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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영태권

변신오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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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영태권
작품등록일 :
2023.01.31 23:13
최근연재일 :
2023.02.11 23:41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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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추천수 :
4
글자수 :
44,052

작성
23.02.07 22:56
조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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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전쟁 같은 문학

DUMMY

정영융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특기생 수시전형으로 명문대에 합격해 일진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가기 위한 수단이자 방편에 불과했다.


그런 연유로 정영융은 평생 글 쓰는 일을 가지고 누군가와 소통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누군가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자기 글을 읽어볼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소설가들은, 지인들에게는 자기 글을 잘 읽히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글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이 노출되고 옷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영융도 마찬가지. 잠시 방심하고 있던 중에 자기 소설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을 확 붉히며 말을 더듬고 손을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어설픈 모습이, 찬밥취급을 받던 동안 현지수와 진주예가 느끼고 있었던 불쾌감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여자들에게 내내 무심하게 굴다가도, 공모전 상 탄 이야기를 하자마자 수줍어하는 모습이 신선하고 매력 있어 보였다. 거만하게 우쭐댈 거라는 예상이 깨졌기 때문이다.


수상작 이야기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내내 냉랭하게 굴던 정영융을 골탕 먹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둘은 앙큼하게도 그 이야기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정영융과는 관심분야가 전혀 다를 것 같았던 나이라와 친구들은, 사실 문학과 예술 전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흔치 않은 경우였다.


불문학 전공이었던 나이라와 진주예도 그랬지만, 현지수 같은 경우는 대학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하면서도 나중에는 본인이 창작까지 해보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터여서 그 관심이 더 남달랐다.


말하자면 그 자리는,


한 종목만을 평생 연습해서 전국체전 우승 정도의 성적을 거둔 체육특기생과, 수능 봐서 체대에 입학한 일반 대학생이 만난 자리와 비슷했다. 청소년 콩쿨 우승자가 일반 음대 학부생을 만나게 된 자리와도 같은 성격이었다.


평소 그런 만남의 자리가 생기기를 고대하며 살아가지는 않지만, 그런 자리를 그냥 지나치게 된다면 어쨌든 후회를 하게 될 법한 만남.


참가자들의 용모 때문이 아니라, 참가자 서로의 속성과 생의 맥락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시간이 그렇게 난데없이 다가와 있었다.


자기 영역에서만큼은 일반인이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수준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막상 이론으로 들어가 보면 아는 게 없는 예술가적 유형1과

오직 재능을 타고난 사람만이 가 닿을 수 있는 예술계에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그 세계 외부에서 내부를 측량하고 재단할 수 있는 이론을 학습 중인 학자적 유형2.


언뜻 생각하기에 이 두 가지 유형의 사람 사이에서는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날의 대화는 그런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의 시간낭비로 흐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현지수가 너무나 영민했다.


현지수는 이미 정영융의 소설을 여러 차례 정독하고 주의 깊게 분석을 한 바가 있었다. 현지수가 정영융의 수상작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 자체도, 범인들의 수준에서는 생겨날 수 없는 것이었다.


현지수의 생각에, 정영융이 응모했던 소설은 심사위원들이 오독을 하는 바람에 당선된 글 같았다. 심사위원들이 과대평가를 하는 바람에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당 소설이 가진 가치를 실수로 낮춰 보는 바람에 당선작으로 선정을 했을 것이리라는 생각이었다.


현지수는, 그 소설을 그해 공모전에서 당선된 소설들 중 가장 흥미로운 소설로 평가하고 있었다. 문제작이 될 만한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나,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이 아니라 청소년공모전 수상작이었기 때문에 논란과 관심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만일 이미 등단을 한 기성문인이 그런 소설을 써서 냈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하고 상상해 보기도 햇다.


정영융의 소설은, 표층의 의식과 심층의 주제가 달랐다.


표층의 맥락을 읽어보자면, 실존주의소설을 모방한 듯싶은 문체와 플롯을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 어렵지 않게 그것이 실존주의계열 소설임을 알아차릴 수 있게 돼있기는 했다. 그러나 현지수는, 그것이 진짜 주제의식이 아니라 오독을 유도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글 전체를 실존주의소설의 키치 정도로 보이게 만드는 부분들이 꽤 있기는 했지만, 군데군데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서술한 문장들이 그 맥을 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표층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천체 반대편에 별자리처럼 못 박고 있었던 것.


