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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22.05.11 11:45
최근연재일 :
2022.06.1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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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30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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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40화>

병자호란




DUMMY

 *           *           *


 계절로는 아직 가을이었지만 크란(Krann) 산맥을 이루는 여러 봉우리의 정상에는 벌써부터 하얀 눈으로 가득했다. 이처럼 거대한 크란 산맥의 상공에서 보라(Bora)호를 타고 황제 일행의 경호와 정찰을 담당하고 있는 샤키와 샤니의 눈에도 그 절경이 그대로 투영되었고, 남매는 허공에 머물며 그저 감탄만을 자아내고 있었다. 

 보라호의 뒤로는 그동안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동원하여 제작한 수십 대의 전투기들이 제각기 편대를 이루어 날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크란 산맥을 방석으로 삼아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는 광활한 창공에서 갈고 닦은 조종술을 한껏 뽐내기 시작했다. 거친 엔진음으로 크란 산맥 전체에 당장이라도 눈사태가 일어날 만큼 이들의 기개와 포부는 당당하고도 우렁찼다.


 크란산 '전몰장병의 묘지',

 충혼묘역 제일 앞에 세워진 충혼문을 지나 묘역 안으로 들어온 황제와 일행은, 드디어 충혼탑을 목전에 두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하이란은 이 숭고한 묘역에 온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기 시작했다.

 실로 가슴이 뭉클했고 눈시울도 좀 젖어들었다.


 이젠 더 가까이 다가가서 헌화와 분향과 참배를 할 시간이었다. 

 황제가 발을 천천히 내딛자 모두가 그녀의 뒤를 따라서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걸었다. 그 다음엔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황제인 하이란과, 그녀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평생을 바쳐 헌신적으로 그녀를 키운 양어머니 완저(Wanzer) 총독, 그 완저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결코 에반의 무리에는 섞이지 않았던 해군 사령관 파르코(Parco) 장군, 그리고 지금은 황제의 근위대장을 맡고 있는 하멜까지... 모두가 충혼탑에 다가가는 이 계단 위로는 난생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웅장한 탑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가자, 어떤 글자를 적어놓은 큰 돌판이 탑의 밑부분에 박혀 있어 가장 먼저 황제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그 글씨는 계속 확대되었다.


 드디어 큰 향로가 있는 곳까지 와서 하이란이 걸음을 멈추자, 이제는 그 글씨를 또렷이 다 알아볼 수가 있었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의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단 세 줄의 헌시(獻詩)가 황제의 눈에 먼저 들어왔다. 

 하이란은 천천히 그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어떤 야릇한 느낌이 들었는지 같은 글을 그렇게 몇 번 반복하였다. 다들 바로 뒤에서 황제의 목소리를 따라 그 문장을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누가... 이 글을 쓴 것입니까?” 황제가 아주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러나 여기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문구였기에...

 "그동안 읽었던 어떤 서적이나 고문에서도 이런 문구를 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글을 처음 짓고 또 여기에는 누구의 글씨로 쓴 것입니까? 혹시 아시는 분이 이 자리에 있습니까?" 다시 한 번 황제가 물었다. 하지만 모두는 고개만을 가볍게 저을 뿐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늙고 왜소하지만, 늘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수석 내관인 로야리(loyari)였다.



 **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현충탑에 쓰여진 헌시(獻詩)에서 인용함.



 잠시 후 그가 앞으로 살짝 나서더니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폐하, 그 헌시는... 브리젠 세자 저하께서 친히 쓰신 것이옵니다. 세자께서는 전몰장병의 묘역을 완공하시면서 동시에 이곳 충혼묘역도 조성하셨고, 그때 이 탑도 함께 세우셨사옵니다. 저 투명하고도 영롱한 수정을 탑에 박는 공사까지 모두 마치고 나자, 그 다음으로 이 헌시를 직접 지으시고는 친필로 돌에 쓰신 것을, 석공들이 정성스럽게 글을 파내어 검게 색을 입힌 것이옵니다.” 로야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옵서 친히 이 헌시를?" 하이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근처에 있던 대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브리젠 세자이시다!’라고 인정을 하며 감탄하는 것이었다.

