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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22.05.11 11:45
최근연재일 :
2022.06.1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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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3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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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8쪽

<41화>

병자호란




DUMMY

 *            *            *


 쓔우우우우~~~ 고오오오오~~~~ 툴툴툴~~~

 갑자기 급강하를 한 보라호는 번듯한 활주로가 아닌 파란 잔디밭에 냉큼 착륙을 해버렸다. 평범하게 보기에는 그냥 넓은 잔디광장이겠지만 하늘을 쌩쌩 날아다니는 보라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좁은 공간이었다. 샤키의 뛰어난 조종술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런 극적인 시도였고, 역시 샤키는 이스트 포인트 최고의 생도였기에 이런 어려운 착륙도 가능한 것이었다.


 “폐하~ 폐하~”

 샤키는 보라호 엔진의 회전날개가 정지하기도 전에 조종석에서 펄떡 튕겨져 나와, 충혼묘역을 향해 달려오며 이렇게 소리쳤다.

 충혼탑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 나오던 황제 일행은 갑자기 나타난 보라호와 샤키에게 적잖이 놀랐다. 근위대 병사들은 무슨 역모가 벌어진 건 아닌지 혼비백산하며 활시위부터 겨누고 칼과 창을 들어 달려오는 샤키를 조준했다.

 “멈추어라!”

 하멜이 짧게 명령을 내렸다. 그제야 근위대원들은 대장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공격의 자세를 누그러뜨렸다.


 가까인 다가온 샤키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잠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저만치에서는 뒤늦게 출발한 샤니도 서둘러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선배?” 하멜은 샤키에게로 몇 걸음 다가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 그게 있잖아... 아 참, 근위대장님, 그게 있잖아요, 제가 드디어 비밀을 풀었습니다, 헉헉헉~” 샤키는 힘겹게 말을 꺼냈지만, 이미 그 표정은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비밀이요? 무슨 비밀 말이에요, 선배? 설마...” 하멜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네, 탁본의 비밀이오. 솔루노픽스 병풍의 비밀 말입니다, 근위대장님!”

 “네? 그게 정말이에요? 선배가 드디어 탁본의 비밀을 풀었다고요?” 하멜은 놀라서 샤키의 양 팔을 움켜쥐며 물었다. 이 소리는 황제와 대신들에게도 그대로 다 전해졌다.

 “그래요, 근위대장님. 제가 방금 진주(Jinju) 세자빈께서 병풍에 추가로 새기신 그 붉은 소나무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알아냈습니다, 후후~” 샤키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이 얘기를 들은 황제도 한걸음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 이때 샤니도 거친 숨을 추스르며 뒤늦게 달려왔다.


 “그게 사실입니까, 샤키 생도? 그럼 어마마마께서 남기신 그 붉은 소나무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있었습니까?” 전혀 황제답지 않게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하이란이 재촉하듯 물었다.

 “네, 폐하. 붕어하신 휘레스 폐하께서 전에 저희에게 말씀하셨듯이, 아마도 진주 세자빈께서 병풍의 붉은 소나무에 어떤 비밀을 남겨놓으셨을 것이라던 그 추측은...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샤니가 헐떡이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오, 이런 세상에나! 샤키 생도와 샤니 생도가 실로 대단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 과연 그 비밀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자리에서 말하기가 곤란하면 짐이 대신들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황제가 흥분하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여기 계신 분들은 오직 폐하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폐하만을 보필하는 훌륭한 분이 아니옵니까? 저 간악한 에반의 무리는 이미 다 사라졌으니, 소인이 여기서 병풍의 비밀을 그대로 말씀드리온들, 그게 폐하께 무슨 걱정이 되겠사옵니까?” 샤키가 논리정연하게 말을 했다.

 “좋습니다. 여러 대신도 모두 가까이 와서 샤키 생도의 얘기를 들으시지요. 그래 도대체 붉은 소나무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있었다는 말입니까?” 황제가 재차 말했다.


 “네, 폐하, 솔루노픽스 병풍에 추가로 그려진 붉은 소나무는 바로...”

 “바로...?”

 “바로... 여기 폐하와 저희가 서 있는 크란(Krann)산의 지형이었습니다, 폐하. 그러니까... 병풍에 새긴 그 붉은 소나무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양상은, 크란산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아 이 산과 저 산들이 연결된 그 능선과 계곡의 지형과 완벽하게 일치했사옵니다!” 샤키는 이제 좀 진정이 된 숨결로 말을 이어갔다.

