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조회수 :
787,409
추천수 :
11,578
글자수 :
5,820,877

작성
17.07.19 02:52
조회
283
추천
8
글자
42쪽

해의 그림자 314

DUMMY

"이건 방술에 쓰이는 처용이 아니라, 침술에 쓰이는 목인인데. 경혈목인."


석주는 합문 앞을 에워싼 의관들 귀에도 똑똑히 들리도록 목청을 돋워서 말했다. 그리곤 입을 비죽이며 덧붙였다.


"이게 왜 여기 있을까나?"


의관들이 낯빛이 변해서 서로 눈치를 보며 수군댔다. 경혈목인이 무녀들의 방술에 쓰였다니. 더구나 드물게도 여인의 목인이라니. 느낌이 좋지가 않았다.


"제 건 아닙니다."

"난 처음 보는데."

"우리 내의원 건 아닌 것 같은데."

"저흰 못 보던..."


의약청 의관들이 너도 나도 발뺌했다. 괜히 불똥이 튈 것 같았다. 명색이 궐에서 어의 내지는 의관 딱지를 달고 사는 입장이니 다들 냄새 하난 기막히게 잘 맡았다.


"그래? 허면 여기 이 둘한테 물어야겠네."


석주는 희누런 이를 드러내고 유상과 흥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눈초리엔 언뜻언뜻 비웃음이 스쳤다. 유상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석주를 보았다. 석주가 대청에서 섬돌로 내려서며 너부죽한 목화를 대충 꺾어신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경혈목인이 여기 있나?"

"글쎄요?"


흥령이 금세 침착을 되찾고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런 흥령을 보는 석주의 두눈에 이채가 스쳤다. 요놈 봐라? 하는 눈빛으로 석주는 흥령을 보며 따져 물었다.


"왜, 내의원, 아니 의약청 목인이 여기 있냐 이 말일세."

"난들..."

"모를 리가? 이 목인의 오른손엔 이렇게 십자흔이 있는데? 그것도 중지에."

"그게 왜요?"

"내 알기로 저기 계신 분이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십자흔이 있거든?"

"아...그래요?"


흥령은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뭐, 새로 들어온 의녀가 하도 침술이 서툴러서 연마 좀 하라고 빌려주긴 했는데, 십자흔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뭐?"


석주는 기가 막혀 되묻기만 했다. 평소 백흥령이 껄렁껄렁거리는 건 알았다. 익히 알았다. 하지만 십자흔 자체를 부정하고 나올 줄은 몰랐다. 이렇게 딱 잡아떼다니. 자신도 모르게 턱이 삐걱거렸다.


"새로 들어온 의녀?"

"아 네. 저기."


흥령이 건들건들 대꾸하며 염지 끝으로 이소를 가리켰다. 석주는 흥령의 손끝을 따라 이소를 돌아보곤, 이내 그 아청색 치맛자락 아래로 비치는 사슴가죽 당혜 앞코를 내려다 보았다. 시선을 바로 떼지도 않고 가만히 주시했다. 그 눈길에 이소는 유상의 거처 섬돌에서 자신의 당혜를 누가 건드렸던 일을 떠올렸다. 기분 나쁜 예감에 이소가 석주를 흘끗 보니, 석주는 이미 진한 비웃음을 눈가에 흘리는 참이었다.


"아, 오랜만이구나. 아해야."


석주가 이소를 반기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회상전 앞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술렁였다. 김석주가 알아보는 의녀, 하지만 자신들은 처음 보는 의녀...저 아이의 정체가 궁금해지려는 찰나였다. 하지만 석주는 더는 흥미를 보이지 않고 흥령에게 차갑게 돌아서며 되물었다.


"허면 자넨 이 십자흔은 처음 본다는 겐가?"

"네. 처음 보는데요?"

"처음? 처음?"


석주는 미간을 찡그리고 흥령을 보았다.


"네가 처음 보면, 그럼 저 아이 소행이게?"

"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흥령은 또 시큰둥히 되물었다. 석주는 기가 차서 이젠 헛웃음만 나왔다. 백흥령이 발뺌하면 저 의녀 아이가 혼자 뒤집어쓰게 된다고 말해주었는데도, 나 몰라라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개 의녀도, 그냥 의녀도 아니고 최석정의 금지옥엽인데, 백흥령이 오리발을 내밀다니. 최석정의 여식이 혼자 덮어쓸 리도 없을 뿐더러, 덮어쓸 수도 없었다.


최석정이 어떤 놈인데?


석주가 인상을 쓰고 이소를 돌아보았다. 똑똑한 최석정 밑에 멍청한 여식이 나올까. 어떻게 나올지 사실 뻔했다. 덮어씌우는데, 덮어쓸 바보는 아니었다.


"제가 한 겁니다."

"뭐?"


석주는 기가 막혀 이소를 쳐다보았다. 덮어씌우니 덮어쓴다? 덮어씌운다고 덮어쓰다니? 자기가 만든 거라 우기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최석정의 딸년이 이렇게 멍청하다니? 이리도 미련하다니?


"네가 해?"

"예."


이소는 석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어깨너머로 놀란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유상과 백흥령을 똑바로 마주볼 뿐이었다.


"네가 뭘? 뭘 해? 왜 해?"

"침 연습을 하다가 헷갈려서 표식을 해둔 겁니다."

"침 연습? 백광현이처럼 종기 째게? 그 솜씨로? 혈자리도 제대로 못 찾을텐데? 운침暈鍼(침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뇌빈혈)이나 안 생기면 다행이게?"


석주는 입꼬리를 푸득거리며 비웃었다. 이소의 대답은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침으로 꽂는 것도 못할 애송이가 침으로 째는 걸 하겠다고 표식을 남긴다는 걸 세상에 누가 믿는다고. 석주는 일부러 더 큭큭거리며 소리내어 웃었다.


"예, 그 운침이나 일으킬 솜씨지요. 그래서 혹시 몰라 백회, 인중, 중충에 침을 놓는 연습을 했사옵니다. 그 중충혈中衝穴에요."

"중충? 그 중충은 좀더 아래쪽인데?"

"아, 헷갈려서 말이옵니다. 원래 중충혈이 유독 헷갈리는 혈자리라지요."


