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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12.26 13:10
최근연재일 :
2024.06.13 11:35
연재수 :
1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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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글자수 :
597,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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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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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No 애매모호 맨

DUMMY

재주 넘는 여인의 데자뷰.

나는 기시감 같은 걸 자주 느끼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당의 미랑에게서 느낀 데자뷰의 정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 기억력한테 알아내라고 독촉하지 않기로 했다. 심리적으로 대단히 섬세하거나 집착하는 캐릭터는 아니니까. 어디서 본 듯하다는 게 착각일 수도 있고 사소한 장면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막연한 느낌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미랑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게 중요했다. 당연히 더 알고 싶기도 했고.


미랑은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까운 친척도 없어서 십대 후반부터 거의 혈혈단신으로 살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체조 선수를 해서 대학도 체조 전공으로 진학했지만 늦은 나이에 시작한 탓에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고 했다.


“초딩 때나 유치원 때부터 시작한다던데 그래도 선수 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고딩 때 선수가 된 건 대단한 소질 아닌가요?”

“소질은 좀 있어요. 기회가 좀 늦었죠.”

“어릴 때부터 시작했으면 대단했을 텐데 아깝네요.”

“딱 맞게 기회 잡는 사람 안 많아요. 건강하게 운동했으면 됐죠 뭐.”


대학을 졸업하고는 체조 코치로 일하다가 총포까지 포함해서 체육용품을 판매하던 신호진을 만났다고 했다.

주변에 기댈 곳 없이 외롭다 보니 못난 남자를 만났던 것 같다. 신호진은 처음엔 물론 사탕발림을 남발하면서 좋은 모습만 보였지만 결국 외도와 폭력에 급사까지 했고.


문제 많은 남편 빼고는 가까운 가족친지도 없었지만 완전히 외롭진 않았던 게 오래 만난 절친들이 있다고 했다.

미랑과 살아온 사연이 비슷한 편인 사람들이었다. 고아였거나 고아처럼 외롭게 자랐으나 자수성가한 친구들.

이제 사귀는 남녀의 공식 코스, 친구들을 만나볼 타이밍이었다.


90년대까지 공단이었다가 젊은 문화 예술인들의 거리로 변한 동네에서 한 친구가 장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내 친구 셋이 오늘은 식당 전체를 예약한 거예요. 주성 씨가 온다니까요.”


그 식당은 포장마차였다.

미랑의 얘기는 살짝 농담을 보탠 거였지만 내가 실망한 건 전혀 아니다. 워낙에 먹는 걸 가리지 않았고 미랑 친구들과 가까워진다면 장소도 별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포장마차는 전통적인 리어카 형태 그대로지만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퓨전 메뉴로 나름 유명한 곳이었다.


주인은 미랑보다 두 살 아래, 나랑 동갑인 서른 살의 마종대 씨.

그는 포장마차만 하는 게 아니었다. 힙합 레이블에 속해서 힙합 가수들의 홍보 매니지먼트 일도 보고 있다고 했다.

얼굴이 길쭉한 편이지만 눈에 띄는 훤칠한 미남이었다. 게다가 살짝 선선한 날씨인데도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근육을 과시하고 있었다.


‘짜식 왜 오버야? 자존심 상하게···’


한눈에 봐도 군살 없는 몸뚱이였다. 근육이 딴딴한 팔뚝 그야말로 말벅지인 다리. 단순히 부풀리기만 한 근육이 아니라 소나무 뿌리처럼 튼튼하고 질겨보이는 스트롱 머슬맨.

술장사하면서 엔터 쪽 일까지 하니까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나머지 두 친구는 다행히 여성. 먼저 한 분은 우리의 다세대 주택주 황묘화 씨.

날카롭고 까칠한 인상이지만 쎈 캐릭터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반할 만한 개성 있는 외모다. 오늘따라 스모키 화장을 한 눈이 강렬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스물여덟 살이고 영화나 드라마 쪽 일을 한다고만 밝혔던 직업은 특이하게도 스턴트 우먼이었다. 그래서 옥상 난간에서도 여유있게 앉아 있었나 보다.


