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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22.05.11 11:45
최근연재일 :
2022.06.1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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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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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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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47화>

병자호란




DUMMY

* * *


 석양이 한즈시에 짙게 깔릴 무렵, 하이란이 탄 말은 육군 사령부의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하멜과 완저, 파르코가 뒤를 따랐고, 샤키와 샤니도 함께 했다. 이들은 사령부의 영내를 곧장 가로질러 본래의 목적지로 향했다.

 이스트 포인트(East Point)였다.


 하이란은 감회가 새로웠다. 하멜도 물론 그러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그저 평범한 1학년 생도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하이란이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고 나서는,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변해버렸다.

 그녀는 코르(Corr)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고, 하멜은 그런 황제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근위대장이었다.

 알콩달콩 연애를 하며 멋진 미래를 꿈꿀 그런 젊음이 한창인 19살의 나이지만, 왕족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기에, 아니 그것도 모자라 왕국의 유일한 왕위 계승자라는 운명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었기에, 하이란과 하멜은 지금 다가온 막중한 임무를 완수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황제와 일행이 향한 마지막 행선지는 바로, 이스트 포인트 영내에 있는 노천극장이었다.

 생도들의 교육을 위해 지어진, 이른바 ‘역사 재현관’이었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전쟁사 담당 교수인 장군 나리프(Nariff)가 ‘7일 전쟁의 개시’라는 제목으로 여기서 강의를 했었고, 하이란과 하멜, 샤니는 그가 주장하는 강의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며 수업이 끝나도 자리를 뜨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던 샤니의 오빠인 3학년 생도 샤키를, 하이란과 하멜이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였다.


 샤키도 2년 전 강의에서 논쟁이 좀 있었다는 말을 했었고, 그래서 네 사람은 반딧불이의 영상을 다른 각도에서도 자세히 살폈었다.

 그러다 하멜이 문득 비둘기 떼 위를 빠르게 잠깐 스치는 그림자를 발견했었고, 그런 이유로 네 사람은 코르가 모르는 어떤 첨단무기를 적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기는 하늘을 나는 비행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후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네 사람은 결국 추진체를 단 글라이더의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페리도트의 기운을 받아 엄청난 성능을 자랑하는 수정 엔진이 탑재된, 최첨단의 전투기를 보유할 수가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 모든 과정과 결과의 시발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오늘도 그날처럼 연단 위에는 향로가 놓여졌고, 근위대 병사들은 지시에 따라 불을 붙여 은은하게 향냄새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늙은 주술사도 물론 그 옆에 서있었다. 샤키도 근처에 있었다.

 근처의 ‘문서 보관실’에서 가져온 ‘전쟁 일지’는 이미 탁자에 놓여진 상태였고, 당시에 정찰조류로 활약했던 이제는 많이 늙어버린 송골매 몇 마리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준비를 다 마치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시작하세요.” 황제의 짧은 명이 떨어졌다.

 그러자 청중석을 밝히던 횃불들은 대부분 꺼졌고, 연단 주변에 있는 작은 초의 불빛만이 약하게 흔들렸다. 황제와 수뇌부가 있는 곳은 짙은 어둠에 잠기었다.


 잠시 후, 주술사는 황제에게 예를 먼저 취한 뒤, 주머니에서 약초가루를 꺼내어 향불 위에 천천히 뿌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계속 주문을 외웠다. 그러는 사이에 샤키는 탁자 위에 놓인 ‘전쟁 일지’를 펼쳐 지난 ‘7일 전쟁’이 터졌던 날의 기록을 찾아내었다.

 곧 강한 향이 극장 안에 진동했고 공중으로도 퍼져나갔다. 송골매들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탁자 위에서 잠시 비틀거리더니 전쟁 일지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가리를 상하좌우로 총총 바꿔가며 일지에 적힌 글이나 그림을 읽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큰 날개를 몇 번 펼치며 ‘끼약!’하는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송골매의 몸에서도 많은 깃털이 빠지며 사방으로 날렸다. 얼마간 이러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주술사의 주문은 계속 되었다.

 전 과정은 몇 달 전의 그날과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드디어 반딧불이가 조금씩 날아오더니, 시간이 갈수록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다. 향기에 이끌린 반딧불이는 연단 위의 탁자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고, 전쟁 일지에서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송골매의 깃털은 천천히 공중을 떠다니기 시작했고, 반딧불이는 허공에 움직이는 영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반딧불이 하나는 작은 점에 불과했지만 수만 마리의 반딧불이가 모두 모이니, 눈앞에 잡힐 만큼 생생한 화면이 황제와 수뇌부의 가까이 공중에 그대로 생겼다.


