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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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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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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0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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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1쪽

해의 그림자 322

DUMMY

"염려 말고 말해 보시오."


숙종은 메마른 눈빛으로 시열을 쏘아보았다. 걸리기만 해 봐라, 이렇게 벼르고 벼르는 듯이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감히 왕의 용안龍顔을 보면 안된다지만, 어심이 의심스러운 나머지, 시열은 나비눈을 흘기며 용안龍顔 중에서도 특히 용안龍眼을 훔쳐보았다.


"송구하오나, 두려운 마음에 감히 헌의하질 못하겠습니다."


시열이 또 고개를 납작 숙이며 사양했다. 숙종은 불덩이 같은 한숨을 애써 삼키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두눈까지 벌개졌다. 참는 것도 한도가 있었다. 아무리 송시열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 해도, 자꾸만 두눈이 시뻘개졌다.


"기탄 없이 말해보래도."

"송구하옵니다."


숙종은 세번이나 권하는데도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 시열의 두눈을 보고 왼쪽 입꼬리를 비틀어올렸다.


"너무 소심하시군."


숙종의 차디찬 말투에 시열의 눈시울이 실룩였다. 지금 여기는 시열 혼자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헌데 왕이 대놓고 직설로 내뱉았다. 소심하다니?


"어찌 그런..."

"잘 아시잖소. 적어도 이 조정에 칼날을 잡을 바보는 없소."


왕의 대꾸는 송시열의 속내를 그대로 꿰뚫았다. 시열은 흠칫해서 숨을 죽이고 앞을 똑바로 보았다. 왕의 용안을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다 보니 그저 내리뜨고 그저 서안 위 어수를 보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왕의 손끝이 서안 위를 꾹꾹 긁어대는 게 보였다. 손톱 반달이 붉어지고 손톱 끝이 하얘질 만큼 힘을 주는 참이었다. 시열은 고개를 숙이며 곁눈으로 가주서를 돌아보았다. 사초에 적지 말라는 눈짓이었다.


붓끝을 놀리던 가주서의 손끝이 움찔했다. 사초를 쓰지 말란다고 안 쓸 수는 없었다. 열성조 어느 임금도 함부로 사초를 검열하지는 못했다. 물론 간혹 검열해서 물의를 빚는 일은 있다 해도,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시열이 사초를 뒤지진 못할 터였다. 헌데도 손끝에서 힘이 풀렸다.


"유신儒臣과 논하라 했는데, 우선 영부사가 저리 몸사리니, 이젠 옥당에서 알아서 할 수 밖에."


숙종의 말에 가주서의 손끝이 움찔했다. 옆에서 교리 임영이 힐끗 눈길을 돌려 자신의 붓끝을 훔쳐보는 참이었다. 가주서는 슬쩍 종이를 옆으로 빼서 임영의 눈길을 피했다. 임영 역시 송시열이 아끼는 제자라 사뭇 눈치가 보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소공조小功條에선..."


임영이 갑자기 입을 열어, 가주서는 자기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임영 역시 주자朱子 운운하는 게, 가주서 자신을 꾸짖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현손玄孫 중에 후사가 될 자의 부인에 대한 글귀가 있으나, 그 아래 그 시어미가 있으면 그렇지 않다는 글귀도 있으며, 증손부曾孫婦 이하를 위한 복服이 없다고는 하지만, 전중傳重(대를 이음)이면 소공복小功服을 입어야 한다고도 되어 있습니다. 하오나 예기禮記에서 이르길, 적자嫡子가 있는 자가 적손이 없으면 그 손부에게 이같이 한다. 라고 되어 있으니, 그 시어미가 있는 자는 전중傳重의 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이옵고..."


다시 생각해 보니 왕과 신료 사이에 오가는 농일 뿐이니,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었다. 자신 이 사초에 적어놔도, 그게 조보에 실릴 일은 없었다. 더구나 실록에 실릴 리도 없었다. 그저 시열의 눈길을 피해 대충 써놓기만 하면 되었다. 아무도 못 알아볼 만큼 전서를 휘갈겨 쓰면 그만이었다.


"대왕대비의 복제는 예경禮經과 예설禮說을 아무리 상고해 봐도, 이미 근거가 없사옵니다. 이는 대행왕비가 전중傳重(대를 이을 후사를 낳음)할 수 없으니, 그 입을 복服이 없는 바, 입을 의리義理도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도 옆에서 임영이 말하는 참이었다. 가주서는 흠칫해서 두눈을 꿈틀했다. 자신이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옆에서 꽤나 장문의 의견을 피력한 듯 했다.


가주서는 흘낏 임영의 눈치를 보았다. 너무 길어 빠뜨렸다 해도, 임영 본인이 품한 말이니 본인은 기억할 듯 했다. 특히 왕에게 뭔가 품할 게 있으면, 신료들은 세필로 종이쪼가리에다 써서 달달 외워 아뢰거나, 그것도 안 되면 읽으면서 아뢰거나, 둘 중 하나였다. 워낙 장문이라 쓰다가 다 못 썼다고 말하고 한번 더 불러달라 청하면 될 것도 같았다.


"알았으니, 옥당에서 알아서 하는 걸로 하고, 이만들 나가 보시오."


왕도 지겨웠던지 손을 내저었다. 대충 논쟁도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백포의 신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도 저마다 다리에 쥐가 나든, 몸이 고단했든 비틀대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든 나쁘게 말하든 엉덩이가 몹시 무거워 보였다.


가주서는 두눈을 힐끔거리며 행연과 사초를 주섬주섬 챙겼다. 어서들 나가자고 보채고 싶은 참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좀처럼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다들 어쩐지 찜찜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주서가 애먼 사초만 구기적구기적거리는데, 드디어 송시열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오면..."


