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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22.05.11 11:45
최근연재일 :
2022.06.1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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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2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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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46화>

병자호란




DUMMY

 *           *           *


 그동안 휴식은 충분하리만치 하고도 남았다. 에반(Evan)은 오히려 마음이 급했다.

 적이 건설해놓은 어마어마한 지하 기지의 위용에 감탄하는 시간도 이제는 지겨울 정도였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평생 꿈꾸어왔던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치욕과 비난도 감내할 각오가 가슴 깊이 들어선 뒤였다.

 역사는 오직 승자만을 기억할 것이라는 논리에 다시 한 번 확신이 서자, 이제는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원했던 것은 반드시 가져야만 하겠다는 욕망만이 계속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얻으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지금 자신과 가까이 있는 단 한 사람 뿐이었다. 물론 그가 자신의 부탁과 제안에 응해줄지는 아직 불확실했기에, 에반으로서는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몸과 마음은 좀 추스른 것이오?” 약간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도르반(Dorban)이 거만하게 말했다.

 “그렇소이다. 대장군이 걱정해준 덕분에 아주 잘 회복을 하였소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선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구려.” 에반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 감사요? 후후후... 음... 어쨌든 건강에 이상이 없다니 그거 다행이오. 우리가 뭐 사실 태어나고 자라고 속한 국가가 다르니,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마주보며 으르렁거린 거였지만, 솔직히 따지고 보면 대장군이나 나나 다 같은 군인이 아니오?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평생을 보낼 수밖에 없는 그 무사로서의 기질이나 운명이야, 어느 나라에 속해 있던 다 비슷하지 않겠소? 대장군도 오랜 시간을 코르(Corr) 왕국의 2인자로 보냈었고, 뭐 이 사람도 퓨그(Fuug) 제국에서는 계속해서 그런 위치에 있지 않소이까? 그러니 어찌 보면, 우리 두 사람의 처지나 일생은 닮은 점이 많다고도 할 수 있겠소이다. 내가 그런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에반 대장군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것이야, 뭐 같은 싸움꾼의 피를 함께 가진 사람으로서는 본능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 같고... 뭐 그렇지 않소이까?” 도르반이 차분하게 말했다.


 에반이 지금껏 들어봤던 도르반의 건방진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어투였다. 그는 꽤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만남을 가진 것은 에반이 빌로를 통해 밀서를 전달하며 먼저 청해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에반은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그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려고 했었는데, 오히려 도르반이 이토록 다정(?)하게 나오니 에반은 예상치 못한 그의 태도에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말을 해주니 이 사람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다시 한 번 전해야 하겠군요.” 에반은 고개를 살짝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단 한 번도 남에게 이런 자세를 취한 적이 없는 에반이었다. 더군다나 철천지원수였던 퓨그의 대장군 도르반에게는 더욱 그럴 일이 없었다. 그를 먼저 죽이면 죽였지...

 그런데 도르반이 먼저 이토록 호의적으로 나오니, 에반도 이제는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장군?” 서로가 서로를 불렀다. 도르반이 에반을 불렀고, 에반도 도르반을 불렀다. 정확하게 둘의 음성이 일치되었다.

 “아, 먼저 말씀을...” 도르반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니오, 먼저 말씀을...” 에반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둘은 살짝 숨을 좀 돌렸다.


 “흠... 그래요... 그러니까... 오늘 이 사람을 좀 보자고 한 이유가...” 도르반이 천천히 말을 꺼내놓았다.

 “아, 뭐... 그게... 그러니까...” 에반이 머뭇거렸다.

 “뭐든 좋소... 말씀을 해보시오... 허심탄회하게 한 번... 이젠 여기서 그럴 때도 되지 않았소이까?” 도르반이 적극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에반은 마음의 준비를 다시 가다듬고는 사방을 잠깐 살피며, 도르반에게로 고개를 살짝 더 들이밀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 대장군... 이 사람이 그냥 말을 하리다. 아니, 부탁을 좀 하리다.”

 “부탁이오?”

 “그렇소. 부탁이오. 내 대장군에게 큰 청이 하나 있소이다.”

