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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12.26 13:10
최근연재일 :
2024.06.13 11:35
연재수 :
1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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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8
추천수 :
310
글자수 :
597,391

작성
24.01.1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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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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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이런, 이런, 큰일이다

DUMMY

충격과 공포.

그 심리적 통증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바보처럼 스크린을 멍하니 보고 있는 나를 보고 고박사가 혀를 찼다.

“쯧쯧쯧.”


나를 측은해하는 그 표정을 마주하니 고박사의 어수선한 얼굴도 선량하게 보였다. 고박사는 김이 나는 따뜻한 차를 가져와서 나한테 건넸다.

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차를 한동안 내려다봤다.


‘이게 뭐지?’

시커먼 보릿가루가 떠 있는 보리차였다. 고박사가 톡톡 내 어깨를 두드렸다. 위로의 손짓이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어둡고 막막하네요.”

“보리차를 소재로 심리상태를 비유하다니 의외로 섬세한 친구로구나. 마셔봐. 보기보다 괜찮아. 더운 기운이 들어가면 꼭 어둡고 막막하진 않을 거야.”


따뜻한 차를 천천히 들이키니 아주 조금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고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우스를 클릭해서 다른 장면을 보여줬다.


한쪽 다리를 흐르는 물에 담그고 서서 물고기를 찾고 있는 새가 보였다. 도심에 흐르는 지천에 자리를 잡은 황새였다. 황새는 사람이 가까이 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았다.

다음 영상은 북미의 한 마을이었다. 커다란 곰이 새끼를 데리고 사람의 마을로 내려와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짐간으로 변신한 모습을 들켰던 아까 그 친구는 이런 현상들을 걱정했지. 아니, 걱정이라기보다는 싫어했어.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것 같았지.”


고박사에게 미행당해서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는 영상이 찍힌 사람은 자주 고박사를 찾아와 동물들의 현실에 대해서 푸념을 늘어놓았었다고 했다.

야생동물들이 스스로 비둘기나 개처럼 인간 문명에 빌붙어 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면서 걱정했다는 거다.

자꾸 인간사회에 접근하려 하고 가축처럼 인간에게 키워지기를 희망하는 동물들에 대해서 불만도 드러냈단다.


“그 친구 얘기를 가만 들어 보니까 인간이 아니라 야생동물의 관점에서 말하더라고. 백인 사회에 동화돼서 인디언의 정체성을 잃는 게 안타깝다. 고려인이 몽고족 풍습을 받아들이는 것은 배신자다. 뭐 그런 얘기를 하는 비분강개 열사 같았다니까.”


같이 술을 마신 적도 있는데 취하더니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도 했단다.

오기 전엔 인간사회가 좋아 보였는데 막상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잘못 생각하는 친구들을 말리고 싶다는 얘기까지 하더니 만취해서 개가 됐다고 했다.

‘이성을 잃으면 늑대가 돼야 되는 거 아닌가?’


고박사는 술 얘기를 하니까 술 생각이 나는지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말을 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이나 코리안 드림 같은 꿈을 품었다가 실망한 얘기 같지 않니? 호모 사피엔스 드림이 허상이었어요, 하면서 짐승들이 후회하는 거야.”

“그럼··· 결론은 야생동물로 살던 것들이 인간으로 변한다는 건가요?”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단순하게 생각해. 원래 그랬어.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야.”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줄만 알다가 지구가 도는 걸 알았을 때가 더 놀라웠을까? 지구가 네모가 아니라 둥글다는 걸 알았을 때 더 충격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았다. 같이 살던 사람의 정체가 여우나 늑대란 걸 알게 됐다면···


“이걸 봐. 70년 전의 우리나라 산이야.”


고박사가 이번에 보여준 건 벌건 흙 위에 띄엄띄엄 푸른 빛이 도는 과거 우리나라의 민둥산이었다.


“옛날에 붉은 산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었어. 나는 붉은산이 단풍이 든 산을 말하는 건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지. 나무가 없어서 벌건 흙이 드러난 민둥산을 가리키는 말이었어.

1960년대 말 70년대 초까지는 민둥산이 아주아주 많았지.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나무 심는 날까지 정해 놓고 열심히 나무를 심었어. 요즘이 백년 전보다 훨씬 울창하다 이 말씀.”


그건 인정한다. 들어서 아는 얘기다. 근데 민둥산 얘길 지금 왜 하는 거지?


“그런데 왜 백년 전에는 늑대 여우 표범 곰 심지어 호랑이까지 우글거리던 나라였는데 걔네들 다 어디로 갔을까? 환경파괴와 도시화로 인해 야생동물이 멸종했다. 그런 뻔한 소리가 정답일까? 아닌 경우는 없을까?”

“그러니까, 동물들이 인간으로 변신했기 때문에 숫자가 줄었다는 건가요?”

“딩동댕!”