송시열이 먼저 일어나서 숙종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보이고서야 나머지 당상관들도 품계 따라 하나둘씩 주춤주춤 일어섰다. 시열이 너무도 심기불편한 기색이라, 다들 서슴서슴 눈치만 보았다. 시열이 또 한번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내쳤다.


그 뒤에서 수항도 그대로 시열을 뒤따랐다.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상진이 서너발짝 걷다 말고 멈칫하여 조사석을 쳐다보곤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동온돌을 나섰다. 조사석이 숙종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서 숙종에게 가져다 바치고선 이내 걸음을 떼어 분합문 쪽으로 갔다. 하나둘씩 우르르 몰려나가는 와중에, 가주서의 등뒤로 숙종이 차갑게 말했다.


"토씨 하나 빼놓지 말거라. 사관에겐 쓸 권리는 있어도 더하고 뺄 권리는 없으니."


가주서는 흠칫 놀라 숙종을 돌아보았다. 언제는 왕이 이거 쓰지 마라, 저거 쓰지 마라 했던 것 같은 건 착각일까. 물론 쓰지 마라, 빼지 마라, 이런 압력은 왕만 넣는 게 아니었다. 주변의 서인들도 감놓아라 배놓아라, 왈가왈부 하는 편이었다. 그나마 송시열은 입밖에 내진 않았으니, 두눈 질끈 감으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사초로 써서 넘긴다고 조보로 나갈 일도 없을 뿐더러, 왕의 붕어 후에도 실록에 나갈 리도 없었다. 적어도 서인이 집권하는 한은.


"저..."


가슴 속에 싹튼 한가지 불안에, 가주서는 숙종을 살짝 돌아보았다. 감히 왕의 용안을 함부로 쳐다볼 수는 없다 해도, 괜히 속에서 무슨 질문인가를 내뱉고 싶어서 목젖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왕이 고개를 드니, 자기도 모르게 울대뼈가 들썩일 정도로,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이만 가보겠사옵니다."


가주서는 목소리가 꽉 잠겨버렸다. 작년에 정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해서 줄곧 사변가주서와 가주서를 왔다 갔다 하고, 또 나갔다 들어왔다 했다. 자신이 수시로 왕의 비위를 건드렸는지, 아니면 왕이 사관을 파리목숨으로 아는지, 보름도 못 가서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중궁이 두창으로 판명되고 또 왕이 심기가 불편해선지 나흘 만에 갑자기 전임을 쫓아내버리고 자신을 앉혔다. 어차피 자신도 며칠 못 가서 또 쫓겨날 터였다. 어차피 내쳐질 테니, 미친 셈 치고 여쭤보고 싶은 호기심이 자꾸만 목젖을 간질였다.


혹시 또 환국을 하시려는 건?


아무래도 중궁이 훙薨하고 나서 어심이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서인에 대한 반감을 꾹꾹 억누르다가도 무심결에 내비치는 느낌이었다. 물론 남인 한둘 쯤 조정에 불러들여 밥그릇을 나누는 일 쯤이야, 그다지 개의치는 않았다. 그냥 싫은 놈 얼굴만 안 보면 되었다. 꼭 남인이라고 보기 싫은 것도 아니고, 꼭 서인이라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기 싫은 놈이 남인에 더 많을 뿐이었다. 그러니, 환국만 아니면 되었다.


"다 썼는가?"

"아, 예, 전하..."


가주서는 묘한 눈빛으로 자신이 장지에다 써놓은 사초를 내려다 보았다. 초서와 전서, 예서를 뒤죽박죽 섞어놓아, 오로지 자신만 알아볼 수 있었다. 왕이 검열한다고 알아볼 턱이 없었다. 문제는 송시열이었다. 그 학식이면 전서도 한눈에 알아볼까 겁이 났다.


"허면 더 앉아있거라. 오늘 좀 바빠질테니."


왕이 분합문 틈으로 비치는 김수항과 송시열의 모습을 노려보며 가주서에게 말했다. 가주서는 분합문쪽을 돌아보고 흠칫했다. 웬일인지 분합문이 아직도 닫히질 않았다. 자신이 나오질 않으니, 저 둘이 괜히 의심이 든 모양이었다.


"아, 예..."


가주서는 불안히 숙종을 돌아보곤 또 분합문 틈으로 비치는 김수항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김수항의 눈초리가 매섭게 번뜩였다. 저 날카롭게 찢어진 뱀눈이라니. 마주하는 것 만으로 살떨리게 무서웠다. 두손으로 청단령 자락을 꽉 그러쥐고 고개를 돌렸더니, 임영도 나가다 말고 힐끗 쳐다보는 게 곁눈으로 비쳤다.


"주상께서 저 윤가한테 뭐라시던가?"


가주서가 늦게까지 남는 게 드문 일도 아닌데도, 김수항은 괜한 의심이 불같이 일어서 교리 임영에게 물었다. 임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길을 힐끗 돌려 가주서를 보았다.


"글쎄요, 천천히 다 쓰고 나가라고 하시는 것 같던데..."


임영은 제대로 못 들었는지 '어'로 들은 걸 '아'로 바꿔 말했다. 확신이 없어서 긴가민가 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송시열이 아끼는 제자들 중 한명이라, 김수항은 더는 불신할 수도 없었다. 줄곧 송시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온 자이니, 두말 할 것도 없었다.


"그래?"


미심쩍은 기분이 남았지만, 수항은 더는 수상쩍게 여기질 못했다. 하지만 섬돌로 내려설 때 다소 시끄러웠으니, 자신들보다 젊은 임영이라도 제대로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수항은 마지막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섬돌로 내려섰다.


"뭐라던가?"

"그게...""

"왜? 뭐 문제라도 있나?"

"다 쓰고 나가라 하셨나 봅니다."