 

 ‘퓨그(Fuug)라는 제국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먼 미래를 준비하는 혜안을 가졌으면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은 한시도 잊지 않으셨던 부모님이, 소녀는 한없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사옵니다...’ 하이란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하이란이 여기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감상에만 계속 젖어있을 수는 없었다. 전면적인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시간이 아주 촉박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사라진 별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이옵니까? 또한 솔루노픽스(SolunOpeaks) 병풍에 더 그려 넣으신 붉은 소나무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이옵니까? 제발 가르쳐주세요. 두 분의 진심을 소녀가 빨리 깨달을 수 있도록 어서 도와주세요...' 하이란은 계속 간절하게 소원을 말하고 또 말했다. 

 귀에 직접 들리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그런 애절한 마음을 대신들은 모두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하멜조차 여기서 뭘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였다.

 병풍의 비밀은 아직 풀지 못한 채, 이처럼 커다랗게 우뚝 솟은 충혼탑 앞에 서있으니, 하이란과 하멜은 자신들이 그토록 초라한 존재밖에는 되지 않을까?라는 자괴감이 앞섰다.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이들은 그저 답답함만을 토로하고 있는 중이었다.


 맑은 하이란의 얼굴에서 은은히 눈물꽃이 피어올랐다. 감동의 시간을 넘어서 안타까움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눈물은 그렇게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            *            *

​​

 두크린(Duckreen)강 하구의 국경 수비대를 출발한 에반(Evan)과 대역죄인들은, 이들을 감시하고 안내하는 부대원들과 함께 북동쪽으로 걸어서 코르의 지붕이자 조상의 발원지인 화노블(Farnoble)산으로 향했다. 강변을 따라 국경을 지키는 부대들을 계속 지나가며 강의 중류 쪽으로 들어서자, 지형은 갑자기 험준하게 바뀌어갔다.

 절벽은 갈수록 높아졌고, 계곡은 갈수록 깊어졌다. 맑고 푸른 강물은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화살받이를 위해 가장 최전방으로 향하는 죄인들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일 수밖에 없었다.


 사흘을 걸어 강의 상류에 도착하니 사방이 눈 세상이고 저 멀리 화노블산을 위시한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죄인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아주 청명한 가을이었지만, 땅에서의 기온은 이미 찬 겨울이었다.


 지친 죄인들과 부대원은 자리를 잡고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오는 길에도 얀스(Jans)는 늘 주위의 지형을 자세히 살피며 군인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있었다. 비록 양 손목은 오라에 묶여 꼼짝할 수 없었지만, 그의 예리한 눈매마저 부대원들에게 구속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에보크(Evoke)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유스토(Usto)항 기지에 잠시 머물면서 다시 팔팔한 혈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죽을 수는 없다는 발악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심장에 깊이 박혀버렸다. 그래서 에보크도 늘 탈출의 기회만을 찾고 있었다.


 한편 죄인들의 수장인 에반은 끝까지 담담함을 잃지 않았다. 세상에서의 삶을 이미 초연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충복인 나리프(Nariff)나 토리크(Torik)조차 가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에반에게서는 어떤 표정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매 빌로(Veelo)가, 대역죄인의 신분으로 추락한 주인을 버리고 멀리 날아가버렸다는 사실에 분하고 괴로워할 만도 한데, 에반에게서는 그런 것에 대한 단 한 줌의 회한도 없는 모양이었다.


 *            *            *



 “오빠, 저기를 좀 봐봐!” 보라(Bora)호의 뒷자리에 앉아 사방을 내려다보며 정찰에 집중하던 샤니가 손을 들어 멀리 가리키며 말했다.

 “어? 뭐를 보라는 거야?” 샤키는 고개를 잠시 돌리며 말했다.

 “저기 가장 높은 봉우리 말이야. 저기가 크란(Krann)산 정상이 맞겠지?”

