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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돌연변이 식물도감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1.11.24 18:03
최근연재일 :
2022.02.10 14:42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67
추천수 :
17
글자수 :
59,834

작성
21.12.3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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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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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4쪽

5화 - 적 (4)

DUMMY

***

5화 2.jpg

“죽음의 신은 까마귀 얼굴을 하고 있다지. 지금 자네 주변을 맴도는 모양이구만. 이것 참 죄송하게 되었군. 아직은 죽으면 안 되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마리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팔을 다친 청년이 양동이를 들고 오더니 창고 바닥에 널브러져 헐떡이는 아벨 옆에 내려놓았다. 양동이에는 희멀건 물이 참방거렸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말만 늘인다면, 굳이 살려둘 이유도 없겠지. 어떤가? 자네도 사람이니 고통스럽게 얼어 죽고 싶진 않을 거라 생각하네. 이제 말해보게. 촌즈에, 글라시아에 온 이유가 뭐지?”


주먹만 한 공이 목구멍을 틀어막기라도 한 건지 숨쉬기가 버거웠다. 아벨은 기침을 여러 차례 쏟아내고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신··· 신께 맹세코··· 그저 호기심으로···”


“이 염병할 베이포리아인!”


팔을 다친 청년이 갑자기 위협적으로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호기심? 그저 호기심일 뿐이라고? 그럼 나도 네 녀석의 살갗을 산 채로 벗겨서 얼어 죽는 걸 지켜볼까? 호기심이 시키는 대로 말이야! 촌장님!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보세요! 기껏 살려두었더니 대놓고 우릴 무시하지 않습니까!”


“너무 앞서가지 말렴, 페라. 그리고 나약한 베이포리아인, 아무래도 자네가 믿는 신은 모두 죽은 모양이구먼. 죽음의 신만이 자네 곁을 떠돌고 있지 않은가?”


마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정말로··· 아무것도···”


“그래, 그래.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지.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보겠네. 최근 너희 베이포리아의 병사들이 국경 지방으로 모이고 있더군. 그것도 기병대 위주로 말이지. 기병대가 뭔지는 알겠지? 말을 탄 놈들 말일세. 부수고 짓밟기를 좋아하는 녀석들이지 않은가? 나는 그들이 언제든 쳐들어와 마을을 짓밟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구나.”


“나는··· 일개 화가일 뿐이야··· 나도 모른다고···”


“그저 화가일 뿐이다···”


마리는 뻔한 거짓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따라 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그저 영감이 될 만한 것을 찾으려 호기심에···”


“아무렴. 그저 살기 좋은 베이포리아 밖으로 나와 험준한 글라시아의 숲을 지나가던 그림쟁이였다, 이 말이지 않은가?”


마리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는 말은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구나. 그렇지?”


아벨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공포가 혓바닥을 집어삼킨 것만 같았다. 파르르 떨리는 뼈마디 사이마다 불길한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마리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어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젊은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양동이가 들리고, 머리 위로 물이 쏟아졌다. 아벨은 비명을 질렀다. 물이 살갗에 매달려 뭉텅이로 떼어내는 것만 같았다.


“젠장! 거짓말이 아니라고! 정말로 난 아무것도··· 아무것도 몰라!”


“나도 알고 있네, 잘나신 *환쟁이 양반.”


마리가 허벅지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다고 그게 자네를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되진 않잖은가? 그리고 혹시 모를 일이지. 죽음의 문턱에서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생길지.”


팔을 다친 청년 페라가 머리끄덩이를 붙들자, 아벨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청년은 욕설을 내뱉으며 아벨의 복부를 걷어찼다. 고통과 절망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문이 열리자 이번에는 혹독한 찬바람이 화가를 짓밟았다. 물에 젖은 살갗이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감각이 둔해지는 와중에 아벨은 문 너머로, 거대한 바람이 불어오는 새하얀 마을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 순간을 그림으로 남겨야 하는데. 그는 생각했다. 혹독하면서도 아름다운 이 순간을··· 그러나 아벨은 아이러니한 풍경을 계속해서 지켜볼 수 없었다.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뭐야, 루피너스?”


페라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그만해.”


“뭐라고?”


“네가 붙들고 있는 베이포리아인. 놓아주라고. 첩보원 같은 게 아니니까. 그는 진짜 화가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창고 안에서 마리가 물었다.


“가방을 뒤져봤어요. 물과 지도, 말린 빵, 구름펜, 바포르 그리고 풍경 그림뿐이더군요. 흉기로 쓸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어요. 군인이라는 증거 역시 마찬가지고요. 제대로 확인해 봤으니 의심은 마세요, 어르신.”


