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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돌연변이 식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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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1.11.24 18:03
최근연재일 :
2022.02.10 14:42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66
추천수 :
17
글자수 :
59,834

작성
22.01.06 12:20
조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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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4쪽

6화 - 적 (5)

DUMMY

***


누군가 걷어차는 바람에 아벨은 기침을 쏟아냈다.

젠장, 쑤시지 않는 곳이 없네. 아벨은 웅웅 울리는 머리를 흙바닥에 처박은 채 생각했다. 낯설지 않아. 언젠가 겪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얼마 전에···


그를 걷어찬 이는 흑회색 망토를 두른 남자였다. 어디서 본 얼굴이야··· 누구였더라··· 두통이 소리를 내며 머리를 통째로 뒤흔들고 있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그래. 일어날 시간이야.”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알람이 효과적이라 다행이군. 고개 들어. 침은 그만 흘리고.”


“아아··· 당신이군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벨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몸이 끔찍할 정도로 불편했는데 손목이 등 뒤로 모여 억센 밧줄에 꽁꽁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벨은 기시감에 속으로 욕을 했다.


“기억하는군.”


남자가 거만하게 말하고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았다.


“기적이라고 해야겠어.. 말발굽에 머리통을 걷어차이고도 살아있다니. 심지어 기억도 멀쩡하잖아. 그래.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난 엄청난 돌머리인 게 분명해··· 인정하긴 싫지만. 아벨은 흙바닥에 침을 뱉고는 부은 눈을 끔뻑였다. 그는 등불 하나로 겨우 밝힌, 작은 천막 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날 이리로 데려온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그림이 필요해서 부른 건 아닐 테고···”


아벨은 눈을 꾹 감으며 지난 일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일순에 얼굴이 대리석 조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잠깐··· 리코는? 그··· 남자아이는 어떻게 되었죠?”


“그걸 왜 나에게 묻지?”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대답해야 할 가치를 못 느끼겠는데. 네 입장이 어떤지 모르는 건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에요. 오해가 있는 것이 분명-”


“변명은 집어치우게, 첩자 양반.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남자가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변명이 아니에요. 진실을 말할 뿐이지···”


“진실? 그래. 진실 좋지. 하지만 진실은 네가 아니라 내가 밝혀야 할 일이야.”


“도대체 절 의심하는 이유가 뭡니까? 제 피부색이 당신과 달라서 그럽니까? 아니면 출신을 믿을 수 없어서?”


아벨은 답답한 마음에, 더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피부? 출신? 내가 정말 그것 때문에 널 의심하는 것 같나? ······그 모르겠다는 표정··· 참 역겹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 네가 왜 첩자인지 알려주마. 우선 넌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했지. 군인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정확히 어떤 임무를 하고 있는지를 말이야.”


남자가 장갑 낀 손으로 아벨의 얼굴을 대뜸 후려갈겼다. 아벨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자 남자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두 번째, 넌 베이포리아의 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국가 정세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모르더군.”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남자가 고갤 끄덕이며 동조하는 척했다.


“그런데 그게 나라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는 문제라면?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없어도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네가 타국의 첩자가 아니라면 말이야!”


머리통이 통째로 흔들리더니, 따귀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세 번째. 넌 국경을 넘지 말라는 나의 충고를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무시했지. 아직도 변명거리가 남았나?”


“미치겠네.”


아벨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찌나 우스운지, 입꼬리가 절로 씰룩이고 실소가 새어 나왔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들끓고 있었다.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아주 지독하게도 꼬였어···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니까 편해? 젠장··· 그래. 존나게 편하겠지···”


“······뭐?”


“그런데 세상의 기준이 단 하나일 수는 없는 거야. 군대가 어쩌고, 정치가 저쩌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진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이 친구야.”


“이 새끼가··· 드디어 실토하는구나.”


남자가 베이포리아 문장이 새겨진 망토를 벗어 던졌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제 뜨거운 시간만 남은 거야. 시간은 충분하니까.”


남자는 외투를 고쳐 입고는 아벨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숨이 턱 막혀 목구멍에서는 신음 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무거운 장화 굽이 또다시 복부를 내질렀다. 뱃속에서 신맛이 나는 액체가 솟구쳤다. 남자는 멈추지 않고 가죽 장갑을 낀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렸다.


