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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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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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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20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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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3쪽

해의 그림자 334

DUMMY

자꾸만 소리쳐 부르며, 천담복 차림의 승지가 배를 타고 다가왔다. 시열이 두눈을 연신 끔뻑이며 지켜보는데, 승지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졌다. 콧수염이며 턱수염이 희끗한 게, 한눈에도 쉰을 넘긴 중늙은이였다. 눈빛이 부드러우면서도 묘하게 날카로웠다.


"윤지선."


얼굴이 보여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기억을 더듬는데, 한성우가 먼저 승지의 이름을 입밖에 내었다. 윤지선이라 불린 승지는 묘한 눈빛으로 송시열에게 고개 숙여 목례만 해보일 뿐, 무엄하게도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오히려 수중의 전지를 더욱 번쩍 들어 소리칠 뿐이었다.


"영부사 송시열은 주상전하의 전지傳旨를 받잡으시오!"


윤지선이 발칙하게도 송시열을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에, 이상도 한성우도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다. 얼마 전 안승지는 전지를 들고 와서 시열 앞에 부복부터 했었다. 헌데 지금 윤지선은 시건방지게도 왕의 전지만 믿고 오히려 부복을 받아내려는 참이었다.


"천세千歲, 천세千歲, 천천세千千歲!"


떠름한 얼굴로 시열이 부복했다. 제자들 역시 마지 못해 부복했다. 본디 왕의 전지를 보면 예를 갖춰 부복해야 마땅했다. 알면서도 못 마땅했다. 소태 씹은 얼굴로 시열은 사배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시열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내려다 보면서도 윤지선은 고개가 뻣뻣했다. 사배례가 끝나서야, 결국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이내 전지를 읽기 시작했다.


"송공宋公 즉견卽見, 이 엄동설한에 공이 성외에서 특별한 거처 없이 헤매느라 고생이 많다 들었소. 연로한 나이라 자칫 외감에 몸을 상할까 심려되어, 그간 발 뻗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소. 성외에서 병이 도져 의원의 치료를 받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하니, 더욱 안타깝기 그지 없소. 문무백관의 지극한 존경을 받는 송공을 극진한 정성으로 보살피려 하니, 원컨대 도성으로 돌아와 조정의 등불이 되어 주시오. 공이 돌아오리라 믿고 도성 안에 거처를 마련케 하리다."


나무랄 데 없는 어찰이었다. 송시열을 아끼는 어심이 구구절절 담겼다. 시열의 제자들도 그저 감읍하여 흐느끼는 시늉이라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열은 들을수록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자, 받으시지요."


윤지선이 뱃머리로 나와서 시열의 눈앞에 전지를 내밀었다. 시열이 전지를 건네받기 전까지는 무릎을 꿇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듯이, 윤지선은 오히려 고개까지 꼿꼿이 세웠다. 싱글거리는 눈웃음을 치면서.


시열은 무릎을 꿇은 채로 두눈을 치뜨고 그악스런 눈초리로 윤지선을 흘겨보았다. 마지 못해 전지를 받아들면서도, 그는 한번 더 윤지선을 쏘아보았다.


윤지선이 누구더라?


"자네 남산에서 본 적이 있는데...혹 병판 정재숭하고 아는 사인가?"


시열이 기억을 더듬는데, 이상이 뭔가 기억해낸 듯이 불쑥 물었다. 윤지선이 씩 웃었다.


"물론 너무 잘 알지요."

"허면 병판한테 도성 안팎으로 잘 좀 다스려달라고 말 좀 잘해 주시게. 무당이 왜 이리 설치는 지 원..."


이상이 굿판이 벌어지는 삼개나루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비아냥거렸다. 윤지선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이상을 돌아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거두지 않고서, 오히려 더욱 진한 미소를 띠고 대꾸했다.


"삼개나루에선 무당이 병조판서보다 더 막강하지요. 우리 숭嵩이라고 뭐 이뻐서 놔두겠습니까?"


숭嵩이? 시열의 눈시울이 실룩였다. 방금 윤지선이 웃는 낯으로 자신에게 침을 뱉은 기분이었다. 숭이? 친하면 호號로 부르고, 더 친하면 자字로 불렀다. 헌데 이름을 불렀다. 정재숭과 친인척이란 얘기였다. 적어도 팔이 안으로 굽을 정도로 가까운 친척인 모양이었다.


"우리 숭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정재숭을 두고 우리 숭이라니. 시열은 기가 막혀 입꼬리가 부들부들 경련했다. 하필이면 정재숭과 엮인 놈이 승지로 왔다. 왕의 어찰을 지니고. 자신을 쳐다보는 시열의 눈씨가 사나운데도, 윤지선은 마냥 웃기만 했다.


"여기서 배 뒤집혀 물에 빠지면, 건져줄 사람도 무당 뿐인데. 너무 뭐라 하지 마시지요. 저래 뵈도 삼개당주입니다. 물속에서 귀신도 건진다지요."


기분나쁜 말을 웃는 낯으로 잘도 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시열은 기분이 껄쩍하여 윤지선을 흘겨보곤 어찰을 펼쳐서 천천히 읽어보았다.


겉으로는 구구절절 곰살궂고 살뜰한 위로의 말 뿐이었다. 하지만 곱씹어 볼 수록 심술궂고 살벌한 위협의 말 투성이였다. 왕은 시열이 도성 밖에서 노도와 두모포를 오가던 것을 누군가한테 이미 들어 아는 듯 했다. 병이 난 것도 알았다. 괜히 도성 밖에서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얼른 도성 안으로 돌아오란 조롱을 던지는 참이었다.


"날이 추워서, 당장 전하께 회신을 드릴 수가 없는데...저 객사에 들렀다 가겠나?"


시열은 차디찬 눈빛으로 윤지선을 흘겨보며 권했다. 하지만 윤지선이 냉큼 손사래를 쳤다.


"아, 그냥 저랑 같이 도성으로 일단 들어가시지요. 여긴 워낙 음습하여 대감 계실 곳이 못 됩니다."

"아...헌데, 자네, 혹 파평윤씨인가?"

"아, 예..."

"파평 윤씨가 하도 많아서...자인子仁이랑 아는 사인가?"


윤증과 아는 사이냐고 대뜸 묻는 시열의 두눈을 보며, 윤지선은 또 진한 눈웃음을 흘렸다.


"물론 잘 아는 사이지요."