이소의 천연덕스런 대꾸에 석주는 말문이 턱 막혔다. 갑자기 이 어린 의녀의 얼굴이 최석정으로 보였다. 아무리 뛰어봤자 최석정이고 김석주 손바닥이라지만, 요 맹랑한 의녀 아이를 보니 느낌이 싸했다.


"그래, 다 네가 한 표식이라 치자. 허면, 그 목인을 준 건 누구더냐?"

"그건 왜..."

"그건 답할 수 있겠지?"


석주가 비웃었다. 이소는 미간을 찌푸리고 석주를 보았다. 무슨 꿍꿍일까. 아무리 영특하다 해도 이제 겨우 열여섯이었다. 온세상 꼭대기에서 굽어보는 듯한 김석주의 머리 위로 올라설 수는 없었다.


"그건..."


이소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미 그건 백흥령이 앞서 말했었다. 침술을 익히라고 경혈목인을 빌려주었다고. '내가'라는 말이 없긴 했지만, 이미 백흥령이든 유상이든, 목인을 빌려준 걸 인정한 셈이었다. 헌데 김석주가 다시 짚고 넘어간 게 이상했다.


"제가 빌려줬습니다만."


유상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이소는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유상을 쳐다보곤, 발부리까지 틀어서 돌아다 보았다. 유상도 이미 김석주를 보다가 이소를 돌아보는 참이었다. 이소를 보는 그 눈빛도 백흥령처럼 반신반의 그 자체였다.


"아...유상 자네라고."


김석주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소는 불안한 눈빛으로 김석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목인을 건넨 자가 유상이란 말을, 마치 자백인 양 반기는 걸까. 이미 이소 자신이 그 십자흔을 운침 때문에 남긴 거라, 혼자 덮어썼는데도. 왜?


"예, 접니다."


유상이 다시 한번 대꾸하자, 김석주는 비로소 만족한 듯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유상도, 흥령도, 이소도 의아한 얼굴로 김석주의 손끝을 쳐다보고, 또 그 눈웃음을 바라보는데, 합문을 에워싼 의관들이 갑자기 좌우로 갈라지며, 전모를 눌러쓰고 한손에 조족등을 든 여인 일곱이 누군가를 곁부축하여 마당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들의 발치로 일곱개의 조족등 불빛이 넘실넘실 흘렀다.


"기, 김내관..."

"김상책..."


유상도, 흥령도 깜짝 놀라 그 이름을 부르며 한발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두광은 자신을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여인들의 전모 아래만 자꾸 들여다보며 끌려올 뿐이었다.


"너희들 뭐야? 의녀 맞아? 뭐야? 뭐야, 너희들?"


두광은 뜻모를 말만 연거푸 퍼부으며 의녀들에게 따졌다. 의녀들이 대꾸도 않고 회상전 마당을 가로질러 두광을 김석주의 코앞으로 끌고 왔다. 두광은 눈앞이 흐릿한데도 시꺼먼 놈이 새하얀 목인을 무자비하게 움켜쥔 것을 보았다. 그의 동공이 사납게 요동쳤다.


"목, 목인..."

"아, 뭐...하필 제웅으로 쓰려다가 나한테 딱 걸렸다네."


석주가 나른하게 둘러대는 말에 두광은 코웃음을 쳤다. 간밤의 일을 두광은 잘도 기억했다. 그는 그때 분명히 어느 의녀가 태자방과 함께 건넨 서찰을 갖고 있었다. 그때 의녀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 귀익은 목소리가 누구의 건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전모 아래로 언뜻 비치는 귀밑 붉은 곰보는 보았다. 제대로 세진 못했지만, 분명히 귀밑 붉은 곰보였다. 꼭 최이소처럼.


"최이소!"


두광은 노한 눈빛으로 이소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앞에 이소의 천연덕스런 두눈이 보였다. 뻔뻔하게도, 아무 것도 모르는 눈빛을 하고 자신을 보는 참이었다.


"너...! 무슨 짓을!"


부들부들 떨며 부르짖는 두광의 모습을 보며, 석주는 상체를 슬며시 뒤로 젖히고 흘끗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

"아니 뭐가 뭔지..."


유상과 백흥령이, 고개를 흔들며 한마디씩 끼여들려다 멈칫했다. 아직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니, 그저 말끝만 흐리는 참이었다.


"보다시피 중궁전하의 환후를 그대로 옮긴 목인木人이 나왔으니, 당분간 자네들은 의약에 동참할 수 없네."

"그 무슨..."


이소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석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저 김두광과 유상, 백흥령이 자신을 보는 눈길이 곱지가 않았다. 미심쩍은, 아니 의심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게, 이소 자신이 목인을 잃어버린 것에 화를 내는 건지, 아니면 한술 더 떠 자신이 일부러 목인을 무당들에게 건네주었다고 의심하는 건지, 정확히는 몰라도, 따지고 또 꾸짖는 눈초리였다. 누군가 농간을 부렸다, 이소는 그 한가지는 직감했다.


"그건 그냥 제가..."

"그건 가짜요!"


이소는 자신이 말하는데 갑자기 끼여든 두광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가짜? 가짜라는 말을 그녀는 곧바로 알아듣질 못했다. 가짜라니?


"오호라? 가짜?"


석주가 오히려 두눈을 빛내며 흥미가 동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두광은 흥분으로 얼굴까지 벌개져서, 석주에게 반박했다.


"치성을 드린다고, 대비전께서 중궁전하 환부를 표시한 목인을 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가짜를 만들어 최이소 저 아이한테 넘긴 거요! 저 아이가 대비전이 심은 간자인지, 아닌지 떠보려고!"

"그러니까, 가짜라!"

"그렇소! 가짜!"

"가짜?"


두광이 가짜라고 강조할수록, 석주는 그대로 되받았다. 가짜라고 말을 듣고도, 오히려 신이 난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구 편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두광의 눈앞에서 석주가 입꼬리를 비틀어 비웃었다.


"그런 건 의미 없어. 아무 의미 없지."

"무슨..."

"가짜란 말을 내뱉는 순간, 진짜가 따로 있다는 말이 되거든."

"네?"