 “청이라... 부탁이라... 뭐, 에반 대장군이 우리 퓨그에 귀화를 해서 황제 폐하께 충성을 바칠 테니, 국적을 퓨그로 바꿔달라는 청이라면야 내가 당장 그리 하겠지만... 그리고 이미 적국의 진지에 몸을 의탁한 대장군이라 그런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으로 알겠는데... 갑자기 부탁이라 하니... 그것 말고 뭐 다른 게 있소이까? 그래 어쨌든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봅시다.” 도르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꽤 진지하게 말했다.

 “코르에서 쫓겨나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지내고 있는데, 이제부터 황제 폐하께 충성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테고... 그건 그렇고... 그러니까 대장군... 단도직입적으로... 음... 이 사람에게 군대를 좀 주시오.” 에반이 짧고 강하게 말했다.

 “군대? 군대요?” 도르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대장군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좀 빌려주시오. 그러니까... 대장군의 병사들과 불곰 군단, 늑대 군단을 이 사람이 통솔할 수 있도록, 그 지휘권을 잠시 허락해주었으면 정말 고맙겠소.” 에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터놓고 말할 작정이었다.

 “허허, 그래도 아직은 나나 대장군이나 서로 적국의 장수인 관계인데... 뜬금없이 적국의 군대를 거느리고 싶으니 지금 당장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라는 말이오?” 도르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            *


 뿌우우~~~~

 강하고 길게 울리는 나팔 소리에 브로(Bro)강의 물결이 잠시 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석양에 붉게 물든 저녁놀도 위아래로 일그러지듯 보였다.

 황제가 프로스(Pross)궁으로 곧 환궁을 할 터이니, 근위대장 스스로 찾던 답을 아직도 얻지 못했으면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황명이었다. 곧장 전장으로 향해야 하기에 더는 시간을 늦출 수가 없다는, 하멜을 다그치는 하이란의 강렬한 재촉이었다.

 자신의 말보다 빠르게 달리는 사슴의 등에 올라탄 하멜을 코지섬에서 분명 보았고, 하멜이 주장하는 대장 사슴이니 뭐니 하는 얘기가 혹시나 그때의 그 사슴과 관련이 있을까? 하는 추측이 들기는 했지만, 하이란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은 하멜에게 시간적인 특혜를 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하멜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 결과이기도 하였다.


 하멜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절규를 했다. 혼자만 갑판 아래로 내려왔기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더 이상 남지 않았다는 좌절과 괴로움에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는 몸을 떨었다.

 모든 배를 다 돌아다녔고, 자신의 반지를 들이밀며 네가 아버지 사슴이 맞냐고, 정녕 이 반지를 알지 못하냐고 만나는 온갖 사슴의 목덜미를 다 흔들어대었다.

 그런데...

 어느 사슴도 이에 대답을 한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 포기하고 돌아오라며 하이란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하멜에게 아버지 사슴을 찾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처럼, 하이란에겐 맨츠 벌판을 회복하고 조국의 독립을 찾는 것이 휠씬 더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만 해도 공식적인 하루 일과를 다 마치면서, 내관들의 눈을 피해 둘은 한적한 곳으로 살짝 숨어, 은밀한 몸짓을 교환하며 잠시 뜨겁게 사랑에 빠지고는 한, 이미 그런 사이였다.

 보는 눈이 불편해 오랫동안 격정적인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도, 하이란과 하멜... 혈기왕성한 19살의 불타는 청년이라면, 어디에서든 잠깐이라도 서로의 애정과 욕망을 당당하게 확인할 그런 대담함은 둘의 몸과 마음속에 엄청나게 내재되어 있었고, 또 둘은 그걸 부끄럼없이 발산하였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라는 사사로움 이전에... 한 왕국의 주인이라는 운명을 둘은 동시에 타고났기 때문이었을까?


 국가의 운명이 눈앞에 놓인 그런 상황에서, 둘은 절대로 사사로움에 흔들리지가 않았다. 사랑보다는... 국가의 운명이 늘 먼저인 것 같았다.

