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왕전생 - 30
주저 없이 레펜하르트는 벽에 박힌 타일을 움직였다. 벽에 붙은 채 문양 일부분이 스르륵 미끄러진다.
‘끙, 만만찮네.’
기억은 다 나는데, 정작 타일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보통 은의 시대 대부분의 방어 시스템은 마법의 힘없이는 쉽사리 작동하지 않는다. 얼마 안 되는 마력을 총동원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근력으로 때우며 한참동안 끙끙거리며 타일을 옮긴다.
그렇게 몇 차례 타일을 조작하자 자연스럽게 문양을 이루고 있던 벽의 타일이 완전히 새로운 문양이 되었다.
“아, 됐다.”
우르르릉!
벽이 흔들리며 먼지가 쏟아져내려왔다. 이것이야말로 과거 토드는 미처 몰랐던, 레펜하르트가 직접 발견한 유적 팔톤의 진짜 유물로 향하는 통로였다.
그는 감개무량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하하…….”
수천 년간 숨겨져 있던 비밀의 문이 지금 열리고 있었다.
통로를 앞에 두고, 레펜하르트는 일단 목도리와 털가죽 코트부터 벗었다. 앞으로 전투를 벌어야 하니 은화 열 닢이나 주고 산 이 옷가지를 험하게 굴릴 순 없는 것이다. 이제 곧 돈 따윈 얼마든지 벌 수 있을 텐데 고작 코트 값에 연연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옷 일부러 버릴 필요도 없잖아? 어차피 안 입는다고 추위 타는 몸도 아니고.’
그렇게 간단한 조끼와 바지만 걸친 조촐한 차림으로 그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자, 이제 6년간 그토록 고생한 이 육체 성능을 시험해 볼 때다!
그렇게 한창 레펜하르트가 신바람을 내던 차였다.
“으아아아악!”
갑자기 어둠 저편에서 흐릿하게 비명이 들려왔다. 아득히 멀리서 들리는, 청력이 높아진 지금의 그도 미처 식별이 힘들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응?”
잘못 들었나 싶어 레펜하르트는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비명 소리가 낯익었다. 아무래도 저거 토드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으악! 으악! 으아악!”
비명이 뒤를 따랐다. 이번엔 실란이랑 그 에드워드인가 하는 작자다.
‘아니, 저쪽으로 들어간 애들 비명이 왜 이쪽에서 들려?’
어이가 없어진 그가 멍하니 자신 앞에 뚫린 통로를 바라보았다.
‘가만 있자, 이 통로가 뭐더라? 원래 여기는 은의 시대 병참 기지. 그리고 이 비밀 통로는 지하 3층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백 도어였지? 그리고 그 백 도어가 열린다는 건 일종의 침입 상황이라는 거고…….’
기억이 났다. 병참 기지라는 것은 이곳이 군사 용도로 쓰였다는 의미. 그리고 침입 상황이 되었을 때 팔톤의 잔재 마력 시스템은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게 된다. 그래, 과거에도 이랬다.
‘그래서 모든 유적의 비밀 트랩이 일제히 작동을 했지 아마?’
“오마나?”
그제야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뭔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저 예전 기억대로 문을 연 것은 좋았는데, 현 상황이 그때랑 다르다는 걸 망각했다. 그때는 시리스와 단 둘이서만 왔었으니 팔톤 지하 1,2층 트랩이 작동하건 말건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에 토드 일행이 가 있지 않은가?
보나마나 함정에 걸려 다 같이 사이좋게 지하 2층으로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들 목소리가 엉뚱하게 이쪽에서 들릴 리가 있나?
“이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일행의 전력으로 지하 2층의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원래 팔톤 지하 1층과 2,3층의 위험도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토드에게 들은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들이 탐사한 지역은 고작 지하 1층이었다. 마검 알티온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몇 개의 유물만 챙겨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 후 알티온 후작가에서 몇 차례나 더 탐사대를 보낸 끝에야 지하 2층을 발견하고 검을 발견해 회수하게 된다. 그건 앞으로 5,6년 후의 이야기.
“실수했다. 쩝.”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은근슬쩍 양심에 찔린다. 뭐, 전생에 마왕씩이나 불렸던 몸이긴 했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 본인은 나름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인이 되어 남이 죽는 상황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솔직히 저 오만불손한 기사 놈들이야 별로 마음에 드는 것들도 아니었으니 저기서 죽어나간다고 딱히 양심의 가책 느낄 것은 없겠지만……, 게다가 토드도 다시 만나고 보니 영 구해주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그 신관 꼬맹이랑 죄 없는 노예 애들이 죽어버리면 꿈자리가 좀 사납겠지?’
안 되겠다.
레펜하르트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단련된 육체가 놀라운 도약력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툴툴거리며 그는 통로의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아, 제대로 꼬였네.”
&
한 줄기 섬광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온다.
“으아악!”
비명이 좁은 석실 복도를 메아리쳤다. 붉은 선혈이 석벽 위로 가득 튀며 찐득하게 흘러내린다. 섬광의 정체는 날카로운 붉은 낫이었다. 피를 뿌린 기사가 어깨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토마스 경!”
다른 기사들이 동료의 부상에 격정 어린 외침을 터트렸다. 하지만 감히 방패를 들고 용맹하게 동료를 감싸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눈앞의 적은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기사들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악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계의 마물이 통로 저편에서 다가온다.
“크크크크…….”
2미터에 달하는 거구에 뒤틀린 근육으로 뒤덮인 붉은 몸체, 흉악한 입가에 누런 불길이 맴돌고 공허한 눈동자는 심연을 담아 끝없이 검을 뿐이다. 인간의 스무 배의 힘과 권능을 지녔다 알려진 이계의 악마, 베이터였다. 그 악마가 지금 돋아난 네 개의 팔에 각자 칼이며 낫, 도끼 등을 들고 그들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기사 중 하나가 절규했다.
“아! 인간이 어찌 저런 악마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이냐!”
‘우와, 아주 저 말투가 뼛속까지 박혔구나.’
절규마저 고풍스러운 알티온 기사를 보며 실란은 혀를 내둘렀다. 공포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저런 말투가 자연스레 나오다니 어떤 면에선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크, 지금 이런 잡생각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실란은 고개를 저으며 쓰러진 토마스 경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으며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치유의 빛이 깃들기를 원하나이다.”
과연 사랑의 여신답게 분홍빛(!) 성광이 솟구쳐 상처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뼈와 근육이 급속도로 아문다. 이 정도로 빠른 치유력을 보이는 이은 필라넨스 교단에서도 드물었다. 나이와 맞지 않게 그는 굉장히 높은 위계를 지닌 신관이었던 것이다.
-계속-
- 작가의말
읭? 뭔가 시스템이 좀 바뀌었네요? 여기다가 작가 잡담을 적으라고 따로 마련된 공간인가요 이거? 맞나?
혹시 틀린 거면 부끄러운디-ㅁ-;;;
여하튼 제가 제대로 쓴 게 맞다면...
모두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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