두광은 아직도 석주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히 되물었다. 회상전 앞마당에 모여든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에워싼 일곱의 계집들 중 누군가가 비웃음을 흘렸다. 두광의 고개가 절로 비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웃음에 반응했다.


"아, 말귀 못 알아듣네."

"무슨..."

"뭔 말이겠어. 중궁전하의 목인을 보내달라는 서찰에, 바로 보내준 것도 아니고, 괜히 켕겨서 저 최이소를 떠보느라 가짜 목인을 넘긴 거잖아. 저 유상, 백흥령을 움직여서."

"그..."

"그 말인 즉, 진짜 목인이 너희들한테 있다, 이 말이지."


석주의 말을 들으며 두광은 그대로 얼음처럼 온몸이 얼어붙었다. 심장이 온통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가짜 목인으로 최이소를 떠본 것 자체가, 진짜 목인의 존재를 드러낸 거라고? 너무도 놀라 귀가 온통 멍했다. 김석주가 두광 자신의 귓전에 대고 한번, 또 한번, 그렇게 연신 손뼉을 쳐대는 바람에 귀가 더 멍했다.


모두 일곱 번의 손뼉소리가 나고서도, 두광은 옴짝달싹 못했다. 석주의 손뼉소리가 신호였는지, 자신을 에워싼 계집들이, 저마다 조족등을 들어 얼굴을, 특히 전모 속을 비추었다. 음력 시월 하순 동틀 녘의 어스름에, 전모 그늘에 가려진 계집들의 턱이 환하게, 괴기스러울 만큼 환하게 비쳤다. 일곱의 계집들 모두 오른쪽 귀밑에 북두칠성 같은 곰보가 있었다.


"곰...보?"


두광은 눈을 의심했다. 두눈을 부릅뜨고 일곱의 계집을 보아도. 저마다 칠성 곰보를 조족등으로 비출 뿐이었다. 두광은 뒤통수를 맞은 듯이 거센 충격으로 동공이 요동쳤다.


어떻게...모두 북두칠성이지?


고개를 돌려 이소를 보았다가, 다시 계집들을 보았다가, 또 다시 김석주를 보았다. 흔들리는 시야에 김석주가 씩 웃는 얼굴이 덩달아 흔들렸다. 두광은 두눈을 깜빡였다. 눈이 뻑뻑해선지, 눈꺼풀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김석주의 거뭇한 얼굴은 또 눈꺼풀을 헤집었다.


당...했다.


두광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곱이나 되는 북두칠성이 자신을 비웃는 참이었다. 아니, 저 최이소까지 합치면 여덟인가. 두광은 눈밑까지 파르르 경련하는 것을 느끼며 이소를 보았다. 이미 이소는 한결 짙어진 눈빛으로 계집들의 귀밑을 돌아보는 참이었다.


"끌고 가라."


김석주가 오연히 손을 소스쳐 보이곤 두광을 묘한 눈길로 비웃는 참이었다. 이소는 눈앞의 김석주가 자신이 유추하는 그 '누군가'란 사실을 직감했다. 하지만 '왜' 이런 짓을 꾸몄는지, 거기까진 알 수가 없었다.


"이 아이는요?"


김두광을 에워싼 의녀들 중 맨앞에 있던 의녀가 귀익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소가 소스라쳐 의녀를 돌아보곤, 다시 김석주를 돌아보는데, 석주가 나른히 쳐다보았다.


"이 아이를 왜?"

"왜냐뇨. 목인을..."

"그 아이는 진짠지, 가짠지도 모르고, 또한 운침暈鍼에 대비해서 침술을 훈련했다고만 말했다. 저들이 이 아이를 시험해본 것만 봐도, 아무 것도 몰랐던 게 명백하지."

"그렇다곤 해도 일단 조사를..."


의녀 역시 이참에 이소까지 끌고 가서 구금해 버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어떻게든 중궁전 치료를 막을 셈이었다. 하지만 석주는 그 의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이소만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아이도 끌고 가자고?"


석주가 또 푸득푸득 웃었다. 기가 막힌 듯이 또 키득키득 웃어댔다. 의녀들은 영문을 몰라서 석주를 보았다. 끌려가는 마당에, 두광과 유상, 흥령이 또 불신어린 눈초리로 이소를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주는 여전히 큭큭거리며 말했다.


"이 아이가 꼴은 저래도, 당상관의 여식일세."

"예?"

"동부승지 최석정의 여식, 최이소."

"예? 누구요?"

"동부승지 최석정, 그 여식이란 말씀."

"말도 안..."


의녀들이 경악해서 이소를 돌아보았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들은 이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치맛자락 아래로 언뜻 비치는 사슴가죽 당혜 앞코가 눈에 띄었다. 긴가민가 싶어졌다.


"반가의 규수를 구금하려면, 미리 의금부를 통해 주상께 고해야만 하지."

"하오나..."

"죄가 없는 게 명백한데, 끌고 가겠다고?"

"그..."

"아, 누구 최석정의 딸년 아니랄까봐, 그 자리에서 운침 운운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놨는데?"

"그..."

"그나마 저 멍청한 김두광이 아니면 저 둘도 못 건질 뻔 했어."


석주가 두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비웃었다.


"나? 내가 뭐...?"


두광은 석주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되물었다.


"이래서 머리 나쁜 것들은 머리 쓰면 안돼."


석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광을 보는 그 눈꼬리가 실쭉했다. 두광은 석주를 보며 얼굴이 푸들푸들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뭘 하는가? 어서 끌고 가지 않고?"


석주가 차갑게 두손으로 손짓했다. 정초군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유상과 백흥령의 옆구리를 꿰어찼다.


유상은 자신들이 김석주의 덫에 걸린 사실을 깨닫고 이소를 돌아보았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꼭 자신들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목인을 핑계로 끌고 간다는 게, 그러면서 최이소는 차마 못 끌고 간다는 게,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김석주의 저의를 알 것 같았다. 중궁을 치료하지 못하도록, 아무도 손쓰지 못하도록, 자신들을 본보기 삼아, 모두에게 본때를 보이려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무릎에서 힘이 턱 빠진 채로, 유상은 백흥령과 함께 합문 밖으로 끌려나갔다. 김석주가 흡족한 눈빛으로 품안의 목인을 쓰다듬는 게, 합문 틈새로 비쳤다. 한발 옆으로 비켜서며 김석주를 차갑게 쏘아보는 최이소의 노한 눈초리도 보였다.