 “어, 그래. 그렇겠지? 다른 봉우리들을 거느리며 가장 높게 솟았으니까. 크란산에는 워낙 호랑이들이 많이 살고 민가에도 가끔씩 출몰하여, 아직 크란산 정상을 끝까지 올라갔다 살아서 내려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들었어. 다만 *아래에서 산을 올려다볼 때, 그 정상의 모습이 마치 왕관이나 갓처럼 생겼다고 하여 산의 이름이 크란(Krann)이 되었다고 해.“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왕관처럼 생겼네? 그런데 좀 이상하잖아?” 샤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뭐가 이상해?” 샤키가 대뜸 물었다.

 “크란산의 정상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어. 다른 봉우리들은 벌써 눈에 다 덮여있는데 말이야. 이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인데 왜 저런 현상이 벌어진 거지?” 샤니가 예리하게 말했다.

 “어? 정말 그러네? 진짜 이상하다. 샤니야, 우리 고도를 좀 더 낮춰서 내려가볼까?” 샤키는 말을 마치며 보라호를 급격하게 하강시켰다. 그리고는 크란산의 정상 바로 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정상에는 눈이 없었다.

 누가 일부러 눈을 모두 치운 것처럼 울뚝불뚝 솟은 바위들은 아주 매끈했고, 왕관 모양을 하며 그저 따가운 햇빛에 강렬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크란 산맥에 눈이 내린 이후로 이 정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샤키와 샤니가 처음이었기에, 그동안 어느 누구도 크란산의 정상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 수가 없었을 터였다.

 “이유가 무엇인지 직접 알아내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 샤니야, 네가 이리 와서 조종간을 좀 잡아야겠다. 난 정상에 한 번 내려가볼게.” 샤키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 저 밑에를 직접 내려가겠다고? 뭐로? 낙하산으로? 그럼 다시 이 보라호로는 어떻게 오겠다는 얘기야?” 샤니는 오빠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만 절레 흔들었다.

 “너야 유격훈련 이후로 밧줄이 가장 무섭겠지만, 난 전혀 그렇지 않거든?” 샤키는 그저 싱긋 웃으며 말했다.


 * 실제로 관악산(冠岳山)은 이런 이유로 이름이 그렇게 붙었음. 다만 본 소설에서는, 크란산을 단 하나의 산으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주위에 여러 산봉우리를 거느리는 거대하고 매우 높은 크란산맥의 우두머리 산으로 설정하였음.

​​


 샤키는 보라호의 밑으로 천천히 밧줄을 늘어뜨렸다. 그 길이가 샤키의 키보다 열 배쯤은 더 되어 보였다. 샤니는 오빠의 지시에 따라 보라호의 고도를 더욱 낮추고 속도를 줄여 크란산 정상을 중심으로 보다 작은 원을 그리며 선회를 하기 시작했다.

 샤키는 보라호가 계속 안정적으로 동일한 비행궤도를 유지하자, 드디어 밧줄을 잡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렇게 추락하고도 이게 겁나지도 않아, 오빠는? 하여간 저놈의 정의감은 누구도 못 말린다니까?' 샤니는 오빠가 다치거나 잘못해서 바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조종간을 그대로 꼭 잡고 있었다. 

 반면에 샤키는 세찬 바람을 뚫고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내려진, 그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매달린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샤키는 계속 내려가서 밧줄의 끝부분에 다다랐고, 여러 번 아래의 지형을 살피더니 드디어는 눈이 가장 수북이 쌓인 안전한 착지점을 마음에 정한 듯했다. 그러자 샤키는 팔과 손을 흔들어 샤니에게 보라호를 그리로 조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샤니는 그대로 따라했고, 그렇게 크란산 정상을 몇 번 더 선회하면서 고도를 더욱 낮추었다.


 이제는 결심의 순간만 남았다. 속으로 시간과 박자를 계속 계산하던 샤키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드디어 밧줄에서 손을 놓았다. 보라호는 계속 창공으로 날았지만, 샤키는 휭~하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퍽! 퍼벅~ 퍽!