 “그게 정말이에요, 선배?” 하멜이 대뜸 말을 꺼내며 샤키가 내민 탁본을 쫘악 펼쳐보았다. 그리고는 붉은 소나무의 꼭대기부터 아래의 나무기둥에 다다르는 그 모든 가지의 생김새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황제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와서 함께 보았다.

 “누가 지금 혹시 크란산의 지형을 그린 지도를 갖고 있나? 있으면 빨리 가져와보게.” 장군 파르코가 좀 서두르며 말했다. 그러자 근위대 병사들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황급하게 뒤지기 시작했다.

“있으면 좋겠는데. 잘 좀 찾아보도록.” 하멜도 초조함을 비치며 거들었다.


 “대장. 제가 여기 크란산의 지도를 찾았습니다.” 한 참모가 손을 번쩍 들어 종이 뭉치를 보이더니 냉큼 달려왔다.

 황제와 대신들은 지도와 탁본을 모두 펼쳐서 둘을 자세하게 비교하기 시작했다.


 “폐하, 샤키 생도의 주장은 과연 사실인 것 같사옵니다. 세자빈께서 추가로 그리신 탁본의 소나무 줄기는 크란산의 지형을 그대로 옮긴 것이 맞사옵니다.” 파르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요, 장군님?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지요?” 샤키가 잔뜩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샤키 생도와 저는 보라호로 크란산의 정상을 여러 번 선회하며 그 지형과 소나무 그림을 꼼꼼하게 비교해봤습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틀린 구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샤니도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대단합니다, 샤니 생도. 생도와 샤키 선배는 정말로 대단한 일을 해주었습니다, 하하.” 하멜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황제는 방금 전까지 보이던 그 흥분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다시금 미간을 찌그러뜨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다들 영문은 모른 채, 황제의 눈치만을 살피며 은근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소나무 그림이 크란산을 나타낸다는 것에는 짐도 완전하게 동의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게 다입니까?” 하이란은 사뭇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네, 폐하? 그게 다냐고 물으시면...” 샤키 또한 황제의 낯빛을 눈치채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자세를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는 지금껏 휘레스 폐하께서 언급하셨던 사라진 유성을 찾아 헤맸습니다. 분명 그 유성을 찾으면 퓨그 제국과 호크런을 이길 수 있는 신비한 힘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태껏 붉은 소나무에는 그 유성에 관한 어떤 비밀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일전에 샤니 생도가 에보크에게 바람을 집어넣어 이미 알아낸 비밀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하이란이 냉정하게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소인이 그놈을 잔뜩 꼬드겨 얻어낸 사실이 있긴 하였습니다만... 그게 어떻다는 말씀이시온지요?” 샤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크란 산맥 어딘가에 유성이 떨어진 것은 이미 반딧불이의 영상을 보고 샤니 생도가 직접 확인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황제의 말은 꽤나 차가웠다.

 “아, 네 폐하. 그건 그렇사옵니다...” 놀란 샤키가 대충 얼버무렸다.

 “그럼 결국 더 밝혀진 것은 없지 않습니까? 유성이 대충 어딘가에 떨어진 것도 이미 알고 있고, 그 어딘가를 나타낸 것이 붉은 소나무 그림이었다는 것은 지금 알아냈고...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간 정보는 전혀 없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황제는 조금도 칭찬을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직도 비밀은 하나도 풀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싶은 듯했다. 그만큼 하이란의 말은 초초함을 그대로 방출하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폐하의 판단이 맞사옵니다. 소나무의 그림이 크란산의 지형을 나타낸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그 이상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사옵니다.” 하멜도 진지하게 말했다.

 “아, 네, 폐하... 그렇게 생각하니 폐하의 말씀이...” 샤키와 샤니는 갑자기 죄인처럼 고개만을 떨구었다.

 “선배와 샤니의 잘못은 전혀 아니에요. 다만 우리에게는 아직 더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남아있다는 사실 뿐...” 하멜은 그들을 위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의 침묵만이 흘렀다.


 여기서 아무도 어떤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고민이 깊어졌다.

 “저리로 한 번 다시 가보십시다.” 하이란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충혼탑이 있는 곳으로 냉큼 걸어갔다. 그러자 대신들과 내관들도 황급히 황제를 따라나섰다.


