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4-
"잠깐."
아리가 정훈과 르라쥐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아리의 날카로운 눈빛에 살짝 주눅든 정훈은 주춤 하며 뒤로 물러섰다.
"뭔가? 플라누스의 여식. 그러고보니 플라누스는 크리그나쟈의 군대에 속해 있었지. 너도 놈들의 일부인가?"
르라쥐도 이제까지 보여주지 않던 흉흉한 눈빛으로 아리를 쏘아보았다.
"아, 아리가 침략자의 부하?"
"그럴리가 없잖아 멍청아!"
아리는 어이없는 정훈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 말하고는 르라쥐를 노려보았다.
"그 말인즉슨, 당신만 없다면 크리그나쟈 라는 자의 군대가 이 곳으로 오지 않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글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어. 어떻게 대처할지 말이야."
"그 말씀은,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는데 당신들은 무책임하게 도망칠 수도 있다는 말으로 생각해도 되는건가요?"
정훈은 아리의 그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르라쥐를 바라보았다.
정훈으로서는 생각도 못 했던 말이다.
크리그나쟈가 침략자라면, 르라쥐가 자신들의 편에 서서 싸워줄거라는 망상이라도 한 듯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르라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마음 같아서는 다 쓸어버리고 싶지만."
잠시 말을 멈춘 르라쥐가 정훈과 아리를 번갈아 한번씩 돌아보았다.
"그쪽은 머릿수가 너무 많거든."
"저기, 르라쥐씨."
정훈이 조심스레 입을 열자 르라쥐와 아리가 동시에 정훈을 바라보았다.
"혹시, 크리그나쟈라는 놈이랑 일대일로 싸우면 르라쥐씨가 지나요?"
"···음."
르라쥐는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미간을 찌푸리며 정훈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 놈은 혼자서는 안 움직이거든. 그런데 뭐, 일대일이라면··· 쳇. 원래는 내가 이겼는데 그 놈이 워낙 이것저것 몸에 좋은걸 많이 먹어서. 지금은 뭐, 블라인이랑 둘이서 싸운다면 또 모르지만 말이야."
"그럼 우리랑 같이 싸우면 안되나요? 나머지는 우리가 맡고, 대장만 둘이서 맡아주면 되잖아요."
"풉."
르라쥐가 정훈의 말을 듣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왜 웃냐는 듯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보는 정훈에게,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명해 주었다.
"인간들, 재밌는 친구들이긴 한데 말이야. 인간들 중엔 네가 제일 강하거나 강자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뭐··· 아마도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정훈을 보고 르라쥐가 말을 이어갔다.
"넌 만약에 모기가 널 물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거지?"
"뭐, 죽여야죠."
"그렇지? 모기가 아무리 많아도 널 죽이지는 못할거야. 진짜 감당 안될 정도로 많다면야 혹시나, 정말 혹시나 모르겠지만."
잠시 르라쥐를 바라보던 정훈이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 말은, 인간들이 모기라는 말인가요?"
"뭐, 아직 모기도 안됐지. 모기 유충 정도면 모를까."
"진짜 너무하시네."
"거짓말 하는 것 보다는 낫지 않나? 자, 인간들이여 나를 따르라! 이래놓고 너희를 미끼로 던져놓고 우린 유유히 도망가버리는거지. 그렇게 하지 않는 것만해도 난 굉장히 양심적인 마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닌가?"
르라쥐는 슬쩍 웃었지만, 정훈은 대답할 건덕지를 찾지 못해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아리가 끼어들었다.
"그럼 인간들이 당신의 기준을 충족시킬 만큼 강해진다면 함께 싸워줄건가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놈들이 들이닥칠텐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낼 수 있는가? 모기라도 되서 수백 수천마리가 달라붙을 정도라도 만들 수 있냐는 질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너희 인간은 지금 상태로는 모기가 아니라 구더기나 애벌레다. 전혀 공격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지."
르라쥐의 눈빛에 조금 짜증이 담겨 있었다.
사실 르라쥐로서는 인간들이 강했더라면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아니, 인간들이 강해서 함께 싸울 수 있다면 최선일지도 몰랐다.