 아니 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그런 운명 앞에서는... 하멜보다는 하이란이 취하는 태도가 더 냉정하고 진지했다.

 하멜은 감정이나 판단의 기복이 자주 오르락내리락하여 그만의 우유부단함이 뚜렷이 보일 때가 많았지만, 반면에 하이란은 무척 강직하고 단순하다고 보면 정답일 것이었다.

 사랑에 빠질 땐 푸욱 빠지더라도, 자신의 소명과 조국의 앞날을 바라볼 때엔 어떤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타협을 할 줄 몰랐다.

 설령 그 대상이 자신의 연인인 하멜이라 할지라도...


 뿌우우~~~

 다시 한 번 나팔이 길게 울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더 거칠게 들렸다. 감히 황제의 명을 우습게 보는 것이냐는 엄중한 꾸짖음으로 다가왔다.

 이에 놀란 근위대 장교들이 여러 배를 뒤지다가는, 갑판 아래로 내려와 근위대장을 찾았다. 당장 황제에게 돌아가자고 상관인 하멜을 거세게 다그쳤다.

 하멜도 다른 핑계를 댈 기력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젠 모든 게 다 자포자기 상태였다.

 결국 하멜은... 자신의 부관들의 손에 끌려가듯... 다시 하이란에게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            *            *


 도르반은 말없이 뒤에서 바라만보고 있었다. 

 에반은 조급함을 숨기지 못하며 앞으로 나서고야 말았다. 비교적 작은 공간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에반의 수하들이었다. 대역죄인이 되어 함께 최전방으로 끌려가다가 같이 탈출한... 공동체의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물론 얀스(Jans)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여러분, 우리가 화노블(Farnoble)산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이곳에 온 지도 여러 날이 지났소. 그 사이에 이 사람도 몸과 마음을 많이 회복하였고, 여러분도 당연히 그러하였을 거외다.” 에반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먼저 꺼냈다.

 “물론입니다, 대장군.” 장군 나리프가 말했다. 예전에 늘 달고 살던 아첨의 말투는 들리지 않았다. 죽고 사는 것이 경각에 달린 마당인지라, 어지간히도 심각한 모양이었다.

 “이제부터는 뭐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대장군?” 아첨 하나로는 결코 나리프에 뒤지지 않았던 장군 토리크도, 정신이 꽤나 제대로 박힌 것처럼 말했다.

 “그러게요 아버지.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에보크도 진지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얀스는 그저 듣기만 하고 있었다. 어떤 내색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음... 여기 계신 도르반 대장군은... 그야말로... 퓨그 제국의 황제 폐하 다음으로 큰 힘을 가진... 그 누구라도 다 인정을 하는 제국의 2인자이시오. 이 대장군과 나는... 오랜 시간동안 우리가 앞으로 어찌해야 할 지에 대해 깊은 상의를 하였소... 그리고...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있는데...” 에반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대장군? 우리는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대장군만 믿고 따라왔습니다. 그런 정신이 지금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나리프가 말했다.

 “맞습니다, 대장군. 이젠 체력도 많이 회복하였으니 우리가 뭐든 좀 하십시다. 대장군이 명하신다면 다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토리크도 반갑게 말했다.

 “좋습니다. 장군들의 늘 한결같은 그 자세를 내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여기 도르반 대장군과 상의하여 결정한 내용을 그대로 말하겠소이다... 이 보시오 나리프 장군, 토리크 장군?” 에반이 말했다.

 “예, 대장군? 말씀하시지요.” 나리프와 토리크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 도르반 대장군의 군대와 함께... 지금은 코르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하이란을 치십시다!” 에반이 단숨에 말했다.

 “예? 하이란을요?” 장군 둘이 똑같이 놀라며 말했다.

 “그렇소. 하이란을. 제 딴에는 왕도 아니고 황제라고 칭해버린 저 건방진 어린년을, 우리가 쳐서 굴복시킵시다!” 에반은 이미 결심이 굳건히 섰다는 말투였다.

 “그, 그럼... 우리가... 조국을 공격하자는 말씀이신데...” 나리프가 머뭇거렸다.