또 한 여성은 서른네 살의 천연호 씨.

옥,희 또래의 아이를 키우면서 옥,희를 자주 맡아주는 언니가 이 분이었다. 연극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어린이 연극이나 만화 더빙 동화 구연 등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주 잘 따르고 당연히 옥,희도 좋아한다.

나이가 좀 위라서 그런지 사람이 넉넉하고 여유 있어 보였다.


새 멤버가 처음 참석한 모임답게 인사말과 덕담이 오가고 어떻게 만났냐 뭐가 좋았냐 같은 문답이 오갔다. 그리고 연호 씨가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자기 범행을 자백했다.


“아침 이른 시간이니까 분명히 두 사람이 방에 있을 거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애들을 풀어놨지. 엄마 놀래줘야지! 살금살금 올라간 다음에 문 열고 확 뛰어들어가는 거야!”


이어진 황묘화의 코멘트,

“풀어놓았다니까 무슨 개를 푼다, 뱀을 푼다 그런 얘기 같애.”


그리고 마종대의 평가,

“옥,희는 개보다 시끄럽고 뱀보다 무섭지.”


당사자 구미랑의 고백,

“정말 무서웠어. 아주 식겁했어. 그리고 언니 죽이고 싶었어.”


민망했던 경찰 지주성 왈,

“대한민국 경찰 중에 어린이를 피해서 장롱에 숨은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걸요.”


그렇게 우스운 얘기만 오가면 좋았을 거다.

하지만 세상에 어려운 일들이 있고 그런 걸 얘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이 모임에선 황묘화였다.

그녀는 주변에 연하 총각이랑 결혼한 이혼녀 언니가 있는데 매우 힘들어 한다고 했다. 전남편과 낳은 아이들과 새 남편과의 관계, 새로 태어난 아이와 형들의 관계 등등. 그리고 젊은 남편을 보면서 불안해 한다고 했다. 남자가 혹시 후회하거나 젊은 아가씨들한테 끌리지 않을까 걱정한다는 거다.


“남녀관계는 좋을 때 기준으로 판단하는 건 무모한 것 같더라고요.”

차분하고 차갑게 황묘화는 말했다. 나를 보면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감정도 결코 아니고요.”


황묘화는 쉽게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질문 두 개만 할 게요. 미랑 언니랑 옥,희가 한 장소에 있고 주성 씨와 미랑 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른 장소에 있어요. 두 곳 다 위험에 빠졌어요. 주성 씨가 가면 살고 안 가면 죽어요. 어디로 갈 거죠?”


막막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질문을 우회해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옳지 않은 질문이십니다. 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해서 괴롭히시네요.”


천연호가 내 편을 들어줬다.

“현명한 답변이네요. 묘화야. 질문이 과하다.”


황묘화는 고개를 저었다.

“하늘에서 별 따다 준다는 사람은 가능해서 맹세한 걸까요? 마음가짐을 물었던 거예요.”

그리고 다시 정색하더니 두 번째 질문을 했다.


“아마 애 딸린 과부랑 사귄다, 결혼한다 그러면 집안에서 반대하실 거예요. 그러면 집안 어른들하고 싸우실 거 같네요. 의절하시더라도. 그렇죠?”

“그렇겠죠.”

“그런데 언니랑 같이 살다가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본가 도움이 필요해졌을 때, 속으로 미랑 언니 원망하지 않을까요?”


“잠깐잠깐, 후회 안 하는 사람이 어딨니? 그래도 자기 사람이 더 소중하니까 사는 거지.”

이번에도 천연호가 내 편을 들어줬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황묘화의 질문에 답했다.


험험··· 마종대가 헛기침을 하고는 맥주잔을 비웠다.