당했다. 저 아이 혼자 남았다.


굿판은 끝났다. 처용굿을 하던 무녀와 잽이들도, 김석주가 데려온 의관들도, 또 그가 불러들인 불러들인 의녀들도,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홀홀히 사라졌다. 이소는 회상전 마당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서, 아까 있었던 일들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김석주가 나, 최이소로 김두광에게 덫을 놓았다.

김두광이 목인으로 최이소를 시험했다.

김석주가 역이용해서 의관들을 끌고 갔다.

그래서 최이소 혼자 남았다.

결론은, 다른 의관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김석주는 일벌백계로 의관들에게 경고했다.

아무 것도 하지 마라.

결론은, 뭐라도 해야 한다.


이소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섬돌을 딛고 올라섰다. 의관들이 찾던 게 자설단이었다. 아마도, 아직도, 그 자설단을 찾을 터였다. 하지만 자설단을 구하기는 이미 틀렸다.


애초에 의관들이 자설단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저 김석주 탓일 터였다. 겪어보니 지독하게 머리가 좋았다. 너무 좋아서,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갖고 노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김석주가 이소 자신을 이용한 것도, 그렇게 의관들의 손발을 묶어버린 것도, 그렇게 중궁을 마치 거미줄에 꽁꽁 묶어 먹이로 만들어버린 것도, 너무도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났다.


이소는 차디찬 눈동자로 대청 위를 보며 말했다.


"고하시게."

"뭐?"


품계도 없는 의녀 주제에 궁녀에게 감히 하대를 하다니. 지밀상궁은 어이가 없어서 이소를 쳐다보다가, 멈칫했다. 그녀도 대청 위에서 저 의녀가 누군지 들었다. 동부승지 최석정의 여식. 적어도 대내大內의 궁녀와 내관들은 최석정이 누군지 똑똑히 알았다. 서른 중턱의 나이에 당상관이 된 자, 아무 일도 없다면, 적어도 5년 안에 정승판서가 될 자...그 여식이니 세상의 모든 여인이 발아래로 보일 법도 했다. 더구나 지금 중궁이 승하하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으니, 정5품 상궁 쯤은 우스워보일 수도 있었다.


"고하시..."


이소는 생각에 잠겨 말하다가 멈칫했다. 그저 지밀나인이라 여기고 말하다 보니, 내명부에서 지밀상궁 이상의 신분만 한다는 어여머리於由味가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지밀상궁이었다. 이소는 정신이 퍼뜩 들어 고개를 숙였다.


"아, 실례를..."

"아, 예."


지밀상궁은 떠름히 웃었다. 그나마 실수였으니 상대를 탓할 수는 없었다. 눈앞의 의녀는 비녀婢女가 아니라 사녀士女였다. 사녀 중에서도 당상관의 여식이었다. 소위 지붕이 있는 옥교屋轎를 탈 수 있는 신분이었다. 아무리 지밀상궁 자신이 더 연배가 있고, 더 품계가 높다 한들, 자신은 휘장만 겨우 두른 보교步轎도 탈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나마 남여의 원형인 죽교竹轎 정도만 겨우 탈 수 있는 신분이었다. 기껏 등받이만 있는 그 죽교를 타겠다고, 한껏 검은 너울을 뒤집어써야 하는. 그런 자신에게 저 최이소가 실수를 미안해 하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어쩌면 상전이 될 지도 모르는데...


지밀상궁의 생각은 거기서 멈추었다. 이른 아침부터 방정맞은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참이었다. 동이 아직 트지도 않았는데, 푸르스름한 새벽이내가 자욱한데, 왜 이런 고얀 생각부터 하는 건지. 아무래도 무당들이 온갖 스산하고 음산한 기운을 퍼뜨린 거라고, 그녀는 무당 탓부터 했다. 불길할 정도로 검푸른 이내가 아직도 걷히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 만치 새벽이 길었다.


"중전마마, 의녀 최씨이옵니다."

"들라."


들라 하라, 이런 격식을 또 갖추지 않고, 중궁이 윤허했다. 물론 애초에 중궁이 의식이 없을 때는 번거롭게 윤허를 구하지 않고 드나들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중궁은 의식이 있었다. 상궁은 그나마 그 사실에 안도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직접 장지문을 열었다. 나머지 문설주 앞에 있던 지밀나인도 쭈뼛쭈뼛 이소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이소는 더는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문턱을 넘어섰다.


"이소이옵니다."


자신을 최씨라고 부른 상궁의 말투가 듣기 싫었는지, 이소는 가운데로 오자마자 무릎꿇더니, 사배례를 올릴 자세를 취했다. 진홍은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어 손만 허공으로 뻗었다. 머리맡을 지키던 의녀가 얼른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앉혔다. 도움을 받아 똑바로 앉고서 진홍은 이내 등줄기가 구부정해져서 힘겨운 호흡을 토해냈다.


"왜..."


진홍은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더는 말을 잇지도 못했다. 이소의 모습이 두겹, 세겹으로 겹치는 탓이었다. 몇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진홍은 이소를 똑바로 보려고 애썼다.


이소는 무릎을 꿇고 사배례를 올리려다 불안한 눈빛으로 진홍을 쳐다보았다. 아까 무당들은 한 게 없었다. 그저 굿을 하는 척 목인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헌데도 중궁이 갑자기 이상했다.


"저...사배..."

"앞으로는 생략하거라."

"예?"

"그냥...피차 힘드니..."


가냘픈 옥음으로 진홍이 겨우 말끝을 잇다가 또 흐렸다. 이소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진홍 뒤의 의녀를 흘끗 보았다.


누구한테서 불안이, 또 의심이 옮은 건지는 몰라도, 괜히 저 의녀가 미심쩍었다. 의녀들이 이소 자신의 칠성곰보를 똑같이 귀밑에 그려넣어 두광의 눈을 속였다는 게 괜히 찜찜했다. 이미 홍화문에서 영의정 김수항이 자신들을 통과시킬 때 이소 자신의 귀밑을 보았고, 또 막례와 함께 있던 무녀들도 보긴 했지만, 침소에서 목인이 사라진 일까지 감안하면, 역시나 가까이에 있는 이의 소행일 터였다. 더구나 이소 자신이 출번하여 교대를 하자마자 이렇게 중궁의 용태가 나빠지니, 괜히 의심이 들었다.