수항이 '어'도 '아'도 아닌 '·'투로 고쳐서 애매하게 답했다. 시열의 눈초리가 매섭게 번뜩였다. 이미 왕이 가주서를 눌러앉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그 속내가 짐작이 되었다. 왕은 아까 칼자루 운운한 얘기를 빼지 말고 쓰라고 가주서를 압박한 참이었다. 어린 왕이 벌써부터 사관의 사초에 감놔라 배놔라 간섭을 하다니. 기가 찼다.


"다 쓰고 나가라?"


송시열은 기가 막힌 얼굴로 동온돌을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온갖 막말을 하고도, 적나라히 쓰라고 사관을 억압한 게 가당치도 않았다. 동온돌을 쏘아보는 시열의 두 눈에 불씨가 이글거렸다. 그 표독한 눈씨에, 곁에 선 수항마저 가슴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가세."


시열은 수항에게 차갑게 눈짓하고 한발한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여기엔 자신들이 거처할 여막도 없었다. 왕이 중궁의 급서急逝를 아직도 받아들이질 않고 버티는 탓이었다. 더 있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스승님, 지팡이는..."


임영이 섬돌로 내려서며 시열을 보더니 얼른 지팡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도 지팡이를 보지 못한 듯 했다. 더러 지팡이도 없이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먼길을 왔으니 지팡이가 있었을 터였다. 그런 임영을 보고 송시열은 아차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빈손이었다. 이미 노도 객사에서 조보에 화풀이를 하느라 깜빡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리로 떠나올 때 누군가는 지팡이를 챙겼을 터였다. 시열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또 동온돌 분합문이 보여서 울화가 치밀었다. 청의대신請議大臣이란 문구가 또 생각나서 속이 홧홧했다.


"그냥 가지."


시열은 심드렁히 말하고선, 또 한번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떼었다. 월대를 내려서는 걸음걸이가 불안했다. 임영이 흠칫해서 시열의 옆으로 다가섰다. 차마 스승의 그림자도 함부로 밟을 수 없는 탓에 앞에서 가로지를 수도 없었다. 임영은 주위를 살피며 시열의 왼쪽으로 한발짝 나서며 무릎을 낮추었다. 시열이 그의 오른팔꿈치를 잡았다. 임영은 한발씩만 앞장서서 시열을 안전하게 인도했다. 지팡이 노릇도 대신하는 제자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시열이 임영의 오른팔에 의지해서 월대를 내려가서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등뒤에서 누군가 숨찬 목소리로 소리쳐 불렀다.


"영부사 대감!"


시열이 뒤돌아보니, 김두광이 두손에 웬 지팡이를 들고 숨가쁘게 달려오는 참이었다.


"상장喪杖?"


시열은 지팡이를 미심쩍게 쳐다보며 수항과 눈빛을 교환했다. 수항 역시 지팡이를 보고 달가운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눈을 찡그리는 바람에 눈빛이 더 짙어지기까지 했다.


"잠시, 잠시만요."


시열의 뒤로 바짝 다가서서야 비로소 멈춰서서 두광이 숨을 골랐다.


"전, 전하께서 하사하시는 거라고..."


두광의 말에, 시열의 얼굴이 굳어졌다.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그 입가에 미세한 경련까지 일었다.


"전...하께서?"

"예, 지팡이도 잊고 오신 모양이라고..."

"귀도 밝으셔."


수항이 구두덜거렸다. 시열은 두눈을 지릅뜨고 김수항을 비껴, 그 어깨너머로 통명전을 돌아보았다.


다 들렸어?


아무래도 왕이 동온돌에 틀어박혀선 월대에서의 대화도 엿듣는 모양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자신이 월대를 오를 때만 해도, 안에서의 대화가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물론 늙어가며 시나브로 귀먹어버렸다곤 해도, 그래도 웬만큼 젊은 연배보다도 귀밝은 편이었다. 물론 효종이나 현종도 귀가 밝긴 했다. 애초에 개국조에 정전과 편전을 지을 때만 해도, 신료들의 목소리를 왕의 귀로 모아주거나, 또 왕의 목소리를 신료들의 귀로 퍼뜨려주는 구조라 들었던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양화당이나 동온돌은 그런 구조일 리가 없었다.


어떻게 들리지?


시열은 아무래도 찜찜해서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궁에는 눈귀가 많으니, 누군가 왕의 밀정 노릇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여기 월대를 지키는 금군들이나, 대청의 궁인이나 내관들이 전했을 수도 있었다. 어찌 됐든, 왕이 후의厚意인 척 자신에게 지팡이를 빌려준 사실이 더 중요했다. 고비늙은 퇴물 취급하는 듯 했다. 허공을 보는 송시열의 두눈이 독기를 품었다.


"황감히 받더라 전해드리게나."


시열은 두광에게 답하고서, 두손으로 지팡이를 받아들었다. 두광의 눈빛이 착잡하게 빛났다. 시열은 고개를 숙이고 지팡이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미동도 않고 지팡이만 내려다 보는 시열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며 두광이 불안을 느끼는 순간, 시열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두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복례는 자네가 한 건가?"


시열이 지팡이를 쥔 손을 꿈틀대는가 싶더니, 이내 똑바로 고쳐쥐며 물었다. 왠지 금세라도 그 지팡이로 후려칠 기세였다. 두광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는데, 갑자기 시열의 입에서 뜻밖의 단어가 나왔다.


"예?"


두광은 갑자기 머리가 멍해져서 곧바로 알아듣질 못했다. 복례? 그 찰나의 어리둥절한 눈빛을 시열은 놓치질 않았다.


"자네가 아니군?"


