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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영태권

변신오징어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로맨스

정창영태권
작품등록일 :
2023.01.31 23:13
최근연재일 :
2023.02.11 23:41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45
추천수 :
4
글자수 :
44,052

작성
23.02.09 23:53
조회
18
추천
1
글자
10쪽

살인 마려워

DUMMY

그런데 예측하지 못했던 반응이 나왔다.


“아니 꼭... 지금 가야 될 필요는 없는데에...”


현지수가 비음을 섞으며 말꼬리를 흔들었다.


“응?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늦었는데 집에 들어가야지.”


내내 수줍어하고, 일없이도 사과하고, 말을 더듬고 손을 떨던 정영융이었다. 그런 정영유이 갑자기 단호하게 정색을 하자, 현지수는 숨을 쉬는 걸 잠깐 잊은 사람처럼 멈춰 서서 정영융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문학과 예술의 천재들이 어떤 식으로 난잡한 사생활들을 꾸려 왔는지를 익히 알고 있던 현지수였다. 정영융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던 건데, 정영융은 예상과는 정반대로 필사적(?)으로 철벽을 치기 시작했다.


안 된다 딱 잘라 말하는 모습이 섭섭하고 서운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미덥고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영융과 눈을 마주할 때마다 몸 이곳저곳이 저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정영융이 딱히 개념이 있거나 유혹에 강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곧 살인을 해야 하는 판이다 보니 어떻게든 미리 주변정리를 하려 했던 것일 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어? 이 부분 이 구절을 꿈에서 본 것 같은데? 데자뷰인가.


세상경험이 전혀 없는 아가씨들이었다. 원규진에게 강간과 학폭 경력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정영융과 주찬범이 강력범죄를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아차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정영융과 주찬범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사실 그 시점에서는, 나이라와 친구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내쫓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만일 이 소설 장르가 무협이었다면, 정영융은 진작 갈!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공술을 써서 몸을 뽑아 올리고 불산 무영각으로 테이블을 발로 차 허공에 띄워놓은 다음 허리춤의 칼을 뽑아 휘둘렀을 것이다.


물렀거라 이 사악한 마귀들아!


사실 그 순간 정영융과 주찬범의 뇌리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으으아악 이런 시발! 날 좀 내버려둬! 저 개새끼 찔러 죽이고 내 인생 정리 좀 하자! 나 살인 좀 하게 해달라고 제발!!!


그런 둘의 마음도 모른 채, 술 취한 아가씨들은 정영융의 말은 듣지도 않고 여기저기서 남자들 말을 자르며 좋을 대로 삐약거렸다. 유치원 병아리들처럼 통제가 불가능한 집단이 되어있었다.


혹시 원규진이 깨어나기라도 할까봐 일부러 조심조심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 있었던 정영융과 주찬범으로서는 정말 환장할 일이었다.


그뿐인가. 원규진이 취중에 펜션 잡아놨다며 같이 가서 놀자고 횡설수설하던 걸 놓치지 않았던 예쁜 병아리들은 나름 믿는 구석까지 있었다?


“나 다리 아파. 하루 종일 걷기만 했다니까?”

“잠깐 앉아서 쉬면 좋아질 것 같은데.”

“숙소도 잡아놨다며? 거기 가서 더 놀면 안 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술 취한 여자 셋이 제멋대로 떠들고 있는데 정신이 있는 게 이상하지.


정영융은 울고 싶어졌다. 정말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영융은 거대한 부조리(?) 앞에 압도되고 위축되었다. 실존적인 고뇌에 빠져 소리 없이 절규했다.


그때까지 정영융에게 있어 실존주의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사상이자 예술사조였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직접 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아하. 이래서 그 작가들이 그런 더럽고 험난한 소설들을 써낼 수밖에 없었던 거구나...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정영융이, 그날 처음으로 인상을 팍 쓰면서 눈을 치켜떴다.


철없는 아가씨들은 그제야 찔끔해서 그 성난 눈을 피하기 바빴다. 마치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변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차 있는 데까지 바래다줄게.”


할 말 많았지만, 정영융은 꾹 참고 일단 점잖게 정리를 했다. 사람 찔러 죽일 생각에 눈이 뒤집히기 직전이어서 그런지 눈빛이 평소와 달리 강렬했다. 멋대로 종알대던 아가씨들은 단숨에 입을 다물고 찍소리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가엾은 아가씨들은 그 모양 그대로 주차장까지 끌려갈 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진주예가 뭔가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틀고 정영융만 못 보게 소리 죽여 웃었다.


“저기... 지금 우리 다 술 마셨잖아. 그런데 운전 하라고?”


그 말을 들은 나이라와 현지수의 눈도 반짝, 빛났다. 이미 아가씨들의 우정에는 깊은 금이 가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협업이 잘 되고 있었다.


“대리운전 불러? 세상에. 여기서 서울까지 가야 되는데?”

“그냥 펜션비 나눠 내는 게 더 싸겠다. 그치?”


그때서야 아차 싶어진 정영융은 머리를 싸쥐었다. 면허를 딴 뒤 처음으로 차를 몰아본 날이었다. 그렇게 모여 술을 마시더라도 운전할 사람 한 명씩은 남겨놔야 한다는 걸 생각지 못했던 것.


