨에게 자연의 위대함과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무한한 뿌듯함을 풍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벨은 독특한 구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루가니가 말했던 나무에 뒤덮인 표지판이었다.

옆으로 살짝 기울어진 표지판에 무언가 적혀 있었지만, 나무줄기에 파묻혀 내용을 알아볼 순 없었다. 나무가 표지판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군. 아벨은 나무와 표지판을 빠르게 스케치하며 생각했다. 신기한 자연현상이야.


표지판 뒤로는 숲 안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이 아닌, 말 그대로 자연이 만들어낸 길이었다. 아벨은 표지판을 소화 중인 나무줄기에 말 고삐를 묶고는 울창한 숲 사이로 발을 들였다.


편백나무부터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초록 잎사귀, 재잘대는 산새, 축축한 잡풀, 자그마한 버섯과 형형색색의 꽃까지. 루가니의 말이 맞았다. 아벨은 즐거움에 사로잡혀 삼림의 풍경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그는 행복했다. 풍경화가의 사명조차 잊을 정도로.


아름다움에 심취해 끝없는 영감에 빠져있던 아벨은 갑자기 소름이 돋아 걸음을 멈추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것이 누군가 몰래 쳐다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자리에 뻣뻣하게 선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 아래서 아벨은 침을 꿀꺽 삼키곤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예술가야··· 예술은 모험 속에서 피어나는 법이지··· 그리고 나는 지금 모험을···”


느닷없이 산새가 날아오르자 아벨은 깜짝 놀라 몸을 획 웅크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혓바닥을 삼킬 뻔했다.


풍경화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코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당당하게 허리를 쭉 폈다.


“모험하는 중이지. 위대한 모험을 말이야··· 그리고 모험을 떠나는 영웅의 심장은 두려움을 모르는 법이야.”


예술가에서 영웅으로 묘사가 바뀌었지만, 아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얼마나 나아갔을까. 아벨은 갑작스레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겁에 질려 헛된 기분에 휩싸인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 바닥에 엎드렸다. 고개만 살짝 내밀어 자작나무 아래 주황빛 덤불을 주시했다.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늑대일지도 몰라, 아벨은 생각했다. 스니퍼 말이 맞아··· 영웅이고 뭐고 간에 망할 놈의 호기심이 문제라니까···


화가는 덤불 주변으로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았다. 정체 모를 그림자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하군, 화가는 고개를 길게 빼며 또다시 생각했다. 포식자치고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데··· 토끼나 사슴 같았으면 진즉에 도망쳤겠지. 혹시··· 루가니 씨의 시종인가?


“누비··· 씨?”


시종의 이름을 기억해낸 아벨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왠지 움직임이 멈춘 기분이었다.


“누비 씨 맞나요? 루가니 씨의 여시종···”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겁에 질린 걸까? 아벨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떡하지?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조금 더 용감한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법이었다. 아벨은 영웅을 생각하며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가니 씨가 부탁해서 찾으러 왔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낯선 기분이 밀려들자, 아벨은 문득 이 순간을 기록하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록하겠는가? 아벨은 스케치 도구를 조심스럽게 꺼냈고, 곧 사명감을 녹여낸 프로의식을 발휘했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간격을 두고 자란 나무줄기와 낙엽들, 이름 모를 꽃, 쏟아지는 빛줄기···


“무서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화가는 그림에 집중하며 말을 되풀이했다.


“당신을 도와주러··· 왔으니까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말이 어찌나 없는지, 아벨은 어쩌면 시종이 벙어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입을 열 법도 한데, 끈질길 정도로 침묵을 유지하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근데 벙어리가 시종을 할 수 있나? 음··· 루가니 씨라면 가능할지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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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화 - 숲의 눈 (3) 22.02.10 16 2 13쪽
» 9화 - 숲의 눈 (2) 22.01.27 14 1 13쪽
8 8화 - 숲의 눈 (1) 22.01.20 12 1 15쪽
7 7화 - 적 (6) 22.01.13 18 1 13쪽
6 6화 - 적 (5) 22.01.06 13 2 14쪽
5 5화 - 적 (4) 21.12.31 15 2 14쪽
4 4화 - 적 (3) 21.12.25 21 2 13쪽
3 3화 - 적 (2) 21.12.19 35 2 14쪽
2 2화 - 적 (1) 21.11.30 37 2 11쪽
1 1화 - 풍경화가 아벨 21.11.24 83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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