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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돌연변이 식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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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1.11.24 18:03
최근연재일 :
2022.02.10 14:42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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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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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글자수 :
59,834

작성
22.01.13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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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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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3쪽

7화 - 적 (6)

DUMMY

***


루피너스는 천천히 등불빛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나 조용한지, 낙엽 밟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스니퍼를 활로 겨누는 그녀의 검은 눈이 붉게 번들거렸다.


“루피너스··· 우리 말로 하자. 대화로··· 일단 그 활부터 거두고-”


“내가 왜?”


단호하게 입을 연 루피너스의 목소리는 물속에 잠겨있기라도 하듯 불안정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어째서? 네가 뭔데? 너도 이 남자와 같이 망할 베이포리아인일 뿐이잖아. 내가 적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일단은··· 일단 대화로-


“날 무시하지 마!”


루피너스가 버럭 소리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흐느꼈다.


“내가 왜 대화를 해야 해? 그러면 뭐가 바뀌기라도 해? 이미 흘러간 시간이 되돌아기라도 하냐고. 젠장··· 내 아들이··· 내 아들 리코가··· 네 녀석들이 내 아들을 죽였어. 그것도 처참히 짓밟아서! 망할 개자식들!”


아벨은 창백해진 낯빛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루피너스가 숨을 몰아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난 널 죽음의 신 곁에서 구해줬어. 그것도 두 번이나··· 그렇게 널 데려가야 했던 죽음의 신은··· 다른 누군가를 데려갔겠지. 운명의 원칙에 따라서 말이야. 그럼 신은 누구를 데려갔을까? 널 대신해서 죽은 이는 누구지? 혹시 그게 내 아들이라면···”


“루피너스,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야··· 아까도 말했지만, 난 죽음의 신 따위 믿지 않아. 그건 하나의··· 사고였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고···”


“사고···”


루피너스의 손가락 끝에 걸린 화살촉이 불안하게 반짝였다.


“아니, 이건 사고 아니야. 이건 필연적인··· 그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 검은 말에 홀려 마을 밖으로 달려나간 순간부터··· 아니지, 내가 검은 말을 탄 남자가 아버지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부터··· 거짓말은 거짓말이었을 뿐··· 그래, 네 말이 맞았네.”


“루피너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더니, 팔에 부목을 댄 글라시아인, 페라가 불쑥 나타났다. 숨을 헐떡거리던 그는 아벨과 스니퍼를 발견하고는 욕을 내뱉었다.


“이런··· 개새끼들! 뭐하는 거야, 루피너스?! 얼른 죽여버려!”


“루피너스··· 제발. 그 활 내려놔···”


“아니. 내려놓지 마!”


페라가 재촉했다.


“이 개 같은 자식! 내가 말했잖아! 저 새끼를 풀어줘서는 안되었다고! 야만적인 새끼들! 네 녀석들은 너희가 저지른 만행에 괴로워하긴 해? 그냥 쏴버려. 저 얍삽한 놈의 머리통에다가 말이야. 너도 봤잖아. 네가 풀어주자마자 곧장 저들 편에 들러붙는걸!”


그때 스니퍼가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루피너스가 활을 쏘았지만 나무줄기에 박히는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아벨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페라가 비명을 지르며 등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낙엽 위를 구르며 다투는 소리가 들렸고, 비명과 신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만둬! 당장! 멈추라니까!”


루피너스가 활시위에 화살을 얹으며 소리쳤지만 아무 소용없어 보였다. 너무 어두워 상황이 어떻게 흐르는 건지, 누가 때리고 누가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활로 상황을 멈추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아벨의 예상과 달리 루피너스는 활을 쏘았다. 그리고 짧고 굵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둠 속에서 뒹구르고 뒤엉키며 낙엽이 흐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둔탁한 것을 때리고, 또 부러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곧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발··· 죽는 줄 알았네. 위험했잖아, 루피너스. 목에 화살 장식을 할 뻔했다고.”


“죽었···어?”


페라가 부르터진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날 선 눈빛으로 아벨을 쏘아보았다.