 코르와 퓨그의 국경인 두크린(Duckreen)강 하류의 지형이 그려졌고, 병력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샤키가 전쟁 일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반딧불이가 만드는 영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했다.

 하이란과 하멜, 샤니는 그때 강의를 듣던 기억이 더욱 또렷해졌다.

 장군 파르코는 아주 오래 전에 전술회의를 할 때 잠깐 보았던 영상이라, 그다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다. 총독 완저는 역사 재현관 자체를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반딧불이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모습은 코지섬의 갤라산 기슭에서 수도 없이 보았지만, ‘7일 전쟁’ 당시의 기록이 재현됨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류에 포진한 코르군 국경수비대 3개 사단의 움직임이 보였다. 두크린강 건너 반대편에 집결한 적군의 큰 움직임도 대충은 다 보였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침범할 준비를 하는 것은 좀 더 확실히 볼 수가 있었다. 이에 대해 코르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며 결사항전에 대비하고 있는 것도 그대로 다 나타났다.

 그런데 아군의 움직임이 있자마자 적군은 벌써 이를 눈치채고 그 다음 진지로의 이동을 하고 있었다.


 장군 나리프는 당시 이 영상을 보여주며 이런 일이 생긴 이유로, 아군 안에 첩자가 있어서 아군의 이동경로를 몰래 적에게 전달했다고 강변했었다. 국경수비대 3개 사단의 첩자가 동시에 송골매를 적에게 날려 모든 기밀을 누설했다고 우겼었다.

 이에 생도들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고, 또 그래서 결국 비행체의 흔적을 찾아낼 수도 있던 것이었다.

그건 그것이고... 이미 다 지난 일이고...

 황제와 수뇌부가 알고 싶은 영상이 지금은 보이지를 않았다.


 아군의 움직임을 포착한 적군의 일부만이 배에 올라 강을 건너려고 하여 그쪽으로 아군이 더 집결하게 만들고, 대부분의 병력은 중류 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영상만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당시에 코르군은 깎아지른 거친 절벽만이 난무한 두크린강의 중상류쪽으로는 방비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지형적인 제약으로 인해 그리로 대군이 넘어올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7일 전쟁’이 퓨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이유도 사실은 거기에 있었다.

 코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의 기습이었다.


 중상류쪽에는 정찰 송골매가 배치되지 않았기에, 그 큰 매머드가 어떻게 강을 건넜는지, 기습은 또 어떻게 그리도 전격적으로 하였는지를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시금 확인한 결론은 하나 있었다.

 적을 이기려면, 적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순식간에 공격을 감행해야 할 것이었다.

 황제도, 근위대장도, 장군 파르코도, 총독 완저도... 그 결론에 도달하는 것에서는 모두가 생각이 일치하였다.


 “폐하, 가십시오. 화노블(Farnoble)산으로 가십시오. 아니, 그리로 꼭 가셔야만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봉착한다 하더라도, 적을 능가하려면 그 길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완저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소신도 이제는 완저 총독의 주장에 힘을 보태고 싶사옵니다, 폐하.” 하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이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파르코를 보았다.

 “장군의 뜻은 어떠합니까?” 황제가 물었다.

 ..........

 파르코는 약간 뜸을 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장군, 폐하께서 묻고 계시오.” 완저가 재촉했다.

 “아 네, 폐하... 소신의 생각으로는...” 파르코가 멈칫하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하이란은 조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산으로 가시긴 가시되...”

 “가시되?”

 “예, 산으로 가시는 것에 대해서는 소신도 이제 공감을 하겠사옵니다. 그런데... 모두를 다 데려가지는 마시옵소서.” 파르코가 침착하게 말을 마쳤다.

 “모두들 다 데려가지 않는다는 말은... 장군께서는...” 완저가 넘겨짚으며 물었다.


 “네, 폐하. 소신은 육군의 일부와 해군의 전병력과 함께, 또한 코지에서 올라온 전사와 사슴 떼와 함께, 두크린강의 하구로 가서 집결을 하겠사옵니다. 그곳에서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자세를 취하겠사옵니다. 우리의 전투기도 유스토에 모이도록 하여주십시오. 그래야 지난 ‘7일 전쟁’에서 우리가 당한 것처럼, 적도 하구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킬 것이옵니다. 대신 폐하께서는 호랑이 군단을 대동하시고 은밀하게 화노블산을 넘어 적의 허점을 노리시옵소서.” 파르코의 목소리에도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황제는 다시 완저와 하멜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완저와 하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한다는 표시를 했다.


 이제야 전쟁에 필요한 모든 정리가 다 끝이 났다.

 하이란은 다시 프로스궁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 당장 출정을 할 것이라는 황명과 함께...