두광은 되묻지 않고 시열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복례를 누가 했느냐가 왜 중요한 걸까. 원래 복례는 차지내관이 하게 되어 있었다. 선대왕 때도 서후행이 맡았다. 하지만 서후행 대신 예조판서 장선징이 몸소 선대왕의 용포를 들고 올라가서 호복례를 치렀다는 말도 있었다. 그건 장선징이 선대왕의 외숙이라서 나섰을 뿐일 터였다. 중궁의 혼을 되돌리는 복례는 가장 가까웠던 내관이나 상궁의 몫이었다. 하지만 두광은 누가 복례를 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네가 아닌 게야?"


한번 더 확인하듯 묻는 시열을, 두광은 또 쳐다보기만 했다. 시열은 눈시울을 실룩였다. 어린 것이 방자하게 자신을 마냥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참으로 고약했다.


"허면 누가 했는고?"

"모르겠는데요."

"네놈이 모르면 누가 알아?"


네놈? 두광은 면전에서 자신을 천것 대하듯이 대하는 시열의 오만에 치를 떨었다. 물론 천것은 맞았다. 웃전들이 미리 후궁으로 점찍고 지밀에 심어두는 궁인들 중에나 멀쩡한 양가 출신들도 더러 섞여 있다지만, 그저 수족으로 삼으려고 데려오는 내시 중에는 양인은 극히 드물었다. 궁핍한 양민들이 군입을 덜겠다고 어린 조카나 처조카 등을 거세시켜 들여보낸 것이면 모를까. 하지만 여관이든 내관이든 궁노宮奴 취급 받는 건 똑같았다. 후궁도 천출이라 얕잡아보는 사대부들의 행태를 생각하면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지만서도. 그래도 왕의 빈어나 수족들조차 첩이니 종이니 하며 비천하게 여기는 저들이, 장차 왕자인들 귀히 여길까...그게 의문이었다.


"모른단 말이지..."


시열의 혼잣말에 두광은 시큰둥히 또 쳐다보았다. 그런 두광의 눈길이 못내 짜증이 나서, 시열은 또 한번 헛기침을 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게트림이 섞인 듯한 그 헛기침에 두광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왜 저래?"


어쩐지 생선비린내가 나는 듯 해서, 두광은 코끝을 실룩이다 고개를 비꼈다. 송시열이야 복어에 환장하니, 또 어디서 복어찜이라도 먹은 모양이라고 무심히 흘려넘기며, 두광은 그가 집요하게 캐물었던 복례나 다시 한번 곱씹어보며 고개를 천천히 갸우뚱했다.


누가 복례를 한 거지?

하기는 한 건가?


두광은 혼란스런 기분에 고개를 흔들며 입이며 코로 한숨을 훅훅 내뿜었다. 그러다 또 한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복제를 누가 했는지 모른다는 건...언제 했는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복례를 했다고 다들 한 목소리로 우기면서, 누가, 언제 했는지도 모른다니. 뭔가 잘못되었다. 한참 잘못되었다. 두광의 불안한 시야로, 수항과 함께 동협문으로 빠져나가는 시열의 뒷모습이 비쳤다. 무슨 앙심을 품었는지, 그 걸음걸이가 사뭇 사나웠다. 지팡이를 짚는 둥 마는 둥, 오히려 실수인 듯 고의인 듯 지팡이 밑을 차고 또 차며 걷는 참이었다.


누가 복례를 했는지 아무도 모른단 말이지.


시열은 그 사실만 곱씹었다. 누가 복례를 했는지 아무도 모르니 왕이 더 중궁의 생존을 믿으려 드는 걸 지도 몰랐다. 그저 복례도 않고 다들 쉬쉬하며 덮었을 뿐인데. 다들 왕의 눈과 귀를 속이고 도둑장례를 치렀을 뿐인데. 그래서 더, 오히려 왕이 중궁의 죽음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라도 중궁을 내놓으라고 여기저기 생떼를 쓰고 강짜를 부리는 느낌이었다.


믿지 않으면 믿게 만들어야지.


아까도 김수항에게 말했다. 시열은 뒤따르는 수항의 사모뿔을 곁눈으로 힐끗 보고 계속해서 걸음을 내쳤다. 어느덧 가마 앞까지 다다랐다. 가마꾼들은 노둣돌 옆에 평교자를 대고서 자기들끼리 노닥이느라 여념이 없는 반면, 미처 지팡이를 건네지 못했던 겸인 놈은 초조히 지팡이를 들고 서성이는 참이었다.


"대, 대감마님...이거...지팡이요..."

"자네...!"


시열은 화가 치밀어, 수중의 지팡이를 뻗어 겸인을 때리려다, 멈칫했다. 왠지 아까 내시 놈의 어깻죽지를 지팡이로 후려치고 싶었던 게 생각났다. 왕의 노비라서 차마 때리지도 못하고 지팡이를 고쳐쥐기만 했다. 왕의 노비는 때리지도 못하고서, 자신의 노비라고 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왕의 노비가 귀하면 시열 자신의 노비도 귀했다. 그래야만 했다.


"어? 그 지팡이..."


겸인이 목움츠리가 되어 고개를 숙이려다, 도로 고개를 들고 시열의 손끝에 달린 지팡이를 쳐다보았다. 방금 상전이 그 지팡이로 후려치려다 꾹 참았다. 엄연히 지금 자신의 수중에 들린 지팡이가 따로 있는데, 상전 손에도 있었다. 이상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보니까 상장喪杖인데."

"받았다."

"누구한테요? 전하...께요?"

"비키거라."


시열은 홧홧한 속을 한숨으로 다스리며, 겸인의 가슴팍을 슬쩍 밀치고서 평교자 옆으로 다가섰다. 가마꾼들이 채 가마를 들기도 전에 먼저 평교자의 교의에 앉아버렸다. 가마꾼들이 한둘도 아니고, 한꺼번에 든다고 무릎이 바로 망가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노둣돌이 없을 때는 늘 이렇게 먼저 타고, 나중에 들어올리는 식이었으니.