시열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정재숭은 물론 윤증까지 잘 아는 사이라? 혹시 최석정도 잘 아는 사이냐고 묻고 싶어졌다. 아직 최석정을 경계하진 않았지만, 저 윤지선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안이 궁금해졌다. 뭔가 씹든 묻든, 뭐라도 하고 싶어졌다.


"허면 최석정도 아는 사인가?"

"뭐...좀 알지요."


아직도 웃는 낯이었다. 송시열은 기가 막혀서 윤지선을 앵도라진 눈동자로 쏘아보았다. 정재숭과는 너무 잘 알고, 윤증과는 잘 알고, 최석정과도 좀 아는...기분 나쁜 자였다. 괜히 속에서 천불이 나서, 시열은 자기도 모르게 전지로 부채질을 했다. 그런 시열을 보는 윤지선의 두눈에 설핏 냉기가 스쳤다.


"헌데, 자네, 혼자 왔는가?"


이상이 뜬금없이 묻는 말에, 윤지선은 똑바로 마주보았다.


"예?"

"아...혹 어의는 같이 안 왔나 해서. 이를테면 백광현 같은?"

"백 누구요?"


윤지선은 눈시울을 실룩이며 되물었다. 억지로 웃느라 눈가에 쥐가 나는 모양이었다.


"백광현 말일세."

"아...그..."


윤지선이 고개를 또 끄덕이곤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마치 대궐 쪽을 돌아보는 듯이.


"백광현은 만수전에 든 걸로 아는데..."

"만수전에 들었다고 못 오나?"

"글쎄...뭐, 두창이 워낙 기승인지라...주상께서 어의들 단속에 나서셨다더군요. 전하께서 마음 같아선 송공께 어의를 보내주고 싶지만, 중궁전하를 잃고 나니 두역 때는 어의를 밖으로 함부로 돌릴 수가 없으시다고...쾌유를 빈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윤지선의 말에 주석이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다. 좌우로 숨죽이고 지켜보던 권상하도 그저 혀를 내두르는 참이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만 불러주고, 왕이 어의들을 오히려 틀어쥔 걸 보니 모골이 송연했다.


"쾌유를 빈다고?"


시열도 묘한 눈빛이 되어서 곱씹었다. 정말로 쾌차를 빌었으면 어의와 약재를 보내주었을 터였다. 그게 대신에 대한 예우였다. 헌데 왕은 승지만 달랑 보내서 도성에 집을 마련해줄테니 들어오라고 비웃어대는 참이었다. 시열 자신이 도성 밖, 성저십리 안에서만 맴도는 것을 다 안다는 듯이. 어린 것이 마음 씀씀이가 왜 이리 독한지. 치가 떨렸다.



"간밤에 만수전에 든 어의 명단이 이게 뭐요?"


숙종은 동온돌에서 빈둥거리면서 약방에서 올린 서계를 검토하다 도승지 오두인한테 불쑥 물었다. 오두인은 서안 앞에 부복한 채로 의아히 되물었다.


"무슨...문제라도...?"


별다를 게 없는 서계였다. 만수전 대왕대비 조씨가 외감 증후를 보여서 어의가 입진했다는 서계였다. 그 어의들 역시 왕이 일부러 궐 밖의 백광현까지 불러들여 꾸역꾸역 밀어넣은 터였다. 헌데 또 뭐가 문제라고 왕이 어의 명단을 문제삼는 건지.


"백광현 외外 5인이라니. 나머지가 누구누군지, 명확하질 않잖소."

"하오나 늘 그리하던 관행이온데..."

"혹시라도 그 외감이 또 두창이면 어쩌려고? 과인도 요즘 외감 기후가 있는데..."


숙종은 짐짓 마른기침까지 해대면서 말을 이었다.


"만수전에 든 어의가 또 내게 들면 곤란하잖소."


오두인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멍하니 벌렸다.


"하오나 대왕대비 전하는 이미 한번 두창을 앓은 바..."

"확실하오?"

"예?"

"우리 중궁도 6년 전엔가 두창이라 진단이 나왔다가, 다시 아니라고 번복이 되었소. 그때도 두창, 또 두창...두창이 평생 한번 앓는 거라는데, 의술이 미약하니 두창을 앓아도 두창인지 모르고 넘어가고, 두창이 아닌데도 두창이라 붙들고 늘어지고...이 지경이니 피차 어의가 겹치면 곤란하지 않소?"

"그..."


오두인은 난처한 얼굴이 되어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갑자기 왕이 어의들을 물고 늘어지는 건지, 중궁을 잃고 더 예민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오시면..."

"앞으로 어의들을 더욱 엄히 단속할 생각이오. 유의해 주시오."


오두인은 서슴서슴 물었다.


"저...하오시면 노도에 어의는..."

"노도?"


숙종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송시열이 있는 노도에 어의를 보낼 생각은 한번도 안 해본 듯한 말투였다. 오두인은 흠칫해서 눈만 똑바로 치떴다.


"전하? 정말 안 보내실 겁니까?"

"도성 밖에 있는 대신에게 어의를 왜 보낸단 말이오?"

"하오나..."

"난 이미 말했소. 도성으로 들어오라고. 도성 밖에 있는 한은 어의를 보내지 않을 생각이오."

"하오나 최석정한테는 백어의를 몇번 보내셨..."

"그거야 내가 보낸 게 아니고 백어의가 간 거요. 친분 때문에."


숙종이 손톱으로 서안을 천천히 긁으면서 딱 잘라 말했다. 오두인이 기가 질려 멍하니 쳐다보는데도, 천연덕스럽기만 했다.


"전하, 너무 송시열을 자극하지 않으시는 게..."

"자극? 내가 언제?"


숙종이 삐딱한 투로 되물었다. 오두인은 목울대에 한숨이 꽉 차는 걸 느끼고 조용히 삭였다. 요즘 왕을 보는 게 왜 이리 힘든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불안했다.


왕은 악에 받쳐 계속 송시열을 자극했다. 늙은 생강 같은 송시열을 상대로 자꾸만 날을 세웠고, 송시열이 적으로 돌리는 자들을 도리어 곁에 두려고 애썼다. 왕이 송시열을 미워하는 건 세살박이 어린애도 얼마든지 눈치챌 수 있을 법 했다. 그러니 송시열이 가만 있을 리 만무했다. 자기를 천거해서 벼슬길을 열어준 백헌 이경석조차, 호의가 변한 걸로 혼자 오해하고 조롱하며 찍어냈던 그 송시열이었다. 백헌 이경석조차 이빨빠진 늙은이로 만들었던 그 송시열이, 왕을 오줌싸개 어린애로 만드는 것 쯤은 일도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에, 오두인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전하, 만수전에서 기별이 왔사옵니다."