*             *             *


 검은 송골매 한 마리가 태양에 닿을 듯 높이 날고 있었다. 커다란 양 날개를 쫘악 펼치고 거센 바람에 몸을 맡긴 송골매에겐 거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광활한 창공을 지배하는 기개는 그야말로 누구의 무엇과 비교해도 탁월함 그 자체였다.

 그래도 예리한 매의 눈은 언제나 그렇듯, 저 멀리 아래의 땅에서 꼬물락거리는 만물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을 착각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송골매의 최종 목적지가 보였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덮힌 거대한 산악만이 눈 아래에 있었지만, 매의 눈엔 흰색이라 하여도 다 같은 흰색이 아닌 게 다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긴 시간을 비행한 그 여정을 이제는 모두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송골매는 갑자기 날개를 접고 몸을 수직으로 하고는 백색의 세상을 향해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쓔우우우우웅~~

 송골매는 그렇게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그 검은 형체는 하얀 눈속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오호호호, 이보시오, 에반 대장군. 이거 아주 좋은 소식이 있소이다?” 도르반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소식? 그래, 어떤 소식이오이까, 도르반 대장군?” 에반은 갑자기 낯빛이 밝아지며 물었다.

 “일전에 대장군이 요청한 내용에 대해, 이 사람이 디퍼슨으로 조류 통신을 띄운 건 알고 있겠지요?” 도르반이 검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아무렴, 그렇다마다요. 대장군의 군대를 이 사람에게 좀 빌려주었으면 하고 부탁을 했었는데, 일단은 디퍼슨에 좀 알아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에반이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렇지요. 그런데 방금 전에 그리로 보낸 통신에 대한 답장이 도착했소이다, 허허.”

 “아, 그래요? 그래... 뭐라고 적혀있었소이까?” 에반은 눈을 크게 뜨며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결론인즉슨...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는... 대장군이 요청한 내용에 대해 승인을 하시겠다는 내용이오. 대장군이 우리의 군대와 함께, 코르를 이끄는 저 어린 계집을 처치하기만 한다면... 이미 매머드 군단을 대동하고 디퍼슨을 출발해 이리로 내려오고 계시는 우리의 폐하께서 친히 코르군을 모두 제압한 이후에는, 대장군에게 코르를 다스릴 수 있는 영주의 자리를 내어주시겠다는 약조를 하신 것이오. 아,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겠소? 안 그렇소이까, 대장군??” 도르반이 또박또박 말을 했다.

 “이런! 이런! 이런! 황제 폐하께서 소장의 청을 그대로 다 들어주셨구려. 세상에 이렇게 황송할 때가...” 에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양 팔을 들고 고개를 숙이며 황제 호크런이 있는 방향으로 감사의 예를 표했다. 근처에서 듣고 있던 장군 나리프와 토리크도 에반을 따라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이런 광경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얀스(Jans)였다.

 얀스는 휘레스(Phoiress) 왕과 베니안(Beniann) 왕세자가 모두 서거한 이후에, 에반이 왕위에 오르면 그의 투철한 군인정신 때문이라도 호크런과 곧장 전면전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프로스궁 대전에서 에반 측과 파르코 측간에 팽팽한 대결이 펼쳐졌을 때,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 얀스는 에반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적장인 도르반에게 몸을 의탁한 이후에, 에반이 보이고 있는 행동을 보니 얀스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얀스는 호크런이 빨리 자신과 에반과 그의 측근을 부르기를 바랬었다. 당장 디퍼슨으로 가기를 원하고 또 원했었다. 

 그래야만 ‘사자의 심장’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그 별을 훔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에반은 자꾸 머리를 돌려서 코르로 내려가겠다고만 하였다.

 얀스에겐 시간이 계속 촉박해지기만 하는데, 에반은 여태껏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자는 말만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얀스로서는 에반과 그의 측근들에게, 자신은 따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할 명분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명석한 두뇌를 가진 얀스라 할지라도, 지금 봉착한 난관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에 대한 답이 전혀 보이질 않으니, 얀스의 가슴속은 그저 새까맣게 타들어가기만 할 뿐이었다.


 *            *            *


 헉헉헉~~

 숨이 찼다. 몹시도 추웠다. 다리는 눈 속에 퍽퍽 빠졌다. 눈보라는 또 그렇게 세찰 수가 없었다.

 거대한 자연은 미약한 인간을 조롱하듯, 감히 내게 다가올 생각을 하는 것이냐며, 매서운 회초리를 사정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푹~ 푹~ 풀썩~~ 풀썩~~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을 부축하고 있는 다른 병사도 추위와 강풍에 지치고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황제도 춥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멜도 물론 그랬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완저는 이들보다 좀 더 힘들어했다.

