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이 아니었네-8-
'근데 네 상태도 다 보이는거야? 가릴 수 없어?'
-서포터 요정일때도 보였잖아. 상태 보면 알겠지만 내 생각은 읽을 수 없어. 그냥 무슨 행동을 하는지는 보일테지만.
정훈은 이제까지 아리를 통찰력으로 살폈을 때를 떠올렸다. '공중에서 파닥거리고 있습니다.' 혹은 '당신의 머리를 쥐어 뜯고 있습니다.' 같은 메시지들. 별 생각 없이 넘겼는데 A.I라서 그런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부분이었다. 3차 전직 클래스를 획득한 플레이어가 늘어나면 조금 문제가 될 지도 모르지만 아리가 알아서 해결하리라는 생각으로 넘겼다.
'이거 어떻게 하지? 솔직히 말해야 하나?'
-죽이려면 죽일 수 있어. 왠지 모르겠지만 욕쟁이한테는 전투력이 상승하는 느낌이야. 왠지 화도 나는걸.
정훈은 플라누스의 펜던트에 있던 설명을 떠올렸다. '다만, 플라누스가 이 펜던트를 보면 발톱이 뽑히는 아픔이 떠올라 미쳐 날뛸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라는 문구. 다행히 플라누스의 알에서 나온 용인에 들어간 아리가 미쳐날뛰거나 하는 상황은 오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육체가 반응한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강림의 말에 한참을 대답하지 않고 아리와 대화하고 있으니 이강림이 정훈의 눈 앞에 손바닥을 펴 흔들어 보였다.
"뭐야? 대답은 왜 안하고 표정은 왜 그래?"
"어··· 얘 아리 맞아. 내 서포터 요정."
아리가 맞냐는 질문에만 대답하고 왜 정훈의 세부사항은 보이지 않느냐는 질문은 의식적으로 피했다. 긴장한 정훈과 달리 이강림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문제는 통찰력으로 이강림의 마음을 이제 읽을 수 없다는 거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의심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대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통찰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쉽게 읽어왔는데 그게 보이지 않으니 허둥지둥할 수 밖에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 근데 그게 가능해?"
이강림의 왼쪽 눈꼬리가 올라갔다. 왜 아리의 정보는 보이는데 네 정보는 보이지 않냐는 질문은 지금 당장은 아리에게 관심이 쏠렸는지 어영부영 넘어간 듯 싶었다. 정훈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아리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야마 포넥스가 이 몸을 사용하면 위험할 것 같아서 제가 들어갔어요. 주인님이 그렇게 하길 바랬거든요. 요정은 기본적으로 정신 에너지를 사용하니까요. 물론 야마 포넥스처럼 사악한 기술은 아니니까 안심 하세요. 살아있는 존재의 몸을 뺏을 수는 없고 할 수 있더라도 그러지 않을거에요."
-죽일거면 말해. 화염저항 펜던트가 있어도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이강림은 살짝 미간에 주름이 갔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겉보기에는 그렇지만 속으로는 어떤지 모르니 정훈으로서는 통찰력을 사용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말하는 것과 정훈에게 전달하는 의사가 다른 아리에게 일단 지켜보자는 의사를 내비치고는 혹시나 싶어 머리카락 속을 더듬거려 보았다. 움직이지 않고 축 늘어져 있는 작은 아리의 몸이 만져졌다. 아리의 몸이나 저 용인의 몸은 일종의 하드웨어고 아리나 야마 포넥스는 소프트웨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훈이 무슨 의문을 품었는지 알아챈 아리가 '단 한번도 생명체로서의 역할을 한 적 없는 빈 깡통같은 육체'로 전이하는게 가능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물론 야마 포넥스의 경우는 영혼 자체를 옮기는 것이라서 다르지만 자신 같은 경우에는 데이터를 옮겨서 신체에 자신을 인스톨 하는 방식이기에 다른 프로그램(인격 혹은 본능)이 존재하거나 존재의 흔적이 있다면 충돌이 일어나서 인스톨이 불가능하다고. 그 말인즉슨 저 용인은 태어날때부터 저 모습 그대로 태어났고 원래 죽어 있었다는 것. 아리는 이 알은 드래곤이 낳은게 아니라 마법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개체라고 설명해주었다. 정훈이야 그런 설명들을 들었으니 조금이라도 감이 잡히지만(사실 복잡한 원리 자체를 정확하게 이해 할 수는 없었다) 이강림은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뭐··· 하긴 비현실적인 일 투성이니까. 그건 그렇고···."