갑자기 장지문 밖에서 들리는 두광의 목소리에 숙종은 턱을 치켜 허공을 쳐다보았다. 마치 보이지도 않는 만수전을 돌아보듯, 눈도 거들뜨고서.


"기별?"

"예, 전하. 만수전에서 시녀 아이가..."


두광의 목소리에 숙종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동안 만수전에서 왕의 눈에 들게 하려고 지밀나인을 한사람만 주야장천 심부름을 보냈었다. 이번에도 그 아이일 터였다. 숙종은 오두인을 힐끗 돌아보았다.


"안 나가보시오?"

"예? 아, 예...."


오두인이 별 생각 없이 대꾸하며 일어섰다. 헌데 무릎에 붙은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이게 누구 머리카락인지. 무릎쪽에 붙었으니, 오두인 자신의 머리카락일 터였다. 등허리를 구부정히 굽힌 채로,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툭툭 떼집고선, 오두인은 숙종에게 고개 숙여 보이고서 물레걸음으로 물러났다. 장지문이 열리고, 오두인이 문틈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숙종은 차가운 말투로 두광에게 명했다.


"들라 하라."

"예, 전하."


대청에서 지밀나인들과 함께 섬돌 쪽을 보고 콧잔등을 실룩이며, 두광이 답했다. 오두인은 대청으로 나오다가 그런 두광의 일그러진 콧잔등을 보고 멈칫했다. 만수전이 싫은 건지, 만수전에서 보낸 저 계집이 싫은 건지, 아니면 너무 좋은 건지, 두광의 태도가 묘했다.


이상한 기분에, 오두인은 동쪽섬돌 쪽으로 걸음을 내쳤다. 섬돌을 딛고 신을 신으려는데 발치로 계집의 그림자가 어렸다. 맹랑하게도 동쪽섬돌로 오다니. 미간을 찡그리다 오두인의 눈시울이 꿈틀했다.


이 아이는?


피로감에 반쯤 감겼던 두눈이 번쩍 뜨일 만큼, 계집의 옥안은 화려했다. 시뻘건 모란꽃이 생각나는 아이였다. 중궁이 세상을 뜬지 얼마나 되었다고, 왕의 눈에 들겠다고 시뻘건 연지를 입술이며 볼에 바르고, 사향냄새까지 폴폴 풍기는 참이었다. 뜨악한 눈길로 계집을 돌아보며, 오두인은 주춤주춤 신을 신고도, 또 서슴서슴 월대를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와, 오두인은 또 동온돌을 힐끗 쳐다보았다. 장지문이 열렸는지, 계집이 동온돌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만수전 지밀나인이라?


숙종은 숙종대로, 눈앞에 들어온 만수전 계집의 요염한 얼굴을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한눈에도 자신의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보였다. 이 계집이 올 때마다 사향냄새가 심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사내를 유혹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한, 여느 궁녀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였다. 그러고 보니 몇해 동안 줄곧 만수전에서 보내는 지밀나인은 이 아이 뿐이었다. 이 아이만 계속 통명전을 찾는 게 결코 우연은 아닐 터였다. 대왕대비 조씨가 이 아이로 점찍고 계속 줄을 대려 하는 게 보였다. 측근으로 후궁이라도 심어 자기 입지를 다져두려는 속내였다. 너무 빤히 그 속이 들여다 보여서, 그저 웃음이 났다.


"그래, 또 너로구나?"


왕이 웃었다. 실오라기 같은 미소로. 옥정은 흠칫 놀라 두눈을 치떴다. 그동안 왕이 자신을 살갑게 맞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처음으로 눈길을 주었다. 가슴이 뛰었다.


"예, 전하."


옥정은 다소곳이 눈길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녀를 보는 숙종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대왕대비 조씨가 다른 계산이 있으니 계속 저 아이를 자신에게 들이밀 터였다. 조씨의 집안은 송시열과 척을 졌다. 겉으로야 서인이란 당에 몸담았지만, 발은 내뻗었다. 언제든 건너갈 수 있도록. 그 다리가 될 계집이 눈앞에 있었다. 이미 숙종 손으로 남인들을 죄다 베어낸 뒤니, 그나마 남은 곁가지가 저 계집 하나일 터였다.


"그래, 뭐라 하시더냐?"

"대왕대비마마께선 무양하신데...전하께오서 자꾸 어의들을 보내시오니...없던 병도 생기려 하신다고...그러니 전하의 천안을 한번 더 뵈어야 나으실 것 같다고...그리 이르셨나이다."

"아, 문안을 못 가서 섭섭하신 게로구나?"

"어쩌면요."

"그럼 뵈야지. 뵈야지."


숙종은 옥정이 말하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간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두 자전의 문안을 차일피일 미뤄왔다. 웬만해선 양화당까지 걸음을 내치지도 않고, 동온돌에서 신하들을 접견까지 했다. 하지만 숙종은 걸음을 내치다가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서안을 힘껏 그러쥐고, 숙종은 힘없이 말했다.


"아, 이런...내 몸이 이래서..."

"정 힘드시면...어찰 한통만 적어주시면...제가 웃전께 전해드리겠나이다."


옥정은 고개를 들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말했다. 왕이 요즘 양쪽 자전에 발길을 뚝 끊었다. 중궁이 두창에 걸린 뒤부터였을까. 옥체미령을 핑계로, 동온돌에서 두문불출했다. 보다 못한 대비 김씨가 동온돌로 들이닥쳤다가 홧병이 나서 또 몸져누웠다. 대왕대비 조씨가 서궐에 남아 있다가 어의궁을 거쳐 동궐로 돌아오고도, 왕은 오히려 어의들만 계속 보냈다. 그리고 자시도 시시때때로 어의를 불러들였다. 왕실에 남은 셋 모두 '옥체미령玉體未寧'인 셈이 되었으니, 서로 문안이고 자시고 할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왔다. 멀쩡한데도 자꾸 어의만 보내고 서로 왕래를 딱 끊어버린 왕의 속내가 궁금해서.


"아, 글로 전할 얘기가 아닌데."

"하오시면..."

"말로 전하거라."

"그리 해도...되옵니까?"

"네년이 제대로 전하는지, 내 다 아는 수가 있으니. 걱정 말고."