“형사니까 흉측한 것들 많이 보지 않았니? 인간이 어떻게 저런 짓을 할까? 문명사회에 사는 인간이 왜 짐승처럼 행동할까?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니?”

“있어요. 꽤 많이.”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점점 늘잖아. 숭산 스님이라고 미국에 한국식 선수행을 널리 알린 유명한 분이 계셨어. 그분 말씀이 전생에 동물이었다가 인간이 된 사람들이 많아져서 인구도 늘고 사람보다 애완동물을 더 중시하는 사람도 많아졌단 거야.

그런데 전생에 동물이었던 인간만 있는 게 아냐. 현생에 동물에서 변신한 인간도 있는 거야.”


영상을 보고 기철이형 얘기까지 들었지만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의심하는 나의 표정을 보더니 고박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니?”

“우리 민족이 그렇다고··· 얘기들을 하지요.”

“단군 할아버지 엄마가 마늘과 쑥을 먹은 곰 출신이잖니. 엄마곰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아빠곰이 뚱뚱하고 엄마곰이 날씬한 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고박사는 동요의 리듬을 살려 말했다. 애기곰이 너무 귀여워까지 인용했으면 이 영감탱이 아마 율동도 했을 거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생명의 기원을 알아야 되고, 배달민족이라면 올바른 민족의식이 있어야 할 거 아니니.”


당연하게도 고박사가 말하는 배달민족은 플랫폼 기업의 이름이 아니었다. 과학 지식뿐 아니라 민족의식까지 탑재한 고박사는 열변을 이어갔다.


“예언자가 말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계시를 받고 왔다. 훗날 왕궁을 떠날 왕자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더니 하늘을 보고 선언했다. 인간으로 살아가던 신의 아들이 인간들에게 처형당했다가 되살아나 하늘로 올라갔다. 이런 걸 신뢰한다고 하면 뭐라고 안 그래. 개인의 믿음은 자유라고 그러지.

그런데 곰이 여인이 돼서 하느님의 아들과 결혼했다는 걸 믿는다고 그러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해. 왜 그러는 거니? 우리나라 사람들?”

“잘 모르겠어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정말 잘 모르겠다. 어디까지 믿어야 되고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고박사와 헤어진 다음 기철이형을 만나서 다시 상의를 할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기철이형은 ‘짐간’에게 당한 피해자지만, 나는 ‘짐간’ 추정인의 남편이니까. 기철이형이 원칙적인 대응을 주장하면 난감할 것 같았다. 지금의 나로서는.


집 근처까지 와서 차 안에 한 시간 넘게 멍하니 앉아 있었다.

미랑한테는 저녁 먹고 좀 늦게 들어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미랑이 전화해서 언제 오냐고 물을까봐 선수를 친 거였다. 미랑과 대화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으니까.

도무지··· 미랑을 어떻게 대하고 집에서 어떻게 지낼지 결정이 되질 않았다.


고민 끝에 일단은 평소처럼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확실한 현실 파악, 분명한 방향 설정이 될 때까지는 전과 같이 생활한다!

결국 열 시가 돼서 나는 집에 들어갔다. 옥,희는 잘 시간인데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평소처럼 신이 나서 나를 반겼다.


“아빠씨 어서 오세요!”

“왜 늦게 왔어 아빠씨!”


미랑이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옥,희는 나한테 아저씨라고 하다가 갑자기 아빠로 호칭을 바꾸기가 어색했나 보다.

아이들이 만든 아빠와 아저씨의 중간 호칭이 ‘아빠씨’였다. 아빠를 존중하는 의미 같아서 듣기에 괜찮았다.

일단 두 팔에 매달리는 아이들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놀이기구 역할을 시작했다.


아빠씨의 늦은 귀가가 못마땅해 벼르고 있었는지 옥,희는 너무나도 팔팔했다.

밤시간이지만 여전히 에너지가 넘쳐서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랑과 오래 마주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보다도 더 힘을 내서 옥,희와 신나게 놀았다. 숨바꼭질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공기놀이를 하고 인형극을 하고 닭싸움을 했다.

미랑은 내가 적극적으로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진 않았다.


옥,희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나는 그 엄청난 활동량을 잘 버텨냈다.

그 다음엔 평소처럼 미랑 옆의 잠자리에 누웠다. 미랑은 불을 끄고 먼저 잠든 것 같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서 나를 누르는 중압감이 배로 커졌다.

솔직히 말해서 무거운 감정의 핵심은 슬픔이나 곤란함이 아니었다. 미랑과 나란히 누워 있으면서 나는 엄청나게 쫄아 있었다.


내가 ‘짐간’의 정체를 알았고 기철이형 폭행범으로 황묘화를 의심한다는 걸 미랑이 안다면? 미랑도 황묘화와 같은 비밀을 품고 있는 ‘짐간’이라면? 한 발 더 나아가 미랑 전남편 신호진 사망 사건이 ‘짐간’ 때문에 일어난 거라면?