“증거가 없단 말이지···”


마리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더니 곧장 말을 이었다.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단다, 루피너스. 화를 남겨서 좋을 것 없으니까. 저 불쌍한 베이포리아인은 하나의 증거물이야. 적이 우릴 공격할 명분이 되는 증거물. 증거물을 남긴 대가는 우리가 치르게 되겠지. 일은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 법이야.”


“바뀌는 게 왜 없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우리 글라시아인답지 않아요! 너무 미개하다고요. 마치··· 베이포리아인처럼 말이죠.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될 셈인가요?”


“닥쳐, 루피너스!”


페라가 대뜸 소리치더니 아벨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망할 개자식! 이 자식이 내 팔을 망가뜨렸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넘어갈 순 없어!”


“이 녀석이 널 그렇게 만든 게 아니지, 페라. 같은 베이포리아인이긴 해도 엄연히 다른 사람이야.”


“내겐 같은 베이포리아인일 뿐이야!”


“그만!”


마리가 버럭 소리치더니 들끓는 가래를 퉤 뱉었다.


“루피너스··· 이 할멈은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구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필사적으로 구는 거지?”


“옳은 일을 하려는 것뿐이에요.”


루피너스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전쟁 중에는 옳고 그름은 흐려지는 법이다.”


마리가 단호히 말하더니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되었다.


“그래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이렇게 필사적으로 나오는 거겠지. 그 이유를 너조차도 제대로 알긴 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뒷일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어르신! 필사적인 건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야죠! 이렇게 넘어가는 건··· 제자리걸음을 하는 셈이라고요!”


“더 이상 충고는 필요 없네, 페라.”


마리가 페라의 말을 날카롭게 잘랐다.


“그리고 루피너스! 네가 선택한 일이야. 책임도 네가 져야 한다는 걸 명심하렴.”


“잘못될 일 없어요.”


루피너스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지. 가자, 아렉시스. 에밀은 의자 좀 가지고 오거라. 그리고 페라. 아직 우리에게는 중요한 일이 많단다. 애꿎은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꾸나.”


마리가 창고를 나서자 청년들도 하나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페라가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느릿느릿 빠져나갔고, 그렇게 창고에는 아벨과 루피너스, 둘만 남게 되었다.


“저 녀석, 예전에 숲을 돌아다니다가 팔을 다쳐서 돌아왔었어. 베이포리아인의 짓이라더군. 그래서 너 같은 베이포리아인들에게 유난 떠는 거야.”


루피너스가 마른 수건과 아벨의 가방을 건넸다.


“······고마워. 덕분에-”


“죽음의 신이 다른 누군가를 데려갈 뿐이지.”


“난 죽음의 신 따위 믿지 않아.”


아벨은 여전히 딱딱거리며 떨리는 턱관절로 힘겹게 말하고는 루피너스가 가져온 모포로 몸을 감쌌다.


“하루에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다니, 정말 엄청난 경험이야··· 이러다 영감이 폭발해 버리겠어.”


“그놈의 영감이 뭐길래 그래? 그렇게 중요한 거야? 목숨까지 걸 만큼?”


“예술가로서 영감을 얻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오늘은 충분한 것 같아···”


“그렇겠지. 그까짓게 뭐라고.”


루피너스의 목소리가 멀리서 말하듯 나직이 들려왔다. 그녀는 잠시 침묵했고, 곧 입을 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내 남편도 너처럼 영감에 목숨을 건 미친놈이었으니.”


아벨은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어깨를 부여잡고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낼 뿐이었다. 루피너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은고사리. 내가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지? 내 남편은 은고사리에 죽었어. 자세히 관찰하고 싶어 했거든. 그이는 은고사리를 꺾을 생각이었던 거야. 난 분명 반대했어. 나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가 반대했다고. 하지만 누구도 그의 호기심을 막을 순 없었어.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지. 은고사리가 말 그대로 갈가리 찢어버렸거든. 팔다리가 꿰뚫려 떨어지고, 흙바닥에는 피가-”


“그걸로 충분해. 충분히 알아들었어.”


아벨이 옷을 추스르며 말했다.


“내가 왜 너에게 이런 얘길 하는지 모르겠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을빛이 나무판자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창고 바닥 곳곳에 박힐 때까지. 몸에 물기를 모두 닦아내고, 찢어진 옷을 추스르고, 몸이 후끈 달아오를 때까지. 루피너스가 등불을 모두 끌 때까지.


누군가 소리를 지를 때까지.


“왔어! 젠장, 놈들이 왔다고! 뭐든 들고나와! 빨리 방책을 꺼내!”


루피너스가 고개를 쳐들었다.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더니, 곧 비명을 터뜨렸다.


“리코!”


---


글라시아의 국경 근방에 위치한 마을, 촌즈는 말 그대로 혼비백산이었다.