 충혼탑에 다다른 황제는 헌시(獻詩)가 새겨진 그 앞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돌판의 글씨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소리를 내어 헌시를 읽어내려갔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하이란이 소리를 내는 동안은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황제의 다음 말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울 따름이었다.


 “민족의 얼... 얼이 서린 곳... 해와 달...” 하이란은 계속해서 겉으로 중얼거렸다.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이 헌시의 내용에서 뭔가 집히는 게 있으신 것이옵니까?” 한 발짝 뒤에 서있던 코지(Cozee)섬의 총독 완저(Wanzer)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민족의 얼... 얼이 서린 곳... 해와 달...” 하이란에게는 그 문구가 주는 어떤 미묘한 느낌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대신들은 그저 브리젠 세자가 지은,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가장 정성스런 헌시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그 헌시를 지은 장본인이 바로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이 무척 감격스러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저 그 시를 되뇌고 또 되뇌며 그 안에 새겨있는 깊은 의미를 만끽하고 싶은 것만 같았다.


 “폐하, 이젠 그만...” 하멜이 민망한 표정으로 살짝 귀트임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하이란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병풍에 그린 소나무는 크란산의 지형과 꼭 들어맞는다... 그것도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바로 아래에 새긴 그 소나무가... 크란산과는 완전히 똑같다...” 황제는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이렇게도 해석해보고 저렇게도 해석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는 대신들도 황제처럼 수수께끼에 대한 고민을 그저 막무가내로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순간에는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문제는 멀쩡한 소나무의 솔잎마저 왜 모두 붉게 표시를 했냐는 것이겠군요, 폐하. 소나무 중에서도 줄기가 붉은 **금강송(金剛松)이야 말로 그 자태나 강직함에 있어서 천하의 제일로 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궁궐을 지을 때에도 항상 금강송만을 사용하는 것이며, 사시사철 늘 푸른 솔잎의 소나무는 언제나 변함이 없이 푸르고 강인한 것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런 소나무를 무슨 이유로 모두 붉게 그렸냐를 이제부터 알아내야만 하는 것이겠습니다.” 파르코(Parco) 장군이 천천히 말을 꺼내가며,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동참했다.

 “붉은 소나무라... 붉은 소나무...” 그러자 하멜의 입안에서도 이 단어는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소나무의 줄기나 잎이 크란산의 지형과 꼭 같지만, 크란산만을 나타내려 했으면 붉은색과 초록색을 섞어서 그렸어야 했는데, 왜 모두 붉은색만을 사용했냐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크란산은 산이 너무 높고 험해 초가을부터 늦봄까지 산의 중턱 위로는 대부분 눈에 덮혀있는데 말입니다...” 황제는 계속해서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앗? 잠시요 , 폐하!” 갑자기 샤키가 말을 끊었다.

 “어? 왜 그래요, 선배?” 하멜도 대뜸 물었다.

 “그러니까, 폐하... 저희가 늘 알고 있었듯이... 동절기에 크란산에는 늘 눈이 가득하지만, 모든 곳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샤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모든 곳이 그런 것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샤키 생도?” 파르코가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아 네, 장군님. 그러니까... 크란산의 가장 정상에는... 눈이 없었습니다."

 "눈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샤키 생도?" 파르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눈이 진짜 없었습니다, 장군님. 그러니까... 맑은 날 여기서 크란산의 정상을 올려다보면 눈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실제로 보라호를 타고 하늘에서 그 전경을 내려다보니 왕관처럼 바위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최정상 부근에는 모든 눈이 다 녹아서 바위가 바짝 말라있었습니다. 마치 정수리만 대머리인 백발노인의 머리를 보는 듯했다는 말씀입니다.” 샤니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최정상에만 눈이 전혀 없다니? 그게 상식적으로 그럴 수가 있나?” 완저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맞습니다, 전혀 없었습니다 총독님. 하도 이상해서 저는 직접 밧줄을 타고 내려가 크란산의 정상에 발을 디뎌봤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모두 말라있는 곳의 바위들은 마치 불에 달군 맥반석처럼 뜨끈뜨끈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눈이 쌓일 수 없었겠고요.” 샤키는 모두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손짓을 사용해, 어떻게 내려갔고 또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래? 샤키 생도가 직접 다녀왔다니 그 말이야 모두 사실일 테지만, 크란산이 화산지대도 아닌데 어떻게 지표면이 뜨거웠다는 건지... 소장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사옵니다, 폐하” 파르코가 고개를 저으며 황제에게 말했다.