 그래도 행군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늘 안으로 목표지점에 도달하여야만, 그곳에 야영을 할 공간이라도 있기 때문이었다. 전 부대원이 추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꼭 필요하고도 꽤 커다란 동굴은, 거기에만 있다는 것이 참모들의 한결같은 보고였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산속에서, 이미 알고 있는 몇 군데의 숙영지 말고, 무작정 다른 장소를 새로 찾는 것이 이런 날씨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했다.

 내일이 되면, 또 내일 가야 할 길이 남아있었다. 끝도 없이 솟은 산을 오르고 계속 올라야만, 비로소 거기에 잠을 청할 동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어두워지기 전까지 그곳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눈보라 속에서 헤매다 얼어 죽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이란은 코르의 주력군을 두크린강 하구인 유스토로 보냈다.

 파르코가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여 그리로 갔다. 코지에서 올라온 사슴 떼는 해군과 함께 배로 올라와 몸을 만들고 있었다.

 샤키와 샤니는 전투기들을 이끌고 미리 유스토에 와서 대기를 하며, 엔진의 성능을 점검하고 또 했고, 공중전에 대한 훈련도 쉼 없이 계속하였다.

 반면에 황제는 소수의 정예병만을 이끌고 화노블산을 오르고 있었다. 대신 이들에게는 호랑이 군단이 있었다.

크란(Krann)산맥 전체를 지배하던 호랑이 떼, 충혼탑에 숨겨져있다 깨어난 페리도트의 초록빛 광채, ‘황제의 별’인 페리도트(Peridot)의 주문을 풀어 그 기운을 크란산에 뻗어나가게 하자, 이에 본능적으로 몸과 마음이 이끌려 스스로 황제에게 다가와 예를 취하며 충성을 맹세한 호랑이들이었다.

 짐승의 제왕인 용맹한 호랑이도, 코르의 황제인 하이란을 알아본 뒤로는 그녀의 앞에만 다가가면 그토록 온순해질 수가 없었다. 다른 병사들을 해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코르군 소속인 말과 사슴들과 마주쳐도 입맛을 다시지 않았다.

 호랑이들은 모두 하이란의 명령으로만 세뇌되어 있었다.

 퓨그의 주력군인 불곰과 늑대 군단을 잡는 단 하나의 임무에만 충실하도록, 그들의 날카로운 눈빛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미 그런 호랑이 군단이었기에, 이들은 지쳐 쓰러진 병사들을 등에 태우고는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호랑이도 추위와 배고픔에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그들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가올 먹음직스런 불곰과 늑대의 고기만을 생각하면서, 이 힘든 여정을 함께 참고 견디자며 황제가 설득한 결과였다.


 부상자가 속출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낙오자는 단 한 사람도 발생하지 않았다. 호랑이도 마찬가지였다. 코르의 독립을 위한 그들의 열정은 황제든 병사든 호랑이든, 전혀 다르지가 않았다.

 어디에 숨겨놓았을지 모르는 퓨그의 비밀 기지와 그 병력을 제압하지 않고, 그냥 맨츠로만 진격했다가는 저번처럼 또 뒤통수를 맞을 수가 있다는 판단 때문에, 황제와 소수 정예병력은 이런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적이 도저히 예상할 수도 없는 높은 곳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야, 그 목표를 이룰 것만 같았다. 그러려면 그 목표를 이루려면, 병력의 이동을 적에게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좀 더 높게 좀 더 높게 올라가야 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물론 그럴 예정이었다.

 

* * *


 헉헉헉~~~ 헉헉헉~~~

 오늘도 고난의 행군은 계속되었다.

 몸이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바닥이 까지고 부르트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나다 얼어붙었고, 다리의 근육은 경련을 일으켜 눈 속에 풀썩 쓰러지기를 반복하였다. 손가락은 이미 동상에 걸려 감각을 잃은지 오래였다.

 그래도 계속 산을 올랐다. 오르고 또 올랐다. 여기서 멈춘다면 돌아갈 길도 없었다. 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곧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과도 같은 것이었다.

 

 병사들의 고통을 모를 리 없는 황제는 계속해서 눈시울을 적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눈시울의 눈물은 이미 얼어있었다. 병사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그녀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중이었다.

 자신의 조국이 아닌데도 이토록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하멜에게는, 그저 고마운 마음 뿐이었다.

 가장 연장자인 몸으로 이 힘든 여정을 견디려 애쓰며, 젊은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고통을 숨기며 행군에 동참하고 있는 완저 총독을 보니, 마음이 안쓰럽고 쓰라렸다. 한때는 자신을 엄하게 키우던 어머니였는데, 지금은 자신 앞에서 한없는 충성을 바치고 있는 총독을 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쨌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적을 이겨야만, 이보다 더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독립을 해야만,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이란은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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