왕의 말은 옥정으로선 알 듯 모를 듯 했다. 만수전에도 눈귀가 있다거나, 아니면 왕이 또 다른 누군가를 보내거나, 아니면 나중에 몸소 대왕조씨를 만나거나, 어떻게든 알아낼 방도가 있다는 말 같았다. 옥정이 더 따져 묻기도 전에, 왕의 서늘한 옥음이 이어졌다.


"할마마마께오서 어의들을 좀 붙잡아두셔야, 어의들을 도성 안에 붙들어둘 수가 있다고, 그리 전하거라."

"아...예. 전하."


계집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숙종은 나른히 몸을 금침 위에 뉘이고 허공을 보았다. 만수전도 여간 갑갑한 게 아닐 터였다. 계속 증손주인 숙종이 이 어의, 저 어의 밀어넣는 참이라, 꾹 참고 계속 아픈 시늉을 하느라고 좀이 쑤시기도 할 터였다. 그런 만수전도 거저 해줄 리가 없으니, 슬쩍 주판알을 튕겨보고 자신에게 바라는 바를 들이밀 터였다. 그 계산을 하니 숙종은 이마가 괜히 뻐근해졌다.


문득 숙종은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아직도 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계집이 물러갔으려니 생각하고 드러누운 터였다. 하지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건, 자신이 너무 골똘히 생각에 잠겼거나, 아직도 계집이 나가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숙종은 미간을 찡그리고 두눈을 치떴다.


"아직도 안 간 게냐?"

"제 웃전의 답을 전해야겠기에..."

"답? 답을 미리 준비해 왔다고?"


숙종은 두눈에 초점이 팍 들어가서 계집을 보았다. 이미 대왕대비 조씨가 저 계집을 보낼 때 작정을 하고 보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뒷방 노인네가 이렇게까지 숙종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볼 줄은 몰랐다. 뭔가 이상했다.


"이미 제 웃전께오서도 짐작하신 바...웃전께오선 전하께오서 미수공의 제안에 어떤 답을 내놓으실 지 궁금하다 하셨습니다."


숙종은 귀를 의심했다. 미수공의 제안에 어떤 답을 내놓을 지 궁금하다고? 미수 허목은 남인 소생 원자를 제의했다. 남인 계집한테서 소생을 보란 얘기였다. 그 남인 원자로 판을 뒤흔들고 송시열을 조롱하겠다는 얘기였다.


헌데 눈앞엔 저 맹랑한 계집이 있었다. 계집의 뒤엔 만수전이 있었다. 그 뒤엔 또 이미 허목이 있었다. 기가 막혔다.


"너로구나."

"예?"


옥정이 멍청히 되물었다. 하지만 그 두눈은 아무 것도 모르질 않았다. 멍한 동공 속에선 묘한 불꽃이 넘실거렸다. 이미 누군가가 저 아이의 눈속에 불을 지폈을 터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눈을 보고 나니, 숙종은 굳이 대꾸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답을 이미 아는 계집한테 대답하는 바보가 되기는 싫었다.


저 계집이 누구더라.


숙종은 머릿속을 더듬었다. 만수전 지밀나인, 장씨. 얼굴과 성씨는 기억했다. 일부러 대왕대비 조씨가 그의 앞에서 매번 이름을 꼭꼭 불러대어 이름도 사실 기억했다. 옥정아.


장옥정.


그냥 머릿속에만 있는 이름이었다. 헌데 끄집어내려니, 어쩐지 무서워졌다. 생선등뼈를 목울대로 쑤셔넣는 기분이 아니라, 뱃속에서 자라고 자란 솔가지 같은 걸 목울대로 뽑아내야 하는 기분이었다. 숙종 자신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온갖 뾰족뾰족한 것이 잔뜩 자란 계집이, 있었다.


역관 장현의...종질이랬나.


인동장씨仁同張氏. 그러고 보니 관향貫鄕도 생각났다. 사대부끼리도 명가가 있듯, 중인끼리도 명가가 있었다. 사대부들이 이름난 사대부가문끼리 혼인하듯, 중인들도 이름난 중인집안끼리 혼인했다. 그렇게 혼맥을 이루고, 자신들의 이권을 지켜왔다. 저 인동장씨들이 아무나하고 혼인하지도 않았다. 초계변씨草溪卞氏가문을 비롯해서 조선에서 온갖 자금을 틀어쥔 거부와 사돈을 맺고, 그런 식이었다. 그러니, 저 장옥정이란 계집도 보나마나 인동장씨와 초계변씨 같은 금덩어리들의 일원일 터였다.


"가거라. 더 할 얘기 없으니."


숙종은 차갑게 식은 말투로 말했다. 귀찮았다. 계집이 너무 오래 있었다. 지겨웠다. 중궁이나 우희 빼곤 동온돌에 여인이 오래 머문 기억이 없었다. 웬만하면 청소조차 두광이 했다. 여인의 손길이나 발길이 닿은 적이 별로 없었다. 여기 동온돌은 중궁의 말고는 다른 여인의 숨결조차 깃들어선 안되었다.


"예?"

"다 알아들었잖나."

"아니 소녀는..."

"가라고."

"전하의 대답을 듣고 나가겠사옵니다."

"뭐라?"

"듣고...나가겠사옵니다."


옥정은 발칙하게도 두눈을 똑바로 뜨고서 숙종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왕은 당장 자신을 내쫓지 못할 터였다. 이미 자신의 등뒤에 대왕대비 조씨가 있었다. 그리고 허목을 위시한 남인잔당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 입을 모아 얘기했다. 왕은 송시열을 찍어낼 수 있는 자금이 필요하다고, 또 송시열에게 칼을 맞댈 남인잔당들도 필요하다고, 더구나 후사를 이어줄 계집도 필요하다고. 그러니, 이 장옥정이 필요하다고.


"네년 목이라도 베어주랴?"


왕의 대답은 너무도 살벌했다. 가슴이 섬뜩해져서, 옥정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선 동공까지 굳어버렸다. 왕의 대답이, 자신의 목을 베어주겠다는 얘기인지. 놀라서 쳐다보는데, 그녀를 보는 왕의 두눈엔 모서리가 있었다. 사람 눈에 모서리가 있을 턱이 없는데도, 온통 뾰족했다. 그런 가시돋친 눈동자를 보니 그저 무서웠다.


"복수...아니 하시려구요?"


갑자기 숨이 가빠져서, 옥정은 딸꾹질까지 나려 했다. 무서웠다. 정말로 왕이 목을 베려 들 것 같아서, 숨도 쉬기 힘들었다.


