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돌연변이 식물도감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1.11.24 18:03
최근연재일 :
2022.02.10 14:42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68
추천수 :
17
글자수 :
59,834

작성
21.11.30 19:28
조회
37
추천
2
글자
11쪽

2화 - 적 (1)

DUMMY

***

2화 여관 5.png

복도는 볕이 들지 않아 어두웠다.


유행이 한참 지난 탁상과 하얀 자국이 남은 벽이 눈에 거슬렸다. 건조한 나무 냄새를 맡으며 아벨은 벽에 걸만한 그림을 하나 그려줄까 싶었지만,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스니퍼와 아벨은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어설프게 정돈된 탁자는 얼룩덜룩한 식탁보가 덮혀있었고, 말라비틀어진 꽃이 더러운 병에 꽂혀있었다.


“이제 말해보게. 편지 한 통 없이 찾아온 이유가 뭔가? 그림이라도 자랑하고 싶어서 왔나? 아니면 돈 문제인가?”


스니퍼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았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 그는 옛날부터 등받이 의자를 선호하지 않았다. 습관은 무슨, 되지도 않는 신념 때문이지. 아벨은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날 뭐로 보는 거야?”


아벨은 불만스러운 나머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네게 보여줄 그림도 있고, 돈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아, 알겠네. 글라시아인으로 오해를 받아서 쫓기는 신세인가 보군. 아니면 그림을 판답시고 사기를 쳐서 고소를 당했거나.”


“날 뭐로 보는 거야? 나는 사명감이 투철한 화가라고! 내가 왜 그림으로 사기를 쳐?”


“자네의 사명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한데.”


말과 다르게 스니퍼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친구, 내가 세상 곳곳을 여행하며 많은 일을 겪고, 보고, 배웠지만, 이번만큼 충격적인 일은 없었어. 우리 인류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일지도 몰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아벨은 평소와 다르게 차분하고 진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스니퍼는 그저 웃긴 농담이라고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트릴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게 그리웠는지도 모르겠군. 자네의 그 호들갑 말일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호들갑이니, 뭐니 하면서 날 이상한 놈으로 만들어서 어쩔 셈이야? 어차피 우리뿐이잖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야. 내 말에 집중 좀 해봐.”


“술이나 한잔하겠나?”


어디서 난 건지 스니퍼가 탁자 아래서 배가 불룩한 술 한 병을 꺼냈다.



“사람 말 좀 들어, 인마!”


“그래서 안 마실 거야?”


“이 친구가 진짜···”


아벨이 탁자 위에 가방을 올려두고는 상체를 적극적으로 들이밀며 소리쳤다.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잔이나 가져와!”


“잔이 왜 필요하지?”


스니퍼가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우리 사이에 챙겨야 할 품위가 있나? 또 급할 것은 뭐가 있나? 뒤를 돌아보게. 자네를 뒤쫓는 건 아무것도 없어. 뭐, 죽음이 우릴 쫓고 있긴 하겠군. 하지만 그것도 수십 년 뒤에나 찾아올 손님이지 않나? 자네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조금만 뒤로 미루도록 하세. 무슨 세금징수원도 아니고, 간만에 보는 벗과 즐기기도 전에 진지한 얘길 꺼내는 것이 말이 되나? 그러니 진정 좀 하고, 대신 우리 옛날이야기나 좀 하지. 음··· 우리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떤가?”



아벨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친구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친구의 입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스니퍼.”



---



아벨은 흘러넘치는 맥주 거품이 아까워 나무잔을 혀로 핥았다가 뒤늦게 잘못된 선택이란 것을 깨달았다. 잔을 돼지우리에다가 보관하는지, 건조하고 불쾌한 흙 알갱이가 입 안 곳곳에 씹힌 것이다.


그는 바닥에 침을 뱉고는 나직이 욕을 했다.


여관은 조용했다.


농부가 벽난로 앞에 앉아 감자 수프를 떠먹고 있었고, 녹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아기를 안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멜로디가 간간이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자장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떠넘기듯 맥주잔을 건넨 주인장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아벨을 곁눈질했다.


아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한쪽 다리를 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루함을 덜어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눌만한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양이와 대화를 나눌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검은 고양이는 신발의 흙을 털 때 쓰는 발판 위에 앉아 앞발을 핥고 있었다.


대화 상대를 찾길 포기한 아벨은 멍하니 맛없는 맥주나 마시는 대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고민하기로 했다.


바리즈를 떠나고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벨은 베이포리아의 전국 곳곳에 발 도장을 찍었다. 도시인이라면 아벨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좋지 않은 소문도 떠돌았지만, 아벨은 이 역시도 긍정적으로 여겼다). 아마도 국왕 폐하보다 더 많은 곳을 둘러보았을 터였다.


그렇게 아벨의 소중한, 뛰어난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베이포리아 여행 가방에는 충분히 많은 ‘풍경화’가 쌓일 수 있었다. 바리즈로 돌아갈 적절한 시기였다.


하지만 아벨은 욕심이 많았다.


여관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나더니 검은 고양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거칠게 문을 밀고 들어온 남자는 흑회색 망토에 팔뚝까지 덮는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었는지 가죽장갑을 힘겹게 벗은 그는 발판 위에 서서 잠시 여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구석진 자리로 찾아갔다. 남자는 등받이 의자를 옆으로 돌려세우고는 망토를 벗어 의자에 깔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식충이가 또 한 명 늘었군···”


여관 주인이 남자의 복장을 흘겨보고는 분노와 체념 섞인 어조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배고파 죽겠군. 식사를 주시오. 맥주도 한 잔.”


남자가 토큰 하나를 여관 주인에게 건넸다.


“주무시고 가십니까?”


“그렇소. 남들과 똑같이 주시오.”