그리고 아가씨들은, 현지수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다들 경쟁적으로 술을 마셨던 탓에 다 얼마간씩은 술에 취해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술에 안 취했다고 해도 얼마든지 앙큼하게 취한 척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모든 게 다 잘 되고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정영융도 잠깐 마음을 놓았던 동안 술을 몇 잔 마신 뒤여서 머리가 맑지 않았다. 좀처럼 타개책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현지수가 정영융 옆에 슬그머니 붙어 섰다. 술김을 빌려 귀에 얼굴을 갖다 붙이고 작은 목소리로


손만 잡고 잘게,


라고 속삭이려던 그 순간!


멀리서 조그만 낚싯배 하나가 나타나 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그만 낚싯배 하나가 내뿜은 빛줄기는 눈부시게 밝았다. 마치 UFO가 지구인 납치할 때 내쏘는 듯한 광휘를 내뿜으며, 배는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배 위에는 휘황한 전등이 켜져 있어 초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그 불빛은, 오징어를 유인하는 집어등이 뿜어낸 것이었다. 물밑의 생명들에게는 죽음과 유혹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없는, 지옥의 불이었다.


올라선 자들에게는 천국의 방주로 보이지만, 붙잡혀 가라앉은 자들에게는 지옥에서 보낸 사절에 가까운, 자그마한 배.


지나치는 중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들을 향해 일직선을 그리며 접근하고 있었다.


집어등의 불빛에서, 스튁스의 뱃사공이라는 신화적인 이미지를 떠올린 정영융이 불길한 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주찬범 역시 갑작스런 변수의 등장이 반가울 리 없었다.


작은 배에 탄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한 사람이 조종해도 될 정도로 배도 선실도 작달막했다. 선실 창문으로 고개만 쓱 뺀 노인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거기! 밤낚시 가려는 거죠?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싸게 해드릴게. 저는 여자 분들한테는 돈 안 받아요.”


낚시터에는 그렇게 슬그머니 다가와서 장사를 하는 낚싯배들이 많았다. 어황이 시원치 않아 조바심이 난 낚시꾼들을 태우고, 주꾸미와 오징어가 많이 사는 포인트로만 데려다준다는 배들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1인당 4만원.


오전에 원규진은 진작 그 배를 타보려고 흥정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용금액이 얼마인지를 듣고 나서는 그 돈을 주고도 고기를 못 잡으면 돈을 퇴해주는 거냐고 퉁명스럽게 쏴붙이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것. 여행지 바가지상술 대단하다더니 진짜였네, 하고 투덜거리면서.


하지만 물정을 모르는 건 원규진이었다. 그 돈을 내고 낚싯배에 올라 바다로 나갔던 낚시꾼들은, 사진을 찍어 SNS에 자랑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낚시꾼들이 각각 아이스박스에 꽉 차게 잡아넣은 주꾸미와 오징어들이 내쏜 먹물이 넘치고 흘러 낚싯배 바닥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조그만 낚시의자에 쪼그리고 앉는 데 완전히 질려버렸던 이용완은 뒤늦게 솔깃했다. 하지만 원규진은 이미 정영융과 주찬범이 잡아 올린 주꾸미 몇 마리를 안주삼아 술만 퍼마시고 있었고, 마음이 딴 데 가 있던 정영융과 주찬범 역시 이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평소의 이용완이었다면 정영융 주찬범의 돈을 뜯어 억지로 태우고 나갔겠지만, 그날은 발길질을 하다가 외제차 포장 비닐을 찢는 바람에 원규진의 눈치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정영융과 주찬범의 사정은 밤이 된 뒤에도 낮과 마찬가지였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낚싯배가 어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


그런데 집어등 불빛이 아가씨들의 허파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화가 난 듯싶은 정영융을 보고 잠시 찔끔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시였다. 아가씨들은 다시 종달새처럼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여자들은 공짜야? 아저씨, 그럼 남자 한 명이랑 여자 셋이 타도 한 명 것만 받아요?”

“우와 재밌겠다. 낚싯대 있지? 그거 미끼 어떻게 매는 거야?”

“나 태어나서 배 한 번도 안 타봤는데. 정말이야.”


아오 시발 더 이상은 못 참아!


마침내 폭발한 정영융이 요란하게 고함을 지르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만일 이 소설 장르가 무협이었다면, 작가는 아마도 정영융은 사자후를 터뜨리기 위해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라고 썼을 거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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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질투 23.02.11 20 1 10쪽
9 범죄천재 찬범 23.02.10 20 1 10쪽
» 살인 마려워 23.02.09 19 1 10쪽
7 이상한 분위기 23.02.08 15 1 10쪽
6 전쟁 같은 문학 23.02.07 21 0 9쪽
5 잠시의 평화 23.02.06 18 0 10쪽
4 나이라 23.02.05 20 0 11쪽
3 주꾸미 낚시 23.02.04 19 0 10쪽
2 일진 죽이기 23.02.02 28 0 10쪽
1 멸치 23.01.31 6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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