언제까지 쫓겨다녀야 할지 르라쥐로서도 기약없는 싸움이었고, 게다가 크리그나쟈는 점점 더 강해져만 가고 있었다.
계속 도망다니다 보면 도망다니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놈이 강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신이 말하는 그 모기의 수준이 어느 정도죠?"
"음···."
르라쥐는 끈적한 눈빛으로 정훈의 위아래를 훑었다.
정훈은 불쾌한 시선에 항의하려 했지만, 르라쥐는 어깨를 으쓱 하고 입을 열었다.
"뭐, 너희 인간들이 최소한 얘 정도의 수준에 이른다면 혹시나 모르지. 물론 그 기준은 가장 약한 인간이 이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최상위권은 글쎄, 지금 얘 수준의 두세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데."
"너무 무리한 요구 같습니다."
"아니, 만약 그 정도 수준을 달성한다면 우리랑 같이 싸워줄 건가요?"
정훈의 말을 가로막고 나선 아리가 진지하게 물었다.
현재 이 대화는 제네럴매니져들에게 모두 전달되고 있는 상황.
만약 이 승부가 가능성이 충분하다면 걸어 볼 만한 싸움이다.
게다가 침략자들이 워랜드에 온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프로젝트 대상자인 플레이어들을 모두 지구로 피난시켜야만 했다.
사람들이 능력을 가진 채로 지구로 귀환시켰다가 다시 다른 곳을 물색해서 보낸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상황.
제네럴매니져들은 아리에게 저 마족과 손을 잡고 싸워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해 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정도 수준에 인간들이 모두 도달한다면 승산은 얼마나 되나요?"
아리는 곧장 다른 질문을 던졌다.
르라쥐는 묘한 표정을 짓고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글쎄. 내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은다면···."
"르라쥐씨. 친구도 있나요?"
"물론이지. 조금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나보다는 약하지만 한 다섯명 정도는 되거든. 어쨌거나, 만약 내 친구들이 모두 모이고 내가 요구한 수준을 모두 달성한다면···."
르라쥐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정훈은 침을 꼴깍 삼키며 르라쥐의 대답을 기다리는 한편, 아리에게 속으로 질문했다.
'이 사람 믿어도 되는거야?'
-글쎄. 모든 가능성을 염두해 둬야지.
아리도 조금 초조해 보였다. 불확실한 대답으로 아리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파악할 때 쯤 르라쥐의 입이 열렸다.
"음. 반 정도는 되려나 모르겠네. 반올림 하면 말이야."
***
"근데 진짜, 저 악마족을 믿을 수 있는거야? 만약에 성공한다 치더라도···."
"만약에 성공한다면, 저 자도 같이 처리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해."
르라쥐가 조금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고, 정훈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아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도 좀··· 그래도 도와준 사람을 배신하는건 좀 그렇지 않아?"
"위협이 될지 안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지쳐 있을 저 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해야 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기는 해. 혹시라도 크리그나쟈라는 최대의 적을 처치한 후에는 저 자가 인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으음. 그것도 그렇네."
고개를 끄덕이며 곧 수긍했지만, 정훈은 아리와 르라쥐의 대화 도중 떠올랐던 의문 사항을 떠올렸다.
"그냥 지구로 잠시 피해있다가 좀 정리되면 다시 오면 안돼?"
"······."
아리는 대답 없이 정훈을 바라볼 뿐, 이렇다 할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정훈의 머릿속을 확 스쳐나가는 생각 하나.
"혹시···."
정훈은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아리를 바라보았다.
"한번 시도해보고, 실패하면 다른 사람들을 뽑아서 다시 시작하겠다. 이런거야? 어차피 우리가 시작한 것도 두세달 밖에 안되었으니까 다시 시작해도 따라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런 생각이야?"
- 작가의말
사죄의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하겠습니다..ㅠ.ㅠ
다음주에 문피아 사무실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김해에 거주중인지라 전날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하루 숙박한 다음 만나고 올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다음주는 연재가 힘들지도..^^;;
가능하다면 금요일에 한편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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