황묘화의 질문 덕에 포장마차 분위기가 싸해져 있었다. 미랑과 천연호는 황묘화에게 눈총을 쏘고 있었다. 내가 잠시 빠져주는 게 분위기 정리에 좋을 것 같았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맥주를 많이 마셨더니···.”


얘기한 대로 수분을 방출하고 화장실 건물 앞에서 전자 담배를 빨고 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낮부터 맑은 하늘에 여우비가 오락가락하던 특이하고 불순한 날씨였다.

맞아도 될 만한 비라서 그냥 포장마차 쪽으로 가는데 천둥 번개까지 번쩍였다. 그러면서도 머리 위엔 먹구름 새로 보름달이 환한 희한한 밤이었다.


포장마차 앞까지 걸어가서 잠시 비구름 틈의 보름달을 감상할 때였다.

격렬하고 거친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번엔 천둥이 아니었다.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괴성! 포장마차 쪽이었다.


‘뭐지?’

포장마차로 시선을 돌렸을 때 번쩍 번개가 떨어졌다. 눈 앞이 하얗게 밝아오면서 포장마차 안 사람들의 그림자가 포장에 비쳤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었다! 목 아래까지는 옷을 입은 사람의 그림자. 그러나 목 위는 커다란 개, 커다란 고양이의 대가리 그리고 길쭉한 말의 대가리였다!


“어··· 어!”


나는 비명을 흘렸다. 그리고 말 그대로 눈 씻고 다시 봤다.

번개의 빛이 사라진 어둠 속의 포장마차에는 이제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내 뺨을 때리면서, 고개를 흔들면서 조심스럽게 포장마차로 다가갔다.


“하, 하하하, 하하···”

짐승 대가리들은 없었다. 미랑과 미랑의 친구들은 내가 들어오자 매우 어색하게 웃어댔다. 마치 안 좋은 분위기에서 나갔던 내 기분을 달래 주려는 듯이.

심하게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며칠 후에 반장님과 상담을 했다.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제 정신인지, 내 시력과 판단력이 멀쩡한 건지 신뢰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기철이 형한테 물어볼 순 없었다. 친한 형이지만 왠지 미랑과의 관계는 딱 잘라 반대하는 것 같았으니까.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해. 내가 정신과 의사는 아니지만 상담을 하려면 옆집 할아버지가 섹시해 보였든 뒷집 꼬맹이를 뒤지게 패고 싶은 충동이 들었든 솔직히 얘기하는 거야.

순간적으로 침투하는 사고, 일시적인 상상 같은 건 죄가 아니니까. 그걸 자기 것으로 선택하면 죄가 되는 거고, 그런 것들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집착하면 병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얘기했다. 보름달이 비치면서 동시에 벼락이 친 희한한 상황을.

포장마차 밖에서 봤을 때 커다란 귀, 길쭉한 목, 인간의 옷을 입은 짐승들이 앉아 있는 것 같았던 무서운 그림자들을.


“무척 무서웠겠구나.”

라고 나를 위로하면서 반장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미랑과 함께 할 새로운 삶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 착시를 일으킨 거라고 의견을 밝혔다.


“나는 말이야. 어찌 보면 도망가기 위한 마음의 근거, 핑계를 찾기 위한 너의 심리 상태가 낳은 착각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정말 제 착각이었을까요?”

“못 믿겠냐? 내 말을? 안 믿을 거면 왜 물어봤냐고는 하지 않겠다.”


상담사치고는 매우 엄격한 반장님의 표정에 뭐라 대꾸를 하지 못했는데,


“그래, 내가 말한 건 추측이다. 추측이야. 확실한 분석을 원하면 돈 많이 주고, 비싼 정신과 의사 예약하고 하안참 기다린 다음에 잠깐 만나 봐. 한 번에 만족이 안 되면 또 돈 많이 주고 만나 보고.”


정말 나보고 만나라는 거야? 아니, 아무래도 만나지 말고 자기 말을 믿으란 얘기로 들렸다. 이 아저씨도 말을 돌려서 하는 데 재주가 있다.