"조금 전에 유상, 백흥령 두분 어의들이 목인 문제로 끌려나갔사옵니다."

"목인?"


진홍이 되묻고선 인상을 쓰며 힘겹게 마른침을 넘겼다. 이소는 그런 진홍을 보고 자신도 똑같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김석주의 농간에 상책과 어의들이 목인으로 소녀를 시험하려다...도리어 빌미를 잡혀서..."

"목인..."

"송구하옵니다."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다."

"저...그 두 어의 대신 믿을 만한 어의가 있으시옵니까?"

"없구나. 유감스럽게도."


진홍의 대답에, 이소는 눈을 숨이 턱 막히는지, 작고 낮게 잦아든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하오면...자설단은 구하셨사옵니까?"

"그 또한...구하지 못했구나."


진홍의 대답에, 이소는 두눈을 질끈 감았다. 의약청 제조 김석주가 준제를 핑계로 시약 자체를 틀어막는 참이었다. 그러고도 목인을 구실로 어의들마저 끌고가 버렸다. 자설단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중궁의 목숨을 유지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어의들이 자설단을 찾던 것도, 김석주 탓일 듯 했다. 헌데 구하지 못했으면...


"제가...아..."


말을 꺼내다 말고 이소는 진홍의 등뒤에 있는 의녀를 보며 입술만 달싹였다. 진홍은 의아히 이소를 보았다. 알아보겠다는 말을 하려던 것 같았다. 그러다 얼버무리려는 걸 보니 동료가 의심된 모양이었다. 김두광과 의관들은 이소를 의심하고, 또 이소는 동료를 의심하고...한숨이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예?"


이소가 되묻는 걸 보며 진홍은 또 하얗게 웃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되었다."


졸렸다. 또 졸렸다. 자꾸 졸렸다. 진홍은 힘없이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허공을 보였다. 하얬다. 눈앞이 온통 희뿌옇기만 했다. 달안개가 찼다. 아니, 달안개가 아니라 구들장 아래서 안개처럼 번지는 연기 탓일까.


"달안개...이상해..."

"예?"


이소는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하지만 이미 중궁은 두눈이 스르르 감겨선 더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꾸만 잠이 늘어나는 중궁을 보니, 이소는 덜컥 겁이 났다. 잠이 길어져도, 또 잠이 짧아져도 불안했다. 꺼져들어가는 촛불을 보는 느낌이...싫었다.


"하오면,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이소는 나직이 말해보았다. 귓결에 들었는지, 중궁의 고개가 까딱까딱하는 것 같았다. 중궁을 부축한 의녀가 얼른 나가보라 손짓하며 중궁을 도로 보료에 눕혔다. 그 동안에도 중궁의 눈꺼풀은 열리지 않았다.


이소가 대청으로 나오니, 추녀 아래로 아침햇살이 기어들어왔다. 그리도 새벽이 길더니, 이제야 아침이 밝았다. 참 이상한 아침이었다. 새벽에 밤이 길 때보다, 오히려 아침이 긴 것 같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침이 길어."


등뒤에서 들리는 지밀상궁의 한숨에, 이소는 흠칫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지밀상궁이 어색하게 웃느라 눈시울이 더 일그러졌다. 이소도 눈시울이 이지러져선 지밀상궁을 보며 고개를 살짝 숙여 눈인사를 하고 툇마루로 나섰다.


추녀 아래에서 보니 하늘이 내려앉았다. 여느때보다 낮았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내릴 것처럼 흐렸다. 하지만 비는 내리질 않았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그냥 하늘 아래 서 있는데, 하늘이 무거웠다.


"아침이 길 때도 있어요?"

"해가 안 뜨잖아. 해가."

"그건 날씨가 흐려서..."

"어쨌든...무섭게..."


이소가 서쪽 섬돌로 내려서는데, 등뒤에서 지밀나인이 묻고, 상궁이 하품하며 대꾸했다. 아침이 길 때가 더 무섭다는 걸 열여섯 이소는 처음 알았다. 왠지 오늘 하루, 유난히 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소는 섬돌 밖으로 걸음을 내치다 멈칫했다. 하품이 나왔다. 또 졸렸다. 졸리고 또 졸렸다. 너무 졸려서 걸음이 느려져야 했다. 하지만 이소는 졸면서 걸었다. 졸고 또 졸았다.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졸면서 걷고, 또 걸으면서 졸았다.


"뭐 하는 게냐?"


누군가가 말을 거는데도, 이소는 듣질 못했다. 그렇게 마냥 걷기만 했다. 지나면서 사향 냄새인지 서각 냄새인지, 묘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데도, 또 걸었다.


"업어가도 모르겠네."


코웃음이 귓전을 스치고, 또 어느 아지매의 혼잣말이 귓등을 스쳐도, 이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터덜터덜 걸었다. 이미 회상전 합문을 빠져나와, 싸리비 같은 계마수조 우듬지가 비치는 돌담길과 반대로 걷다보니, 치맛자락이 젖었다. 아무리 잠결이라도 더는 졸며 걸을 수 없는 암지巖地에 이르러, 왕암의 물줄기를 밟고, 치맛자락을 적시며 또 걷다가 넘어지는 참이었다.


"이년 가관일세."


뱀처럼 매끄러운 소맷자락이 이소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 소맷부리에서 뻗어나온 한삼이 아예 이소를 더는 옴짝달싹할 수 없게 동여매기까지 했다. 시뻘건 눈두덩 아래로, 막례가 흥미로운 눈초리로 이소를 굽어보았다.


"사람들은 싫지만, 네년이면 괜찮겠지."


흥미로운 눈초리로 막례는 이소를 내려다 보았다. 꽃다운 열여섯이라, 뺨은 온통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막례는 염지를 뻗어 관자놀이부터 턱밑까지 손끝으로 훑었다. 그 손끝이 워낙 차디차서, 이소는 잠결에도 고개를 움츠리면서도 눈을 뜨질 못했다. 곤히 잠든 그 얼굴을 보며, 막례는 붉은 잇몸까지 비칠 정도로 히쭉 웃었다.