아벨은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느꼈다.


“스니퍼?”


누군가 천막 문을 열어젖히자,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보았다.


“뭐야?”


“우리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지휘관님께서 지금 널···”


천막을 연 사내가 피 섞인 침을 뱉어내는 아벨을 힐끗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휘관님께서? 지휘관님은 이곳에 안 계시잖-”


“스니이이이퍼!”


또 다른 누군가가 벽력처럼 소리치더니 사내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체구가 크고 하얀 수염이 난 나이 든 남자였다. 사내가 허우적거리며 뒤로 나자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망할 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불누스 지휘관님? 여긴 어떻게···”


스니퍼라 불린 남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도대체 누구 명령을 받고 이따위 일을 벌인 거야?!”


“일이라고 하면···”


“뭐겠어! 당연히 내 명령도 없이 글라시아 마을을 급습해 학살을 벌인 일이지!”


불누스 지휘관이 언성을 높였다.


“아··· 그게··· 그게 율리오 님께 직접 명령을 하달받아 제가 부대를 이끌고··· 급습 작전이라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성급하기는! 너는 내 부하야! 율리오 같은 배신자가 아니라!”


“······배신자라니요?”


스니퍼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베이포리아의 미래를 누구보다도 걱정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율리오 님께서 제게 충분히 설명을··· 그러니까 이번 급습 작전을 벌이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작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는 이를 수긍하고 작전을 벌였을 뿐입니다.”


“그래? 그 개자식이 베이포리아의 미래를 걱정해? 염병할! 그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던가?!”


“그러니까··· 코어 있지 않습니까? 글라시아의 냉향석동굴에 있는, 빛과 열을 스스로 뿜어내는 유물 말입니다.”


스니퍼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얼른 말문을 열었다.


“코어의 잠재력은 매우 높아 그 영향이 세계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은 점성술사뿐만 아니라 벨루요크의 전문가 역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일부 사기꾼들을 제외하면 말이죠. 그런 유물이 글라시아에 있는 건 우리 베이포리아에게 좋지 않을뿐더러, 먼 훗날을 위해서라도 우린 코어가 필요합니다. 즉 국가의 존속을 위한 코어를 확보하려는 노력에서, 저희는 그 거대한 임무에 작은 시작점이 되었을 뿐입니다.”


“코어? 국가 존속? 미치겠군. 그럼 넌 이 일을 맡으면서 방법이 지나치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눈에 밟히는 모든 것들은 죄다 태워버렸더만! 마을이 피와 재투성이라고! 벌써 썩은 내가 진동한단 말일세! 그리고 네 전우이자 내 부하인 마켈은 화살에 맞아 한쪽 팔을 잘랐어. 요즈한은 왼쪽 눈을 잃었고, 허벅지나 어깨에 장애를 얻은 애들도 있지. 또 귀한 순종 말 네 마리를 잃었어. 이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데에는 사사로운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미래를 위한 희생일 뿐입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마을 하나 없어진다고 문제 될 것 없습니다. 전우가 다친 일은 안타깝지만, 우린 더 큰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지휘관님께서도 분명 이해하게 되시리라 믿-”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모든 일이 베이포리아를 위한 일이었다는 거지? 그런데 이걸 어떡하지?”


불누스 지휘관이 스니퍼의 말을 자르고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말했다.


“이젠 베이포리아는 존재하지 않아. 율리오 그 자식이 일부 학자들과 귀족들을 데리고 반란을 일으켰으니까! 이제는 킨들리아가 되었네! 젠장! 나라 이름이 킨들리아가 뭔가? 무슨 디저트 이름도 아니고.”


“베이포리아가··· 어떻게 되었다고요?”


스니퍼의 눈이 일순에 커졌다.


“무너졌다고 이 미친 새끼야! 넌 그 악당한테 속은 거야. 나를 포함한 베이포리아 정통파들의 영향력을 깎아내리는 데에 이용당한 거라고. 이제 대중들은 우리 부대를 잔혹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집단으로 여기겠지. 네가 끔찍하게도 사랑하는 조국이 네 헛짓거리에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거야! 이제 네가 한 짓을 이해하겠나?”