 이런 여러 얘기를 듣고 있었지만, 하이란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깊은 생각에만 잠기어 있었다. 

 잠시 또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 실제 조선시대에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보면, 줄기는 붉고 잎은 푸른 금강송(金剛松)을 해와 달의 밑에 그려넣었지만, 필자는 이 소설에서 판타지적인 묘미를 더하기 위해 솔루노픽스(SolunOpeaks) 병풍의 소나무는 전체가 다 붉은 것으로 설정을 하였음.

 금강송은 나무 줄기가 붉어서 ‘적송(赤松)’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로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陸松)’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송(女松)’이라 부르기도 함. 그렇지만 적송은 소나무의 일본 이름이고, 한국의 옛 문헌에서 소나무를 적송이라 부른 예는 없음.

 소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벌레가 쉽게 생기거나, 휘거나 갈라지지도 않음. 그래서 궁궐이나 사찰을 만드는데 많이 쓰였음. 특히 궁궐을 짓는 목재는 소나무 외에는 쓰지를 않았음. 그중에서도 강원도와 경북 울진, 봉화에서 나는 소나무는 ‘춘양목’이라 불렀으며, 나무의 결이 균질하고 고와 최고급 목재로 이용되었음.




 “로야리(Loyari) 내관?”

 심각한 표정으로 대신들과 논의를 하던 하이란이, 갑자기 내관을 불렀다. 그러자 약간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야리는 서둘러 황제에게 다가왔다.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로야리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관은 이중에 가장 연장자인데, 지금까지 짐과 대신들이 고민하고 있는 이 문제에서, 혹시 추가로 더 보탤 얘기는 전혀 없는 것입니까?”

 “네, 폐하? 보태라고 하시면 무엇을 어떻게...” 로야리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한 번 슬쩍 들며 물었다.

 “크란산에 대해서 말입니다. 크란산이 화산지대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정상의 바위들이 뜨끈뜨끈할 수가 있냐 이 말이지요. 이 문제에 대해 짐 또한 전혀 집히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에요.” 하이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네, 크란산 말이옵니까, 폐하. 크란산이라... 크란산...” 로야리는 잠시 기억을 더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크란산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역사적이나 풍수지리적인 의미가 더 있습니까, 내관?” 완저도 자신보다 한참 더 늙은 로야리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비록 내관의 신분이기는 했으나 몇 대 걸쳐 오직 국왕만을 섬기고 있는, 그야말로 진한 연륜과 올곧은 성실함을 겸비한 코르의 충직한 신하였기에, 어느 누구도 로야리에게는 함부도 대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질 못했다.

 가장 겸손한 그의 표정을 단 한 번이라도 본다면, 세상에서 제일 거만한 나부랭이라 하더라도 감히 속된 말이나 행동이 먼저 나오지는 못할 입장이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의 많은 역사를 스스로 모두 기억하고 있을 내관 로야리의 존재가, 모두에게는 매우 인상적이고 조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저 간악한 에반의 무리가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코르 안에서 권력을 독차지하며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때에는, 단지 내관의 신분인 로야리라는 이름은 결코 드러나지 못했었다. 에반과 측근에게 로야리는, 인간이 아닌 쓸모없는 곤충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고, 또 그 세상을 다스리는 주요 인물들의 성품 또한 바르게 자리 잡았음을 많은 백성이 인정하는 중이었다.


 “폐하께서 그렇게 물음을 주시니, 소신에게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긴 있사옵니다.” 로야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기다렸다는 듯 파르코가 점잖게 물었다. 그러자 로야리는 목젖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침으로 입술을 몇 번 바르더니, 옛날을 회상하며 말을 시작했다.


 “크란산은... 예로부터 크란산과 그 주위를 둘러싼 이 거대한 산맥은... 한즈(Hanz)시와 브로(Bro)강을 남쪽에서 지켜주는 영험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태고로부터 우리 코르 왕국에게는 가장 신비롭고 보물과도 같은 다섯 개의 산, 그러니까 *오악(五岳) 중 하나였지요.”