"재복아."

"예?"

"전하께 답례로 뭐 하나 보내드려야겠구나. 아주 실한 놈으로."


시열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를 악물었다. 이 은혜는 꼭 갚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갚아야만 했다. 고개를 돌려 통명전 지붕을 쳐다보며, 시열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린 왕에게 자꾸만 모멸감을 받았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만 같았다.



부孚, 부孚...


또 꿈을 꾸었다. 숙종은 올빼미 울음소리가 자꾸만 밧줄이 되어 귀를 친친 감는 듯한 악몽에 시달렸다. 대왕대비의 복제에 관해 왕이 자문을 구하는데도, 자칫 화를 입을까 몸사리며 한사코 마다하던, 그토록 못난 모습을 보였던 송시열이, 꿈에 나와 분풀이라도 하듯, 그 은잿빛 털을 온통 곤두세우고 사납게 울어대는 참이었다.


부孚, 부孚...


꿈자리가 사나워서, 숙종은 더는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이미 온몸의 뼈마디가 모조리 뒤틀리고 등가죽이 못이 박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 그럴 수록 더욱 온몸이 쑤시고 결렸다. 특히 오른쪽 어깻죽지가 자꾸 결리고 아팠다. 뭔가 뾰족한 모서리 같은 게 자꾸 짓눌리며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숙종은 고통에 겨워서 두눈을 실룩이다, 겨우 떴다. 어두컴컴한 허공이 보였다. 그런데 어깻죽지 밑에 뭔가 딱딱하고 뾰족한 게 살을 쑤셔드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숙종은 고함 섞인 신음을 내리르며 두눈을 더욱 크게 뜨며 옆으로 몸을 굴려 벗어났다.


뭐야?


잠결에 느끼긴 했지만, 그 단단하고 매끄러운 질감은 꼭 옻칠을 겹겹이 칠한 나무토막 같았다. 숙종은 손을 뻗어 여기저기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느낌이 섬찟했다.


"불을 밝히거라."


숙종은 나무때기를 오른손에 쥔 채로 사방의 장지문을 돌아보며 날선 음색으로 명했다. 장지문 밖 툇간에서 번을 서던 노상궁들이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답했다.


"예, 전하."


거뭇하던 사방의 장지문이 온통 하얗게 반짝였다. 툇간에서 장지문으로 스며드는 빛에 동온돌도 온통 환해졌다. 숙종의 시야도 밝아졌다. 수중의 물체가, 그 형체가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뭐지?


"전하, 방 안도 밝혀드려야 하옵니까?"


서쪽 장지문 밖에서 두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숙종은 눈시울을 실룩이며 수중의 물체를 똑바로 들여다 보았다. 가운데에 검은 먹물로 그은 선이라든지, 글씨라든지, 뭔가 그려놓고 적어넣은 듯한 도식이 보였다. 어슴푸레한 툇간의 불빛으론 그 형체를 분별할 재간이 없었다.


"그리하라."


숙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안 앞으로 다가앉았다. 이윽고 서쪽 장지문으로 두광의 그림자가 비치는가 싶더니, 두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들어가 보겠나이다."


두광이 불붙인 인광노를 들고 걸어들어왔다. 상전이 새벽녘에 깨어나서 방안을 밝히라 명한 것이 어쩐지 불안해선지, 두광은 문지방을 넘는 순간부터 부지런히 두눈을 굴렸다. 초췌한 안색으로 눈동자만 형형하게 번뜩이며, 서안 위에 한뼘 반 만한 나무때기를 올려놓고 살피는 참이었다.


"이게 뭐냐...?"

"예?"

"누가 내 머리맡에 놓아두고 간..."


숙종은 말하다 말고 눈동자가 요동쳤다.


비훙妃薨?


그 두글자로 손에 들어온 물체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 나무 때기는 한눈에도 소목장이 행자목으로 짜서 그 안에 종이를 끼워놓아 만든, 액자 같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종이는 위에 열다섯칸, 아래에 또 열다섯칸...그렇게 서른칸으로 나누어 한달치 날짜가 표시된, 달력 같은 것이었다. 헌데 누군가 그 달력에 적어넣은 것은 중궁의 발상發喪과 소렴, 대렴 등의 절목이었다. 두광은 주춤주춤 서안 옆 등불을 밝히며 쳐다보았다.


"그건...?"

"얼른 나가거라."


왕의 옥음이 곤두박질치듯 가라앉았다. 두광은 흠칫 놀라 두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예?"

"혼자 있고 싶구나."

"전..."

"개미 한 마리 얼씬도 못하게 하거라."

"예, 예..."


두광이 서슴서슴 대답하며 숙종의 눈치를 보며 동온돌을 나갔다. 숙종은 두광의 뒷모습을 흘끔 쳐다보곤 다시 서안 위 물체에 시선을 못박았다. 나무때기는 한눈에도 행자목으로 짜서 그 안에 한달치 달력 같은 종이가 끼워놓은, 하지만 누군가 그 달력에 적어넣은 것은 중궁의 발상發喪과 소렴, 대렴 등의 절목이었다.


