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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영태권

변신오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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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영태권
작품등록일 :
2023.01.31 23:13
최근연재일 :
2023.02.11 23:41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47
추천수 :
4
글자수 :
44,052

작성
23.02.05 21:59
조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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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11쪽

나이라

DUMMY

정영융이 뒤로 돌아서기 직전,


“영웅아!”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목소리였다.


아 안 돼!


돌아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정영융을 ‘영웅’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저 먼 거리에서 나인 줄 알아본 걸까.


그것도 하필 지금!


“영웅아! 야 여기서 뭐해?”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기쁨이 묻어나오는, 명랑한 목소리. 어쩌면 뭣도 모르고 반갑다고 손이라도 흔들고 있을지 모르지. 혹시 내게로 달려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정영융은 그쪽을 돌아볼 수 없었다.


제발 지나가라 그냥! 제발!


“...야 이 새끼야 뭐해? 너 부르잖아 지금...?”


이런 망할.


정영융은 등짝에 총구가 겨눠지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하게 뒤로 돌았다. 원규진이 깨어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영융이 상상했던 그대로,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다 넘어간 줄 알았던 광명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눈부신 광경.


그러나 정영융에게까지 그것이 아름답고 반가울 리 없었다.


끼익!


멀리서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리고, 원규진의 외제차에서 급하게 내린 주찬범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정영융과 원규진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최악의 일들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 정영융이 쓰게 웃었다. 핏방울을 끌어 모아 짜놓은 것 같은 노을이, 마치 날개나 후광처럼 정영융의 등 뒤에, 아니 방금 영웅이라고 불린 남자의 등 뒤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누구냐 시발년 저거... 존나 예쁜데?”


술에 취해 잠들었던 원규진의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간악해 보였다.


“모... 르는 사람인데? 잘못 봤나보지.”


금세 탄로 날 거짓말을 해서라도 구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정영융이 있는 곳까지 달려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원규진과 달리 정영융은 시력이 좋지 않은 편이었고, 그래서 그게 소녀의 모습을 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여자의 모습을 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정영융의 뇌리에서, 오래 전의 일들이 한 번에 다 되살아났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이 목격하게 된다는 그 주마등이란 게 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정영융에게 그 시간은 꼭 죽음 같았다.


나이라.


성은 나씨에 이름이 이라였다. 흔치도 않고 어쩐지 외국인 이름처럼 들리기도 했서 초등학생 시절 내내 놀림을 받았었다.


동병상련이었다. 정영융 역시 ㅇ이 과도하게 많이 들어간 이름 때문에 후르츠링이라는 놀림을 받고 있던 터였다.


놀림을 당하고 시무룩해진 나이라를 보면 정영융은 항상 주문을 외우듯 계속 말해주곤 했다.


저 망할 놈들이 나이롱이니 뭐니 하면서 너를 놀리는 건 사실 널 좋아해서 그러는 거고, 여자애들이 그러는 건 샘이 나서 그러는 거야.


학폭에 시달려 못 보고 살아온 시간 동안 눈부시게 아름다워진 초등학교 동창이, 눈앞으로까지 날아왔다.


이를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영융의 속도 모르고.


“야 정영융. 왜 모른 척하냐 너? 사람 부르는데?”


정영융이 모르는 사람인 척할 기회도 안 주고 숨도 쉬지 않고 재잘댔다. 조그만 새처럼.


“네가 낚시를 다 하러 왔어? 아니 어떻게 약속도 안 잡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딱 만나?”


거침없고 구김이 없었다. 정영융은 아마도 조금 전 주찬범이 보였던 얼굴처럼 처참한 몰골이었을 텐데도.


눈치 없이 해맑은 건 여전하구나. 예쁜 거하고.


너무 아름다워서 사람을 절망시키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예술이 그렇다고 하겠지만, 정영융은 그 한 순간에 지옥 끝자락에 가 선 것 같았다. 너무 답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원규진은 짐승이 사냥할 때 그러듯 소리도 없이 정영융의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느새 셔츠를 주워 입고 문신을 가리고 있었다.


나이라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거의 동물적인 반응속도였다.


안 그래도 발정이 나있던 마물 앞에, 나이라는 무방비로 서 있었다.


나이라는 원규진의 사악한 기운을 감지하기라도 했는지 의심스러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누구세요? 친구야?”


친구가 아니라고 눈치라도 주려고 했지만, 원규진은 어깨동무 하는 척 하면서 정영융의 목을 감아 졸랐다.


“안녕하세요? 영융이 친구예요. 아이고 영융이한테 이렇게 예쁜 친구 분이 있었네? 반가워요.”


호들갑 떠는 꼬락서니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역시 말할 수 없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다시 만나게 되면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하고 싶었는데.


“친구들이랑 놀러왔지. 꽃박람회 구경하고 지금 가는 길이야.”

“친구들? 남자친구들?”


갑자기 그렇게 묻자 나이라는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었고,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 아직 남친 없어.”


정영융은 이를 악물었고, 원규진의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정영융은 묻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뭐 타고 왔어?

“차 한 대 렌트했어. 운전연습도 할 겸...”


꽃박람회에 놀러간다고 부담 없이 렌트비를 쓸 수 있을 만큼은 신세가 좋아진 것 같았다. 정영융은 잠시나마 행복했다.


“그래? 그럼 빨리 가서 차 반납해야 되겠네. 주말이라 길 많이 막힐 텐데.”

“아이 뭐 급하게 가실 거 있나요? 심심하시면 같이 술이나 한 잔 해요.”

“죄송한데 저희가 술은 별로고... 운전도 해야 해서요.”


정영융은 있는 힘과 용기를 다 짜내서 말했다.


“아... 우리는 밤새 낚시할 거거든. 아쉽게 됐네. 일정이 안 맞아서.”