불누스 지휘관이 바닥에 침을 퉤 뱉더니 경악을 금치 못하고 탄식을 터뜨렸다. 드디어 바닥에 쓰러져있는 아벨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젠장!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저··· 그게 이놈은 글라시아의 첩자-”


“첩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가 글라시아 놈들이 첩자를 보낸다던가?! 그런 말은 내가 지휘관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잠깐··· 이런 미친! 이분은 아벨 씨잖아!”


불누스 지휘관이 깜짝 놀라 얼른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 아벨은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지휘관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과 친분이 있던가. 누군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나를 아는가 보네. 다행히도.


“제 얼굴··· 너무 많이 망가지진 않았겠죠?”


아벨이 조금은 과장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괜찮고 말고요··· 아마도요···”


불누스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부하가 너무 열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오, 위대한 화가 아벨 씨. 보상은··· 솔직히 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소. 제 목도 간당간당해서···”


“보상보다 우선 얼굴이 부디 멀쩡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이만 집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너무 지쳤어요.”


“그럼요. 집으로 돌아가셔야죠.”


불누스 지휘관이 체념한 듯 힘없이 말했다. 얼굴에 근심이 어찌나 가득한지, 화낼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저희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가시는 길에 신의 가호가 있기 바랍니다··· 배웅해 드리게, 스니퍼. 난 내 모가지를 위해서라도 네가 싼 똥을 치워야 하니까.”


---


“정말 미안하게 됐네···”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던 스니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건 자네 잘못도 있네. 내게 의심할 여지를 주었으니까.”


“여지를 준 기억은 없는데.”


아벨이 조용히 대꾸했다.


“여지를 준 적이 없다고? 그럼 왜 내 정체를 알고 싶어 했나? 내 충고를 무시하고 국경을 넘은 이유는? 그리고 국가 정세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도 말이야.”


“당연히 호기심 때문이지. 정치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고.”


“호기심이 사람 여럿 죽이는군···”


둘은 베이포리아를 향해, 아니, 속옷 갈아입듯 탄생한 국가 킨들리아를 향해 축축한 숲길을 지났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 밤새우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고, 등불 빛에 번지는 나무 그림자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진실은 하나의 잣대로 정해질 만큼 단순하지 않아. 내가 말했잖아.”


아벨은 산 아래에서 힘겹게 빛을 내는 태양의 잔상을 멍하니 쳐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네. 진실은 만들어지는 법 아닌가? 젠장··· 도무지 모르겠군. 얼굴은 좀 어떤가?”


“눈코입이 제자리에 잘 붙어있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잘 붙어있네. 그렇게 세게 때리진 않았으니.”


“내 말은 형태를 알아볼 수 있길 바란다는 뜻이야.”


“아. 그렇군··· 오른쪽 눈이 좀 붓긴 했는데, 나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태평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벨은 어이가 없어 인상을 구겼지만, 스니퍼는 이를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실수한 사실은 변치 않겠지··· 젠장, 미치겠군. 무엇이든 말해보게. 무엇이든 들어주지.”


“무엇이든?”


“내가 해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스니퍼가 말을 정정했다.


“그럼 내게 영감을 줘. 내가 말하는 영감은 예술적인 자극을 말하는 거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네. 그런데 그걸로 충분한가? 돈이나 물건 같은 게 아니라?”


“그 외에는 모두 쓸모없어.”


아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영감이라··· 그걸 어떻게 주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나와 대화를 나누면 돼. 이런저런 이야기. 예를 들면, 네가 겪었던 충격적인 일들이라든-”


아벨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스니퍼가 갑자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 목소리가 굳어버린 것이다. 아벨은 숨을 고르며 스니퍼를 바라보았다. 거위 깃털이 달린 화살이 그의 어깨에 박혀있었다.


“움직이지 마···”


나무가 우거진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벨은 이 상황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니,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다. 목이 잠긴 것을 제외하면.


“루피너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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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화 - 적 (4) 21.12.31 15 2 14쪽
4 4화 - 적 (3) 21.12.25 22 2 13쪽
3 3화 - 적 (2) 21.12.19 35 2 14쪽
2 2화 - 적 (1) 21.11.30 37 2 11쪽
1 1화 - 풍경화가 아벨 21.11.24 83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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