곧 감자 수프와 맥주가 나오고, 여관 주인이 방을 정리하러 자리를 비웠다.


아벨은 맥주를 홀짝이며 남자를 찬찬히 살폈다. 각진 턱에 수염이 듬성듬성 자란 남자의 외투에는 조국 베이포리아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바람에 오랫동안 맞았는지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뒤로 잔뜩 쏠려있었다.


남자는 손을 바들바들 떨렸지만, 겁에 질렸거나 어딘가 아파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파발꾼이신가요?”


아벨이 아는 척했다.


“혼자 오신 것을 보니 파발꾼이신가 보네요. 먼 길을 급하게 오신 모양입니다. 손이 그렇게 굳으신 것을 보니 말입니다. 갈 길이 급하신가 봐요.”


“당신 알 바 아니오.”


남자가 차갑게 대답했다.



“오는 길이 고되었을 텐데, 같이 여독을 풀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벨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국가에서 지원을 받아 생활하고,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우린 동료나 마찬가지죠.”


“당신, 유학생이오?”


남자가 아벨을 쏘아보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유학생은 외국인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전 외국인이 아니죠. 피부색이 이래도 베이포리아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부모 중 한 명이 외국인이겠군.”


“파발꾼은 모두 똑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가 보네요. 틀렸어요. 제 부모님도 베이포리아인이죠.”


아벨이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지만, 남자는 응하지 않았다.



“당신도 그리 똑똑한 것 같진 않소. 젠장맞을. 더럽게 맛없군.”


남자가 맥주를 홀짝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제가 똑똑하지 않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이유가 뭡니까?”


“나는 파발꾼이 아니거든. 수색부대원이지.”


남자는 맥주잔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그럼 다른 부대원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겁니까? 설마 탈영이라도 한 것은-”


“내가 왜 탈영을 하겠소?”


“점심 식사가 더럽게 맛없나 보죠. 이 맥주처럼.”


아벨이 나무잔을 살짝 들어 보이고는 남자처럼 구석에 밀어 치웠다.



“군대 음식이 맛없긴 하지.”


선발대원이 바닥에 침을 퉤 뱉곤 수프를 떠먹었다.


“하지만 탈영 얘기는 농담으로라도 꺼내지 마시오. 탈영을 농담 삼아 꺼낼 시기가 아니니.”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에도 탈영하는 이가 있나 보군요. 농담으로도 못할 정도로.”


아벨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가방에서 깨끗한 종이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 그는 가볍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탈영병을 잡아다 교수형을 시켰소. 그것도 세 명이나. 못 잡은 탈영병은 그보다 더 많지.”


“왜 갑자기 탈영병이 많아진 거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어난 건가?”


아벨이 창밖으로 노랗게 물든 거리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여긴 국경선 근방이지 않습니까? 이곳이 평화로우면 베이포리아 전국이 평화로운 것이지 않겠어요?”



“자넨 정말 멍청한가 보군.”


남자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아벨을 쳐다보았다.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한 법이지. 그리고 현재 바리즈는 큰 혼란을 겪고 있소.”



“혼란이요? 무슨 혼란을 말하는 거죠?”


아벨은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건 알아서 알아보시오.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든가.”


남자는 수프 그릇을 맥주잔 옆으로 치웠다. 아무래도 입맛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훌륭한 조언이십니다.”


아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이곳에 있는 거죠? 수색부대원이라면 수도에서 벌어졌다는 큰 혼란을 잠재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마치 흥분한 용을 잠재우듯이 말이에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소. 명령을 신속히 처리하는 것이 군인의 유일한 사명이니까.”


“정말 중요한 명령인가 보군요. 예를 들면 정보 전달이라든지. 정보 전달은 파발꾼의 주요한 역할 아니겠습니까?”


“······”


남자는 말이 없었다.



“이건 선물입니다.”


아벨이 남자에게 종이를 펼쳐 보였다. 조촐한 선술집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외로운 군인의 옆모습이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겨두고 있죠. 선물하는 당신의 이름을 써야 하거든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오.”


“그것참··· 철학적인 대답이네요. 자! 여기,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입니다.”


아벨은 그림 모서리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글귀를 새겨넣곤 긴 탁자를 통해 남자에게 그림을 건넸다.



“음··· 화가는 맞나 보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림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그림을 돌돌 말아 외투 안쪽 주머니에 넣고는 아벨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빛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하고 딱딱했다.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작은 보상을 해야겠지. 혹시 국경을 넘을 생각이오?”


“네. 그럴 겁니다.”


“그럼 제 얘기가 특히 도움이 될 거요.”


남자가 망토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국경을 넘지 마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돌연변이 식물 도감의 소설 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심문수입니다.

돌연변이 식물 도감은 판타지 세계관 <블루뮤테이션(Bloomutation)>을 기반으로 한 소설 겸 그림책입니다.

 그림은 기획자 겸 그림작가인 '규수' 님께서 힘써주고 계십니다.

 소설뿐 아니라 이 거대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게임, 아카이브집 등의 작품도 창작 중이오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돌연변이 식물도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0 10화 - 숲의 눈 (3) 22.02.10 17 2 13쪽
9 9화 - 숲의 눈 (2) 22.01.27 14 1 13쪽
8 8화 - 숲의 눈 (1) 22.01.20 12 1 15쪽
7 7화 - 적 (6) 22.01.13 18 1 13쪽
6 6화 - 적 (5) 22.01.06 14 2 14쪽
5 5화 - 적 (4) 21.12.31 16 2 14쪽
4 4화 - 적 (3) 21.12.25 22 2 13쪽
3 3화 - 적 (2) 21.12.19 35 2 14쪽
» 2화 - 적 (1) 21.11.30 38 2 11쪽
1 1화 - 풍경화가 아벨 21.11.24 83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