"나랑 같이 가자꾸나."


반시진이 지나서, 서궐 흥화문에서 죽교 하나가 나왔다. 검은 너울을 검은 전모에 씌워 머리끝부터 가슴까지 드리운 여인이 좁디 좁은 죽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그 죽교를 모는 가마꾼 넷이서 수문장의 눈치를 보며 흥화문을 나섰다. 그 옆으로 전모 쓴 의녀가 호종하는 참이었다.


"부신通行符信은?"


아무래도 찜찜했던지 수문장 한명이 뒤따라와서 창칼로 앞을 떡 가로막고 물었다. 한눈에도 전모에 너울까지 드리워 얼굴을 가린 여인은 궐안 궁인 중에서도 지위깨나 되는 지밀상궁일 터였다. 당상관, 그것도 문반쪽 부녀자가 아니면 옥교를 탈 수 없는 탓에 무반쪽 부녀자나 지밀상궁은 저렇게 정자亭子 지붕도 없는 죽교만 겨우 탈 수 있었다. 그나마도 지밀상궁이나 되어야 탈 수 있는 죽교였다. 지밀상궁인 걸 알면서도, 상대가 너울도 걷어내지 않고 졸기만 하니, 신원을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주무시는데 어찌..."

"그래도..."

"들어오는 거면 몰라도 나가는 걸 왜 따지실까..."


전모 쓴 의녀가 입을 비죽이며 허리춤을 뒤척이곤 出출이라 적힌 부신을 꺼내어 수문장에게 앞뒤로 뒤집어보였다. 뒷면엔 내전지밀상궁內殿至密尙宮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수문장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검은 너울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검은 너울은 꾸벅꾸벅 조는 참이었다.


"내전...지밀상궁?"

"몸이 좀 편찮으셔서..."


수문장은 한숨을 내쉬며 창칼을 내렸다. 수상한 사내면 모를까, 계집을 두고 신원을 따지는 게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였다. 특히 중궁전 지밀상궁이 몸이 불편해서 잠시 궐을 나가겠다는데 더 따지고 싶진 않았다. 혹시라도 두창에 걸린 여인일까 겁도 났다.


"두창...은 아니..."

"뭐, 아직은 모르..."

"얼른 가보시오."


수문장은 께름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며 궐문 앞으로 돌아갔다. 의녀가 전모 아래로 입을 비죽이곤 가마꾼들에게 손짓하며 걸음을 보챘다.


"그저 두창..."

"두창이 그렇게 무섭나..."


가마꾼들도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그들도 켕기는 게 있는지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 수문장은 입맛을 쓰게 다시며 곁눈으로 힐끔거렸다. 오늘 하루는 이래저래 느슨했다. 대비전 명이라고 무녀들을 들이고, 또 내보내고 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허리춤이 헐거워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찜찜해도 지금은 그냥 저 죽교행렬을 더는 붙잡아두고 싶지 않았다. 귀찮았다. 그냥.


볼품없는 죽교행렬이 서궐 흥화문을 벗어나, 숲정이에 이르니, 의녀는 누군가를 찾는지, 소맷자락을 가만히 흔들어, 소맷부리에 감춰둔 방울을 두어차례 울렸다. 딸랑이는 방울소리가 맑게 수풀을 뒤흔들자, 길섶 안쪽에서 어린 정초군이 횃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막례? 늦으셨네?"


어린 정초군은 그다지 살갑지 않은 말투로 말하며 전모에 가려진 의녀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이 형형하다 못해 흉흉했다. 하지만 의녀는 믿는 바가 있는지 그저 태연자약하게 방울을 한번 더 흔들어 보였다.


"손님을 모시는 길이라..."

"웬 손님?"


정초군은 불손한 말투로 물으며 죽교 위에 앉은 검은 너울의 여인을 쏘아보았다. 저 괴팍한 무녀가 검은 너울까지 씌워서 어느 여인을 빼돌리는 게 느낌이 좋지가 않았다.


"몰라도 되잖아? 내 도움 받으려면 너무 관심 갖지 않는 게 좋아."

"아, 이거, 겨우 유근피 갖고 잘난 척은."


정초군, 체건은 소매춤으로 툭 삐져나온 유근피를 내려다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야유했다. 그런 체건을 보고 무녀, 막례는 느긋하게 아랫입술을 비죽였다.


"그 유근피로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던 주제에?"

"아니...왜 참견을..."


체건은 더욱 우거지상이 되었다. 이 요상한 무녀가 뒤따라와서 자신이 유근피를 들고 약방들을 뒤지고 다니는 것을 훔쳐보곤 대비전한테 이르겠다고 으르고, 또 자기가 돕겠다고 어르고 하는 통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어쩌다 체건 자신이 뒤를 밟힌 건지, 갑자기 개줄 채워진 똥개라도 된 기분이었다.


"네놈 불쌍해서 그러지."

"아니...내가 왜 불쌍한데."

"멍청해서 불쌍하지."

"아, 정말 확..."


체건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을 어루만졌다.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저 요망한 무녀를 겁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칼을 뽑을 수는 없었다. 힘없는 아녀자를 겁주기가 싫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뒤를 따라다닐 정도로 신출귀몰한 무녀를 겁내는 건지...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체건은 죽교 위에 너울 뒤집어쓴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개를 꾸벅거리며 조는 걸 보면, 태평해 보이기까지 했다. 돕는다고 잘못될 것 같진 않았다. 헌데 이 찜찜함은 대체 뭔지.


"그...누구기에..."

"네놈이 걱정 안해도 되는 분..."

"아 정말..."


체건은 짜증이 치밀어 두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부터 이 요악한 무녀가 자신의 신경을 살살 긁어대는 통에 온몸에서 털이 다 빠지는 기분이 되었다. 걱정 안해도 된다니까 더 하고 싶어졌다. 적어도 가마를 탈 수 있는 여인이니 더 알고 싶었다.


체건은 흘끔 너울자락을 보고선 허리춤에서 칼자루를 휙 돌리면서 그대로 몸을 솟구쳐 죽교의 끌채를 딛고, 또 딛고 양쪽 발로 밟고 섰다. 이미 검집째로 철릭에서 뽑아낸 칼끝이 여인의 너울을 파고드는 참이었다.