┌一─一─一─一─一─一─一一─一─一─┐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十│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月│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一─一─一─一─一─一─一一─一─一─┤

│十│十│十│十│十│初│初│初│初│初│

│五│四│三│二│一│十│九│八│七│六│

│日│日│日│日│日│日│日│日│日│日│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一─一─一─一一─一─一─一─一─ㅡ─┤

│三│二│二│二│二│二│二│二│二│二│

│十│十│十│十│十│十│十│十│十│十│

│日│九│八│七│六│五│四│三│二│一│

│回│日│日│日│日│日│日│日│日│日│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大│小│發│乙│回│回│回│回│回│

│回│斂│斂│喪│夜│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妃│回│回│回│回│回│

│回│回│回│回│薨│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一─一─一─一一─一一─一─一─一──┘


기일忌日을 잊지 않고 챙기려고 미리 적어놓는 기신록忌辰錄이었다. 행자목을 연귀턱짜임으로 짜서 테두리를 두른 변자邊子에다 뒷판을 대고서, 양쪽 옆면 틈새를 경첩으로 이어붙인 액자額子에다 여섯 장의 종이를 끼워넣은 참이었다. 그 칸칸의 날짜는 진한 먹물로 적힌데다, 26일 칸에도 을야乙夜(2경. 밤 9시~11시) 비훙妃薨(왕비 승하)이라고 진한 먹물로 적혔다. 다만 대렴, 소렴, 성복은 버드나무숯으로 적어놓아 언제든 목면으로 문질러 지울 수 있게 적혔다.


"기신록, 기신록..."


숙종은 음울히 뇌까리며 기신록의 경첩을 열었다. 안에 적힌 여섯장의 종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삐져나왔다. 맨앞에 놓였던 10월의 일정 뒤엔, 이내 11월의 일정이 나왔다.


┌一─一─一─一─一─一─一一─一─一─┐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十│回│回│回│回│回│回│回│

│回│回│一│回│回│回│回│回│回│回│

│回│回│月│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一─一─一─一─一─一─一一─一─一─┤

│初│初│初│初│初│初│初│初│初│初│

│十│九│八│七│六│五│四│三│二│一│

│日│日│日│日│日│日│日│日│日│日│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成│

│回│回│回│回│回│回│回│回│回│服│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一─一─一─一─一─一─一一─一─一─┤

│二│二│二│二│二│二│十│十│十│十│

│十│十│十│十│十│十│九│八│七│六│

│五│四│三│二│一│日│日│日│日│日│

│日│日│日│日│日│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回│回│回│回│回│回│回│回│回│回│

└一─一─一─一-一─一─一─一一─一─┘


다음달 초하룻날, 즉 11월 1일 칸에 성복成服이란 글자가 있었다. 숙종은 숨이 턱 막힌 얼굴로 시선을 못박고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잠시 두눈에 물기가 어린 듯 하더니, 이내 그 눈빛이 메마르게 반들거렸다. 숙종은 나머지 넉장의 간지를 무릎맡으로 내려놓고, 두장만 서안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오른쪽엔 10월의 역서를, 왼쪽엔 11월의 역서를 놓고서, 숙종은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흔들리는 듯 싶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직 성복이 정해지지도 않았다. 헌데 누가 벌써 기신록에 표시를 해두고, 아무도 모르게 숙종 자신의 머리맡에 가져다 놓았다. 섬찟했다. 누군지 몰라도 나쁜 맘을 먹었으면, 숙종 자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칠 수도 있었다. 숙종은 고개를 비끼고 손끝으로 턱밑을 긁적였다. 괜히 턱밑이 따끔거렸다.


누가 이 기신록을 가져다 놓았을까.

왕이 잠든 사이

그 머리맡에

어느 간덩이 부은 놈이.


그 누군가가 송시열이란 것을 숙종은 직감했다. 물론 지밀나인이나 차지내관을 은밀하게 포섭해서 동온돌에 가져다 놓게 할 수 있는 건 송시열 만이 아니었다. 궁안 모든 궁인들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고 주름잡는 어미도 있었다. 어쩌면 어미가 더 수월할 일이었다. 하지만, 어미는 못할 짓이기도 했다. 자식 잠든 사이에 그 머리맡에 물건을 갖다놓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을테니.


"왜..."


숙종은 미간을 실룩였다. 낮에 시열에게 대왕대비 복제에 대해 자문을 세번이나 구한 일 때문일까. 물론 진심으로 자문을 구한 건 아니었다. 그건 조정에 녹을 먹는 자들이면, 홍단령 아닌 녹단령 입는 자들도 충분히 알 만한 얘기였다. 하지만 왕의 도발에, 감히 신하가 응답했다. 한밤중에 왕의 침전을 범하여, 기신록을 두고 갔다.


왜? 겁을 주려고? 아니면 성복은 11월 1일로 하라고 압박하려고? 그것도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왕의 침전을 범하는 게 가능한 지 누군가를 시험해 보려고? 온몸이 신경이 쭈뼛 곤두선 가운데, 숙종은 벌떡 일어나서 방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괜히 이쪽저쪽 왔다갔다 하다가, 홱 돌아서서 또 북두칠성 방향으로 빙빙 돌다가, 또 그 반대편으로 돌다가, 그렇게 동온돌을 휘돌았다.


누가 보면,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질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숙종의 눈초리는 힘없이 들뜨고 흔들리는 게 아니라 사납게 휙휙 돌아갔다. 숙종은 사방의 장지문에 비치는 상궁들의 그림자를 살피며, 조는 듯이 그림자가 흔들리는 장지문부터, 그 위로 돌돌 말려 들어열개 식으로 걸린 초록빛 누비이불, 일명 문염자門簾子를 홱 잡아뜯다시피 하여 내렸다. 아무도 쉽사리 엿듣거나 엿보거나 하지 못하도록, 문염자를 모조리 내렸다. 그렇게 사방의 이목을 차단하고도, 숙종은 고개를 들어서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거듭거듭 살피고서 숙종은 동벽에 첩첩이 접어놓은 병풍도 하나만 남겨두고 모조리 펼쳐서 사방에 둘렀다.