"복수? "


왕이 웃었다. 그 앵도라진 눈빛은 미친 사람 같았다. 그저 낯설었다. 언제는 낯익었나.


남의 사내. 한번도 그녀의 것인 적 없었던 사내. 이제야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궁만 죽어없어지면,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거머쥘 생각만 하고, 그 생각에 빠져서 잠시 망각했다. 눈앞의 사내가 결코 자신이 함부로 굴어선 안 되는 상대라는 것을.


"복수?"


똑같은 말 두번세번 내뱉기 싫어하는 왕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저 왕이, 자꾸만 되뇌이며 차갑게 웃어대는 참이었다. 비웃는 눈으로.


옥정은 해연히 놀란 얼굴로 숙종의 눈치를 보며 물레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등뒤로 장지문이 닿았다. 등뒤의 지밀나인들이 문을 열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려서 수군대는 게 들렸다. 느껴졌다.


"얼른 나가지 못할까!"


숙종은 짜증이 났다. 지밀나인들이 장지문을 후딱 열지 않는 것도, 계집이 제 손으로라도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 것도,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다 화가 났다.


"예, 예..."


옥정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등뒤로 장지문이 삐꺽 열리는 것을 느꼈다.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황급히 몸을 가누며 문틈으로 빠졌다. 그렇게 그녀가 서둘러 물러나와 대청을 가로질러 섬돌에서 당혜를 신는데, 여기저기서 따가운 시선들이 꽂혀들었다. 옆얼굴로, 이마로, 정수리로, 목덜미로...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드니, 그냥 지밀나인들의 시선인가 싶었다.


옥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월대 아래로 계단을 내려오는데, 아래에서 누군가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는 참이었다. 천담복 차림일 뿐이라 복색 만으론 당상관인지 아닌지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곧 바로 알아차렸다.


도승지 오두인.


아까 물러났던 도승지가 월대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언제 나오나 살핀 모양이었다. 옥정은 흠칫 놀라 두눈을 치뜨고 정오의 햇살을 내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이 부셨다. 눈살을 찡그리며 도로 도승지를 쳐다보는데, 도승지가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는 참이었다.


"왜 이리 늦게 나온 게냐?"

"예?"


옥정은 당황해서 두눈을 쭈뼛거리며 사방을 살폈다. 아무리 웃전 자의대비 조씨가 뒷배라도, 여기서 끌려가기라도 하면 아무 힘도 못 써줄 터였다. 내금위로 있는 오라비라도 있으면, 또 모를까. 그녀는 오라비 장희재가 주변에 있는지 살피고, 서온돌 기둥 쪽에 숨은 그림자를 알아차렸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바른대로 대지 못할까!"


오두인은 소리죽여 나직하게 다그쳤다. 조금이라도 큰소리를 내면 왕의 귀에 들어갈 지도 몰랐다. 월대 아래가 아니라 통명문 밖에서 이 아이를 족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치는 참이었다.


"그냥...만수전에 드는 어의 문제로 전하께 웃전의 말씀을 전했을 뿐이옵니다."

"그래?"


오두인은 온전히 믿지 않는 듯이 고개만 갸웃하며 옥정을 노려보았다. 미간이 계속해서 실룩였다. 계집이 너무 오래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동온돌에서 너무 늦게 나왔다. 뭔가 계집이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오두인은 미심쩍은 눈길로 통명전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니, 여기저기 숨은 낮새들이 짹짹거리며 저승전에 뭐라도 전할 터였다. 오랜만에, 사돈인 대비 김씨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송시열이 머무는 노도 객사 앞 둔덕은 고샅마다 속속들이 유생들이 새까맣게 뒤덮었다. 인근 주막에서 콩죽이나 국밥 등을 시켜다 놓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먹으면서 허기를 면하고, 그러다 저녁이 되어 추위를 못 견디고 또 물러가고, 그 와중에도 누비두루마기나 이불 같은 것을 챙겨와서 밤새 앞을 지키며 눈도장을 열심히 찍어댔다.


"육창六昌이다!"

"뭐? 어디?"

"저기, 육창!"


갑자기 둔덕 쪽을 보며 유생 하나가 염지 끝으로 가리켜 말하자, 유생들이 움찔 놀라 주춤주춤 비켜섰다. 갑자기 썰물 끝에 풀등이 열리듯, 웬 젊은 유생 여섯이 담황색 행의를 갖춰 입고 떼지어 둔덕을 올라왔다. 그 뒤로 또 깃이 푸른 청금복을 차려입은 성균관 유생들 일백이 줄지어 뒤따랐다.


"저..."

"육창六昌?"

"진짜 육창?"


유생들은 두눈을 끔뻑이며, 담황색 행의를 입은 여섯명의 유생들을 쳐다보았다. 진짜 육창이라고?


육창六昌


金昌集김창집

金昌協김창협

金昌翕김창흡

金昌業김창업

金昌緝김창즙

金昌立김창립


젊었다. 다들 젊었다. 앞의 셋은 서른而立 즈음이었고, 뒤의 셋은 스물弱冠 즈음이었다. 맨앞에 선 유생은 서른 초반의 나이로, 코밑이며 턱밑으로 짤막한 수염이 거뭇거뭇했다. 그 뒤의 유생은 갓 서른이 되어, 눈두덩에 흐릿한 주름이 졌다. 세번째로 걸어오는 유생도 턱밑이 거뭇거뭇한데다 똑같은 뱁새눈이었다. 나머지 셋은 수염이랄 것도 없이 그저 앳된 얼굴이었다.


"와...영상댁 자제들..."

"육이 다 몰려왔네."

"뭐냐. 무섭게."

"야, 빨리 비켜, 비켜."


여섯이서 얼굴들이 엇비슷해 보이긴 했다. 하나같이 눈두덩에 주름이 져서 뱀눈처럼 보이는 뱁새눈에, 길쭉하게 뻗은 마늘코에, 얄팍하게 생긴 뱀입술이며, 둥글납작한 제비턱이라, 누가 봐도 한핏줄 한형제였다. 다시 봐도 닮았다. 앞으로 볼록한 광대뼈에 옆으로 움푹한 옆턱까지 너무도 판박이었다. 차남 김창협, 사남 김창업은 특히 떡살로 찍어놓은 듯이 똑같았다. 보다 보면 누군가를 생각나게 할 만큼.


"야 어떻게 저렇게 똑같냐."

"저러니 육창이지."

"몰려다니니까 더 똑같아 보여. 길쭉길쭉."