"아 맞다. 급한 일이 있어."
정훈이 무언가 말하려 하는 이강림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박윤구가 부하를 대기시켜 놓았고 해가 지기 전까지 호출이 없으면 하이덴으로 돌아가 피스메이커를 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강림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해가 지기까지는 대략 1시간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그새끼 진짜 질척거리네. 어딨는지는 알아?"
"여기서 하이덴의 중간쯤에 있다고는 했는데··· 상세한 위치는 몰라. 그것보다 MP포션 한가득 들고 클로킹 하고 있다고 하더라."
GM의 눈으로 파악해 보니 조금 변동은 있었지만 아직 그 상태였다. 어디있는지 정확히 안다는 것도 수상할 수 있다. 최근에 통찰력을 사용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해왔지만 막상 일이 닥치니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기왕 받은 능력 한번 써볼까?"
이강림이 슬쩍 웃더니 부지불식간에 불에 타서 재가 되어 사라진 박윤구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잘려나간 팔도 그대로 인채로. 입이 떡하니 벌어진 정훈에게 이강림이, 아니 박윤구의 모습을 한 이강림이 씨익 웃었다.
"뭐 스킬의 일종인것 같은데 좀 이상해. '인간 복사기' 라나."
인간 복사기 스킬은 자신이 아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이며 심지어는 그 사람의 스킬도 사용 가능하다고 말해주었다. 심지어 통찰력으로 보는 이름과 레벨도 '박윤구, LV80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강림에게 통찰력이 생겼다는 건 변하지 않는지 다른 상태는 볼 수 없었다. 이강림이 아리에게 엔센다르를 내놓으라고 손짓했다.
"그거 줘봐. 그거 들고 지나가면 확실히 믿겠지. 야, 넌 일루와봐. 내가 잡은것 처럼 해야지."
이강림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지의 아랫단을 찢어 정훈의 손을 묶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부하들은 다 죽고 자빠졌는데 둘이 어깨동무하고 쫄래쫄래 가면 퍽이나 안 수상하겠다. 게다가 쟤까지 데리고."
정훈은 아리를 바라보았다. 178cm인 자신과 비교해도 별 차이 없어보이는, 쭉쭉 뻗은 기럭지에 티끌하나 없어 보이는데다 만지면 꿀이라도 묻어나올 듯한 피부.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완벽에 가까운 정도로 또렷하고 얼굴이든 신체든 비율이 완벽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 듯 했다.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함이 너무 넘쳐서 아름답다는 말을 꼭 붙여야 할것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강림에게 말했다.
"엄청난 미모긴 하지···."
"그게 아니잖아. 길드원 9명을 데리고 널 따라 갔던 길마가 처음보는 사람과 너와 함께 셋이서 나타난다. 나같으면 경계할것 같은데."
굳이 이름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피스메이커 길드에는 꽤나 미녀들이 많았고 그 사이에서 생활하다 보니 미인에 대한 면역이 꽤나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의 지금 모습은 정훈이 차마 주시하지 못할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괜시리 얼굴이 살짝 빨개진 정훈은 이강림이 말한 것이 미녀가 아니라 처음보는 사람이라서 경계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임을 깨닫고는 괜시리 헛기침을 하고는 이강림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아 그리고 아리 넌 좀 멀리서 와."
"옷이라도 좀··· 줘야하지 않을까?"
아리는 골반 아래까지 커버되는 레더아머를 착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슬아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훈은 괜시리 귀를 몇번 만지고는 스케일아머를 벗고 그 안에 입고 있던 티셔츠를 아리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이강림에게도 눈치를 줘서 갑옷을 벗고 티셔츠를 벗어 주게 했다.
"대충 묶어서라도 가려. 좀··· 냄새 날지도 모르지만."