방안이 온통 어두워졌다. 그러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 지, 숙종은 다시 동벽에 첩첩이 접어놓은 병풍을 모조리 펼쳐서 사방에 둘렀다. 여름엔 덥다고 모조리 걷어놓고, 겨울엔 답답하다고 걷어놓았지만, 지금은 염탐하는 눈귀를 가리기 위해 일부러 병풍을 사방에 두르는 참이었다. 마지막을로 여덟폭의 오봉병까지 펼치는가 싶더니, 그 병풍 뒷면이 거꾸로 앞면이 되게 뒤집어놓았다. 오봉병 뒷면에 붙여놓은 기보와 기록 등을 쏘아보며, 숙종의 두 눈에 시뻘겋게 핏줄이 돋았다.


숙종은 병풍 뒷면에 여기저기 꽂힌 나사못을 하나둘씩 돌려빼선 두장의 기신록을 놓고 병풍 뒷면에 틈틈이 꽂아넣었다. 시뻘겋게 혈안이 되어선 기신록에 적힌 성복이란 글자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이미 그 두눈의 물기는 말라버리고, 어둠 속에서 칠흑 같은 눈동자만 메마른 섬광을 내뿜었다.


적어도 조정엔 칼자루 쥔 송시열에 맞서 칼날을 맨손으로 쥘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잡을 사람이 없으면, 숙종 자신이 맨손으로 쥘 셈이었다. 왕의 피투성이 손이 곧 누군가 잡을 명분이 될 터였다. 두손에서 피가 철철 흐르더라도, 숙종은 칼날이라도 잡을 작정이었다.




송시열은 더는 나오질 않았다. 혹여 왕이 또 다시 복제에 대해 하문할까 피할 셈이었다. 왕도 더는 찾지 않았다. 어차피 송시열이 지레 몸사리고 날세우는 것을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눈치챈 마당에, 더는 몰아세울 필요도 못 느끼는 참이었다.


"본디 오례의五禮儀에 6일째에 성복成服한다는 법문이 있으니, 오는 초1일初一日에 성복해야하는 건데...하온데 이번 대행왕비의 초상은 비록 26일 밤에 났지만, 발상發喪과 거애擧哀는 이튿날인 27일 새벽녘이었습니다. 발상發喪한 날부터 계산하면 초2일로 넘어갑니다. 겨우 하루 밀릴 뿐이니, 예기禮記에서 생여래일生與來日, 즉 산 사람의 일은 이튿날부터 헤아린다 하였는데, 이에 어긋나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전하 또한 부음을 들은 뒤 6일째에 성복해야 한다면, 또한 초2일이 됩니다. 다만, 예와 법이 서로 다를 수도 있으니, 청컨대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조사석이 또 대청에서 신료들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청의대신請議大臣을 입에 담았다. 이쯤 되니 조사석을 보는 서인들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저 척신 놈이...


저 조사석이 왕과 손 잡은 게 분명했다. 뒷방 늙은이의 사촌동생도 꼴에 왕의 지친입네 나서는 건지...김수항은 조사석을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 예경禮經에 이르길, 생여래일이고 사여왕일이라, 즉 生與來日산 사람의 일은 이튿날부터 세고, 죽은 사람의 일은 죽은 날부터 센다, 이는 주석이 달리길, 성복成服은 산 사람의 일이므로, 이튿날부터 세어 사흘째에 한다...하였습니다. 발상發喪은 아예 논외였습니다."

"발상은 논외라?"


숙종이 되묻자, 수항은 힘있게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예법에 어긋날 게 없사옵니다."


수항은 발상이 늦은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왕이 이미 인정하고 승복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여기서 한발이라도 더 물러나면 곤란했다. 이미 왕은 중궁의 죽음조차 반신반의하는 참이었다. 한걸음 밀리면 두걸음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 나중에 왕이 며칠 지나서야 중궁의 죽음을 받아들이고서, 그날부터 상복을 입겠다고 우긴다면, 그 억지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허나 의리義理라는 게 있지 않은가?"

"예? 의리요?"

"그렇소. 의리. 내 정궁正宮을 위해 상복을 입는 날이 하루라도 모자라서야 쓰겠소?"


숙종의 차가운 반문에, 수항은 관자놀이가 온통 섬찟해졌다. 이러려고 왕이 중궁의 훙서薨逝를 줄곧 부정해 왔나 싶었다. 독했다. 지독했다. 둘도 없는 반려였던 중궁의 죽음조차 정적을 숙청하는 수단으로 바꾸는 왕의 비정함이 소름끼쳤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러게, 왜 내게 알리지도 않고 도둑장례를 치렀소?"


숙종의 차가운 반문에, 수항은 가만히 심호흡을 하며 대답을 늦췄다.


"하오나...대행왕비가 승하한 것이 26일 밤이었으니, 그날로 사흘째에 소렴하고, 또 닷새째에 대렴하며, 백관들도 이튿날부터 날짜를 세어 닷새째에 성복하는데, 즉 승하하고 엿새째에 성복한다는 얘기지요. 이는 대렴이 끝났다고 차마 당장 성복하기 어려운 마음에, 꼬박 하루가 지나길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성복하게 되는 것이고, 신하된 도리로 차마 그럴 수 없다는 뜻이 담긴 것입니다. 허나 대렴한지 이틀 만에야 성복한다면, 태완太緩(몹시 느즈러짐)의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이 또한 예절禮節이 어그러지는 것이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김수항의 통렬한 반박에 숙종은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얼굴이 벌개진 채로, 두눈도 더 벌개졌을 뿐이었다.


"전하, 신臣 이상진 한 말씀 아뢰어도 되겠나이까."

"말해 보시오."


숙종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잠시 뜸들이듯 이상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서야, 겨우 손짓으로 답했다. 잔뜩 긴장했다가 풀린 건지, 이상진도 심호흡을 하고서야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송구하오나 6일 만에 성복을 하는 것은 정해진 예법이옵니다. 그 6일째를 맞추기 위해서 대렴하고 이틀 뒤에 하는 것도 예법을 거스르는 게 아니므로, 나쁘지는 않사옵니다."

