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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돌연변이 식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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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1.11.24 18:03
최근연재일 :
2022.02.10 14:42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64
추천수 :
17
글자수 :
59,834

작성
21.12.25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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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추천
2
글자
13쪽

4화 - 적 (3)

DUMMY

***

[크기변환][크기변환][크기변환][크기변환][크기변환][크기변환]사본 -IMG_1250.jpg

글라시아의 눈 덮인 풍경이 주는 감동은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머리부터 무릎 아래까지 모포를 뒤집어쓰고도 아벨은 지독한 추위에 덜덜 떨었다. 그림 그리기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9월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벨이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생각했다. 원래 글라시아가 베이포리아보다 춥던가? 젠장, 망할 지리교수가 잘만 가르쳤어도 수업 시간에 졸진 않았을 텐데!


고개를 부르르 흔들고는 콧김을 힘차게 쏟아내는 수말은 기분 좋은지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벨은 수말의 질긴 가죽을 보며 후회와 부끄러움에 코를 훌쩍였다. 눈 밟히는 소리가 부드러웠지만, 흔히 발라드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따뜻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음유시인들은 죄다 사기꾼들이야. 망할 사기꾼들···


“겁도 없이 입고 왔네. 추위를 못 느끼나 봐? 근데 얼굴이 왜 그래? 꼭 시체 같은데?”


루피너스가 비아냥거렸다.


“이렇게 살인적인 날씨는 난생 처음··· 잠깐, 발가락이 이상한데? 아무 느낌도 없어! 진짜로! 이거 괜찮은 거야?”


“나약하긴. 이제 다 왔어. 봐봐. 아이들이 벌써 반기잖아?”


루피너스의 말대로 빗자루로 쓸어낸 길과 굴뚝의 검은 연기가 도드라지는 새하얀 마을의 입구를 향해 아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키는 크지만 아직 얼굴에 젖살이 덜 빠진 아이부터,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코흘리개까지. 울타리가 눈에 뒤덮여 있는 건지 하얀 둔덕이 마을 주변을 두르고 있었다. 둔덕 사이에는 한 글라시아 청년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멀리 조그맣게 보이는 광장에는 나무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의자에 앉아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눈 속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도 열심히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며 아벨은 자신의 나약함을 실감했다. 추위에 떠는 이는 자신 말고 아무도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아이들도 건들지 말고.”


루피너스는 조용히 경고하고는 경비병에게 향했다.


루피너스와 경비병이 서로 조용히 속삭이는 동안, 아벨은 모포를 여미며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빌었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에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수말은 편자로 눈을 문지르고 고개를 흔들어 눈송이를 떨어뜨렸다.


마을의 아이들이 입구를 지나 마을 밖으로 나가려 하자 경비병이 얘길 나누다 말고 아이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혼자서는 아이들을 온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는데,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경비병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와서는 재빨리 아벨에게 다가온 것이다.


“와! 말이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이거 아저씨 말이에요? 아저씨가 데리고 왔어요?”


“뭐라고?”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천진난만한 아이를 굽어보며 아벨은 찬 공기를 훅 들이켰다.


“말 이름이 뭐예요?”


“글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헐! 바보 같아! 우리 아빠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아이가 침까지 튀기며 소리쳤다.


“리코! 이리 와!”


루피너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아이를 붙들었다.


“엄마! 엄마! 아빠가 검은색 말을 타고 올 거라고 했잖아? 저 아저씨는 아니지?”


리코라 불린 아이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루피너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란다, 아가. 이 말은 황갈색이고, 저 아저씨는 멋있지도 않잖니.”


루피너스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렴. 엄마가 사슴고기 구워줄게.”


“고기? 정말?”


“당연하지. 대신 얌전히 있어야 해! 친구들이랑 손잡고 갈까? 자! 다들 집으로 돌아가렴!”


루피너스의 매혹적인 제안에도 리코는 황갈색 수말이 여전히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홀린 듯한 눈빛이 수말에게 떨어질 줄 몰랐고, 마지못해 간다는 듯 발걸음을 질질 끌었다. 정작 다른 아이들은 죽은 사슴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잠시 후, 마을 안쪽에서 팔과 어깨에 붕대를 칭칭 감은 청년이 달려오더니 리코와 아이들을 이끌었다. 루피너스가 호로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참 이쁜데?”