 “우리가 비록 대역죄인의 판결을 받고 한즈(Hanz)에서 쫓겨는 났지만... 그래도... 코르는 우리의 조국인데, 우리가 하이란과 싸우려면... 대장군이 거느리던 그 육군 병사들과 우리가 적이 되어 싸워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대장군이 아끼던 병사들을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죽이자는 말씀이십니까??” 토리크도 에반의 의중을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에반의 제안에 사실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얀스(Jans)였다.

 얀스는 아직도 ‘사자의 심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호렌 세상에서 지금은 ‘가장 위대한 자’로 군림하고 있는 퓨그의 황제 호크런에게로 갈 수만 있다면, 얀스로서는 뭐든 다 환영을 할 일이었다.

 잠시 퓨그의 지하 기지에 몸을 의탁하고는 있지만, 이왕 이곳에 와서 도르반과도 안면을 좀 텄으니, 그래도 코르의 핵심 요직을 맡았던 에반과 그의 무리들을 퓨그의 수도인 디퍼슨(Deeperson)으로 보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곳으로 보내 황제를 알현하게 하고는 거기에서 충성을 맹세하라고 도르반이 시킬 줄만 알았다.


 그렇다면 얀스는, 호크런과 적군이 전쟁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기회를 엿봐 적의 올가미로부터 탈출을 할 자신이 분명 있었다. 또한 호크런의 수중에 있을 신비한 유성 ‘사자의 심장’, 그러니까 여기 호렌 세상에서는 ‘황제의 별’이라고 부르는... 그 유성을 훔칠 계획이 확실히 충만했었다.

 이곳 지하 세계에서 휴식을 취하면서도, 얀스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에반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도르반의 군대를 빌려 하이란과 코르의 군대를 치겠다는 말이었다. 태어나고 자란 조국의 등에 비수를 꽂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방향을 돌려 다시 코르로 내려간다면... 그곳에서 에반이 거느린 군대와 코르군이 전투를 벌인다면... 얀스는 혼란을 틈타 하멜 왕자와 조우할 기회가 분명 있을 것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거기서 하멜을 만나 함께 코르를 탈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걸렸다.


 하멜을 만나 탈출을 했다고 하더라도, 둘은 다시 호크런을 만나러 가야 했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 하멜을 만난다는 것은, 얀스가 에반의 무리에서 이탈을 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도르반과 에반을 버리고 하멜을 만난 얀스라면, 퓨그의 황제인 호크런과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의 환심을 사야 ‘황제의 별’도 훔칠 기회가 생길 터이지만, 도르반을 배신한 몸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건 누가 봐도 뻔한 이치였다.

 얀스는 갈등에 휩싸였다. 에반이 도르반과 함께 코르를 치러 내려간다고 할 때, 함께 갈 수 없는 어떤 이유를 만들어야만 했다.

 오히려 자신은 디퍼슨으로 가서 황제를 만나야만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했다.


 *            *            *


 조류 통신을 통해 최전방의 정보가 속속 한즈(Hanz)로 들어왔다.

 *화노블(Farnoble)산을 시작으로 서해로 계속 흐르는 **두크린(Duckreen)강이 바로 코르와 퓨그의 국경이었다.

 차고 매서운 북풍 보라(Bora)와, 온화하고 약간 습한 남풍 마프(Marp)가 충돌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크린강 유역에는 늘 비가 자주 내렸고, 습지가 넓었고 수풀도 우거져있었다.

 코르의 정찰용 송골매와 비둘기는 국경을 살짝 넘어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는, 적국의 조류들이 떼로 공격을 가하기 전에 냉큼 남하하여 목숨을 보존하고는 하였다. 이런 방식은 퓨그의 정찰 조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많은 것을 보고 정찰했다 하더라도, 적국의 새 떼에게 잡혀버리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우선은 살아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정찰에서 얻은 영상을 반딧불이를 통해 재현시켜 보고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정보에 의하면, 두크린강 북쪽 국경에는 서서히 퓨그의 군대가 집결하기 시작했다. 서해로 흘러드는 강의 어귀에 있는 ***유스토(Usto)시, 코르의 국경 수비대와 해군 기지가 위치한 이 유스토시와 두크린강을 경계로 바로 마주하고 있는 ****적군의 레도스(Redos)항에도 부쩍 전력이 강화되었다.