 몇 바퀴 굴러 눈 속으로 내팽개쳐진 샤키가 다시 눈을 떴다. 과연 샤키의 판단은 완벽하리만치 정확했다. 아주 푹신한 이불에 몸을 던진 것처럼 샤키는 어디 한 군데 다치지도 않고 안전하게 크란산의 정상 부근에 떨어졌다. 이제 몸을 잘 추슬러 눈이 하나도 없는 저 왕관 모양의 바위로 올라가면, 그곳이 바로 크란산의 최정상이었다.

 “오빠! 괜찮아?!” 저 높은 곳에서부터 샤니가 소리쳤다.

 “그래! 난 멀쩡해!” 그러자 샤키도 팔을 흔들며 신나게 외쳤다.


 샤키는 조금 더 걸어올라 드디어 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정말로 눈이 모두 녹아버려 바위들은 그 자체가 햇빛에 바싹 말라있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바로 저 아래는 저토록 하얀 눈으로 덮힌 다른 세상이건만, 왜 이 꼭대기 부근에만 눈이 쌓이지 않은 것일까? 아니 눈이 왜 쌓이지 못한 것일까?

 샤키는 일단 바위들의 상태를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바위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샤키는 뜨거운 열기를 감지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땅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이 정상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손을 뻗어 바위들을 만져보니 정말로 불에 달군 맥반석처럼 뜨끈뜨끈하였다.

 ‘혹시 크란산이 코지(Cozee)섬의 갤라(Gaela)산처럼 화산지대였나?’

 샤키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디서도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샤키는 이런저런 생각에 한참동안 혼란스러웠다.

 

 ‘아, 도저히 원인을 모르겠다. **이 열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여기서 바위가 조금만 더 달아오른다면 산 정상이 다 타겠는 걸? 그렇다면 이 산 밑에는 엄청나게 큰 불기운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럼 나중에 그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면, 온 산이 다 시뻘겋게 탈 수도 있겠네?’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등성이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또 갈라지고 하는 게 정말 멋있다. 꼭 눈 내린 무슨 큰 나무에서 나뭇가지가 계속 뻗어나가는 것처럼 생겼어. 이렇게 쫙쫙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샤키는 열기에 대한 정답은 찾지 못한 채, 계속 사방을 둘러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앗? 그런데 이 지형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어디서였지? 저기서 저렇게 갈라지고, 또 저렇게 갈라지고, 또 그렇게... 저 지형... 내가 어디서 봤더라? 나뭇가지처럼... 저렇게... 맞아, 그래, 그거야! 바로 그거였어!! 잠깐 내가 그걸 어디다 두었지?’



 ** 예로부터 관악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강한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음. 그래서 정도전이 새로운 왕국의 수도로 한양을 정하고 경복궁을 만들 때, 관악산의 불의 기운 때문에 궁궐에 화가 미치는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 옆에 수성이 강한 물짐승인 '해태상'을 세웠고, 관악산의 화기를 화기로 제압한다는 뜻을 담아 한양 도성의 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였음. 즉, 숭례문(崇禮門)에서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나타냄. 결국 숭례(崇禮)는 불이 타오르는 풍수적 의미의 문자가 되며, 글씨를 가로로 하면 불이 잘 타지 않기 때문에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게 함으로써, 불은 불로 막는다는 의미를 가지게 하였음. 또한 숭례문 옆에는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만들어-지금은 사라졌지만-물로써 불기운을 방어하였음.

 한편, 2008년 2월 방화로 인해 숭례문이 전소되었을 때, 당시에는 ‘경복궁 광화문 제모습 찾기’ 사업을 벌이던 중이었고, 이 때문에 광화문을 공사하며 옆에 있는 해태상을 잠시 치운 상태였는데, 그로 인해 관악산의 불의 기운을 막지 못해 화재가 난 것이라는, 풍수지리 학자들의 주장도 제기된 적이 있었음.