"네놈이!"

"흥."


막례는 물론 가마꾼들도 화들짝 놀라 돌아보는 참이었다. 끌채를 놓지도 들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마꾼들이 체건을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여!"

"죽고 잡나!"


하지만 체건은 그대로 검집으로 너울을 들췄다. 어느전 상궁마마신지 낯짝이라도 미리 봐두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은 너울 아래 꾸벅꾸벅 조는 앳된 얼굴이 나타난 순간, 그는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도저히 상궁일 수 없는, 차라리 나인 쯤 되는 얼굴이었다.


"어?"

"이놈이!"


체건이 멍한 얼굴로 너울 속 얼굴을 바라보는 사이, 그 뒤통수로 쇠방울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체건은 화들짝 놀라 상체를 옆으로 틀었다. 그 바람에 중심이 흔들려서 체건은 하마터면 끌채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나마 가마꾼의 어깨를 딛고, 또 딛고 해서 겨우 무사히 착지했다. 귓결에 뭔가 짤랑거리고, 또 딸랑거리는 소리도 한두차례씩 났던 것 같아 고개를 돌리니, 땅바닥에 팔찌 같은 가죽끈에 매단 쇠방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체건은 입을 쩍 벌리고 막례를 돌아보았다.


고작 살구 만한 쇠방울일 뿐이었다. 하지만 뒤통수를 뚫을 듯이 매섭게 날아왔었다. 일개 무녀가 아무렇게나 던진 솜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은 본색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지, 막례는 더는 움직이지 않고 체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손님을 왜 건드려? 자꾸 이러면 재미 없어."

"뭡니까? 저 항아님..."


말하다 말고 체건은 멈칫했다. 너울을 들췄을 때 보았지만, 저 앳된 항아님은 고개를 꾸벅이며 한가하게 조는 참이었다. 자신이 연신 끌채를 딛고 뛰고 하는 바람에 가마꾼들이 놀라 우왕좌왕하다 보니 가마가 요동치는데도, 저 항아님은 잠에 취해 눈도 뜨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남색 치마가 아니라 아청색 치마인 게, 의녀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개 의녀를 무녀가 빼돌릴 이유는 없었다. 그 일개 의녀가 빌려신은 게 아니고 오래도록 길들여 신은 듯한 사슴가죽 당혜까지 신었으니, 일개 의녀랄 것도 없지만.


"중전마마는 아니신데...왜..."

"이 아이라도 건져야지."

"뭐요?"


체건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이 아이라도 건져야겠다는 막례의 막된 말이 신경을 확 긁었다. 자신이 그 소동을 벌였는데도 세상 모르고 곤히 잠든 얼굴을 보니 그저 기가 찼다. 봄볕은 커녕 가을볕도 한번 안 쬐어 본 듯이 허여멀건 얼굴이, 결코 민가의 규수는 아니었다. 더구나 누가 업어가도 모를 듯이, 심지어 호랑이가 물어가도 모를 듯이 잠을 자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 같기도 하고, 또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 같기도 했다.


"어디서 많이 본..."


막례를 돌아보는 체건의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하필이면 누군지 기억이 나버렸다. 재산루로 김석주가 납치해왔던 아이...이 아이를 납치하겠다고, 체건 자신을 강제로 끌어들인 걸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저...절대로 건드려선 안될 상대가...궐안에 있는 여인이랑, 울안에 있는 여인인데..."

"원...네놈 말대로면 못 건드릴 여인 뿐이구먼?"


막례의 뻔뻔한 대꾸에 체건은 더욱 화가 치밀어 버럭 고함쳤다.


"내 말은! 그 중에서도! 중전마마랑, 영감나리 여식인데!"

"영감나리? 영감이면 영감이고, 나리면 나리지, 영감나린 또 뭐고?"


막례가 입을 비죽이는 것을 보고 체건은 입김을 허공에 훅훅 불며 대꾸했다.


"있거든요. 그런 양반이."

"알거든요. 그런 양반쯤."


막례의 대꾸에 체건은 터무니 없다는 표정으로 흘겨보았다. 그런 양반을 막례 따위 무녀가 알 리도 없지만, 알고도 이런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알고도 어떻게?"

"아니까 이러지."

"예?"

"지금 저 안에 있으면 이 아이도 죽어."


막례가 서궐 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 체건은 흠칫 놀라 서궐을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소린지. 저 안에 있으면 이 아이도 죽는다니? 그 말은 서궐의 누군가가 죽는다는 얘기였다. 그 서궐의 누군가가...


"설마..."

"방금 네놈이 말한, 절대로 건드려선 안될...궐안의 여인, 연꽃."


막례의 눈시울이 더 붉어졌다. 천천히 말하다가, 갑자기 숨이 가쁜 건지, 말투가 빨라졌다. 하지만 막례는 억지로 숨을 찬찬히 몰아쉬며, 또 천천히 한마디씩 끊어 말했다. 그런 막례를 보며, 체건은 입술을 감물고, 어둠 속에서 막례를 쏘아보았다.


"말도 안돼..."

"일단 이 아이는 살리고 봐야지."


막례의 말에 체건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하지만 막례를 쏘아보는 시선이 매섭게 번뜩였다. 중궁전하가 죽는다고? 두창이니 그럴 만도 했다. 처음엔 역병환자 열에 다섯이 죽고, 나중엔 열에 셋이 죽고, 그러다 다음엔 면역들이 생겨서 괜찮으려니 싶으면 또 열에 넷이 죽고...그렇게 끔찍한 병이었다. 그러니 죽는다고 말할 만도 했다. 하지만 왜 이 아이를 빼돌리려는 걸까. 체건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막례를 흘겨보았다.


"유근피가 아니면 뭔지, 그거나 말하쇼."

"내 두뭇개 앞까지만 같이 가주면 말해준다 했잖으냐."

"두모포는 왜 또...아, 거기 무녀촌?"

"뭐...그 근처에 볼 일도 있고."

"아...씨..."