“아니. 하지만 네 화살이 녀석의 다리를 꿰뚫었어.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할 거야··· 루피너스. 지체할 시간 없어. 이제 가야 해. 베이포리아 군이 소리를 들었을 거야. 얼른 끝내고 빨리 페시클로··· 이런 젠장!”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소리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두명이 아니었다. 페라의 예상대로 베이포리아 군이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놈들이야! 얼른 가야 해!”


“먼저 가.”


페라의 다급한 경고에도 루피너스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차갑게 빛나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감정이 결여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녀의 뺨이 붉게 반짝였다. 활시위가 팽팽해지면서 활이 불안하게 휘어졌다.


“허튼짓하지 마, 루피너스. 사는 게 우선이야. 확실하게 처리하고 와. 페시클로. 알겠지?”


페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동료를 지켜보다가 결국 어둠 속으로 홀로 사라졌다. 루피너스는 낮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비극은 비극을 낳는다고 하지. 동아줄처럼 얽히고설켜서. 비극의 끝은 어디지? 오긴 하는 걸까? 어쩌면 끝이 없을 수도 있겠지. 왜냐하면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고, 변치 않는 진실은 존재하니까. 진실은··· 남편은 은고사리에 죽었다는 것과, 베이포리아인이 내 아들을 죽였다는 것.”


그녀는 아벨의 머리를 겨냥했다. 그녀 말이 맞아. 아벨은 떨리는 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맞아. 진실은 변치 않아.”


아벨은 검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도 있고··· 하지만··· 그래도 노력해야지. 같은 존재가 될 순 없잖아?”


루피너스는 눈을 질끈 감더니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속에 쌓아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내듯.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활시위를 내렸다.


“······항상··· 이 놈의 주둥이가 문제이지···”


루피너스가 힘겹게 말했다.


“다음에는 가차 없이 죽여버릴 거야. 모든 베이포리아인들을 말이야··· 그러니··· 우린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지···”


“그래···”


루피너스는 잠시 서서 아벨을 지켜보더니,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베이포리아 군이, 정확히는 킨들리아에게 버려진 병사들이 아벨과 풀숲에 쓰러져있는 스니퍼를 발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들것에 실렸고, 원치 않게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되었다. 불누스 지휘관은 도망간 글라시아인들을 잡으려 수색을 벌이지는 않았다. 더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듯했다.


“다 엿듣고 있었어. 젠장··· 빚을 졌군··· 빚지는 건 딱 질색인데···”


스니퍼가 조용히 속삭였다.


“갚아야겠지··· 그러니까··· 영감을 원한다고 했나? 내 이야기··· 그래, 내 이름 스니퍼 카운드럴이야.”


“그건 이미 알고 있어. 빚을 갚기에는 싸다고.”


“젠장,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군··· 잠깐, 뭐 하나만 좀 물어봐도 되나?”


스니퍼가 힘겹게 말했다. 아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황야에서··· 자네가 어린 글라시아 아이를 구하려는 모습을 보았네. 사실 그 모습을 보고 자넬 첩자라고 확신했지··· 그런데 자네는 첩자가 아니지 않은가? 왜 그 아이를 구하려 한 거지? 도대체 왜···”


아벨은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서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까. 만약 멈출 수 있었다면,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진 않았을 거야.”


스니퍼가 들것에 맥없이 누워있는 아벨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젠장.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네··· 영감 얘기나 하지.”


스니퍼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있었던 충격적인 일··· 어쩔 수 없군··· 내 아내는 날 두고 도망갔네. 심지어 아들도 두고 말이야. 챙기거라고는 귀중품과 돈 뿐이었지. 다른 남자가 있었던 모양이더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이별은 상상도 못 했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한가?”


“영감거리보다는 이야기 소재거리에 어울리겠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아벨이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더는 말하지 마.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이제는··· 정말이지 쉬고 싶은 생각뿐이야.”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벨.”


---


“술이 다 떨어졌군.”


스니퍼가 텅 빈 병 안을 들여다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더 마실 수 있지? 조금만 기다리게. 부엌에 새 병이 있네.”


“그래··· 빨리 가져와. 그 전에 잠깐! 네가 고양이를 키웠던가?”


아벨은 창틀에 앉아 거리를 구경하는 하얀 고양이를 보며 물었다.


“내가 키우는 건 아닐세. 안줏거리는 어떤가? 뭐 좀 먹겠나?”