 *            *            *


 하이란이 아무리 눈물로써 애원을 해보았지만, 이미 눈을 감은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충혼탑에 와서 부모님에게 참배를 드린 것 말고는 어떤 해답도 찾질 못했다. 이제는 서산에 해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는데, 여기서 그대로 비통한 표정만을 지으며 계속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온몸의 힘이 다 빠진 하이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켜 돌리고야 말았다.

 황제가 한즈(Hanz)로 다시 환궁을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대신들은 서둘러 그녀를 보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오늘 밤은 돌아가는 길에 천막을 치고 잠을 청해야 하겠지만, 그런 당연한 일도 근위대와 내관들에게는 한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되는 임무였다. 황제를 경호하고 보필하는 일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대역죄인이 된 에반과 그의 심복들을 황제가 최전방으로 쓸어내기는 했지만, 지금도 육군의 곳곳에는 에반을 추종했던 세력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여자의 몸으로 황제에 오른 하이란에게 적극적으로 동조를 하거나 충성을 바치지 않고 있는 것을, 하멜이나 파르코나 어쨌든 하이란을 황제로 옹립한 신하들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모를 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은, 에반을 따랐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어떤 벌을 내릴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래서 황제의 안녕에 더욱더 완벽을 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부산스러운 근위대 병사나 내관들과는 달리, 정작 근위대장인 하멜은 끝까지 담담한 표정만을 지었다. 황제이자 자신의 연인인 하이란을 위해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초라해진 자기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것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            *            *

​​

 “샤니야~~~ 내가 수수께끼를 풀었어~~~!”

 감격에 찬 샤키의 외침이 크란산 정상에서 길게 뿜어져나갔다. 환호하며 팔을 휘두르는 샤키의 움직임은 샤니의 눈에도 그대로 들어왔다. 이젠 다시 오빠를 불러들일 시간이었다.


 샤니는 기체의 속도와 고도를 낮추어 샤키 쪽으로 보라(Bora)호를 몰았다. 바람에 휘둘리는 밧줄은 여러 번의 시도를 해서야 샤키의 손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찬 탓인지 샤키는 근처로 다가온 밧줄을 단번에 움켜잡고는, 순식간에 보라호로 올라와버렸다.

 "오빠, 뭘 알아냈어?“ 샤키가 안전하게 자리잡은 걸 확인한 샤니는 조급하게 물었다.

 “어, 내가 드디어 탁본의 비밀을 풀었어, 하하하!” 샤키는 신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 붉은 소나무의 정체가 뭔지를 알아냈다는 말이야? 내가 아무리 위에서 정찰을 해봐도 여긴 전부 하얀 눈 세상이라, 붉은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도대체 그 비밀이 무엇이야? 빨리 말을 해봐~” 샤니도 웃으면서 계속 집요하게 물었다.

 “하하하, 일단 '전몰장병의 묘지'로 빨리 내려가자. 지금 당장 폐하를 만나야겠어!”

 모든 비밀을 이제 다 풀었다는 통쾌한 웃음을 동생에게 발산하느라, 샤키에겐 어떤 피곤함도 드러나지 않았다.


 *            *            *


 휘이이이잉~~~~ 쌔앵~~ 쌩~~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어느새 뿌연 눈구름이 다가와버렸다. 이내 바람도 거칠어졌고 세찬 눈보라까지 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죄인들이 더욱더 고지대로 올라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 드디어 화노블(Farnoble)산의 매서운 날씨를 본격적으로 체험하게 되는구먼... 결국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는가 봅니다...” 긴 한숨을 내쉬며 얀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막다른 골목이라... 여기서부터는 아마도 그런 듯하오...” 지금까지 늘 그랬듯, 이번에도 에반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후~ 이젠 정말... 이승에서의 인연도 이것으로 마지막이 되겠지요...” 모든 걸 체념한 듯한 얀스의 말이었다. 그동안 계속 예리하게 부대원들의 동향을 파악하며 탈출의 기회를 속으로 계산하던 그였지만, 더는 그런 순간이 다가오지 않자 이젠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이승에서의 마지막이라... 뭐, 그런 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냥 그걸 편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게 아니겠소...” 끝까지 에반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흑흑흑~~~” 그런 아버지의 말에 설움이 북받쳤는지, 옆에서 걷고 있던 에보크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요 며칠 간은 절대로 생명을 쉽게 포기하거나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쌩쌩하던 젊은 혈기였는데, 갈수록 뭇 인간의 세상과는 멀어지며 최종 목적지인 화노블산에 가까워지자, 그도 역시 인내와 결심에 한계를 느낀 듯했다.