서둘러 명령하는 소리, 욕설 섞인 고함소리, 아낙네들의 비명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 도끼나 곡괭이, 삽, 망치 따위의 쇠붙이들을 꼬나든 몇 없는 청년들이 눈으로 덮인 둔덕 속에 숨겨두었던 마차를 꺼내 마을 입구를 막으려 필사적이었다. 아무래도 마차가 방책인 모양인데, 방책 세우기가 잘 안되는 듯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려는 주민들과 아직 마을에 돌아오지 못한 이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마을 입구가 한껏 붐볐기 때문이었다.


한편 눈으로 덮인 언덕 위에는 거대한 검은 말을 탄 기수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스무 명을 조금 넘기는 소규모의 기수들은 검은 갑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무장한 채 마을을 가만히 굽어보고 있었다. 쥐새끼를 노리는 송골매처럼 그들은 자신만만했다.


“리이이이이이코!”


루피너스가 힘껏 소리쳤다. 그러나 멀리 뻗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소음에 금세 파묻히고 말았다.


“리코! 어디 있어! 젠장! 에밀, 내 아들 봤어? 내 아들 봤냐고!”


“뭐라고? 리코? 네 얘잖아!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에밀은 버럭 소리치고는 화살 뭉치를 챙겨 마을 입구로 다급히 향했다.


루피너스는 주변을 휘둘러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벨은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머리를 쥐어뜯는 상한 손에서 절망을 엿볼 뿐이었다. 아벨이 어디든 가서 찾아보자는 말을 하려는 찰나에 루피너스가 갑자기 어디론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혼잡한 마을 입구 부근에 있는, 말구유가 놓인 나무 차양이었다. 말구유에는 아벨의 황갈색 수말이 묶여있었는데, 시끄러운 소음에 잔뜩 흥분해서 앞발을 들썩이고 있었다. 루피너스의 아들, 리코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망할! 도대체 어디 있는··· 리코!!!”


루피너스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터뜨렸다. 뒤이어 아낙네들도 충격에 휩싸인 비명을 질렀다. 루피너스는 미친 사람처럼 팔을 휘적이며 마을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페라가 그녀를 얼른 붙잡는 바람에 방책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루피너스와 아낙네들이 본 것은 마을 밖, 눈으로 덮인 황야를 있는 힘껏 달리는 자그마한 생명체, 리코였다.


아벨은 재빨리 고삐를 풀어 수말 위에 올라탔다. 수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히잉거리더니 마을 출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말에 밟히지 않으려 도망치듯 길을 터주었다. 아벨은 아무 저항 없이 마을을 빠져나갔다.


아벨은 고개를 거의 말 목에 대고 소리 지르며 속력을 높였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했다. 수말의 뜨거운 목에 닿은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댔고, 얼굴 가죽이 찬바람에 벗겨지는 듯했다. 말발굽 아래에 눈발이 흩날렸다.


베이포리아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더니 내리막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리코는 달리기를 멈추고 제자리에 우뚝 섰다. 아벨이 소리쳤다. 리코! 돌아와!


그러나 리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몸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뻣뻣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겁에 질린 것이 분명했다. 겁에 질려서 온몸이 굳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눈을 가린 검은 말들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벨은 욕을 하며 수말을 재촉했다.


그러나 지금껏 기쁨에 찬 듯이 질주하던 아벨의 수말이 갑자기 속력을 늦추더니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벨이 질책하며 옆구리를 발로 찼지만 소용없었다. 수말은 히잉거리며 울부짖더니 급기야 고개를 마구 흔들어 아벨을 눈 덮인 대지에 냅다 떨어뜨렸다. 그리고 저 멀리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벨은 수말의 엉덩이를 향해 욕설을 퍼부을 새도 없이 리코를 향해, 하얀 들판 위를 휩쓸며 내려오는 검은 물결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그러나 아벨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말이 겁 없는 최고의 명마였다 할지라도, 자신이 베이포리아 최고의 기수라 할지라도, 이미 늦었다는 것을.


리코가 뒤돌아 아벨을 바라보았다. 작고 가녀린 아이는 울고 있었다. 리코가 울부짖었다.


“엄마! 아빠!”


“리코!”


검은 물결은 어린 생명을 순식간에 짓밟았다.


작가의말


*환쟁이 - 화가를 낮잡아 부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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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화 - 숲의 눈 (2) 22.01.27 1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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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화 - 적 (5) 22.01.06 14 2 14쪽
» 5화 - 적 (4) 21.12.31 16 2 14쪽
4 4화 - 적 (3) 21.12.25 22 2 13쪽
3 3화 - 적 (2) 21.12.19 35 2 14쪽
2 2화 - 적 (1) 21.11.30 37 2 11쪽
1 1화 - 풍경화가 아벨 21.11.24 83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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