"영상대감을 아주 쏙 빼닮았네."

"떡살로 찍었나. 어떻게 저러냐."


누가 육창六昌 아니랄까봐, 여섯이 몰려다니니, 온몸에서 맹렬한 기운이라도 내뿜는 것 같았다. 유생들은 저마다 한두발짝 비켜서서 길을 터주고도, 괜히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맨뒤에서 걸어오던 육창의 막내가 해맑게 웃기 전까지는.


"고름 풀렸다."


속삭이듯, 혹은 노래하듯 어느 앳된 유생의 행의 앞섶을 구부린 염지 끝으로 콕 가리키며 해 씩 웃고서, 막내 김창립이 형들을 뒤따랐다. 고름을 지적당한 스물 남짓한 나이의 유생이 얼굴을 붉혔다. 왠지 홀린 기분이었다. 유생이 주춤주춤 고름을 여미는데, 김창립이 고개를 숙이고서 제 고름도 고쳐매곤 유유히 지나갔다.


"저 막내가 옥룡玉龍...김창립?"


열댓이나 되었을까. 여섯 중에서 인물이 제일 훤했다. 웃으니 더 환했다. 수염은 커녕 솜털도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유생은 얼떨떨한 얼굴로 옆엣유생에게 거듭 물었다.


"맞소? 옥룡 김창립? 영상댁 막내라던..."

"맞는데 막내는 아니오."

"예? 무슨...막내 맞는데."

"아...뭘 모르네. 원래 그 밑에 하나 더 있어서 초명이 칠룡이었는데, 그냥 죽었어."

"예? 아..."


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물정 어두운 듯한 유생의 행동에 옆엣유생은 인상을 쓰고 눈을 흘겼다. 턱 쪽에 붉은 곰보가 좀 있는 것 빼곤 인물이 꽤 반반했다. 방금 지나간 김창립과 나란히 서도 주눅들지 않을 옥안이었다.


"헌데 뉘신가?"

"예?"

"자네 말일세. 여간한 집 자젠 아닌 것 같은데. 어디 문하이신가?"


옆엣유생이 붉은 곰보를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사대부가의 자식이면, 어려서는 외가에서 배우고, 자라서는 처가에서 배우고, 또 본가에서 익히는 것이 관례였다. 그렇게 가학家學을 익히고 이름난 명사를 찾아 배워선, 학문을 완성했다. 그 다음에야 누구 문하입네 내세우고 다녔다. 아무리 이 객사에 묵는 송시열 문하라고 자신들이 쫓아다녀도, 따지고 보면 송시열 제자의 문인일 뿐이었다. 이사명, 이이명 형제가 급제하여 나간 뒤로는 지금 성균관을 주름잡는 자들도 저 육창이었다. 그런 육창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걸 보면, 성균관 문하는 아닌 것 같고, 행색을 보면 약간 병색이 있긴 해도, 귀태가 흘렀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아, 워낙 병약하여, 가학家學만 겨우 익혔습니다."


유생이 고름을 고쳐매며 대꾸했다. 옆엣유생은 미간을 찡그렸다. 가학이라니, 또 어느 문중인지, 외가가 어딘지, 처가가 어딘지, 여러모로 사대조四代祖가 궁금해졌다.


"허면, 누구 밑에서..."


옆엣유생이 묻는데도, 붉은 곰보의 유생은 육창에 정신이 팔려서 들리지가 않았다. 까치발까지 하고 어떻게든 지켜보려 애를 썼다. 이미 성균관 유생들까지 몰려와서 둔덕을 빼곡하게 메운 참이었다. 이젠 서 있는 것도 조붓하니 불편했다. 시야도 자꾸 가려져서 까치발을 해도 보일락 말락 했다. 붉은 곰보의 유생은 주변의 바위를 찾아 딛고 올라가 마저 지켜보았다.


"너랑 또래 같은데. 애다, 애야. 저렇게 어린데 왜 왔다냐."


객사 앞에 이르러 손위인 다섯째 김창즙이 건넨 말에, 여섯째 김창립은 고개를 돌려 힐끗 곁눈으로 보고선 피식 웃었다. 내년이면 약관이 된다고, 이미 동지가 지났으니 약관이나 다름 없다고, 저 손위 형님은 창립 자신을 어린애 취급을 하는 참이었다. 물론 창립 자신이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았고, 또 약관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이미 문재가 형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였다. 애 취급 당할 하등 이유가 없었다.


"좋을 때죠."


애늙은이 같은 말투로, 김창립이 배시시 웃었다. 김창즙은 입을 비죽이며 앞을 주시했다. 이미 큰형 창집과 둘째형 창협이 중문 안으로 들어가버린 참이었다. 김창립은 주위를 돌아보며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손위 창즙에게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형님, 우린 안 들어가도 되겠지요?"

"뭐? 너..."


창즙은 아우 창립이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눈치채고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열다섯의 나이에 떡하니 성균관 유생으로서 제몫을 할 정도로 문재文材가 뛰어난 아우였다. 하지만 아직은 송시열 같은 거물한테 눈도장을 찍는 것보다 친우들과 어울리는 걸 더 좋아하는, 철부지 애였다.


"야, 너..."

"아니 뭐...아버지가 우리더러 몰려다니지 말라고 하셨는데...뭐 하러 같이 들어가요?"

"너...내 말을 뭘로 들었냐. 그래도 대로를 뵐 땐 다같이 뵙고 성의를 보이는 게 낫대도."

"에이. 저 같이 어린애가 들어가면 오히려 아버지께 누가 돼요."

"허. 너 아까 내가 한말 때문에..."

"아니 뭐...우린 뭐 어차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뭐하러 들어가요?"

"야..."

"그냥 저기 협協이 형님만 뵈면 되죠. 우리까진 들어갈 필요도 없고."


창립의 말에 창즙은 입만 쩍 벌렸다. 아우 창립이 말하는 바를 충분히 알아들었다. 송시열은 둘째형 창협만 있으면 되었다. 육창이라 불릴 만큼 조선의 문단을 주도하는 자신들 6형제지만, 단연 발군은 둘째형 창협이었다. 아비 김수항보다도 수려한 외양에 6형제 중 가장 학문이 빼어났다. 너무 출중해서 오히려 어미 안정 나씨가 시름이 컸다. 차남이 너무 뛰어나면 장남 앞길이 막힌다고 외숙을 붙들고 한숨을 쏟아내기도 했다. 물론 자랑인지 걱정인지 모르겠다고, 외숙도 씁쓸해 하긴 했지만. 그 김창협을 대로 송시열도 대놓고 차별했으니. 창즙이 망설이다 중문 쪽을 보는데, 들어가다 말고 넷째 창업이 고개를 뒤로 젖혀 쳐다보았다.