“집에 먹을 게 있긴 한가 보네. 아무거나 줘. 그러면 고양이는 네 아들이 키우는 건가?”


“카르디가? 그럴 리가 있나. 그 녀석은 멍청하고 쓸모없는 고집불똥이야. 만약 녀석이 내 집에 고양이를 들인다면, 똥으로 가득 찬 머리통을 부수어버릴 걸세.”


말의 내용과 달리 스니퍼는 아주 차분했다.


“고집불똥이 아니라 고집불통이야. 제발 공부 좀 해. 카르디하고 아직도 사이가 안 좋아?”


“아직도라니. 한순간도 좋았던 적 없네.”


스니퍼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아들놈이 불쌍하구만. 아벨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아무리 내 친구라지만 저렇게나 냉혹한 아버지를 두다니··· 나라면 숨이 막혀 죽어버렸을 거야. 아니면 진즉에 도망쳤거나. 그의 전 아내처럼···


“야옹아.”


아벨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양이를 불렀다. 고양이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벨을 쳐다보더니 관심 없는지 다시 창밖을 내다보며 앞발을 핥았다.


“하긴,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이 널 데려왔을리 없겠지. 그런데 아들놈도 아니라니, 넌 도대체 누가 데리고 온 거니? 설마 당당히 들어와서는 집 한구석을 마음대로 차지해버린 건 아니겠지?”


“제가 데려왔어요.”


문밖에서 한 소년이 조용히 말했다.


열다섯 즈음으로 보이는 소년은 긴 바지와 외투 그리고 가죽 부츠를, 그러니까 다른 남자아이와 다를 것 없이 입고 있었다. 소년은 쟁반을 들고 와서는 탁자에 계란 스크램블과 소시지 그리고 치즈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외투 아래로 드러난 소년의 팔뚝은 다른 남자아이보다도 단단해 보였다.


카르디가 이렇게 어렸던가, 아벨은 소년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대학을 다닐 나이로 알고 있는데··· 생각을 거듭하던 아벨은 놀라서 입이 쩍 벌어졌다. 가느다란 눈썹과 짧게 자른 머리카락, 작은 얼굴에 뾰족한 턱. 아이는 소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마워, 알리아. 고양이 좀 데리고 나가주겠니?”


스니퍼가 술병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알리아라 불린 소녀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고양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고양이가 신경질적으로 발버둥치며 야옹야옹 울었다.


“저 애는··· 뭐야? 아니, 누구야?”


그럴 필요 없는데도, 아벨은 조용히 속삭여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진짜 그렇게 믿고 싶진 않지만··· 설마··· 너의 새로운···”


“날 완전히 미친놈처럼 여기는군. 아니면 자네가 미쳐버렸거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할 거면 내 집에서 썩 꺼져버리게.”


“네가 이전에 한 짓들을 먼저 돌이켜보는 게 어떻겠어? 이건 합리적 의심이라고···”


아벨은 코를 훌쩍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도대체 누구야? 혹시 숨겨둔··· 딸?”


“옛 동료의 딸일세. 그 이상은 알 필요 없어.”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알 필요 없다니, 이건 예술가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어.”


“고문 당해본 적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뭐야, 넌 당해봤어?”


“아니. 내가 많이 해봤지. 모르는 기구가 없네. 혹시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가?”


“내가 식탁보를 더럽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이미 더럽지만.”


“음··· 그렇게 둘 순 없지.”


스니퍼가 새 병을 열어 잔을 채웠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아, 맞아.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도 우리 인류사에 몹시 중요한 문제라며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야.”


“드디어 들을 준비가 된 건가?”


“당연하지. 사실 처음부터 그랬지.”


“젠장··· 옛날이야기는 그저 추억을 만지작거리는 것뿐이었군. 마치 매춘부를 애무하듯이 말이야. 참 쓸데없는 짓이었어.”


“비유가 적절치 않은 것 같은데.”


스니퍼가 바보처럼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비유가 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무슨 상관인가? 이제 얘기해 보게.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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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화 - 적 (3) 21.12.25 22 2 13쪽
3 3화 - 적 (2) 21.12.19 35 2 14쪽
2 2화 - 적 (1) 21.11.30 38 2 11쪽
1 1화 - 풍경화가 아벨 21.11.24 8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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