 병력은 하류는 물론이거니와, 두크린강 중류와 상류에까지 퍼져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황제가 이끌고 올 매머든 군단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날이 더 추워져야만 매머드도 맨츠 벌판의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 분명했다.

 적의 전투기가 정찰을 한다는 정보도 아직은 없었다. 전쟁의 준비단계에 돌입은 했지만, 적도 아직은 힘을 더 비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화노블산=백두산, ** 두크린강=압록강, *** 유스토시=신의주시, **** 레도스항=중국의 단둥시를 모델로 하였음.




 출정에 앞서 하이란은 참모들과 함께,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잡을지에 대해서부터 고민했다.

 코르의 주력이 유스토 쪽으로 간다면, 레도스에 집결한 적군과 일대 격전이 불가피했다. 두크린강 하구에서 해전이 벌어질지, 아니면 일단 적의 영토에 기병과 보병이 상륙을 해서 전투를 벌일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어도, 어떤 경우에든 아군도 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전투기들이 먼저 맨츠로 넘어가서 폭격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적도 똑같이 대응을 할 게 뻔했다. 페리도트(Peridot)의 기운을 받은 새로운 수정 엔진이 있기에 공중전에서 적의 전투기를 잡는데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전체적인 전투기의 수였다.

 코르가 보유한 전투기와 조종사는 기껏해야 몇십이 전부였다.

 반면 퓨그군은 그 사이에 또 얼마나 많은 전투기를 만들었을지, 맨츠에 나타나는 전투기 말고도 지안(Jiaan) 대륙의 기지에는 또 얼마만큼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을지, 코르에서는 그 규모를 도무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게 무서운 것이었다.

 하이란도 하멜도 파르코도 완저도... 샤키도 샤니도... 끝도 없는 적의 엄청난 물량공세가 솔직히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두크린강의 중류나 상류로 방향을 택하는 것도 물론 고려는 하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사이에 난 좁은 길을 통해 얼마나 빨리 은밀하게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만...

 만약 그리로 결정을 한다면, 코르의 주력군은 달이 없는 밤에만 움직이고, 강을 건너는 것도 뗏목을 이용해야만 했다. 군대는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겠지만, 문제는 보급품 부대가 따라오기에 제약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두크린강의 최상류이자 화노블산 자락을 넘는 방법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한겨울일 텐데, 대군이 그 높은 산을 넘어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과도 가까웠다. 적 또한 방비가 두크린강 하류보다는 허술할 것이지만, 아군 중에 낙오자가 속출할 것을 생각하니, 하이란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해전에 자신이 있는 파르코 장군은 두크린강의 하류를 건너 적의 레도스항을 점령하는 작전을 줄곧 주장했다.

 하멜은 아직 이렇다 할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아니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멜의 머릿속에는 온통 찾다 찾다 결국은 찾지 못한 아버지 사슴에 대한 아쉬움과 쓰라림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샤키나 샤니는 전투기로 레도스항을 기습폭격한 뒤, 공중전을 펼쳐 일단 적의 전투기 수를 줄여놓자는 작전을 제안했다. 역시 두크린강 하구에서 모든 승부를 걸자는 주장이었다.

 대부분의 장군은 파르코와 의견이 비슷했다. 아직도 육군과 해군으로만 작전을 펼쳐본 게 다였기 때문에, 전투기나 공중전 얘기만 나오면 모두가 다 깜깜이가 되는 것이 현실이기는 했다.


 “완저 총독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결국 우리가 유스토로 향하는 방법 말고는 전혀 없는 걸까요?” 입이 바싹 타들어간 하이란이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완저는 황제의 물음에 잠시 더 생각을 하더니, 회의실에 모인 다른 장군과 대신들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아군이 호크런과 맨츠 벌판에서 최종적으로 겨루려면... 거기 가서도 전면전을 펼칠 그럴 충분한 병력을 계속 보유하려면... 우리가 화노블산을 넘어 진격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폐하.”