아벨이 모포를 끌어 올려 감각이 무뎌진 귀까지 덮었다.


“이쁠 뿐만 아니라 너보다 더 강인하지.”


루피너스가 아벨의 팔을 붙들고 마을 안으로 이끌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경비병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지만 아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끈적한 눈빛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얘길 들어보니 애 아빠는 같이 지내지 않는 모양이던데.”


“네 알 바 아니야.”


루피너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맞아. 내가 너희 집안 사정 알아서 뭣하겠어? 그렇지만 조언은 해줄 수 있겠지.”


아벨이 조용히 말했다.


“영원히 거짓말을 할 순 없잖아? 그것도 네게 몹시 소중한 아이에게 말이야. 좋은 의미로 하는 거겠지만, 거짓말이 아이를 지켜주는 것은 아니야.”


“지금 네가 하는 말은 조언이 아니라 참견이야.”


“듣기 좋으면 조언, 듣기 싫으면 참견. 세상 모든 말이 그렇지 않겠어?”


“그래. 듣기 싫으니까 닥치라고.”


루피너스가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벨은 잠시 닥치고 있었다. 아주 잠시.


“나는 엄마 없이 아버지 밑에서 자랐어.”


아벨이 작은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아주 어려서 기억조차 없었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지. 정확히는 그런 줄 알았던 거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알려주셨거든. 병들어 죽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잖아? 아버지의 말을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그런데 진실이 아니었던 거야. 진실은 아버지가 엄마를 버렸다는 거지.

아버지 몰래 도박 빚을 지고 있었던데다가 외간 남자와 놀아났었거든. 아버지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셨어. 내가 정신적으로 불안한 엄마 손에서 자라느니 차라리 홀로 키우는 게 더 좋았을 거라면서. 내가 예술대학에 다닐 때 그 얘길 듣게 되었는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어.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셨고, 난 정말로 부족한 것 없이 잘 자랐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미워지더라. 그렇게나 사랑했던 아버지가. 이해하겠니?”


이번에는 루피너스가 말이 없었다. 찬 공기에 말라버린 입술을 핥을 뿐이었다.


“조언은 개뿔··· 망할 참견일 뿐이지. 이미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아벨이 거리를 내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광장으로. 짐과 말은 내게 맡겨.”


루피너스가 한숨과 함께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둡고, 음울했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 친구. 널 괴롭게 할 의도는 아니었어.”


아벨이 얼른 말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바람이 날카로워졌다.


“내 일은 여기까지야. 이제 혼자 가도록 해.”


짐가방과 말고삐를 챙긴 루피너스는 아벨을 두고 광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루피너스가 고개만 돌려 아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


“네 말이 맞아. 거짓은 거짓일 뿐이고, 조언은 조언일 뿐이지.”


글렘의 광장은 마당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작았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무 한 그루와 의자 대용으로 쓰이는 바위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빗질해서 흙바닥이 드러났지만, 그마저도 녹은 눈에 얼룩져서 깔끔하다는 인상은 주지 못했다. 한마디로 풍경화에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다.


아벨이 광장에 들어서자 지팡이를 짚은 노인과 젊은이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젊은이 중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팔을 다친 청년도 있었는데, 그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날이 추워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반가워요, 여러분. 저는 아벨 미르라 입니다. 베이포리아의 바리즈에서 왔죠. 거긴 꽤 따뜻한 곳인데··· 근데 춥지 않으세요?”


아벨은 차갑게 얼어붙은 뺨 근육을 움직여 능숙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냉소적인 분위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모두 얼어붙은 것 같았다.


노인이 말없이 손을 들어 아벨을 가리키고 나서야 젊은이들은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벨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


발아래도 쥐들이 속삭였다.


초라한 생명체들의 발소리에 아벨은 정신이 돌아왔다. 머리가 웅웅 울리는 것이 마치 누군가 머리통을 사원의 종으로 삼아 힘껏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아벨은 머리를 만져보려 했지만, 좀처럼 잘 되질 않았다. 팔이 얼어붙었나? 아니, 무언가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어깨와 팔꿈치, 허리, 허벅지, 그리고 발목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묶은 동아줄이 언 피부를 파고들었다. 아벨은 몸을 비틀며 몸부림쳤지만, 동아줄이 살갗을 야금야금 갉아 먹을 뿐이었다.