포장마차 모임 이후로 미랑과 나 사이에는 약간 서먹한 기운이 흘렀다.

미랑은 황묘화의 불편한 질문 때문에 내가 마음이 상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짐승 대가리 그림자 때문에 맘이 개운치 않았다.

퇴근 후에 집 근처 카페에서 미랑과 마주 앉았을 때 결국 미랑이 황묘화 얘기를 꺼냈다.


“묘화가 불편한 질문한 다음에 주성 씨 많이 기분 상했나 봐요.”

“아니, 아니에요.”

진짜 그것 때문이 아니니까.


“묘화가 말했던 문제들이 현실이잖아요. 내 입장에선 주성 씨한테 어떤 요구도 못 해요.”

“아니라니까요. 왜 요구를 못 해요. 당연히 부탁도 하고, 잔소리도 하고, 심부름도 시키고 때로는 강요도 하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런데··· 요 며칠 주성 씨 얼굴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많이 걱정하고 기운이 빠진 것 같아서요. 나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남자 입장이라도 당연히 두려울 수 있어요.”


너 겁날 거야, 이런 말에는 매우 민감한 편이다. 특히나 여성이 그런 말을 할 때는 절대 동의를 못 한다. 발작 버튼이랄까?

나 안 쫄았어! 내가 왜 겁을 내! 여인 앞에서 중2병처럼 외치고 싶은 게 아직도 내 감성이다.


“아니라니까요!”

내 언성이 조금 높아지고 우리 사이에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카페에서 마마무 노래가 흘러나왔다.


“니 눈빛에 내가 헷갈리잖니, 거기 미스터 애매모호 쳐다만 보지 말고 좀 더 다가와 봐. 쉿!! 지금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헬로 미스터 애매모호! 니 덫에 걸린 난 애정결핍 여우! 거기 미스터 애매모호. 찔러보지만 말고 저질러 봐!”


그 노래를 듣고 미랑의 표정이 돌변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 미랑이 나의 애매모호 우유부단 지지부진한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구나!’


이 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내 뇌리를 강타했다. 나는 신속히 내 나름의 체크리스트를 가동했다.

미랑을 만나는 건 불행한 여인에 대한 동정심인가? 아니다.

일시적 엔조이인가? 아니다.

미랑의 딸들 옥,희가 나한테 부담인가? 아니다.

미랑과 헤어지면 후회할까? 당연하지!

미랑을 안 만날 자신이 있는가? 없어!

애딸린 과부, 피살자 아내라는 사회적인 평가가 신경 쓰이는가? 노노노노노!!!!!


그거 하나는 자신 있다. 누구한테 피해준 거 없는데 남이 욕하거나 남이 평가질하는 따위는 절대로 결단코 신경쓰지 않는다!!!! 그게 지주성이다!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미랑이 물었다.

“우리 사이가 그냥 재미로 만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낫다고요. 주성 씨도 그런가요?”


나는 결심을 밝히기 위해, 단전 아래까지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이를 악물었다.


“왜 대답을 안 해줘요··· 주성 씨도 두려운 거죠?”


나는 미랑의 두 손을 꽉 움켜 쥐었다. 그리고 단전에서부터 터져 올라오는 결심을 고백했다.


“같이 삽시다! 미랑 씨!”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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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괴물을 보았다 24.01.02 78 7 14쪽
7 모든 길목 모든 모퉁이에서 24.01.01 91 7 14쪽
6 아래층 여자 위층 남자 +6 24.01.01 91 7 13쪽
5 요동치는 옥탑 +4 23.12.30 91 7 14쪽
4 하트 어택 Heart Attack +6 23.12.29 96 7 12쪽
3 피살자의 아내 +12 23.12.28 134 8 14쪽
2 수컷 삼대 +10 23.12.27 186 9 15쪽
1 총을 쥔 시체 +14 23.12.27 335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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