 “화노블산을 넘으려면 아군에게 낙오자와 부상자가 속출할 것을 예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어찌 감당하시려고...” 파르코는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전투에서 죽는 병사들보다야 많겠습니까, 장군? 또한 호랑이 군단에게 배를 타게 해서 그 멀미를 이겨가며 전투에 임하도록 내모는 것보다는, 그들이 산을 오르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일일 것입니다.” 완저는 이미 확신에 찬 상태였다.


 프로스(Pross)궁 주변에는 이미 코르군의 주력이 모두 집결을 하고 있었다. 브로(Bro)강에 있는 해군 사령부 앞에도 서해로 나아갈 전함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크란(Krann)산에서 내려온 호랑이들과 코지(Cozee)섬에서 올라온 사슴 떼도 맨츠(Mantz)로 떠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주는 먹이를 다 받아먹은 뒤에는 또 신나게 운동장을 달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호랑이들끼리는 서로 겨루는 시합을 통해 적의 불곰을 잡을 전투력을 극대화했고, 사슴들은 장거리를 계속 달려도 지치지 않을 힘을 기르며 다리통의 근육을 더욱 우람하게 단련했다.


 전면전이 임박했음은 한즈(Hanz)시의 백성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군대에 보탤 식량과 무기들을 자진해서 가지고 왔다. 쌀 한 톨, 칼 한 자루라도 지금 코르의 병사들에겐 아주 절실했다.

 19년 동안 퓨그(Fuug)의 황제 호크런(Hawkrunn)의 폭정 밑에서 보낸 그 치욕과 회한의 시간에서부터, 이제는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사명감이 모든 이에게 불타올랐다.

 최전방으로 나가서 싸울 우리의 아들, 우리의 조카일 수도 있는 저 늠름한 병사들을 생각하면, 얼마간의 굶주림은 끝까지 견딜 각오가 되어있었다.


 이처럼 출정을 위한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나가는데, 군대를 통솔할 코르의 지휘부는 가장 중요한 결정 하나를, 정작 아직까지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황제의 최종결정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디로 진격을 할 것이냐에 대해 그만큼 하이란의 고민이 깊다는 말이었다.

 결국 황제와 수뇌부는 마지막으로 한 곳을 들러, 다시 한 번 지난 일에 대해 검토와 확인을 해보기로 하였다.


* * *




하멜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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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59화> 22.06.11 17 0 16쪽
59 <58화> 22.06.10 16 0 24쪽
58 <57화> 22.06.10 16 0 19쪽
57 <56화> 22.06.09 17 0 24쪽
56 <55화> 22.06.09 16 0 19쪽
55 <54화> 22.06.08 16 0 22쪽
54 <53화> 22.06.08 16 0 16쪽
53 <52화> 22.06.07 18 0 24쪽
52 <51화> 22.06.07 15 1 19쪽
51 <50화> 22.06.04 17 1 22쪽
50 <49화> 22.06.04 15 1 18쪽
49 <48화> 22.06.03 20 2 27쪽
48 <47화> 22.06.03 19 2 20쪽
» <46화> 22.06.02 18 0 23쪽
46 <45화> 22.06.02 15 0 32쪽
45 <44화> 22.06.01 22 0 28쪽
44 <43화> 22.06.01 17 0 33쪽
43 <42화> 22.05.31 20 1 30쪽
42 <41화> 22.05.31 20 0 28쪽
41 <40화> 22.05.30 20 0 25쪽
40 <39화> 22.05.30 15 0 24쪽
39 <38화> 22.05.29 18 0 30쪽
38 <37화> 22.05.29 17 0 50쪽
37 <36화> 22.05.28 22 0 46쪽
36 <35화> 22.05.28 16 0 25쪽
35 <34화> 22.05.27 19 1 34쪽
34 <33화> 22.05.27 16 1 22쪽
33 <32화> 22.05.26 21 0 36쪽
32 <31화> 22.05.26 19 0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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