건조한 목구멍에 신음이 겨우 흘러나왔다.


차갑게 말라버린 공기 속에서 발끝을 살짝 덮는 희미한 빛줄기를 굽어보며, 아벨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떠올리려 애썼다. 글라시아인들이 무슨 짓을 한 것 같은데··· 눈앞이 번쩍였고··· 엄청 아팠던 것 같아. 얻어맞은 것처럼··· 특히 관자놀이가. 만져보지 않아도 관자놀이가 부어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놓은 곳은 텅 빈 창고처럼 보이는 나무집이었다. 벽을 세운 나무판자 틈새로 찬 바람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추위에 이가 절로 딱딱거렸다. 반쯤 가린 창으로 빛이 스며들었지만,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래서 횃불을 든 사내가 나타났을 때, 아벨은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일어났네?”


사내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망할 새끼. 촌장님! 베이포리아인이 깨어났습니다!”


저물어가는 볕과 함께 찬바람이 얼굴 가죽을 잡아채더니 열린 문으로 지팡이를 짚는 노인과 두 명의 청년이 들어왔다.


“불 좀 밝히거라. 눈이 침침해서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구나.”


노인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창고 곳곳에 등불들이 제 역할을 시작하자 구석에 쌓아둔 지푸라기와 나무상자 따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벨은 창고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널브러져 있었다. 노인이 털모자를 벗어 한 청년에게 건네는 사이에, 다른 청년이 얼른 의자를 가져와 아벨 앞에 두었다.


“반갑구먼, 베이포리아인. 나는 마리라네. 보다시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늙은이지.”


노인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영혼이 결여된 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죠.”


아벨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따뜻하게 덥힌 포도주와 고소한 빵까지 바라지도 않습니다. 젠장 맞게 춥네··· 원래 이곳은 손님맞이를 이따위로 합니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아니면 잔꾀를 부리는 중이거나. 확실히 말하겠네. 잔꾀 따위 부리지 말게. 그리고 묻는 말에 명확하게, 어떠한 거짓도 없이 대답하게. 조금이라도 수상한 부분을 발견한다면··· 고통을 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마리가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무슨 전쟁포로도 아니고···”


“초대받은 손님도 아니지.”


마리는 흡족한 듯 웃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결코 되돌아오지 않지. 마치 끝없이 흐르는 즈타르 강물처럼 말이야. 더는 시간을 지체하지 말자고. 준비하자꾸나, 아렉시스.”


아렉시스라 불린 거구의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아벨을 억지로 일으켰다. 동아줄에 짓눌린 상처가 뜨겁게 요동쳤다. 아벨은 고통에 코 밑까지 신음이 차올랐지만, 아렉시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아벨을 문 쪽으로 끌더니 웃옷을 억지로 찢어버렸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벨을 눈 바닥에 처박았다.


날카로운 눈 알갱이들이 아벨의 가슴과 목, 그리고 얼굴을 할퀴었다.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고, 얼굴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져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벨은 절망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여길 온 이유가 뭐야! 당장 말해! 우리를 염탐하러 왔나?!”


아렉시스가 아벨의 허리를 짓밟으며 소리쳤다.


“아,아니야! 그게 무슨-”


아렉시스는 아벨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다시 눈 속에 처박았다. 아벨은 차가운 눈이 얼굴에 뚫린 모든 구멍에 빈틈없이 침투하는 것을 느꼈다. 끔찍한 추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렉시스! 다시 데려오거라.”


그는 노인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아벨은 축 늘어진 채 힘없이 노인 앞으로 끌려갔다. 온몸의 관절이 부서질 듯 불안하게 떨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껄떡이며 가슴에 찬 숨을 뱉어내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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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화 - 적 (4) 21.12.31 15 2 14쪽
» 4화 - 적 (3) 21.12.25 22 2 13쪽
3 3화 - 적 (2) 21.12.19 35 2 14쪽
2 2화 - 적 (1) 21.11.30 37 2 11쪽
1 1화 - 풍경화가 아벨 21.11.24 83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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