 “그건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코지섬의 갤라(Gaela)산이나 북쪽의 화노블(Farnoble)산과 함께, 크란산도 매우 중요한 산인 것을요.” 파르코가 또박또박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장군.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그러니까 ‘7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 산에 좀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반면 로야리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19년 전이오? 그리고 또 이상한 일이라뇨? 그게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놀란 하멜이 대뜸 나서며 물었다.


 19년 전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하멜이었다.

 그 해는 자신이 태어난 해이기도 했지만, 예언에 나오는 밝은 유성이 콕센의 하늘을 날아 멀리 동쪽으로 사라진 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사자의 심장’을 찾아 아버지인 요한슨 왕자가 네론을 출발해 동쪽으로 원정을 떠난 해이기도 했고, 하지만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여 나중에 이를 비관한 어머니 마리앙(Mariann)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 그러니까 하멜의 가족에게는 비극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또한 그 비극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도 그 별을 찾아 이곳 호렌(Horen)까지 들어왔고, 지금은 코르(Corr)라는 나라에 갇혀 별은 찾지도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 한국의 오악은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5개의 산으로,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서울에 있는 북한산)을 말하며, 산악에 대한 신앙으로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오행사상(五行思想)에 의하여 오악의 개념이 생겼음에 기인함. 한편, 송도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 그리고 서울 남쪽에 있는 관악산은 ‘경기 5악’에 해당됨.



 “19년 전, ‘7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짐이나 여기의 근위대장 또 샤니 생도가 태어났던 해가 아닙니까?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우리 코르는 매우 평화로웠다고 들었는데, 그때 크란산에 어떤 일이 생겼다는 말이오, 내관?” 황제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네, 폐하. 그게 그러니까... 아마도 시기적으로는 여름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깊은 밤에 밝은 유성이 한즈의 하늘을 낮게 날아갔다는 점성술사들의 보고가 있었는데, 마침 그날따라 날이 많이 흐렸고 비도 제법 내려서 정확히 어디쯤에 그 유성이 떨어진 것이지는 확인이 되질 않았사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왕궁의 주술사들이 말하기를, 크란산의 기운이 많이 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이 산이 매우 안정적인 상태로 한즈와 브로강의 남쪽을 지키는 형세였는데, 그 유성의 일이 있은 후로는 갑자기 크란산 안에서 어떤 불과 같이 뜨거운 기운이 계속 솟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로야리가 차분하게 말을 했다.

 “불의 기운이라...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로야리 내관? 세상에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인데요? 폐하, 소장도 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사옵니다.” 파르코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셨겠지요, 장군. 이 일은 당시 슈젠타(Pseuzenta) 폐하께만 보고가 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외형적으로 크란산에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폐하께서는 주술사들의 보고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모두에게 다 잊혀진 일이 될 수밖에요. 물론 저도 그렇게 잊고 있었고요. 그런데 폐하께서 오늘 갑자기 이런 물음을 주시니, 소신도 정말 오랜만에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사옵니다.” 로야리가 공손하게 말했다.


 “불과 같이 뜨거운 기운이라... 불과 같은 기운... 불의 기운... 크란산 안에 불의 기운이 가득 찼다...” 황제는 계속해서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하멜은 곁에서 이런 황제의 고민을 함께 하며, 탁본에 새겨진 소나무 그림을 여러 번 쓰다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그림 안에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다른 해답이 나올 것만도 같았지만, 여전히 그런 게 나오질 않으니 무척 답답한 모양이었다.

 황제가 슬쩍 눈치를 주자 하멜이 이번에는 그 탁본을 하이란의 앞에 펼쳐놓았다. 이제는 하이란이 그 그림을 어루만지며 수수께끼에 대한 실낱같은 단서라도 찾으려고 하였다.


 틱~

 하이란의 손끝에 아주 미세한 무엇인가가 스쳤다.

 “어?” 하이란이 고개를 숙여 그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하멜이 대뜸 물었다.

 “여기, 탁본에 여기가 좀 찢어졌군요.” 황제가 침착하게 말했다.

 “네? 아, 네... 그렇군요. 종이니까 뭐 이리저리 가지고 다니다보면, 찢어질 수도 있고 뭐 그런 거겠죠, 폐하.” 하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니요? 뭔가 툭 튀어나온 부분에 종이가 긁혀서 살짝 찢어진 것 같은데요?” 하이란은 생각이 달랐다. 그러자 하멜도 좀 더 자세하게 종이의 면을 긁어보며 확인에 나섰다.