그 심층의 의식을 선으로 연결해가며 면밀히 추적해가던 현지수는, 그 연결선이 그려낸 버뮤다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듬뿍 담긴 다층적 문제의식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하면 그 공모전을 주최한 재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속물쯤으로 취급되는 어떤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고 후원하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 쉽게 무협지 식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강호에서 명망이 높던 한 문파의 장문인이, 자신과 문파의 덕업을 칭송하는 시를 공모해 큰 상을 내리기로 했다. 그리고 수많은 응모작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를 찾아 선정하고 포상도 했다.


그런데 이 시에는 문제가 있었다. 겉으로는 해당 문파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세로드립으로 ‘너희 문파의 장문인은 매춘부의 자식이며 너희의 무공은 전부 쓰레기’라는 글을 숨겨 해당 문파의 본진에 드랍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현지수가 파악하고 있던 정영융의 맥락이었다. 현지수는 거침없이 정영융에게 이 의문점들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마치 자백을 받아내려는 수사관처럼.


물론 작가를 데려다 놓고 당신이 이러이러한 작의를 가지고 글을 썼던 것 아니냐며 따지듯이 묻는 것은, 순문학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예술계 어느 곳에서든 큰 실례가 되는 행동이다.


하지만 정영융은 그런 만남 쪽으로는 경험이 전혀 없었고 그런 식의 대화도 난생 처음이었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다 발각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는 예술가에게 있어 상당히 치욕스런 순간.


정영융은 안 그래도 원규진에 관한 계획과, 나이라 일행을 범죄자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대책마련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겨우 잠시나마 마음을 놓게 된 참이어서 심리적으로는 무방비였다.


현지수의 질문은 타당하고 예리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 글을 쓴 장본인이 자기 소설의 작의는 이러이러했다면서 대놓고 실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강 얼버무리려고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현지수는 정영융이 본문에 적어놓았던 구절들 중 인상적인 부분들을 그때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작중에 등장했던 ‘책임지지 않는 신’, ‘식민지적 욕망’ 등의 표현 하나하나까지 끄집어내면서 정영융을 공박했다.


정영융은 현지수가 거의 비평가 수준의 이해력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뒤늦게 긴장했지만, 이미 해놓은 대답을 나중에 가서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쟁 같은 문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따라가기 힘든 수준의 대화이기도 했다.


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고 말았던 원규진 주찬범은 물론이었고, 나이라 진주예도 사실은 마찬가지였다. 둘은 불문학을 전공하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신입생에 불과했다.


나이라는 항공사승무원 쪽으로 방향을 잡고 외국어성적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고, 진주예는 아나운서 쪽 진로를 탐색하던 중이었다.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애착을 가지고는 있었으되, 상식을 그리 벗어나지 않는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정영융이 수상한 소설의 전문을 읽기는 했어도, 그저 수사학적인 기량과 표현력 정도를 체감할 수 있었을 뿐, 전문적인 이해를 시도할 수 있는 역량은 없었던 것.


어쨌든 가엾은 정영융은 쩔쩔매기 시작했다. 혹시 자기가 소설에 현지수를 화나게 할 만한 부분을 적어 넣었었는지를 묻고, 혹시 그랬다면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봤지만 현지수는 전혀 만족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정영융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어쩌면 제국주의열강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해놓은 사상적 함정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고 에둘러 작의를 인정하고 말았다.


찾고 있던 답을 얻어낸 현지수가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앞에 놓여만 있던 잔을 들어 쭈욱, 시원하게 술을 들이켰다. 보기 드문 모습이었던 듯 나이라와 진주예까지 깜짝 놀랐다. 난적에게 항복이라도 받아낸 사람 같았다.


그렇지만 현지수가 궁금히 여겼던 것은 작의가 아니었다. 그 사건이 우연의 산물이었는지, 아니면 고의로 기획한 것이었는지의 여부였다. 현지수에게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는데, 정영융이 당황해서 오해를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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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진 죽이기 23.02.02 29 0 10쪽
1 멸치 23.01.31 68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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