나와 미랑 사이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긴장했다.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다. 미랑의 팔이 내 명치 위로 스르르 올라왔다.

이건 무슨 신호지? 단지 우연한 잠버릇인가? 나는 몸을 무지무지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미랑의 팔을 명치에서 배 위로 옮겨 놓았다.

쿵쾅쿵쾅 우퍼 스피커처럼 진동하는 내 심장의 박동을 못 느끼게 하려고. 내가 미랑의 정체를 알아채고 떨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한쪽 팔만 올려놓고 있던 미랑이 내 쪽으로 돌아눕는 게 느껴졌다. 혹시 지금 옥,희 동생 만들기의 욕망 같은 걸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무기는커녕 어떤 방어도구도 숨길 수 없이 적나라한 무방비 상태가 된 지주성 위에 올라앉은 구미랑. 에로틱한 동작으로 지주성을 혼미하게 만들더니 갑자기 머리를 뒤로 홱 젖혀 머리카락을 화라락 날리면서 변신을 한다.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 누나는 얼음 송곳을 휘둘렀는데 구미랑에겐 아무런 흉기도 필요 없다. 손이 앞발로 변하면서 날카로운 발톱이 솟고 송곳니가 튀어나온다.

“크아아악!”


아이고야, 나는 1초에 1센티미터씩 무지무지 조심스럽게 몸을 틀어서 미랑의 팔을 떨궈내고 역시 1초에 1센티미터씩 미랑 곁에서 멀어져갔다.

침대 끝에 거의 매달리는 꼴이 됐다.

선배들이 마누라가 무섭다고 얘기하던 게 이런 거는 아니겠지. 이 정도로 머리칼이 쭈뼛 솟고 와들와들 한겨울처럼 떨린다는 건 아니었겠지.


신체 접촉에서 벗어났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살짝 선잠이 들긴 했다. 캬아오, 크르르릉하는 짐승의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화들짝 놀라면서 잠에서 깼다.

내 곁의 미랑은 얕은 소리로 드르렁 코를 골 뿐이었다. 휴~ 긴 한숨이 나올 때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새벽녘에 또 한 번 설핏 잠이 들었는데 이번엔 음성이 들렸다. 진짜 미랑의 음성.


“하지 마, 하지 마, 그건 위험해.”

미랑은 팔을 내저으며 잠꼬대를 했다.

뭘 하지 말라는 거지? 황묘화의 고양이 권법 테러를 말리는 건가? 확인하려고 잠꼬대를 유심히 들어봤다. 다행히도 살벌한 내용은 아니었다.

옥,희한테 타이르면서 뭔가 말리는 말투였다. 아이들이 높은 곳에 올라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해가 떴다. 나는 살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와서 옥,희가 세상 모르고 자는 모습을 들여다 본 후 미랑이 깨기 전에 집을 나왔다.

이렇게 하루하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건가? 나는 뇌 속에 있다는 세포줄기들의 안부를 걱정하면서 출근했다.



눈이 벌게서 사무실에 들어서니 반장님은 반갑게 맞이하시면서 써야 할 보고서와 처리해야 할 공문을 한아름 안겨주셨다. 흔쾌한 척 받아들인 다음 할 일의 순서와 참고할 문서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기철이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연락 안 한 건 입원한 선배를 배려한 게 당연히 아니겠지?”


다짜고짜 트집을 잡는 기철이형 목소리엔 어제보다 힘이 있었다. 나는 간단히 어제 일을 보고했다. 고박사 만났다. 동물 반 인간 반 그런 게 진짜 있단다. 근거 동영상 봤다. 바로 연락 안 한 건,


“됐다. 대충 알잖아. 너도 심란하겠지.”


알면 처음부터 좀 부드럽게 말하지, 라고 화를 낼 뻔했다. 나도 답답했으니까.


“웨딩 기타리스트한테 부탁을 해놨어.”

지능범죄팀 박경위!


“합법은 아니지만 나쁜 취지도 아니라서 겨우 허락받았다. 황묘화, 구미랑··· 휴대폰 위치추적 해줄 거야. 메신저나 문자로 연락 갈 거다.”


아··· 결국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형사로서 아내의 뒤를 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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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모든 길목 모든 모퉁이에서 24.01.01 96 7 14쪽
6 아래층 여자 위층 남자 +6 24.01.01 101 7 13쪽
5 요동치는 옥탑 +4 23.12.30 97 7 14쪽
4 하트 어택 Heart Attack +6 23.12.29 102 7 12쪽
3 피살자의 아내 +12 23.12.28 140 8 14쪽
2 수컷 삼대 +10 23.12.27 191 9 15쪽
1 총을 쥔 시체 +14 23.12.27 343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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