 “아, 네... 폐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사옵니다만... 여기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특별히 탁본의 관리를 잘 못한 적은 없을 텐데 말이죠.” 하멜은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


 “아, 폐하! 혹시 그 부분이... 붉은 태양과 아주 가깝게 있는 소나무 줄기의 끝부분인가요?” 갑자기 샤니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툭 말을 던졌다.

 “끝부분? 글쎄요? 그게 그러니까... 음, 맞군요. 태양과 아주 가깝게 있는 줄기의 끝부분이 맞는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샤니 생도?” 황제가 고개를 돌려 샤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예전에... 저희가 프로스(Pross)궁으로 들어가 휘레스 폐하와 베니안 왕세자를 뵈오며 처음으로 그 병풍을 보았을 때 말입니다, 폐하.” 샤니가 공손하게 말했다.

 “그래, 그때 처음으로 병풍을 보며 이 탁본을 뜨게 되었지.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샤니 생도?” 장군 파르코도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뗐다.

 “그때 병풍에서 실오라기가 뜯어진 부분이 한 군데 있었사옵니다. 모두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당시에 베니안 왕세자께서는 ‘태양과 가장 가깝게 있는 부분이라 실도 좀 타버린 건 아닌가요?’라고 지나가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씀이 떠올라서 제가 그냥 드린 얘기입니다, 폐하.” 샤니가 담담하게 말했다.

 “실오라기가 태양과 가장 가까워서 타버렸다... 그런 말이 있었던가요, 폐하? 하여간 샤니 생도는 어떻게 그렇게 그냥 스쳐갔던 얘기까지 다 기억을 하는 것입니까? 이제 보니 정말 생각보다 무척 예리하군요.” 하멜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네. 원래 저에 대한 생각은 그게 아니셨습니까, 근위대장님?” 하지만 샤니는 정색을 하며 따지듯 물었다.

 “네?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깜짝 놀란 하멜이 대충 얼버무렸다.


 “근위대장, 탁본에서 찢어진 부분이 크란산에서는 어디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까?” 황제는 둘의 대화를 중간에 자르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자 움찔한 샤니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한 발 물러섰고, 하멜은 구원군을 만난 병사처럼 반갑게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찢어진 부분은 정말 소나무의 줄기 끝으로 붉은 태양에 가장 가까운 곳인데... 크란산의 지도와 비교를 해서 그곳이 이 지점이라면... 음... 여기서 이렇게 산등성이가 연결이 되고... 여기서는 계곡이 이렇게 있으니... 그러니까 폐하... 탁본에서 실오라기가 터졌던 곳은... 음... 바로 이 묘지입니다, 폐하. '전몰장병의 묘지'가 있는 이 산기슭이 솔루노픽스(solunOpeaks) 병풍의 태양에 제일 가깝사옵니다.” 하멜이 놀라며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이란도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탁본을 확인하며 말했다.

 “네, 확실하옵니다, 폐하. 이 ‘전몰장병의 묘지’ 중에서도... 음... 바로 여기 이 충혼탑이 있는 곳이 실오라기가 탄 곳과는 정확히 일치하옵니다.” 하멜은 흥분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그러자 황제도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무엇인가 단서를 찾아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보였다.


 황제는 다시금 충혼탑 앞에 새겨진 헌시를 바라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그 시문을 읽고 또 읽으며, 눈을 감고 수만 가지의 추측을 떠올리고 있었다.

 “민족의 얼... 얼이 서린 곳... 해와 달... 민족의 얼... 얼...” 황제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되뇌었다.

 “민족의 얼...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하시는데... 무슨 깊은 의미라도 느끼시는 것이옵니까, 폐하?” 가장 가까이 옆에 있던 하멜이 답답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황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다른 대신들도 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시간만 잠시 흘리고 있었다.


 “민족의 얼... 얼... 근위대장?” 황제가 살짝 물었다.

 “네, 폐하?” 기다렸다는 듯 하멜이 즉시 대답했다.

 “대장은 전에 짐과 함께 황실의 사고(史庫)에 들어가 아바마마의 행적을 적은 **디퍼슨(Deeperson) 일기를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네,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말씀이옵니까, 폐하?“

 “그때 아바마마께서... 고국으로 영구 귀국을 하시기 전에, 휘레스 숙부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기록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차분해진 황제가 천천히 물었다.



 ** 소현세자 심양일기


 *            *            *




하멜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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