"안 오고 뭐해?"

"가면 뭐 반겨주시나. 우린 그냥 여기가 더 어울려요."


창립의 대꾸에 창업도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치?"

"와. 와. 와. 같이 여기서 다른 유생들하고 어울렁더울렁...술이나 마시자구요."


창립이 술잔을 꺾는 시늉을 해보였다. 창즙은 물론 창업이 일그러진 눈시울로 창립을 돌아보았다. 맙소사, 고작 열댓살인 아우 입에서 술 얘기라니. 하지만 나쁜 제안도 아니었다. 창업은 이미 아우의 술 유혹에 혹해선 중문 안쪽을 쳐다보았다. 이미 큰형 창집과 둘째형 창협에 이어 셋째 창흡까지 중문 안으로 들어가버린 참이었다. 정말 아우 말대로라면,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창협 하나면 되었다. 하지만 큰형이나 셋째형까지 이미 들어가버린 뒤였다. 부디, 나머지 두 형이 수모나 안 당하면 좋으련만.



"우리 중화仲和(김창협의 자字)가 1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내 적전이 되었을 것을."


송시열은 객방에 드러누워 한손엔 주석의 손을, 또 한손엔 창협의 손을 그러쥐고 싱글벙글 웃었다. 이 손주 송주석, 제자 김창협, 이 둘만 보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든든했다. 더 없이 든든했다. 그 아비가 좀 성에 안 차도, 저 아들이면 되었다. 호랑이 같은 아비에 개 같은 자식이라지만, 손주 주석도, 김수항의 아들 창협도, 둘 다 제 아비보다 나았다. 형 만한 아우 없다지만, 둘 다 제 형보다 나았다.


맏이 창집이 미간을 찡그리고 손아래 창협의 눈치를 보았다. 아우와 함께 오는 게 아니었다. 떼어놓고 왔어야 했다. 송시열한테 올 때마다 기분이 참 거시기했다. 자신이 송시열의 눈밖에 나지도 않았는데, 아우 창협이 눈에 들어, 늘 자신만 찬밥 신세였다.


"내...우리 중화仲和와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좀 나가 있어 주겠나? 잠시면 되네."


시열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말뜻은 차디찼다. 창집은 일그러지는 미간을 애써 펴느라 눈머리가 실룩였다. 아무래도 아우와 긴한 얘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꼭 아우여야 하는지. 김창집 자신도 누구 못지 않은 학식과 문재를 지녔다고 자부했다. 동년배에선 최석정이나 이사명과 어깨를 겨룰 만큼은 될 터였다. 헌데 왜 꼭 자신이 아닌 협이만 곁에 두려 하는 건지. 시열이 원망스러웠다.


"저 밖에 제 형님도 계십니다. 두분 회포나 푸시지요."


주석이 손끝을 비스듬히 북쪽으로 찔러보이며 말했다. 대청 툇마루에 있든, 그 바깥 뒤뜰에 있든 송은석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고 창집은 멈칫했다. 서운한 눈빛으로 사위를 뚜렷대곤 마지 못해 일어섰다. 장지문을 열고 대청 툇마루로 나가는 그 뒷모습을 애써 외면하느라고 창협은 고개를 숙였다.


"어찌...형님을..."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창협이 서슴서슴 물었다. 스승 송시열이 맏형 창집보다 자신을 더 높이 쳐주는 바람에, 집안 내에서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참이었다.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집안 공기가 물과 기름처럼 미묘하게 뒤뜨는 듯 했다. 외출 한번 할 때마다, 혹은 전인이 서찰을 가져올 때마다, 식구들이 형과 자신의 눈치를 살폈다. 똑같이 육창六昌이라 불리며 문단을 주름잡는 자신들인데도, 그중 우열과 서열이 뒤바뀌는 참이었다.


"저 아이들은 가문을 걸머진 아이들이니...내 어찌 위험한 일을 맡기겠누."


시열이 차디찬 미소를 띠었다. 창협은 어쩐지 가슴이 섬뜩해져서 눈길을 뚜렷뚜렷 굴려서 주석의 눈치를 살폈다. 주석 역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창협의 눈치를 살피는 참이었다. 두 또래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곤 다시 시열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대청마루를 가로질러 툇마루로 나가다가, 창집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뭔가 들은 것 같았다. 물론 긴요한 얘기는 아직이었다. 툇마루로 나가니 시린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살을 에고 코를 베는 느낌이었다. 귀까지 먹먹해져 어깻죽지에 귀를 비벼대다, 그는 뒤뜰에서 바람을 쐬는 은석을 발견했다.


"인일仁一(송은석의 자字) 형님?"

"바람이 시원해서..."


은석이 서글픈 미소로 답했다. 하지만 피차 동병상련이었다. 속이 홧홧해선지 바깥의 혹독한 겨울바람도 그저 시원하기만 했다. 창집 역시 구슬픈 미소로 답했다.


"저도...뭐 시원하네요."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겸연쩍게 웃었다. 그리곤 또 할 말이 뚝 끊겼다. 어차피 서로 할 말도 없었다. 주석과 창협이 나이가 엇비슷한 것처럼, 그들 역시 나이가 고작 세살차이였다. 한술 더 떠 창집이 손부채까지 하여 목에 대고 바람을 부치는데, 객방 쪽에서 시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저십리城底十里(도성근교)...를 정찰 좀 해줘야겠다. 특히 두모포."


은석도, 창집도 귀를 의심했다. 정찰偵察? 나라 변방을 정찰하란 것도 아니고, 성저십리城底十里를 정찰하라니? 한성부 주변을 정찰하란 것은 곧 내란을 준비한다는 얘기였다. 그게 남인들이 일으킬 내란에 대비하자는 건지, 아니면 서인들이 내란을 도모하자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 없이, 내란이 목적인 게 문제였다.


정...찰?


차마 입 밖에 소리내지 못하고, 창집이 입술만 달싹였다. 뒤따라 툇마루로 나온 창흡이 헛숨을 들이키다 잔기침만 연신 해대었다. 누가 들을세라 창흡이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마저 했다. 그럴 수록 창집이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사방을 경계했다. 누가 들을까 겁나는 말이었다.


"전하께서...재가하신 일이 아니지요? 자칫 역모로 의심을..."