아리는 정훈과 이강림의 티셔츠를 받아들어 찢은 다음 상하체의 중요부위 위에다 묶었다. 왠지 비키니 같은 모습이 되었지만 아리나 이강림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훈은 괜히 혼자만 신경쓰나 싶어 멋쩍게 턱을 좌우로 움직여 입술을 몇번 마찰시키고는 이강림과 함께 하이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0분 가량 왔던 길을 따라 걸었다. 정훈의 손이 묶여있었지만 박윤구의 힘을 사용하는 이강림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가 가능했다. 정훈이 GM의 눈을 사용해서 위치를 지속적으로 파악하며 이동했지만 너구리척살단의 어쌔신, '포포' 김연준은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 놈, 여기 있어.'
김연준의 위치가 가까워졌지만 이강림에게 여기에 있다 라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김연준은 클로킹을 사용해서 숨어 있어 시야에 보이지 않는데 정확하게 위치를 말해준다면 수상하게 여길거라는 생각이었다. 아리는 시야 밖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형님, 다른 애들은요? 어? 그 사람, 피스메이커 길마 아닙니까?"
다행히 김연준은 딱히 경계심을 품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20미터 가량 떨어진 곳의 나무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강림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쪽 방향에다 대고 말했다.
"이 새끼 잡느라고 다 죽었다. 같이 있던 한 놈은 죽였고 이 놈은 생포했지."
"그렇습니까? 아 그 어둠인가 하는 새끼 띠꺼웠는데 잘 쳐죽이셨습니다. 맨날 센척이나 하는거 꼴사나웠잖습니까. 그나저나 이 놈은 왜 잡아오신 거에요? 그냥 죽여버리지."
김연준이 나무에서 뛰어내려 정훈과 이강림에게 다가왔다. 이강림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윤구의 넙적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호오··· 연준아 가까이 와봐."
이름을 말한적은 없는데 놈의 이름이 김연준이라는 것은 통찰력으로 이미 파악한 듯 싶었다. 냉큼 대답하고 가까이 다가온 김연준을 보며 이강림이 씨익 웃었다.
"왜 안죽이고 데리고 온줄 아냐?"
"저야 모르죠. 형님 뜻인데요 뭐."
"그야 난 니 형님이 아니니까. 맨날 센척하는 어둠인가 하는 띠꺼운새끼거든."
"엥···?"
김연준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엔센다르가 빠르게 날아들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왔던 김연준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눈을 부릅뜬 상태 그대로의 머리통이 바닥에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렀고 절단된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리고 기우뚱 하며 중심을 잃은 김연준의 몸통이 그대로 풀숲에 풀썩 하며 쓰러졌다.
"···야."
이강림이 스킬을 풀었는지 다시 본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차가운 목소리를 내고는 정훈을 돌아보았다. 엔센다르를 바닥에 던져버린 이강림이 물끄러미 정훈을 바라보았다. 정훈은 올게 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플레이어들을 보면 정보가 보인다는걸 김연준을 통해 확인했을텐데 자신만 보이지 않으면 당연히 의심을 가질테니까.
"왜?"
"쟤 능력치랑 생각하는 것 까지 보이더라. 근데 왜 넌 아무것도 안보이는거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훈이 묶인 손을 빼내려고 손을 꼼지락대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나도··· 그 스페셜 어빌리티란걸 얻었으니까."
"시스템 메시지에 뜨더라. 3차 전직이 가능한 레벨에 도달하면 통찰력과 함께 스페셜 어빌리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정훈은 마음이 갑자기 평안해지는걸 느꼈다. 마음을 굳히자 당황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오히려 편한 기분이었다. 아리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알아서 해. 난 아무 말 안할테니까.
이강림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지금 당장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리가 의외로 얌전한 반응을 보였다. 정훈은 이강림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실은 내가···."
"니가 뭐? GM너구리라도 되냐?"
계속 말 할듯 안할 듯 하는 정훈에게 조금 짜증이 났는지 이강림이 정훈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이강림을 빤히 바라보던 정훈이 5초 정도 지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GM너구리야."
- 작가의말
드디어 선작이 1000을 넘어섰네요.
3주하고도 3일만의 쾌거!!!!!!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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