"신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민정중까지 웬일로 이상진의 의견에 동조했다. 숙종은 굳은 얼굴로 이상진을 쏘아보았다. 뿔뿔이 흩어져서 제 갈 길을 가려던 저들이, 지금은 또 똘똘 뭉쳐서 예법을 입에 담는 참이었다. 속에서 부아가 났지만, 애써 참아야만 했다. 숙종은 두손 열손가락 뼈마디마디 모조리 으스러지도록 빈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등의 시퍼런 핏줄이 온통 도드라질 만큼 손끝에 힘을 꾹꾹 눌러서.


"전하, 장령 안후安垕와 이홍적李弘迪이 청대請對(뵙기를 청함)를 하옵니다."


장지문 밖에서 대전상궁이 고했다. 숙종은 심드렁히 장지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오대烏臺(사헌부)라?"


사헌부의 장령이 둘씩이나 청대를 하였다면, 누구를 찍어내겠다고 그 까마귀밭에서 기어나온 건지. 헌데도 신료들은 별다른 반응조차 보이질 않았다. 숙종은 시큰둥히 장지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들라 하라."

"예, 전하."


대청 안 신료들이 그다지 어리둥절한 기색도 없는 것을 보니, 숙종은 또 한번 한숨이 나왔다. 이미 이들은 사헌부 장령들이 찾아온 용무를 어림짐작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사전에 언질이 있었든 없었든 충분히 들어 아는 듯 했다.


이윽고 장지문이 열리고, 시퍼런 청단령을 입은 사헌부 장령 둘이 두루마리 한장씩을 들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신료들은 그다지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숙종은 괴이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비끼고 장령들의 안색을 살폈다. 저들이 안으로 들어서며 마른침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꿈틀거리는 참이었다. 시뻘건 홍단령을 입은 대신들 앞으로 차마 나서지 못하고, 부복해서 고개를 조아릴 때까지, 숙종은 잠자코 기다렸다가 단도직입 용건부터 꺼내라고 독촉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그게..."

"말해보라."

"하오면...대행왕비께서 위예違豫(편찮음)하신 기미가 하룻밤에 졸극猝劇(갑자기 악화됨)하여 승하하셨으니, 천만 뜻밖의 변입니다. 어의들이 약만 제대로 썼으면 어찌 회춘의 방도조차 없이 이리 망극한 고통을 만났겠습니까? 청컨대 수의 이하 어의들을 모두 잡아다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하소서."


숙종은 장령 안후가 두루마리를 펼쳐 계문을 읽는 것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눈빛도 시들했다. 하지만 '약만 제대로 썼으면'이란 문구를 듣는 찰나 눈빛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격분을 참느라, 그 눈시울까지 시뻘겋게 붉혔다.


"어의들을 모조리 단죄하라?"

"예, 전하. 어의들을 처벌하시어 대행왕비의 한을 풀어주시옵소서."


대청 안 신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숙종은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져서, 콧잔등을 찡그리며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저 기가 막혔다. 성난 왕에게 힘없는 어의들이나 제물로 던져주는 서인들의 행태에, 신물이 확 치받았다. 하지만 숙종은 더는 따져 물을 기운도 없는 듯이 시들한 말투로 답했다.


"알았으니, 이만들 물러가라."

"하오시면 지금 어명을..."

"승지는 받아적으라. 중궁의 두환에 소임을 다하지 않은 어의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그 죄를 묻도록 하라."

"예, 전하."


승지가 재빨리 받아적어 숙종의 서안 앞으로 가져오고, 숙종도 순순히 옥인을 찍어주었다. 발톱빠진 호랑이처럼 마냥 유순했다. 그런 왕의 잠잠한 태도에 서인들은 찜찜한 낌새를 채면서도, 자기들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서인들이 저마다 흡족한 얼굴로 물러가고, 철저히 혼자가 되고서야, 숙종은 동온돌에 오도카니 앉아, 김수항이 내뱉았던 예기記 한 구절을 가만히 뇌까렸다.


"생여래일사여왕일生與來日死與往日..."


산 사람은 이튿날부터 헤아리고 죽은 사람은 죽은날부터 헤아린다...그 글귀를 인정하는 순간, 숙종 자신은 산 자의 길로, 중궁은 죽은 자의 길로 엇갈리는 것이었다. 이 짧은 글귀가 참으로 잔인했다. 산 사람은 살고, 죽은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말처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너무도 슬펐다. 숙종은 두눈을 글썽이면서도, 치미는 울음을 참으려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돌을 삼키는 것처럼, 울대뼈가 사납게 출렁였다. 목젖이 온통 얼얼해져선 숙종은 또 되뇌였다.


생여래일사여왕일生與來日死與往日...


다 죽여버리겠다. 네놈들도, 중궁의 시간 속으로 죄다 던져버릴테다. 그 뒤를 따라가 보거라. 산 자와 죽은 자의 시간이 달라지는, 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지가 너덜너덜 찢겨 질질 끌려가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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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해의 그림자 323 17.09.16 233 5 41쪽
» 해의 그림자 322 17.09.07 219 6 41쪽
322 해의 그림자 321 17.08.27 235 3 43쪽
321 해의 그림자 320 +1 17.08.20 308 4 43쪽
320 해의 그림자 319 +1 17.08.15 253 6 43쪽
319 해의 그림자 318 17.08.13 214 5 43쪽
318 해의 그림자 317 17.08.08 262 4 43쪽
317 해의 그림자 316 17.08.01 281 6 42쪽
316 해의 그림자 315 17.07.24 305 5 43쪽
315 해의 그림자 314 17.07.19 283 8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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