원규진이 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야이 시발...! 죽고 싶냐.


나이라와 같이 온 친구들은 멀찌감치 서서 다가오지도 않고 있었다. 나이라가 정영융이 친구라면서 소개를 하자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하기는 했다.


“나도 친구들이랑 같이 왔어. 대학동기들이야.”


유유상종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셋 모두 늘씬하고 예뻤다. 특히 한 명은 수준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예인들한테서 나온다는 그 후광이라는 게 정말로 현실에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규진 앞이었다.


나이라와 진주예는 불어불문학과 동기였고, 현지수는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었다.


둘 다 원규진과 정영융을 마뜩치 않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정영융은 키도 큰 편이 아니었고 옥수숫대처럼 마른 체형이었다.


키와 외모만 놓고 보면 그나마 봐줄 만한 게 원규진이었지만, 그건 그 네 명 중에서 꼭 한 명을 꼽아야 할 때나 그런 것이었을 뿐, 그런 미인들한테까지 호감을 끌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다.


날라리 양아치 티가 풀풀 나는 건 그렇다쳐도, 낮술을 마셨던 게 치명적이었다. 특히 현지수는


“아 술냄새...”


라면서 코를 가리고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평소였다면 모멸감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에는 그렇게 대놓고 꺼려하는 기색이 고맙기까지 했다.


원규진은 그런 미인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씨익 웃었다. 그건 그놈이 담대해서가 아니라 악랄해서였다.


원규진은 범죄에 대한 죄책감을 못느끼는 사이코였다. 아무리 착한 척을 한다고 해봐야 결국에는 싹싹한 강간범일 뿐이었다.


정영융은 고등학교 때 원규진 일당에게 장기간에 걸쳐 윤간 당하다가 자살한 여자아이의 얼굴과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 미친놈이 사람 없는 자리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걱정이 되었던 정영융이


지금이라도 이 새끼를 칼로 찔러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주찬범이 그 자리에 도착착했다. 정영융은 난감해졌다. 멍청하게 망설이다가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좋은 기회를 놓친 나를 계속 믿어줄 것인가.


주찬범에게까지 불신을 받게 되면 삼 대 일이었다.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전력차가 생기게 된다.


그렇지만 주찬범 역시 넋이 나가 있었다.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영융아. 친구 분이셔? 진짜 예쁘시다...”


그렇게 간단하게 실수가 용납될 줄 몰랐던 정영융이 말을 잃었다.


아 저 단순한 놈...


사실 주찬범은 원규진의 차에서 내린 직후, 정영융이 허리춤의 칼을 손에 쥐고 돌아서려던 그 순간을 눈으로 보기는 했다. 그래서 주찬범은 실망하지 않았다. 일이 진행 중이라는 것만으로도 그저 기쁘고 즐거웠다.


다행스럽게도, 명문대 재학 중인 미녀는 철벽을 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럼 재미있게 노세요.”


세상 반가운 소리였다. 정영융은 자신도 모르게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예,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원규진이 펄쩍 뛰었다.


“잠깐만요! 저희도 세 명이서 왔는데, 마침 세 분이시니까 저희랑 저녁 같이 하시는 거 어떠세요?”

“아니 우리는 사실 네 명이고, 이제 차도 막힐 텐, 윽!”


원규진이 장난인 양 옆구리를 주먹으로 쳤다. 마른 몸이어서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삼대삼 미팅하면 딱이네!”


의리 없게 이용완을 버리고 갈 셈인 것 같았다. 원규진에게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이용완은 주먹다짐할 때 맷집이 좋아서 같은 편이 됐던 거지 여자한테 먹히는 외모는 전혀 아니었으니까.


어? 잠깐만.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나? 숙소에 자러간 이용완이 떨어져나가면? 기회가 더 많이 생길 수도 있잖아.


주찬범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정영융은 눈을 보고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그러나 일이 아무리 유리하게 흘러간다고 해도, 나이라와 그 친구들은 무관한 사람이었다. 정영융은 머리를 흔들었다.


냉담하게 구는 미녀들에게 차를 보여주고 어떻게 꼬드겨볼 생각이었는지, 원규진은 차를 어디 세워뒀느냐고 주찬범을 다그쳤다.


허리춤에 숨겨놓았던 칼자루를 잡았던 손으로, 정영융은 나이라의 손을 잡았다. 혹시 덥석 잡으면 놀랄까봐 천천히, 마치 꽃송이를 감싸 쥐듯이 조심스럽게.


나이라는 움찔 놀라는 것 같기는 했지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손은 작고 매끄럽고 따뜻했다. 정영융은, 당황한 끝에 격하게 흔들리는 나이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라야. 아무것도 묻지 말고 오늘은 그냥 가. 부탁할게. 나중에 다 설명해줄 테니까.”


영문을 알 리 없는 나이라였지만, 그렇게 절박하고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자 뭔가 알아차린 것 같기는 했다.


“어... 그래? 그럼 전화번호 줄래? 나중에 연락...”

“아니 아니 아니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네 번호 알아낼 테니까, 오늘은 그냥 가. 다 말해줄게.”

“...그래. 알았어.”


원규진이 자기 차를 끌고 오겠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음주운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정상인들에게 그런 행동은 절대로 호감을 줄 수 없었다. 현지수와 진주예는 벌써 저만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친구들 뒤를 따라 걸어가던 나이라가 돌연 뒤로 돌아섰다. 걱정스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정영융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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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잠시의 평화 23.02.06 18 0 10쪽
» 나이라 23.02.05 21 0 11쪽
3 주꾸미 낚시 23.02.04 19 0 10쪽
2 일진 죽이기 23.02.02 28 0 10쪽
1 멸치 23.01.31 6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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