장지문 안에서 되묻는 창협의 목소리가 떨렸다. 창집은 가슴이 철렁해서 또 한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물론 왕이 재가했을 리가 없었다. 그랬으면 김석주를 시켜 재산루의 사병들이나 충장위들에게 정찰을 맡기지, 이렇게 송시열이 은밀하게 창협과 주석에게 따로 일을 맡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무서웠다. 아우 창협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는 건지 따지고 들고 싶었다.


"모르는 척 하게. 우린 모르는 일이야."


갑자기 은석이 손을 뻗어 창집의 팔을 붙잡았다. 창집은 흠칫 놀라 은석을 보았다. 객방 안쪽에서 장지문에 비치는 불빛이, 또 자신에게 부딪혀 은석의 얼굴에 그림자를 비추는 참이었다. 그 그림자로 나뉜 은석의 두 얼굴이,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


"모르...는 일?"


창집은 결코 우둔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송시열이 자신들을 굳이 저 방에서 내보낸 것이었다. 안동 김문과 은진 송문, 그 대를 이어야 하는 장손들인 만큼, 위험한 일에 엮이지 않게 하려는, 그런 배려였다. 그러니 은석도 모르는 척 하자고 자신을 제지하는 참이었다.


"소리 좀 낮추게. 우리 대화도 들릴라."


은석이 더 목소리를 낮췄다. 창집은 몸서리를 취면서도, 곁눈으로 등뒤의 불빛을 보며 그 안의 대화에 집중했다. 밖의 눈귀를 의식하는지, 안의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 더는 들리질 않았다. 아무 것도. 그리고 뒤뜰엔 소름끼치는 정적만 남았다.



동호東湖에 깔린 광주廣州의 섬 일대엔 워낙 왕실과 사대부가의 별서들이 많았다. 세종이 직접 지었다는 화양정華陽亭, 성종 때 한명회가 저자도 건너편에 지었다는 광주廣州 압구정狎鷗亭부터, 저자도 며 그 인근에도 온갖 수월정水月亭을 위시해서 온갖 정자들이 즐비했다. 많은 권세가들이 두모포나 저자도 주변에 정자도 세우고, 별서도 마련해서 경치도 감상했다. 시회詩會도 열고, 또 계회契會도 열었다. 동호의 잔잔한 물비늘에 조각배 띄워서 시도 읊고, 술도 마시고, 그렇게 두둥실 떠도는 배를 타고 풍류도 즐기고...동호는 그런 곳이었다.


"압구정이라..."


홍세태는 예닐곱의 시회詩會 동지들과 함께 언덕 위 압구정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언덕 아래 깔린 모래밭에 내려앉은 기러기떼가 마치 발치에 모여든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괜히 발끝을 저 기러기들이 기나긴 부리로 살살 쪼아대는 듯 했다. 숨가쁜 웃음이 나왔다.


"좋지?"


흑립 아래로 귀와 목을 덮는 휘항揮項까지 받쳐쓴 김창흡이, 다 떨어진 흑립만 쓴 홍세태보다 한결 안정된 호흡으로 말하며 웃었다.


"예, 뭐..."


홍세태는 대답하려다가 또 잔기침부터 나왔다. 그는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시선을 발치에서 떼어, 은비늘이 반짝이는 저 동호의 잔물결을 보았다. 너무 잔잔해서 너무 조용해서, 그냥 맨몸으로 미역을 감아도 될 것 같은 동호엔 섬도 많고, 배도 많았다.


거기, 저자도가 있었다.


동호東湖의 은비늘이 토해놓은 은모래밭이 깔리고, 푸른 닥나무숲이 우거진, 저 아름다운 섬이 오후의 햇살에 더욱 아름답게 비쳤다. 그냥 보기만 해도 좋았다. 호된 강바람에 마른기침이 나오는 것만 아니면.


"왜, 힘드는가?"


김창흡이 홍세태의 등줄기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려주고선 창협을 흘겨보며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뭐하러 예까지 옵니까? 필운대가 어때서."

"지겹지 않으냐."

"지겹긴요. 하나도 안 지겹네요."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살겠냐. 가끔은 고기도 먹어야지."

"춥기만 하지. 어떻게 여기가 더 추워. 필운대 놔두고 여길 왜 와."


김창흡은 미간을 찌푸리고 홍세태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필운대에서 여기 압구정까지 오는 데만 꼬박 한시진도 더 걸렸다. 홍세태는 그새 입술이 시퍼렇게 말라붙은 뒤였다. 여름날도 아니고 겨울날에, 한시진 넘게 걸려 굳이 여기 동호로 와서 그 혹독한 칼바람에 시달리느라. 귀하디 귀한 신분인 자신들과 달리, 저 홍세태는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해서 비루먹은 노마駑馬 같은 신세였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만 해라."


창협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창흡과 창립은 흠칫 놀라 그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둘째형 창협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앖았다. 사실 이 엄동설한에 자신들을 굳이 필운대에서 여기 동호로 데려온 것도 이상했다.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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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해의 그림자 335 17.11.26 169 4 43쪽
» 해의 그림자 334 17.11.20 258 4 43쪽
334 해의 그림자 333 +1 17.11.12 215 5 43쪽
333 해의 그림자 332 17.11.04 242 4 43쪽
332 해의 그림자 331 17.10.28 204 3 43쪽
331 해의 그림자 330 17.10.22 248 6 43쪽
330 해의 그림자 329 +1 17.10.17 419 4 43쪽
329 해의 그림자 328 17.10.13 218 5 43쪽
328 해의 그림자 327 17.10.07 251 6 43쪽
327 해의 그림자 326 +1 17.10.03 307 4 43쪽
326 해의 그림자 325 17.09.29 228 6 43쪽
325 해의 그림자 324 +1 17.09.24 252 4 43쪽
324 해의 그림자 323 17.09.16 233 5 41쪽
323 해의 그림자 322 17.09.07 219 6 41쪽
322 해의 그림자 321 17.08.27 235 3 43쪽
321 해의 그림자 320 +1 17.08.20 308 4 43쪽
320 해의 그림자 319 +1 17.08.15 253 6 43쪽
319 해의 그림자 318 17.08.13 214 5 43쪽
318 해의 그림자 317 17.08.08 262 4 43쪽
317 해의 그림자 316 17.08.01 281 6 42쪽
316 해의 그림자 315 17.07.24 305 5 43쪽
315 해의 그림자 314 17.07.19 283 8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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