 아들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이런 처절한 울부짖음을 에반도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아무런 내색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피를 보며 자랐고, 지난 ‘7일 전쟁’에서 가장 많은 적군의 피를 손에 묻힌 그였다. 그 때문에 제일 빨리 장군과 대장군에 오르는 동안에도 에반은, 자신을 반대하거나 자신과 경쟁을 하려는 상대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그들의 피도 보고야 말았다.

 오죽했으면 당시에 제1순위의 왕위 계승자인 브리젠(Brizenn) 왕세자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은, 다름 아닌 에반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역시 그의 본능은 남의 피를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들의 피눈물을 보는 동안에도 에반의 감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얀스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감시하는 부대원을 한 번 힐끔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어차피 목숨을 내놓은 대역죄인의 신분이니, 더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게 어떠하겠냐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했다.

 이런 날씨와 지형을 뚫고 화노블산의 최전방 부대로 죄인을 압송하는 부대원들도 몸과 마음이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동안 어떤 탈출의 시도도 하지 않았고, 아니 따지고 보면 부대원의 경계가 워낙 철통같았으니 그런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테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동하는 것에 그저 협조를 잘 해준 죄인들이었기에, 스푸든 대장의 명령을 받아 출발했던 부대원이 이 죄인들에게 어떤 특별한 악한 심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아니었다.

 에반의 음모로 국경 수비대 대원들이 몰살을 당한 이후 새로 구성된 수비대였으므로, 지금의 부대원은 이미 죽은 이전의 그들과 어떤 가족이나 친척의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기도 했다.


 에반에게만 영원히 충성을 바칠 것 같던 그 당찬 모습은 다 어디로 흩어져버렸는지, 장군 나리프와 토리크는 이미 모든 생을 단념하고는 폐인에 가까운 몰골과 행동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연 저런 인간들이 스스로 최고의 사관학교라고 자부하는 이스트 포인트 출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추접함은 도를 넘고 있었다. 그들은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지, 무슨 수치를 뒤집어쓴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목숨만은 부지하고 싶다는 말을 군인들에게 하며, 계속 그들에게 애걸복걸 사정을 하고 또 하였다. 

 가진 금은보화는 다 줄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애원이 끊이지 않았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역겨운 흥정이었지만, 부대원들의 감시와 경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휘이이이이이이잉~~~~~ 쉬이이이이이~~~~~ 쌔애애애애애애~~~~~~

 그 사이에 눈보라는 더욱더 심해져만 갔다. 이제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세상이 온통 하얗게 꽁꽁 얼어가기 시작했다. 더는 앞으로 전진하기가 힘든 시간이 도래하고야 말았다.

 “모두 중지!”

 부대원 중 가장 선임인 군인이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모두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더는 움직일 수 없다. 죄인들은 지금 당장 행군을 중지하고 저쪽 바위 밑으로 몸을 피하라! 일단은 이곳에서 눈과 추위를 피해 야영지를 구축하고 휴식에 들어간다!” 선임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른 부대원은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능선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니 큰 바위들이 절벽 쪽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폭설을 피할 공간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대원들은 죄인들을 나누어 그 공간에 머물도록 지시를 내렸다.

 죄인들은 그저 웅크리며 추위에 떨고 있었고, 대원들은 작은 천막을 여러 개 펼쳐 일단 이곳에서 며칠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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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22.05.30 20 0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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