체건은 욕이 튀어나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답답했다. 하필이면 최석정의 딸을 빼돌리는 일에 자신을 끌어들이다니. 그냥 막례를 버리고 가서 당장 최석정을 불러와야 되는 건 아닌지. 아니면 막례를 따라가서 지켜보고 최석정의 딸을 구해줘야 하는 건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그동안 막례가 그들에게 해코지한 적이 없으니, 일단 지켜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유근피."

"아 진짜..."


결국 체건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두모포까지 막례를 따라갔다. 두모포는 경강京江과 송계천松溪川이 만나는 두물머리라서 물비늘이 마치 갈치비늘처럼 잔잔했다. 물살이 완만한데도 온갖 뗏목과 황포돛배가 즐비하게 늘어서서 물살을 일으키며 왔다갔다 하는 통에 강가엔 하얗게 메밀꽃이 일었다.


"배 타시게요?"


배에서 내리는 누군가를 마중 나온 건지, 아니면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가려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지켜보려고 뒤따라오긴 했지만, 체건은 막례가 두뭇개나루에 정박한 황포돛배에 올라타는 것을 보니 불안해져서 이소의 등뒤로 바짝 다가섰다.


이소는 재산루에서도 잠에 취해 걷고, 눕고, 돌아다니고 하더니, 지금은 아예 더했다. 이런 이소를 데리고 막례가 두모포에서 배까지 타려는 걸 보니 체건은 더 불안해졌다.


"어. 오른쪽."


막례가 왼쪽 송계천 대신 오른쪽 경강 쪽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경강쪽 물줄기로 가자는 그 손짓에 사공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특히 닥나무가 많은 저자도楮子島 앞은 그나마 양반네들 물놀이로나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 뒤는 그야말로 물살이 느려터져 속터지는 곳이었다. 헌데 벌건 대낮에 미친 듯이 조는 소녀를 데리고, 웬 중년여인이 하필이면 물길이 느린 동호로 가자고 하는 참이었다.


"어? 무녀촌은 왼쪽인데? 왼쪽이에요. 송계천."

"거기 안가."

"간다매요."

"오른쪽 먼저."


체건이 끼여들어 막례와 실랑이를 벌이는 통에, 왼쪽 송계천으로 가는지, 오른쪽 경강으로 가는지, 사공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해괴한 손님들을 태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사공이 고민하는 사이, 막례는 떡하니 배에 올라타 버렸다. 그리곤 여전히 서서 조는 이소의 어깨너머 체건에게 손짓했다.


"뭐 해? 안 태우고?"

"아, 정말..."


물론 막례는 체건더러 두모포 앞까지만 같이 가자고 해놓고, 요악하게도 두뭇개 앞 동호東湖를 오가는 황포돛배에 태웠다. 물살이 느려터져 사공 혼자 노를 젓는 것 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는다며, 막례가 체건의 손에도 노를 쥐여주었다. 체건은 수중의 노를 내려다 보며 입가에 하얗게 게거품을 물다시피 하여 막례에게 짜증을 냈다.


"아 씨...두뭇개 앞까지만 가자면서요!"

"두뭇개 앞 맞는데?"

"아니 배 타자곤 안 했잖아요! 두뭇개 앞이면 그냥 두뭇개나루豆毛浦지!"

"내 얘기는 두뭇개 앞을 흐르는 동호東湖였는데?"

"아 이...말장난...아 씹..."


체건은 화가 치밀어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탁탁 때렸다. 그럴 수록 속이 더 답답해서 이젠 갑판 위에 이소가 아직도 잠들어 있거나 말거나 발부리로 갑판이며 사정없이 걷어찼다.


"어어? 네놈이 죽고 싶은 게냐?"

"그쪽이야말로 죽고 싶은 거 아니면, 이게 뭐요, 정말?"

"이 아이라도 살리려 그런다니까."


막례는 동호를 가로지르는 황포돛배의 뱃머리를 흘끗 쳐다보며 대꾸했다. 이미 배는 두모포를 떠나와 왼쪽 물줄기로 굽어드는 대신 오른쪽 물줄기로 돌아나갔다. 막례가 계속해서 염지로 더, 더, 더 가라고 고집한 끝에, 황포돛배는 둑도나루纛島津 숯광골炭洞 앞에 이르렀다. 막례가 실쭉 웃었다.


"다 왔구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해의 그림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해의 그림자 전편으로 끊고, 속편 준비 중입니다. 17.12.24 319 0 -
공지 등장인물의 변辯 +6 12.11.14 10,139 1 -
342 해의 그림자 341 - 終 +3 17.12.22 469 11 43쪽
341 해의 그림자 340 17.12.20 201 3 43쪽
340 해의 그림자 339 17.12.17 182 3 44쪽
339 해의 그림자 338 17.12.12 203 4 43쪽
338 해의 그림자 337 17.12.08 215 5 43쪽
337 해의 그림자 336 17.11.30 217 7 43쪽
336 해의 그림자 335 17.11.26 169 4 43쪽
335 해의 그림자 334 17.11.20 258 4 43쪽
334 해의 그림자 333 +1 17.11.12 215 5 43쪽
333 해의 그림자 332 17.11.04 242 4 43쪽
332 해의 그림자 331 17.10.28 204 3 43쪽
331 해의 그림자 330 17.10.22 248 6 43쪽
330 해의 그림자 329 +1 17.10.17 419 4 43쪽
329 해의 그림자 328 17.10.13 218 5 43쪽
328 해의 그림자 327 17.10.07 251 6 43쪽
327 해의 그림자 326 +1 17.10.03 307 4 43쪽
326 해의 그림자 325 17.09.29 228 6 43쪽
325 해의 그림자 324 +1 17.09.24 252 4 43쪽
324 해의 그림자 323 17.09.16 233 5 41쪽
323 해의 그림자 322 17.09.07 219 6 41쪽
322 해의 그림자 321 17.08.27 235 3 43쪽
321 해의 그림자 320 +1 17.08.20 308 4 43쪽
320 해의 그림자 319 +1 17.08.15 253 6 43쪽
319 해의 그림자 318 17.08.13 214 5 43쪽
318 해의 그림자 317 17.08.08 262 4 43쪽
317 해의 그림자 316 17.08.01 281 6 42쪽
316 해의 그림자 315 17.07.24 305 5 43쪽
» 해의 그림자 314 17.07.19 284 8 4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